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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7 | [문화저널]
1996년 7월 과월호 문화저널
문화저널(2004-02-12 11:35:57)
제 22회 전주대사습놀이 전국대회 국악 재목 기근, 활로가 필요하다 국악인들의 권위 잇는 등용문이 전주대사습놀이 제22회 전국대회가 풍남제기간 중인 지난 6월 19일과 20일 펼쳐졌다. 판소리 명창■일반, 농악, 기악 무용, 가야금병창, 민요, 시조, 궁도 등 9개 부분에 천2백여명이 참가해 기량을 겨른 이 대회에서 영예의 판소리 명창부 대상은 주운숙씨(43■대구시 중구)가 차지했다. 전주대사습놀이 전국대회는 국악의 대중화와 국악인의 화려한 등용무 역할을 담당해왔다. 이틀간의 대회장에는 수 많은 자리를 찾은 관객들이 열기를 더햇는데 관객 대부분이 노년층이어서 아직도 국악의 저변확대가 젊은층에게까지 이어지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또한 예년의 수준을 크게 뛰어넘지 못한 이번대회에서는 특히 전공 분야별 역량있는 국악인들의 기근으로 지난 대회에 이어 국악인구 활성화와 대중화를 위한 문화적 공감 형성을 필요한 과제로 남겼다. 올해 각 부분 수상자들을 보면 다음과 같다. ■판소리 명창부:장원주운숙(43■대구), 차상 박복남(69■순창군), 차하 윤진철(32■광주광역시). ■농악부:장원 경남마산농악단, 차상 전남순천농악단, 차하 한국전자(주)농악단 ■기악부:장원 남현우(35■경기안양), 차상 원지선(26■서울), 차하임미애(32■서울) ■무용부:장원 이은자(26■서울), 차상 박종필(32■서울), 차하 이귀선(37■경남울산) ■가야금 병창부:장원 위선경(22■서울), 차상 주문희(19■서울), 차하 강정희(48■대전) ■시조부:장원 김명순(54■인천), 차상 최귀임(50■전주), 차하 노경옥(45■제주) ■민요부:장원 최은호(35■서울), 차상 정재경(42■서울). 차하 김점순(34■경기성남) ■판소리 일반부:장원 배기수(27■광주광역시), 차상 김미숙(26■대전), 차하 박미애(30■정읍) ■궁도부:장원 조영석(51■전남 구례), 차상 김효규(43■경남하동), 윤한의(45■경기 용인), 차하 김학순(36■충남연기), 이기봉(39■경남고성), 서상택(56■경기파주). ■잠깐인터뷰 판소리 명창부 장원 주운숙 씨 전주대사습놀이 전국대회의 스물두 번째 명창으로 주운숙 시(43■대구시)가 ‘심청이 뱃사람들에게 팔려가면서 심봉사와 이별하는 대목’으로 영예의 장원이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이날 시상식에서 소리 공부 11년 세월을 씻어내리는 큰 웃음을 보인 주운숙 명창은, 서른세 살의 늦은 나이에 험난한 소리의 길에 들어서서 겪은 어려움이 떠오르는 듯 눈물을 참는 모습을 감추지 못했다. “선생님의 열정적인 가르침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해 안타까움이 크지만 항상 겸손하고 치열한 자세로 공부를 하면서 그 은혜에 보답하겠다.”고 말했다. 대구에서 활동하고 있는 이명희 씨로부터 처음 민용와 흥보가를 배우고, 3년 전부터 이일주 명창을 찾아다니며 김연수-오정숙-이일주로 이어지는 동초제 심청가를 전수했다. 그는 현재 대구에서 생활하며 활동하고 있지만 그가 다섯 살 되던해에 작고해 정작 성장기에는 국악에 대한 관심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 소리에 뒤늦게 빠져들어 명창의 반열에 들어선 그는 이제야 아버지의 길을 잇게 되었다며 남다른 감회를 보였다. 그는 이제 명창의 반열에서서 소리를 할 수 있는 자격을 얻은 만큼 아직 판소리가 활성화 되지 못한 대구 지역의 국악 발전에 자신의 힘을 더하고 싶다고 밝혔다. 