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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7 | [문화저널]
전북 서양화단 문을 연 작가 금릉 김영창(金永昌)
글/이철량 전북대 교수 ·미술교육학과 (2004-02-12 11:43:53)
이 지역에 최초로 서양화의 씨를 뿌린 이순재의 뒤를 이어 박병수(朴炳洙)와 김영창이 있다. 그러나 박병수에 대해서는 남아 있는 자료가 발견되고 있지 않다. 다만 그는 임실에서 만석군의 아들로 태어나 지적이고 낭만적인 생을 살았던 인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박병수는 부유한 가문의 후원을 받으며 1930년대에 일본 와세다 대학 법학부에서 법률 공부를 하였다. 그러나 그는 다시의 어려운 시대적 환경 속에서 많은 기대를 안고 일본가지 건너가 법률가가 되기를 원했으나 그의 타고난 천성은 그를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는 와세다 대학 법학부를 졸업했으나 법률가가 되기보다는 화가의 꿈을 키우며 다시 영목 천구마(鈴木 天久馬)미술 연구소에 입학하여 서양화를 공부하였다. 그렇게하여 귀국한 이후에는 김영창과 함께 동광미술연구소를 개설하는 등 한동안 활동을 지속했다. 동광미술연구소를 그의 아틀리에에 개설하였을 만큼 아틀리에가 규모있고 대단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배출된 작가들도 대부분 지역 미술을 주도하는 인물들이었다. 그러나 박병수는 실질적인 작품 활동에는 별로 참여한 바가 적다. 아마도 그는 넉넉한 재정을 바탕으로 하여 아틀리에를 개설하고 후배들을 도와주거나 또는 당시 어려운 화가들을 음으로 양으로 도와주는 후견인 역할로서 만족했던 것같다. 그리고 그는 6·25전쟁 이후 모든 흔적들을 감추어 버렸다. 어쩌면 박병수는 그가 하고 싶었던 일을 김영창을 통해 이루려고 했었는지도 몰랏다. 실제로 김영창은 이순재와 박병수의 밑거름으로 성장했다고 볼 수 있다. 이순재와 김영창의 인연은 김영창이 전주 사범학교 3학년때였다. 이순재의 아들 이정열씨의 회고에 다르면 김영창이 전주 사범학교 교내 전시회에 출품한 수채화를 본 이순재가 김영창의 재능을 감탄하고 그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그림에 전념하도록 격려하고 유도했다고 한다. 이때 이순재는 일본에 유학중이었으며 여름방학을 통해 귀국해 있으면서 김영창의 천부적 재능을 발견하고 그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고 전한다. 김영창은 한일합방이 되던 해인 1910년에 태어났다. 그리고 1988년 1월 10일 세상을 뜰 때까지 줄곧 붓을 놓지 않고 모름지기 화가의 길을 걸었다. 그가 최초의 전북의 서양화가로 지목되는 까닭도 여기서 찾아진다. 말하자■ㅕㄴ 이순재나 박병수가 일찍 절필하고 화업의 길을 벗어났으나 김영창은 이 길을 끝까지 지켰던 것이다. 그가 어떤 연유로 그림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김영창이 1929년 에 전주 사범학교를 졸업했고 여기에서 당시 신화풍이었던 수채화나 유화등에 흥미를 갖기 시작했을 것으로 보여진다. 그리고 이 무렵 당대 젊은이들의 선망이 되고 있었을 일본 유학생 이순재에게 발견되고 격려를 받게 된 것이 계기가 되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나 김영창이 이순재에게 직접 그림을 배웠다는 흔적은 없다. 아마도 음으로 양으로 이순재의 활동은 김영창의 거울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러 기록으로 보면 김영창은 당시 전주 여고보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일본인 교사 대진일차(大津逸次)에게 그림을 배웠다고 전하기도 하고 혹은 전주고보에 있던 삼림평(森麟平)에게 배웟다고 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때가 공통적으로 1932년이 된다. 이렇게 보면 김영창이 일본인 교사에게 본격적으로 유화 공부를 하게 되는 것은 1932년이 된다. 그의 나이 22세때이다. 그러나 그는 이보다 훨씬 이전에 이미 유화를 익히고 있었다. 이것은 그가 이미 1931년 제 10회 선전(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하였다는 사실이 이를 말해 준다. 그렇다면 김영창은 사실상 이순재에게서 유화를 공부하였다는 것이 확인된다. 그리고 이순재는 이 무렵 왕성한 창작열을 보이고 있는데 그는 이미 1928제 7회 선전에 전북인으로서는 최초로 입선의 반열에 오르고 있었다. 