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7 | [문화저널]
우리들의 혼불 같은 저항음악사
한국음악의 이해와 역사적 과제
글/노동은 목원대 한국음악과 교수
(2004-02-12 11:39:00)
왜 이 글을 쓰게 되었는가?
나는 한 두 달 전에 『문화저널』로부터 새로운 연재를 제안받았다. 한국음악사에서 저항적인 음악의 역사를 소개할 수 잇는지가 그내용이었다. 주춤할 수 밖에 없었다. 그 내■ㅛㅇ도 내용이지만, 연재로 묶여서 원고 마감일에 쫓길 것이 뻔하므로 자신이 없엇던 것이다. 내 자신의 새로운 다짐이 필요한 대목이었다. 더욱이, 이번 6월호(통권 제97호)에 내가 쓴 『한국근대음악사1』에 대하여 전북대 학국음악과 윤화중 교수가 “주체성 없는 사람들의 눈가리개 벗겨 내는 역할”이라고 과분한 서평을 한데다. 편집자가 ‘독자와 함께’란에 내 글이 앞으로 연재 소개될 것이라고 예고한 사실을 확인하고 나는 대답을 해야 했다.
약속은 함부 할 일이 아니다. 그러나 나는 오래 전부터『문화저널』에 대하여 각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통권이 이제 100호를 앞두고 있을 정도로 뻗어 나온 힘도 대단하려니와 『문화저널』의 지표 또한 쓰고 싶다는 충동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였다. “문화저널은 문화에 대한 폭넓은 인식과 사랑을 바탕으로 합니다.”가 그 지표이였다. 나는 이 인식과 사랑에 푹 빠지고 싶었다. 나 또한 그런 책을 만들려고 꿈꾸어 왔었다. 그렇다. 이지표의 대상이 당대 독자들의 몫이라한다면, 나 역시 『문화저널』의 일원이 되어야 한다고 새로운 다짐을 할 수 있었다. 편집진들이 나를 시켜 줄지도 모르면서 당돌한 다짐을 하고 있었다.
역사적으로 한반도에 살면서 안으로 삶의 소리를 일으키고, 밖으로 국제와 대응하며 살아온 우리 한국인들의 삶과 죽음의 음악, 그 혼불 같은 민족 음악사가 이처럼 『문화저널』에 태어났다. 정말이지 모든 분에게 감사한다.
음악사는 소리의 역사뿐인가?
오래 전에 학술 세미나 관계로 암골 고려대학교를 가본 적이 있었다. 충격과 회한이 교차하는 사건이 있었다. 충격과 회한이 교차하는 사건이 있었다. 매시 정각이 되면 차임벨 소리가 울렸다. 이 소리 확인은 나에게 시시한 사건이 아니었다. 「새야새야 파랑새야」가락이었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휩쓸어 가고, 전 대통령들의 재판이 진행되고, 선거 열풍과 세계화 구호가 사사처처마다 드높아지고 있을 때, 그 소리가 고려대학교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나는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새야새야 파랑새야」는 분명 백년 전의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민족고려대’를 생각하고 있엇으니까 말이다. 그들은 이 소리에서 21세기 민족의 미래를 가슴으로 뜨겁게 느기고 있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어떤 이는 피울음으로 목놓아 울은 1894년 한반도 역사를 생각하기도 하였다. 고대 어느 교수가 나에게 전해주었다. 전봉준·김개남·손화중 장군을 비롯하여 농민군 약 40만명 이상이 죽으면서까지 간절히 소망하였던 것이 무엇이고, 이제 우리가 무엇을 바라야 하는가?라고 민족의 삶을 고려대인들은 생각한다고, 단지「새야새야 파랑새야」가 음(音)들을 나열한 가락뿐이었지만, 왜 우리들은 한국인들의 피맺힌 삶의 역사를 느끼고 있을까?
그렇다. 음악은 소리의 연속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음악이 소리로 조직한 예술임에 틀림없지만, 그것만으로 설명하려는 80년대 음악계에 대하여 누구나 따가운 비판을 서슴지 않은 이야가 여기에 있다.