현재 그는 대구에서 판소리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으며 대학에 다니는 아들과 함께 노모를 모시 있다. 연극협회 전북지회 & 창작극회 중국교류 방문 무산 연극계의 무더운 여름 전북연극의 중국 공연이 무산되었다. 연극협회 전북지회(류영규 지회장)와 창작극회가 그 동안 추진해온 중국 강소성과의 정기적인 연극 교류 1차 방문이 방문 사흘을 앞두고 일단 무기한 연장된것이다. 당초 연극협회와 창작극회는 37명의 방문단을 구성하고 강소성의 3개 시(소주시■무석시■남경시) 공연 일정으로 7월 1일 출국을 앞두고 있었다. 연극협회 전북지회의 이런 계획은 창작극회(신중선 대표)와 함께 지난 해 말과 올해 초 사이에 구상되었다. 전락북도와 중국 강소성은 지방정부 출범 이후 자매결연을 맺고 있는데 민간단체인 연극협회 전북지부와 창작극회의 이번 교류사업은 전락북도의 주선으로 협의의 문을 열게 되었고, 지난 5월 전북지회의 중국 현지 사전 방문으로 본격적으로 추진되어왔다. 연극협회의 류영규 지회장과 정종선 사무국장, 창장극회의 류경호 상임연출과 임형택 기획은 지난 5월 13일부터 16일가지 나흘간의 일정으로 중국 강소성을 방문 그곳 문화청 관계자들을 만나 현지의 현대극 공연 실정과 공연장 시설들을 돌아보고, 7월 초부터 열흘간 강소성 내의 3개 도시를 방문해 공연을 열기로 협의했엇다. 교류방안의 연극협회 측 구상은 원칙적으로 도내 각극단이 모두 참여하는 것으로 하고, 각 극단과 협의하여 방문 극단과 작품을 정하는 방식을 검토해 왔다. 또한 중국측의 도내 방문은 중국 전통 무대예술 양식인 경극을 내용으로 10월이나 11월 사이에 방문할 예정이었다. 이한 교류사업은 순조롭게 추진되는 듯 보였으나 출국을 사흘 앞둔 6월 28일 중국측은 일방적으로 사업의 연기를 통보해왔다. 중국측의 일방적인 연기 이유는 재정상의 문제다. 사전 협의된 것에 의하면 상호 교류 방문에 필요한 경제적 비용 가운데 현지의 체제에 드는 비용은 초청측에서 부담하고 그 외의 항공료나 기타 비용은 방문측에서 부담하기로 협의했었다. 강소성 측에서 통보해온 문제는 연극협회 교류방문단이 강소성을 방문해 3개 도시에 공연하는 동안 머무는 체재비 확보가 마련되지 못햇다는 것이다. 이런 중국측의 돌연적 사세변화로 연극협회 전북지회는 적지않은 재정적 손실과 대외 문화 교류라는 외형적 중요성에 대한 상대적 손실감은 차치하고도, 좀처럼 무력감을 떨쳐내지 못하던 연극계와 신선한 자극과 활력소를 기대하던 연극인들에게 미치는 보이지 않는 상실감과 공신력 실추의 영향은 무더운 여름을 예보하고 있다. 중국과의 문화교류가 낯선 일은 아니다. 그러나 지방의 민간 단체가 중국지방 정부와 정기적인 문화교류를 시작하는 일은 처음 있는 일로 특히 강한 예술적 설득력을 가지고 있는 연극교류라는 점에서 관심을 끌어왓었다. 국제적인 문화교류의 러시현상과 함께 앞으로도 미간단체중심의 대외적인 문화교류의 창은 열려있는 형편이나 상대국에 대한 문화적이해와 치밀하고 꼼꼼한 일의 추진이 아쉬운 과제로 남겨진 것이다. 우진 춤판 모색과 실험의 30대 춤판 과감한 기회과 효과적인 공간활용으로 소도시에 걸맞는 종합문화공간으로서 위상을 더해가고 있는 우진 문화공간이 96년 새로운 춤판을 열었다. 매년「우진 춤판」의 이름으로 올려진 크고 작은 춤판들은 이 지역 무용계에 가장 중요한 행사로 자리잡아 왔다. 우진문화공간은 1992년 ‘춤의 해’를 맞아 ‘한국춤, 그 침무과 생명의 아름다움’으로 이 지역의 중견 춤꿈들인 장신숙(전북대 무용과 교수), 강미란(전북도립국악원 무용단), 김경주(우석대학교 무용과 교수)를 초청, 지역 춤판의 정수를 선보엿고 그 이후에도 해마다 기획춤판을 펼쳐 날로 새롭게 변화 발전하는 춤의 세계를 나름대로 조망해왔다. 우진 춤판이 올해 기획하고 있는 주제는 ‘젊은 춤꾼, 그 생동하는 언어’이다. 