그후 10회 때도 김영창과 함께 입선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 무렵에는 이순재와 김영창은 매우 가까운 사이로 왕래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줄곧 이순재의 주변에서 떠나지 않고 화우로서 혹은 스승으로서 함께 지냈다. 이렇게 본다면 이 지역의 최초의 서양화가였던 이순재는 김영창을 통해 서양 화단의 맥을 이어 내리는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김영창은 그후 수년이 지난 1939년에 일본에 건너가 동경에 있는 영목천구마 미술연구소에서 더 깊은 공부를 하게된다. 그의 도일에 관해서는 1939년설과 1941년설 등으로 전해진다. 사실 그의 일본 유학에 관해서는 구체적으로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김영창은 제10회(1931년) 선전에 입선한 이래로 계속해서 14회, 15회, 16회에 걸쳐 입선하는 저력을 보였다. 그리고나서 일본에 유학했으니 당시 동년배들인 진환이나 김해 등보다 유학은 늦었지만 이미 탄탄한 실력을 바탕에 깔고 있었다. 김영창이 일본 유학을 다녀온 이후 전북화단은 자못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미술인들의 모임이 잦아지기 시작했고 선전에 출품하는 작가들도 많아지기 시작했다. 유경채, 한소희, 추교영, 박용섭, 윤후근, 서정조 등이 선전에 출품하여 입선하며 번북 화단에 활기를 불어넣었던 인물들이었다. 이렇게 급속도로 확대되기 시작한 초기 서양 화단에 새로운 불을 당긴 것이 김영창에 의해 설립된 동광(東光)미술연구소였다. 박병수와 함께 그의 아틀리에에 사설 교육기관으로서 역할을 담당했던 동광미술연구소는 실질적으로 김영창에 의해 운영되었다. 이 때 김영창에 의해 배출된 작가들이 이의주, 천칠봉, 배형식, 이준성, 소병호, 허은, 하반영 등이고 이들은 훗날 지역 미술의 대변자들이 되었다. 김영창은 해방이후 전북 화단을 이끌면서 많은 활동을 하였다. 전북 미전의 심사를 맡기도 했고 전북 문화상 심사위원도 했다. 그런가 하면 그자신이 제1회 전북문화상을 1956년동에 수상하기도 했다. 그리고 1961년도에는 한국미협전북지부장과 예총 전북지부장을 맡아 일하기도 했다. 그는 초창기 전북화단의 중추적 인물로서 각종 활동을 주도했다. 그리고는 1967년에는 상명여자사범대학에 출강하면서 그는 활동거점을 서울로 옮겨갔다. 이해에 민족 기록화를 제작하는가 하면 목우회라는 구상 계열의 서양화가들의 모임에 참여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의 나이 65세에 국전 추천작가로 선정되기에 이른다. 지금까지 알려진 자료에 의하면 김영창은 두차례 개인저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65년과 71년이다. 그리고 71년 무렵은 아마도 그가 서울로 거처를 옮긴 이후의 일로 보인다. 그의 71년의 개인전에서 이마동(서양화가·전 혹익미대학장)은 “항상 평버한 대상을 비범한 수법으로 재구성하는 필법이 언제나 그 배후에 보이지 않는 정신의 심도를 후광으로 지니고 있어 보다 높은 강도의 상징성을 발산하는 특징이 있으니 날카로운면서도 담담한 여운을 보인다”라고 적고있다. 김영창의 범상치 않은 그림세계를 잘 설명하고 있는 대목이다. 김영창의 작품세계는 그의 생애동안 거의 일관되게 사실화풍의 경향을 유지하고 있다. 특히 고전주의적 사실화풍에 인상파 화풍의 붓질이 나타나기도 한다. 그가 처음 그림을 공부하기 시작할 무렵의 경향은 대체로 인상파 화풍과 고전주의적 사실화풍이 혼재하고 있었다. 특히 그의 선배였던 이순재가 이러한 화풍의 범주를 벗어나 있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일본에 건너가 공부했던 화풍도 이와 같았을 것으로 보인다. 어떻든 김영창은 그의 작품세계에 있어서 새로운 진보적 세계를 보여주지는 못했지만 그의 끈끈한 인간미를 보여주듯이 심도있는 사실의 세계를 담아 내고 있다. 그의 작품을 보면 깊고도 아른한 표현의 깊은 세계를 느끼게 된다. 김영창은 말년을 서울 수유리에 거처를 잡았으나 그의 생활은 항상어려웠다. 이는 그가 그림으로 현실과 타협하지 않은 꿋꿋한 작가 정신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호를 금릉(金陵)이라 했던 이 고장 최초의 본격적인 서양화가 였던 김영창은 말년에 백내장과 암에 시달렸다고 한다. 그러나 죽음을 앞에 두고서도 끝내 화필을 놓지 않았었다고 한다. 그리고 끝까지 예술가의 혼을 지켜냈던 뚜렷한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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