1996.7 | [신귀백의 영화엿보기]
그토록 쓸쓸한 불륜의 몽상, 열병 없는
<지독한 사랑>
글/김정용 영화평론가
(2004-02-12 11:48:56)
이명세 감독은 영화를 몽상의 또다른 형태로 보고 있다. 데뷔작 <개그맨>에서 <지독한 사랑>에 이르기까지 그가 보여준 영화의 세계는 마치 꿈속에서 헤매는 것처럼 심상의 흐름이 현실을 재구성하고 사물의 관계를 다시 규정한 세계이다. 이를테면 <개그맨>에서 삼류 개그맨 이종세와 이발사 문도석은 각각 영화감독과 배우라는, 도무지 이루어질 성싶지 않은 꿈을 위해 현실의 굴레를 박차고 나가 은행털이라는 비현실의 세계로 진입한다. 또 <나의 사랑, 나의 신부>에서 신혼의 단꿈에 젖은 영민과 미영의 시선에는 초라한 일상의 공간들이 모두 푸르고 노란 색상으로 다시 채색되어 보인다. 그건 <첫사랑>의 영신에게도 마찬가지다. <남자는 괴로워>에서 상사의 압력과 쳇바퀴 돌 듯 변함 없는 일과에 지친 샐러리맨들은 저마다 일탈을 상상한다.
그러한 꿈, 망상, 몽상, 상상은 출구 없는 현실의 닫힌 체제를 되돌아보게 한다는 점에서 무척 소중한 영화적 전략이다. 구체적인 사실과 진술로만 가득한 세계의 외벽을 부수는 우화, 혹은 상징, 관념의 이미지와 추상의 공간. 바로 이것이 이명세 영화의 특징이다. 그러니 그의 영화에 현실이 보이지 않는다고 비판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현실을 보려면 다른 감독의 영화를 볼 일이다. 그는 비현실을 보여줌으로써 현실 밖으로 쿵쾅거리며 마구 달음박질치는 인간과 세계의 심장을 꿈꾸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자세는, 언제부터인가 ‘꿈꾸기’라는 영화 본연의 기능을 극장에서 찾아 볼 수 없게 된 우리 영화 풍토에서 무척 소중한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이명세의 작업은, 단지 그것이 희귀하다는 이유에서가 아니라, 미처 피하지 못한 채 저 뒤에 처져서 헉헉대고 있는 현실의 한계들을 ‘꿈같은 한 순간의 도피’를 통해 부감한다는 점에서 관객의 귀와 눈을 끌 만하다.
그의 지독한 고집이 만들어 낸 신작 <지독한 사랑>에서도 우리는 몽상의 여정이라는 감독 고유의 양식적 특징이 지속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대학교수인 영민과 신문사 여기자인 영희는 첫 눈에 반한다. 몇 번의 망설임 끝에 영민은 그 날 그녀에게 다시 만날 것을 제안한다. 둘은 급속도로 가까워진다. 영화는 여기서 그들이 만나 친해지기까지의 과정을 과감히 건너뛰고 곧장 둘이 맨살로 뒤엉켜 서로의 몸을 탐하는 장면으로 넘어간다. 왜냐하면 이건 애당초 사랑의 ‘순간’을 보여주려고 작정한 영화이기 때문이다. 가령 우리가 한때 뜨겁게 사랑했던 누군가를 회상한다면, 아마도 우리의 기억에 남은 대부분의 추억은 연애 이전에 가졌던 미처 무르익지 못한 모호한 감정들보다는, 마지막 연애의 실랑이에 가까울 것이다. <지독한 사랑>은 그런 과거의 순간 순간들에 대한 회상의 이미지로 가득찬 영화이다. 그래서 영화는 영민과 영희의 서로 친해진 이후, 다투고 헤어지고 그리워하고 만나서 한데 뒹굴고 또 싸우고 욕하고 다시 이별을 선언하는 그런 실랑이의 과정으로 이루어졌다.