음악의 식민적 정서
음악이 무엇이냐? 라며 그동안 음악적(음향적) 사실(음계, 음정, 화음등)만으로 설명하려 했던 한국음악사회(특히 음악교육계)가 실패한 이유도 여기에있다. 귀가 따갑도록 “작곡자의 사상과 감정을 음을 통해서 나타나는 예술”이라는 식의 서양식 음악 정의를 「완전정복」참고서를 통하여 골백번 들으며 배웠을지라도, 음악적 사실만 배웠다는 점에서 이제는 다 잊어 버린지 오래될 정도로 한국음악교육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러면서, 일본음악과 서양음악의 힘에 밀려 한국음악은 울밑에 선 봉선화 마냥 모퉁이에 도사리고 있었다. 더욱이, 사상과 감정을 단 한 번도 제대로 배운바 없지만, 그나마 그 사상과 감정을 ‘작곡가의 사상과 감정’만으로 묶어서 설명하려했다는 점에서 더더욱 한계가 있었다. 언제나 배운 것은 소리의 연속인 노래만 배워 왓을 뿐이다. 요즈음은 부르는 사람도 없지만, 우리들 삶과 노래는 어느사이에 따로 놀고 있다.
왜 우리 사회가 삶과 노래가 따로 떨어졌을까? 바로 여기에 우리 음악사의 비극이 도사리고 있다. 말할 것도 없이, 그것은 한국근대사가 일제 강점하에 있었고, 한국현대사가 분단사로 점철되 왔다는 점에서 비롯되었다. 한국인들의 삶의 원래 노래가 일상적 생활 자체이었으므로, 식민주의자들은 그 고리를 끊어 놓고, 그 대신 일본풍과 서양풍 음악의 학습을 강요했다. 한국인의 삶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식빈주의자들이 보기에 언제나 반체제로 나타날 수 있다는 점에서 통제해야 할 사항이었다. 일제하에 한국인들 자신들의 삶을 노래한다■ㅡㄴ 것은 곧 민족적인 지향을 의미했으므로 일제는 바로 그 점을 통제하고 싶어했고, 그것을 해방이후 분단된 나라에서 통일과 삶을 추구하는 노래를 반체제로 몰아치는 상황과 너무도 흡사했다. 지금 우리들의 음악에서 도처에 식민성이 도사리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또, 왜 학국에서 지금까지 ‘순수음악’만 강조되었는지의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기야, 한반도가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음악의 식민성이 반드시 근현대사만 나타났던 것은 아니다. 한반도 서쪽으로 위치한 중국과 오랫동안 국제관계를 맺어 왔다는 사실 하나만 보더라도 중금음악의 미적 기준과 가치가 한반도를 되비질 하였었다. 조선이 아악을 정비할 때에도 중금음악이 기준이었다. 그점에서 박연(朴堜, 1378-1458)은 조선의 악성이라기보다는 친중파였다. 근대에 들어와 한반도 남쪽의 일본이 국제로 통할 때에는 홍난파 등 동경 유학새이 엘리트를 자처하며 일제와 손잡고 그 음악들을 독점할 수 있었다. 그랬기에 친일이 완성될 수 있었지 않겠는가! 해방 이후 한반도 동쪽의 미국이나 북쪽의 소련이 곧 ‘국제’로 통하면서 부터는 현제명이나 김원균 등 미국유학생과 소련유학생들이 그 역할을 담당하면서 서양음악을 독점할 수 있었다.
지금, 가정에서부터 사회에 이르기까지 할아버지 세대의 노래가 민요조로 나타나고, 나이 즈긋한 아버지 전후세대가 일본풍 뽕짝으로 나타나고, 누님이나 오빠 전후 세대들이 짬뽕조로 나타나며, 우리네 10대 세대들이 서태니자 룰라조로 나타나 서로 꼬여있는 이유는 이러한 이유에서이. 나이가 들면 민요로 나타나지 않고 뽕짝이 좋아지는 것이라고 어른들이 말하는 것은 사실인가? 세대차 때문에 각 즐기는 음악이라고 강변할 수 잇을까? 이러한 현상이 요즘 유행하는 말처럼 포스트 모던한 음악현상이고, 다양성 음악이란 말인가? 음악문화가 국제간으로 자연스럽게 교류되는 것이라고만 말할 수 있는것인가?
