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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7 | [문화저널]
일하는 엄마, 눕고 싶은 하루
글/전춘근 전주시립극단 단원 (2004-02-12 11:48:09)
아침에 자리에서 일어나든 꼴로 밥통에 쌀을 씻어 앉히고, 오늘 아침 국은 무엇으로 할까, 반찬은 무엇으로 할까 생각하다 냉장고를 뒤적거린다. 이도 저도 여의치 않아 그냥 김치찌개를 올려놓고나니 막 잠에서 깬 아들녀석이 엄마를 부르며 칭얼댄다. 잠시 안아서 얼러주고 있으면 찌개가 끓어 넘치는 소리가 들리고, 그럼 허겁지겁 달려가 내려 놓는다. 아직 덜 차린 밥상에 손을 대는 아이놈에게 아빠 깨워! 쉬해! 손닦아! 소리를 고래고래 질러댄다. 이 난리를 치르면서 아침밥을 먹고 나면, 애기 아빠더러 밥상을 치우라고 해놓곤 세수하고 이빨닦고 얼굴에다 로션을 대충 찍어 바르고 나선 출근이다. 차안에서 숨을 돌리고는 어제 내가 무얼하다 말았지? 오늘 해야 할 일이 뭐지? 생각하게 된다. 그러다 어제하던 연극작업에 생각이 미치고 나면 짜증이 난다. 대체 연극 속에서 여성의 역할의 왜 남자 주인공의 순종적인 애인, 맹목적인 모성애의 어머니, 그것이 아니면 창녀, 이런것들만 해야 되는지... 연극속에서 여성은 곧잘 왜곡된 모습으로 나타난다. 여주인공은 무조건 예쁘고 날씬하고 청순하면 그만이다. 조연 여배우는 섹시하고 화장기가 많고 좀 나이를 먹었다하면 옆집 아줌마나 할머니 등 역할이 극히 제한되어 있다. 이놈의 세상은 예쁘지 않은 여자에게는 아무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 모양이다. 어머니는 자식을 위해 존재하고 옆집 여자는 수다쟁이로 동네방네 소문만 내고 다닌다. 우째 극작가들은 이따위 작품만 쓰시는지, 우째 등장인물 중에 남자가 그렇게도 많고 주인공은 남자만 해야 하는지... 옆자리에 앉은 아들놈이 할머니를 찾으며 울어대기 시작한다. 요새 애 할머니가 몸이 아파 며칠째 같이 출근하고 있는데 저도 할머니하고 떨어져 있는 게 싫은 모양이다. 그래 네가 할머니하고 같이만 있어준다면 이 애미도 얼마나 좋겠냐. 어머니는 손주가 생길 때마다 자식들 집을 돌아다니면서 애기들을 봐주다 팍사 늙어버리시고 몸이 많이 쇄약해 지신것이다. 이제 더 이상 어머니에게 애를 맡기는 일도 못할 짓이다. 아들놈은 아직도 오줌을 가리지 못한다. 헝겊 기저귀를 썼으면 벌서 가렸을텐데 쌀 때마다 매번 기저귀를 빠는 일이 힘들고 지쳐서 일회용 종이 기저귀를 채워준 때문이다. 애한테도 못할 짓인 것 같다. 애기 때문에 고충을 겪는 것은 나뿐만이 아니라 우리 극단만 해도 세 명씩이나 된다. 그래서 요즘 극단은 마치 유아원을 방불케한다. 5개월짜리 하나, 세살자리 하나, 다섯 살짜리 하나, 세트를 만드는 작업장을 아이들이 돌아다니며 곳곳에 위험한 세트와 연장들을 만지작거린다. 특히 우리 애는 세 살박이라 말도 못하는데다 장난꾸러기라서 정말 어울리지 않는 곳이다. 그러니 내가 일하다가도 종종 신경을 써야하고 수선스런 애들 때문에 작업에 방해를 받고 있는 것이 분명한 다른 동료들에게도 미안하다. 왜 직장에 아이를 데려와서 작업에 지장을 줄까 하는 불만이 동료들에게 생길 법 하지 않은가. 그런데도 동료들은 그런말을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양육비가 보통 40-50만원 정도라는 것을 알고 있고 그런 비용이 우리들의 형편에 어떠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왜 이렇게 마음 놓고 아이를 맡길 곳이 없을 까. 아이가 옆에서 왔다갔다 내 신경을 붙들고 잇으니 창의력이나 상상력은 간데없고 이놈이 어디서 다치지나 않을까 다른 사람한테 폐가 되지 않을까 항상 걱정이다. 15대 총선에서 육아 보육시설 확충 확대하겠다고 한 후보를 찍어주었지만 국회는 아직도 공전중이다. 직장내 탁아소는 영 가망이 없는 얘기인가. 여성 근로자 300명 이상 근무하는 사업장이 과연 전주시내에 몇군데나 된단말인가. 우리처럼 적은 수의 여성이 근무하는 곳은 어떻게 하라는 것인가. 더 이상 사교육비가 우리의 목을 조르지 않게 해다오. 퇴근 시간이 다가오면 나는 벌써부터 지쳐 어서 눕고 싶은 생각이 간절해진다. 집에 들어가는 길에 장을 보고 싶지만 그것도 수월치 않다. 집에다 우릴 데려다주고 애 아빠는 다른일을 보러간다. 이사람은 밤 열시나 되어서 들어올 것이다. 그동안 애 씻기고 옷 갈아입히고 빨래하고 대충 저녁을 챙겨 먹는다. 설거지를 하고 나면 뒤꿈치는 천근만근, 종아리도 땡땡해진다. 잠을 자려고 방으로 들어가면 애는 쌔근쌔근 잠이 들었는데 장난감이며 그림책들이 온 방안에 널려 있고 TV는 왕왕댄다. 그러다 낮에 걸려온 전화가 생각낫다. ‘여성과 문화’에 대한 원고 청탁, 갑자기 웃음이 터져 나왔다. ‘여성에게도 문화라는게 있나?’ 전춘근/전주대 사회교육과를 중퇴하고 85년 전주 시립극단에서 연극을 시작했다. 인형극단 ‘허수아비’를 이끌었었고 여성연극<여보세요>를 연출했다. 87년에는 제5회 전국지방연극제에서 연기상을 수상한바 있다. 93년 결혼하여 지금 세살짜리 아들이 있고. 전주 시립극단의 단원인 홍석찬 씨가 그의 남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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