실랑이 끝에 두 사람은 도시 근처 한적한 바닷가로 도피한다. 그 두 달간의 동거가 영화의 중심 사건이다. 먼지가 풀풀 날리는 낡은 방을 말끔히 닦고, 지붕도 수선하고, 하나 둘씩 집기를 장만하고, 아궁이에 불을 넣어 온기를 불어 넣은다음, 자 이제 그들은 행복해 하는가? 얼핏 모든 가재도구는 앙증맞아 보이고 그 안에 머무는 불륜의 연인은 행복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사물과 사물 사이, 영화의 회사와 셋방 사이, 영희와 영민 사이에는 의외로 커다란 틈이 벌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먼저 사물과 사물 사이를 관찰하자. 감독이 즐겨 쓰는 스튜디오 세트는 여기서 두 가지 효과를 같이 낸다. 하나는 사물들을 바라보는 두 남녀의 따뜻한 시선, 즉 꿈처럼 따뜻한 이미지이고, 다른 하나는 그것이 지닌 인공 모조품 특유의 날림으로 급조된 이미지이다. 꿈이면서 현실인 이 이미지들은 주인공의 심리와 주인공을 둘러싼 현실의 성격을 정확하게 반영한다. 그 다음, 회사와 셋방 사이에는 폐허가 있다. 카메라는 그 아늑한 신혼(?)의 셋방을 빠져나가 바로 곁에 있는 을씨년스러운 창고를 훑어 나간다. 그들이 행복해 하는 시시때때로 말이다. 그래서 영희와 영민 사이에는 깔끔한 신접 살림살이와 온지구를 뒤흔드는 진동이, 또 사랑에 취해 흐느끼는 알몸과 두려워 떠는 불안이 겹을 이루며 뒤섞여 있다.
이는 영화를 영화로, 즉 그림자 놀이로 만들던 예전의 방식과는 다소 다른 것이다. 물론 인연이라든가 의식에 남아 있는 대상의 추억을 새로이 떠올리게 한다는 점에서 천국과 지옥의 느낌을 한꺼번에 포착하는 양식적 기법은 일관된다. 그러나 그 몽상의 세계 안에 있는 현실의 비통한 이미지는 전보다 더 흉측하게, 더 삶에 가까운 몰골을 하고 있다. 이명세 감독은 지금 과거의 주제 의식과 스타일을 그대로 간직하면서 갈 수 있는 어떤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있는 것이다. 현실을 단촐하게 희화화된 기호로 정리하는 것을 이명세 영화의 유일한 장점으로 본다면 이건 위험한 풍경일 수 있다. 그러나 출구를 마련하기 위한 시도로서 이런 작업은 오랜시간 진득하게 지켜 볼 가치가 있다.
다만 일상에 대한 감독의 독특한 묘사가 어느 틈에 신선함을 잃어 가고 있다는 것은 지적되어야 한다. 팬시 상품을 연상시키는 소품들의 집합이나 그와 충돌하는 거리의 차가운 이미지는 그 자체로 어떤 불륜의 한 순간에 영희와 영민이 느꼈을 법한 마음의 상태를 충분히 밝혀 주지만, 그 이상의 느낌을 던지지는 못한다. 서정성의 백미를 맛보게 하는 마지막 정사 장면 역시 그 빼어난 충돌의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지적으로부터 온전히 자유롭지는 못하다. 일종의 성스러운 의식처럼 카메라는 그들을 창문 밖에서, 프레임 내의 프레임으로 잡고, 둘은 그 안에서 힘겹게 방의 끝과 끝을 오간다. 그들의 숨소리는 창 밖 눈보라에 가려 들리지 않고, 보이는 건 겨울 방안에 놓인 어떤 불륜 남녀의 알몸뿐이다. 장면 전체를 휘감으면서 느리게 관객의 귓속을 파고드는 배경음악은 편곡한 “봄날은 간다”이다. 그렇게 그들의 불륜은 봄날은 간 것이다. 욕망의 폭포수 같은 분출을 아름답게 절제한 이 장면은, 그러나 지독한 사랑의 유희, 뼈아픈 이별의 예감, 절절한 육체적 행사로까지 상승하지 않는다. 자신의 영화적 행보에 대한 추억처럼, 마지막 연애의 추억을 꿈결처럼 회상한 것이기에 그러했을까?
이명세 감독은 이제 새로운 몽상의 길목에서, 인생의 다른 순간을 또다른 인상으로 포착하려는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