아니다. 이 현상을 한국의 역사를 생각하지 않고 단순히 사회적·문화적·심미적 접근으로 풀어지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오늘 우리의 음악 현상은 식민성이 배어있는 현상이며 민족의 음악이 체계적으로 왜곡되어 나타나는 사회이다. 물론, 이 음악들은 지난 시기와 같은 의미로 수용하지 않는다. 그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식민성이 역사적 기반으로 자리잡고 있는 한 뜻없이 즐기면 그뿐이라고 말하는 것은 도리어 식민성의 정서를 확대 재생산할 뿐이다. 노래방의 즐김은 한국인들의 스트레스 차원을 뛰어넘어 뽕짝의 일제 식민성이 은폐된채 확대 재생산 공간으로 부각되어 이후에 개방될 일본 대중음악의 시장터로서의 토양이 될것이라■ㅡㄴ 점은 이를 반증한다. 직접 위성방송을 통하여 일본 NHK의 ‘청백가합전’같은 엔카 프로그램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아지거나, 이를 모방한 가요무대같은 한국의 프로그램이나 노래방의 성지 부산을 비롯하여 홍대나 신촌을 방문하면 이 현상을 쉽게 파악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독일이나, 프랑스나, 이태리 등의 나라들과 다르게 나타나는 현상이고, 한국과 같은 제3세계의 공통적인 특징이라는 점에서 역사바로세우기의 과제가 우리 앞에 있는 것이다.
한국음악의 역사적 과제
한반도 엘리트 집단들이 지정학적으로 동서남북을 통하여 국제관계를 맺으면서 밖의 외세와 손잡고 그 식민본국의 음악들을 독점함 바 있다. 그렇다면, 그들이 안으로 숱한 삶들의 정서를 억압하며 늘 주장하였던 강령구호는 무엇이었는가? 당대마다 이름은 달랐어도 시쳇말로 바꾸면 ‘근대화’ · ‘국제화’ · ‘세계화’였다. 그것은 곧 동서남북을 통하여 중국화·일본화·미국과 소련을 통한 서양화를 가리켰다. 베이컨의 뜻과는 달리 ‘아는 것이 힘’이라는 강령구호는 중국과 일본과 서양을 알아내는 것이 힘이 될 수 있음을 가리킨다. 그 문화를 배울 때만이 우리민족이 살수가 있다고 거짓 계몽시켜왔다. 그러면서, 근대화의 걸림돌을 바로 ‘민족 삶의 전통’으로 보고 이를 역사적으로 해체 대상으로 삼을 수가 있었다.
그러나 이 위기 속에서도 우리네 삶들이 언제나 생각하였던 근대화의 역사적 전개는 두 가지 성격으로 헤쳐나왔다. 하나가 ‘민족 전통음악의 창조적 계승과 외래음악의 비판적 섭취’의 길이었고 또 하나가 ‘민족전통의 완전한 회복’의 길이었다. 이 두 길은 모두 동서남북의 식민적 정서를 극복하고 한반도의 혼불같은 소리의 정체성(正體性)을 밝혀 온 길이었다. (여기에서 ‘전통’은 저통주의와 다르다. 그리고 ‘전래’와도 다르다.)
그 평등의 무등산에 올라 조국 산하를 바라보며 ‘둥둥 두리둥’고동 시킨 그 북소리, 하염없이 붉게 타오르는 다가공원에서 효자동을 바라보며 참된 전주대사습을 그리워하는 뼈마디 구음소리, 30년대 일제강점 하에 전남담양의 지실마을에서 열사가 판소리를 만들어 비전시킨 박동실...
그 소리가 어느날 손가락이 타는 한이 있어도 치켜든 자기 깃발처럼, 이 땅에서 쓰러져 간 농민·의병·군인·학도·기생·천민·지식인·목사·승도 등의 삶과 죽음을 저항의 소리를 뿜어내며 삶의 소리로 전개시킨 역사가 또한 우리 음악의 민족음악사이다. 곧, 한반도가 안으로 인간화를 꾀한 삶의 음악과 밖으로 자주성을 꾀한 민족의 음악에 바탕을 두고, 민족전통음악의 창조적 계승과 외래음악의 비판적 섭취는 물론 민족전통음악의 완전한 회복이 바로 우리 음악사의 역사적 과제였다.
그렇다면, 이 역사적 과제가 본격화 되는 1860년대부터 어떤 음악사가 전개되었을까? 다음 호부터 다시 뻗어 가기로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