주제에서 드러나듯이 이번 기획춤판에는 전북지역에서 활동하는 30대 초중반의 역량있고 힘있는 춤꾼들을 초청, 그 삶과 생활속에서 배어나온 그들만의 이야기가 담겨져 있다. 더욱이 이번 춤판은 전국적으로도 명성을 얻어가고 있는 젊은 춤꾼들의 무대로 하국춤의 방향에 대한 모색과 탐험을 엿볼수 있는 기회로 평가된다. ’96 우진춤판 ‘젊은 춤꾼, 그 생동하는 언어’는 그 첫무대로 지난 6월 3일 이경호(전북대 무용과 교수)를 초청 그 막을 올렸다. 이경호 교수는 이날 춤판을 통해 ‘나는 너로부터, 너는 나로부터’와 김말애 선생의 살풀이를 바탕으로 구성한 ‘악몽’을 올려 한 젊은 춤꾼이 관조하는 세상과 사랑을 형상화시켰다. 6월 3일 시작된 이 춤판은 7월 18일과 19일에는 현대무용단 사포의 대표인 강형숙씨(원광대, 계명대 강사)로 이어지고 세 번째 춤판은 9월 19일과 20일 서영숙씨(전주예술고 무용과 과장), 마지막으로 10월 17일에는 현대무용단 사포의 신용숙씨(원광대, 계명대 강사)의 춤으로 마무리된다. 우진문화공간은 이번 기획춤판에 이어서 한창 실험기를 겪으면서 훈련에 몰두하고 있는 20대의 춤꾼 네사람을 선정하여 11월경에 신진 춤판을 올린다는 계획도 세워두고 있다. 부채시화전 합죽선의 청신한 멋과 시의 향기 합죽선의 청신한 멋과 묵향의 은은한 내음, 간결하고 아름다운 시귀절이 함께 한 부채시화전이 6월 7일부터 13일까지 전북예술회관에서 열렸다. 96 문학의 해 전북기획단과 문인협회 전북지회가 공동으로 마련한 부채시화전은 여름의 초입에 시원한 바람을 그리는 많은 관객들의 발길을 끌었다. 96 문학의 해 행사의 하나로 기획된 이 시화전은 기존의 시화전이 지닌 일상적인 틀을 벗고 전북지역만의 독특한 정서와 문화적 색책로 전시장을 꾸몄다. 전주의 특산품인 합죽선의 멋과 묵향의 전통적인 향취를 조화시킨 이전시실은 합죽선위의 시화 그림들이 내용마다 각기 다른 향기를 담아내 큰 호응을 받았다. 시인 58명과 서예가 15명, 화가 14명 등 82명이 한 주제와 형식으로 참여한 시화전으로는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기도 했던 부채시화전은 부채를 이용한 아이디어도 관심을 모으지만 문학과 미술인접예술인들의 공동작업으로도 의미가 있다. 전북문인협회와 95문학의 해 전북기획단에서는 이번 시화전의 참여 시인들을 55세 이상으로 제한하여 전시했다. 참여시인은 황길현 한성수 이종희 김정웅 김남곤 양상욱 김민성 권지희 조춘희 이길성 최진성 김봉렬 박금규 문학인 최승범 최형 이목윤 조기호 문제환 김옥녀 송재옥 맹희선 손경조 이갑상 김승규 강만영 류공선 장태윤 조병희 서재균 박형보 최종규 김병곤 고두영 유휘상 정순량 이운룡 허소라 채규판 노진선 이세일 이기반 송희철 조준환 잉병훈 진양효 김용극 한대선 전병윤 윤이현 정극태 박만기 송기섭 씨. 글씨와 그림은 김종현 권갑석 송계일 정승섭 이규진 윤석탁 권병렬 김화래 최종인 최상기 임섭수 김지섭 김봉범 최난주 여태명 소병순 이용 송명석 김윤길 윤명호 오영 이형수 김광영 씨 등이 참여했다. 호사연, 미노총과 연합세미나 지역 노동운동의 새로운 모범이 필요하다. 전북의 노동운동은 후퇴하고 있는가. 전국적으로 노동운동의 위기가 운위도고 있는 시기에 전북지역의 전문 학술연구단체인 호남사회연구회와 민주노총 전북지부가 공동으로 토로회를 열어 관심을 모았다. 지난 6월 27일 전북대에서 열린 이날 토론회는 ‘전북지역 노동운동의 흐름과 조건’이라는 주제로 노동조합 활동가들과 노동자, 그리고 호사연 회원 약 50여명 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첫 번째 발표를 맡은 전북노련 자룝집 발간위원 나정민 씨는 80년대 초부터 최근에 이르기가지 전북지역 노동운동의 흐름은 노동자 의식의 발전이라는 측면에서 점검하면서 현재의 노동자의식이 무정형(無定形)하다고 규정하고 지난 시대의 노동해방 이데올로기와 현장 노동조합의 기업주의적 활동이 노동자 의식의 발전을 