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7 | [서평]
풍자와 해학·웃음과 비꼼의 미학정신
『호루라기를 부는 장자』
글/김은희 전북대 강사·중문학과
(2004-02-12 11:45:07)
한 시대는 저마다 역사적 맥락에서의 빛과 그림자를 지니고 있으며, 그것들은 한데 어우러져 나름의 문화 심리를 만들어 낸다. 이러한 문화 심리는 상식과 통념이라는 이름 아래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를 긋고, 이 경계는 또다시 현란한 수사와 그럴듯한 논리에 힘입어 지배적 담론을 형성하고 지배적 담론은 다시금 문학 심리의 지배계급적 속성을 강화시킨다. 되돌이표처럼 반복 순환되는 수많은 부호 속에서 사회는 보이지 않는 실재에 의해 통제된다.
통제된 사회의 이면에는 이분법적이고 반인간적인 금기가 존재한다. 그 금기는 지배적 담론의 계급적 성격을 호도하는 가리개임과 동시에, 그것의 본질적 속성을 단순 명쾌하게 엿보여 주는 창이기도 하다. 변혁에 대한 나름의 전망을 가진 작가는 대체로 자신의 글쓰기 행위를 통해 금기에 대한 위반을 감행한다. 그러나 억압적이고 폭력적인 사회일수록 금기의 그물은 촘촘하고 완정하다. 따라서 금기를 위반하고자 하는 작가의 글쓰기 역시 치밀하고 교묘하지 않으면 안되며, 바로 여기에서 작가의 글쓰기 전략이 요구된다. 우리는 이같은 작가의 태도를 노신(魯迅)에게서도 발견한다.
중국 현대문학의 아버지라고 흔히 일컬어지는 노신은, 1881년에 태어나 1936년에 세상을 떠난 작가이자 사상가이며 사회 비평가이다. 그는 봉건 이데올로기와 서구의 신문화·신사상의 정면으로 충돌하였던 5·4신문화운동기에 본격적인 소설 창작의 길에 들어섰다. 봉건 군벌과의 투쟁이 치열했던 1920년대 중반에는 잡문을 통해 사회 비평에 뛰어들었고, 국공간의 대립이 심화되었던 1930년대 초반에는 좌익 문단의 수상으로서 활동하였다. 요컨대 그가 생존했던 시기가 중국 현대사의 격동기였던 만큼, 그가 선택하고 요구받았던 삶이 전투적이고 논쟁적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의 글쓰기 역시 자신의 삶을 에워싼 힘과 힘의 밀고 당김이 낳은 긴장 관계를 반영하고 있다. 간단명료하면서도 직설적인 어투로부터, 상징과 은유에 의한 시적 언어, 풍자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바로 그의 글쓰기 전략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노신의 수많은 글 가운데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글쓰기 전략은 ‘비틀어 보이기’이다. 현실 혹은 사상(事象)을 비틀어보임으로써 상식 속에 교묘하게 감추어진 지배적 담론의 허위성을 드러내고, 마음 속 저편에 잠재되어 있는 금기의 반역사성을 들추어낸다.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 중의 하나가 작품집『호루라기를 부는 장자』이다.
『호루라기를 부는 장자』는 『외침』, 『방황(彷徨)』에 뒤이어 엮어진 세 번째 단편 소설집이다. 이 작품집의 원래 제목은 『고사신편(故事新編)』으로, 글자 그대로 ‘옛 이야기를 새로이 엮는다’라는 의미이다. 여기에서 ‘옛 이야기’는 신화·전설과 역사적 사건, 혹은 이와 관련된 영웅이나 성현의 이야기이며, ‘새로이 엮는다’는 것은 현재의 관점에서 새로이 재창조한다는 것이다. 결국『호루라기를 부는 장자』‘옛 사람과 옛일들을 통하여 현재의 과제를 이야기’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호루라기를 부는 장자』에서 옛사람과 옛일은 기존의 상식과 통념과는 달리 철저히 비틀어 보여지고 있다. 「호루라기를 부는 장자」에서의 장자(莊子)는 자신의 철학조차도 제대로 실행에 옮기지 못하는 졸렬한 인간이며, 「관문을 떠난 노자」에서의 노자(老子)는 시든 나무토막처럼 하는 것도 없고 하지 않는 것도 없는 공론가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고사리를 캔 백이와 숙제」에서의 백이(伯夷)와 숙제(叔濟) 역시 ‘선왕(先王)의 도(道)를 따르고자 위선적인 노력을 기울이다가 결국 모순을 범하게 되는 유가의 비인간적이며 시대착오적인 오류의 전형으로 등장한다.
반면 신화와 전설 속의 영웅과 성현은 영웅주의와 신비주의의 모습에서 벗어나 평범한 보통 사람으로 되살아난다. 「전쟁을 막은 묵자」에서의 묵자(墨子)는 민중을 도탄에 빠뜨리는 전쟁을 막기 위해 동분서주하며, 「홍수를 막은 우임금」에서의 예는 영웅의 모습이 아닌,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필부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요컨대 성현으로 떠받들여지는 이들에 대한 희화화를 통해, 노신은 당대의 위선적이며 비현실적인 지식인 사회를 비판·조소하고 있다. 이 모두는 오랜 역사의 흐름 속에서 고정화된 관념을 깨트리는, 그리하여 고정관념 속에 은폐되어 있는 지배적 담론을 뒤집어 보이기 위한 ‘비틀어 보이기’의 일환이다.
노신은 ‘비틀어 보이기’는 『호루라기를 부는 장자』에서 드러나듯이 현실을 있는 그대로 엄숙하게 보여주기보다는 현실의 단면을 익살스럽게 과장하기나 축소함으로써 이루어진다. 따라서 『호루라기를 부는 장자』에는 풍자와 해학의 미학 정신이 넘쳐흐른다. 그것이 누구와 무엇을 겨누고 있는 풍자와 해학이든, 그 밑바탕에 흐르고 있는 것은 웃음과 비꼼이다. 그러나 현실 인식에 투철하기에 그 웃음은 글썽이는 눈물을 동반하며, 적의에 가득차 있기에 그 비꼼은 촌철살인의 비수이자 투창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호루라기를 부는 장자』는 인물 형상의 성격에 걸맞는 언어, 군더더기 없는 간결한 문체, 우리의 호흡에 알맞은 리듬 등, 많은 공력을 기울여 우리말로 옮기어졌다. 아울러 중국문학, 특히 노신의 문학 사상에 많은 관심을 기울여 온 신영복 선생님의 추천의 글, 그리고 북경대학 교수인 첸리췬 교수의 작품 해설은 이 작품집의 전반적인 성격을 개괄하고 각 작품을 분석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호루라기를 부는 장자』를 통해 세상을 떠난 지 60년이 지난 오늘도 살아 숨쉬는 노신의 정신을 오늘 우리의 관점으로 새로이 엮어보는(新編)게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