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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7 | [문화저널]
어떤 좌우명
글/정영길 원광대 교수·문예출판학과 (2004-02-12 11:38:14)
사람을 기다리는 일처럼 미치고 환장할 노릇도 없을 것이다. 그것도 확실하게 나타날지 모르는 사람을 기다리는 일이라면.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틀림없이 올 거야....” 그는 다짐하듯 중얼거렸다. 약속시간이 지난지 거의 두 시간. 그러나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단념을 하고 돌아가기에는 왠지 미련이 남았다. 금방이라도문을 열고 “죄송해요, 길이 막혀서 늦었어요.” 하고 하얗게 웃으며 나타날 것 같은 환영을 지워버릴 수 없었다. 그래서 장활용씨는 자신의 소심증을 학대해 가면서.... 안절부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안내석으로 가서 그녀의 인상착의를 말하고 혹 메모라도 남긴 것이 없는지, 며칠 전이라도 좋으니 연락이라도 온 것이 없는지 확인하고 또 확인해보았지만 헛일이었다. “... 혹시 화장실에 다녀 온 사이 잠깐 들렀다 간 것을 아닐까? 아냐, 그럴 까닭이 없어, 몇 번이나 다짐받은 약속인데...” 장활용씨는 초조해서 담배 한갑을 축내고도 모자라 거푸 맹물을 마셔댔다. 그러면서 애써 그녀의 부재(不在)를 믿지 않으려 했다. 완전히 허방다리를 짚었다고 생각하기엔 너무 억울했던 것이다. ‘칠월 둘째주 일요일 정오 하얏트 호텔 커피숍’ 아무리 생각해도 틀림없는 약속이었다. 칠월.. 둘째주... 커피숍.... 그동안 만지작거려 귀가 다 닳은 그녀의 주소가 쓰인 종이 쪽지를 탁자 위에 올려놓고 훑어보고 또 훑어보았다. 찬찬히, 마치 가자 수표라도 감정하는 듯이. 그러다가 문득 그녀를 처음 만난 기차 안에서의 일을 떠올렸다. “실례합니다. 동석해도 괜찮을는지...?” 쭈뼛쭈뼛 한동안 눈치를 살피다가 말을 걸었다. 이런 용기, 모르는 여자에게 막무가내로 말을 건 것은 순전히 그녀에 대한 첫인상 때문이리라..... 이마 위로 흘러내린 버드나무 가지 같은 고운 머리카락, 긴속눈썹, 반짝이는 눈, 뾰족한 콧날과 단정한 입술.... 어디로 보나 정활용씨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하였다. 더구나 무슨 생각에 잠긴 듯 차창을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보슬비가 흩뿌리는 바깥 풍경과 묘한 구도를 이루어 흡사 한 폭의 풍경화를 보는 것처럼 아름다웠다. 그래서 장활용씨는 기차에 오르는 순간부터 온통 시선을 그녀에게 붙박을 수밖에 없었다. “장활용이라고 합니다. 실례지만 어디까지 가시는지요?” “서울” 그녀는 짧게 대답하엿다. 얼굴이 해말쑥하고 반주그레한데다 두 눈이 토끼처럼 컸다. “영광입니다.” “뭐가요?” “아가씨 같은 미인과 함께 앉아 가게 됐으니... 이거 보통 행운이 아닌 것 같습니다. 서울에 내리자마자 당장 복권부터 한 장 사야겠습니다.” 그는 짐짓 정중하게 말하였다. 여ㅏ는 대답 대신 힘끔, 그를 펴다보았다. “저는 인동 장시 제 삼십육대손으로 장래희망은....대통령입니다....초면에 이름을 불어보면 실례일테고.” 그녀는 잠시 어이없어 하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재미있다는 듯 덧니를 드러내며 피식 웃었다. “장씨들은 다 여자가 똑똑하잖아요? 장희빈이나 장녹수, 장영자처럼.” 코가 약간 멘 귀여운 음성. 예뻣다. “처, 천만의 말씀입니다. 장보고, 장가방, 장발장 등... 우리 장씨 가문을 빛낸 남자들도 수두룩합니다.” 그녀가 폭소를 터뜨렸고 이것이 동기가 되어 두 사람은 마치 연인처럼 온갖 이야기를 나누며 지루한 줄 모르게 서울에 닿았다. “전국 순환 기차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창 밖 풍경을 맘껏 보며 며칠씩 아무 생각 없이 싸돌아다고 싶은 때가 많거든요. 욕실이나 침실, 오락실을 갖춘 비싸지 않은 기차라면 더욱 좋고요.” 역을 빠져 나오며 그녀가 말했다. 두 사람은 가까운 다방으로 가서 뜨거운 커피를 마셨고, 돌아오는 칠월 둘째 일요일에 다시 만나자는 약속을 몇 차례 다짐하고 그리고는 서로의 주소를 적고 난 뒤 헤어졌다. 그녀는 주소 끝에다 전화번호 대신 ‘此竹彼化去竹“이라는 엉터리 한문 몇 자를 쓴뒤, 다음에 만날 대 꼭 뜻을 알아맞혀 보라는 숙제까지 내주고 총총히 사라졌다. 그런 그녀가 일방적으로 약속을 깨고 나타나지 않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많은 시간이 흘렀다. 장활용씨는 종업원들의 눈총에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던지 호텔을 빠져나와 무조건 택시를 탔다. 거리에는 서서히 땅거미가 내리고 있었다. 그냥 집으로 돌아가기에는 뭔가 억울하다는 느낌이 든 장활용씨는 그녀가 적어준 주소지를 찾아 나섰다. 다리가 쑤시고 결리는 걸 참으며 동사무소로, 반장네로, 동네 슈퍼마켓으로 두어 시간을 수소문하고 다닌 끝에 겨우 그녀의 집을 찾을 수 있었다. 그녀의 집은 꽤나 한갓진데 있었다. 조금 긴장되는 하였으나 용기를 내어 초인종을 눌렀다. 그러자 초등학교 육학년쯤 돼 보이는 계집애가 대문을 열고 빼꼼 얼굴을 내밀었다. “이 집에 혹시 박미희라는 사람 살고 있니?” “네, 전데요. 왜 그러세요?” 꼬마의 깨꿍맞은 대답에 그는 잠시 말문을 잃었다. 구차하지만, 어쩔수 없이 꼬마에게 저간의 사정을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잠자코 듣고 있던 꼬마가 갑자기 배꼽이 빠지도록 깔깔깔 웃어댔대. “그 언니요, 우리 집에 셋방을 살았는데 이사갔어요. 나도 그 언니 진짜 이름은 몰라요, 접때도 내 이름으로 편지가 오고 그랬어요. 낮에는 잠자고 저녁에만 일하러 나가던데... 아주멀리 이사간댔어요.” 그때서야 장활용씨는 번쩍 정신이 들었다. 그리고 파김치가 다 되어 집으로 돌아왔을 때야 그녀가 적어준 그 괴상한 문구의 수수께끼도 저절로 풀렸다. 이대로 저대로 되는데로!(此竹彼竹化去竹) 장영길 /원광대 국문과 및 같은 대학원을 졸업했고 1982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시로 입상한 뒤 199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소설 「무화과나무의 꽃」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현재 원광대학교 문예출판학과 교수이며 한국소설의 정통성 또는, 가장 한국적인 소설이 어떤 것일까 등을 고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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