방해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앞으로의 노동조합 운동은 투쟁의 관점에서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을 스스로 이분하고 역할을 협소화시킬 것이 아니라 보다 중층적이고 다원화된 사회적 관계로서의 위치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 발표에 나선 이성호 씨(전북대 사회학과 강사)는 전북지역의 구조변화와 노동자 의식의 문제를 구체적인 조사자료를 통해서 분석했다. 전북지역의 제조업구조는 여전히 전근대적인 성격을 벗어나지못하고 있지만 80년대 말 이후 산업구조조정과 서해안 개발사업이 시작된 이후 소비재 중심의 경공업이 쇠퇴하는 한편 화학, 금속 기계장비 등의 중화■ㅏㄱ 공업부문이 급속하게 성장하고 있다고 주장햇다. 그러나 이같은 구조적 변화가 곧 노동운동 지형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지역내 제조업의 중심은 여전히 영세성을 면치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노동운동 조직의 성장에 중요한 장애요인이 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더욱이 전북의 지역주민들 속에 뿌리깊게 내려있는 지역 개발 이데올로기는 자본주의의 본질적인 계급적 대립을 은폐시키고 지역주의를 강화하는 경향으로 나타나며, 이것은 전체사회의 보수화를 촉진시키는 결과를 가져왓다고 주장했다. 이성호 씨는 앞으로 새롭게 형성될 자본의 통제전략에 대한 지역노동운동의 새로운 틀이 요구된다고 지적했다. 이어 벌어진 토론에서는 호사연과 민노총에서 각가 두 명의토론자가 나서 지역 노동운동의 조건과 앞으로의 과제를 두고 활발한 토론이 벌어졌다. 오궁리 국제조각 심포지엄 세계의 조각과 함께한다 오궁리 전북미술문화센터가 세계 9개국 조각가를 초청, 심포지엄을 개최해 한국 조각예술과 세계의 조각이 나란히 어깨 견줄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다. 한국을 비롯 미국 영국 프랑스 등 9개국에서 10명의 조각가들이 참여하는 이번 조각 심포지엄은 7월 1일부터 30일까지 한달동안 작가들이 임실 오궁리에 머물면서 조각 작품을 제작, 세계 조각의 면면을 보여주게 된다. U대회의 성곡적 개최를 기원하고 예향 전북의 위상과 전북 미술문화의 세계화를 목표로 치러지는 이번 행사는 소요경비만도 2억여원이 넘게 잡혀있는 대규모 문화행사이다. 7월 5일 오궁리의 운동장에서 국제 조각심포지엄의 개막식이 치러졌다. 운동장 한켠에 나라별로 작업장을 구분지어 놓고 거대한 원석들이 군데 군데 놓여져 있는 가운데 진행된 개막식은 막대한 진행비와 행사의 규모에 걸맞지 않아 아쉬움을 남겼다. 대규모 미술축제 임에도 불구하고 정작 미술인들의 참여도 미흡했거니와 국제조각 심포지엄의 특징을 살리는 기획도 부족했다는 것이 전반적인 평가였다. 이날 개막식은 전북미술문화센타 회장 김한창 씨의 개회사와 유종근 도지사 이형노 임실군수의 축사에 이어 외국작가대표의 답사와, 공연으로 이어졌다. ‘성공적인 U대회’ ‘전북을 세계속에’라는 슬로건 아래 치러지는 이번 심포지엄은 외국작가들을 초청 국제행사를 유치함으로써 전북도의 위상을 세계에 알리는 기회로 삼자는 목적이었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이러한 기대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들도 튀어나오고 잇다. 전북을 세계속에 알려낼 생각이라면 국내의 역량있는 조각가들을 중심으로 외국작가들을 초청, 내실을 기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하지 않았겠느냐는 의견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이미 막은 올랐다. 따라서 남은 일은 도민과 미술인들이 관심을 가지고 국제조각 심포지엄의 중심이 흔들리지 않도록 관심을 보내는 일일 것이다. 이번 조각 심포지엄이 끝난후 각 작품들은 40여점이 사선대 조각공원에집중 배치되며 10여점은 도내의 상징적인 장소에 배치된다. 시 구멍 유용주 걷다가 허방에 빠져 휘청 끈을 놓&#52451;을 때 올가미는 당연히 목을 조일 줄 알았는데 발목을 잡는다 코 훔친 소매자락 반들거렷던 시절 작은 형은 겨우내 높은 깎음을 돌아다녔다 운이 좋아 곧바로 목에 걸린 토끼는 붉은 눈으로 하늘을 보앗지만 간발에 차이로 발에 걸린 녀석은 뼈가 다 으스러질 때 까지 나무 밑둥을 죄 갉아 놓고선 뻣뻣하게 얼어 있었다. 삶은 늘 느닷없이 발목을 잡는다 몸부림 칠수록 바짝 조여온다 유용주/1960년 전북장수 출생. 1990년 첫시집「오늘의 운세」를 문학마을에서, 1993년 두 번재 시집「가장 가벼운 짐」을 창작과 비평사를 통해 내놓았다. 문화칼럼 문화예술이 삶의 질을 높여주는 시대 글/홍태표 전주 케이블 TV회장 문화·예술의 중요성 요즈음 매스컴을 접할 때마다 21세기의 정보화 문제가 다루어지지 않는 것이 없다. 21세기에 정보화 사회를 이룩하지 못하면 선진국에 진입할 수 없고 국제경쟁에서 낙오하게 된다 하여 세계의 모든 국가가 구력을 기울여 정보화 사회의 선두에 나서려고 안간힘을 다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 첫 단계가 ‘고속 정보망’(정보 고속도로) 설치며, 우리나라도 2015년까지 45조원을 투자하여 고속 정보망을 완성한다고 발표한 바 있다. 국가 고속 정보망은 지구촌 고속 정보망에 연결되어 세계의 지식, 정보, 문화, 예술 등의 교류가 단 몇 초 사이에 이루어지는 엄청난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문제는 막대한 투자로 고속 정보망을 성치해 놓고 그 고속도로에 달리게 하는 차가 어느 나라 차가 많이 점유하느냐가 더 중요하다. 쉽게 예를 들어 현재 우리나라 고속도로는 연휴나 명절이면 고속도로 구실을 못한다. 정체가 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현재의 4―6차서을 100차선으로나 확장해야 고속도로의 구실을 할 수 있다고 가정하면 이에 소요되는 투자가 얼마나 되는가를 알 수 잇으며 이렇게 막대한 투자를 해서 확장을 해 놓앗더니 국산차는 거의 없고 외국 차만 달리게 된다면 무엇 때문에 확장을 해야 하는 것인지 국민들이 납득하기 어려운 것과 비교할 수 있다. 즉 막대하 ㄴ예산을 투자해 고속 정보망을 설치해 놓았더니 그 고속정보망에는 우리것은 없고 외국의 지식, 정보, 문화, 예술 등만 달리게 된다면 정보고속망이 없는 편이 더 낳을지 모른다. 자칫 그 나라의 고유 문화는 사라지고 외국 문화에 예속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21세기는 다가오고 정보화 사회는 필연적이며 고속정보망 설치를 앞당길 노력은 각 국가마다 치열해 질 것이 당연시 된다면 우리의 차, 즉 우리의 문화, 예술, 지식, 정보의 창출이 필연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그러면에서 우리는 문화·예술의 주요성을 온 국민이 인식하고 창조적 교육이 시급한 과제로 떠오르게 된다. 더하여 우리나라의 차도 중요하지만 우리 도(道)가 경제적 낙후를 한탄하고 잇으나 굴뚝없는 고부가가치의 산업이 바로 이것들이며 깨끗한 공기, 맑은 물, 전통적 멋과 맛이 어울어진 진정 지상의 낙원을 이룩할 수 있다는 미래가 바로 우리 눈 앞에 있다. 예향의 전통을 발전시켜야 우리 도민들은 곧 잘 예향이라고 자랑을 하며 자긍심을 갖고 있다. 그러나 예향이라고 부르기엔 부끄럼이 많다. 창(唱)하시는 분 몇 분, 글씨에 능하신 분 몇 분, 그림을 그리는 분이 몇 분 있다하여 우리도가 예향이라고 부르기에는 어색하다는 것이다. 러시아의 싼토 페테르부르크(구 레니그라드)를 다녀 온 사람은 우리 도를 예향이라고 부르기에는 부끄러움을 느낄 것이다. 러시아 혁명의 진원지요, 제2차 세계대전에 많은 피해를 받은 도시가 옛 문화유산을 알뜰하게 보존, 복원해 놓은 데 감명을 받는다. 또 그 유명한 오페라, 바레이, 교향악 연주 등을 감상하는 관중이 3-4천여 명 수용하는 좌석을 가득 메우고 그 관중들은 우리나라처럼 돈잇는 선택된 몇 사람들이 아니라 어린아이들과 함게 하는 가족들임을 알 때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진짜 문화 예술의 고장이란 바로 이런 곳이다. 어려서부터 수준 높은 문화나 예술을 생활의 일부로 접하며 살아가는 곳, 바로 이런 곳이 예향이라고 자랑할 수 있을것이다. 그런 문화와 예술 속에서 생활을 해 온 사람들은 성난 혁명의 투쟁 속에서도 소중한 문화 유산을 훼손하지 않고 고이 보존하는 정신이 있고, 문화 예술을 사랑하며 발전시켜 나아가며 삶의 질을 높여 가는 근원이 된다고 보아야 한다. 이제 우리도 예향이라고 자랑하려면 우리의 문화 예술에 대한 인식을 바꾸고 교육과 자치단체의 정책을 하나로 결합시켜 차분하게 추진해야 한다. 우리 고장은 예로부터 문화예술을 사랑하고 발전시켜 왔던 전통과 맥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 전통과 맥이 끊어진지 오래이고 다만 예향이란 헛 낱말만 남아있다 하여 큰 반론이 잇을까. 문화 예술이 삶의 질을 높여 줌은 물론 문화 예술은 21세기의 고부가가치 산업이기에 더욱 우리 도의 전통 문화 예술을 발전시켜야 할 이유가 분명하다. 21세기는 문화예술의 시대 먼저 문화 예술에 온 도민이 생활의 일부로 저하게 할 장과 계기,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 지방자치 단체나 사회 봉사단체는 지역마다 문화 예술의 공간을 많이 만들어 관리하며 주민들이 항상 좋은 문화 예술을 접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그 문화 예술 공간의 이용은 도내 학교 클럽활동 발표나 예술, 문화단체가 공연의 장으로 이용하며 관중에게 감상의 기회를 주면 된다. 특히 사회봉사 단체가 많으며 좋은 봉사 활동을 하고 있으나 형식적이고 홍보성 행사에 많은 예산을 쓰고 잇는 사례가 많다. 이러한 것보다는 한 단체가 한 문화 예술 공간을 세우고 관리하며 명성있는 공연을 경쟁적으로 유치하는 것이 훌륭한 봉사활동이며 값진 사업으로 평가받을 것이다. 학교교육에서는 어려서부터 이 고장의 문화 예술의 역사를 가르치고, 예술의 한 분야에 취미 활동을 할 수 있는 장소가 마련되어야 하고 꾸준히 키워 갈 수 있도록 지도해야 한다. 그래서 전 도민이 문화 예술에 대한 인식이 깊고 한 가락을 할 줄 알 때 예향이란 칭호를 받을 수 잇을 것이다. 그러한 가운데 소질이 있는 사람(그 사람은 초드학교만 졸업하였던 중학교를 중퇴했던 상관없이)에게는 지방자치단체는 마치 기업에 투자하듯 그 소질을 보고 투자하고 그 문화예술을 산업화시키도록 한다면 한 작품이 몇십만 대의 자동차 수출보다 훨씬 이득이 많은 고부가ㄱ치 산업이 될 것이며 지방 재정자립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21세기는 문화 예술이 삶의 질을 높여주는 것이며 동시에 고부가가치 산업이요 가장 유망한 직종이 된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어려서부터 학교, 가정, 사회 모두가 문화 예술이 생활의 일부로 자리 메김이 되게 하는 데 노력해야만 한다. 홍태표/·1972년 12월 익산 왕궁 산(産). 중아대 경상대. 1962년에 교직생황르 시작, 1992년 전락북도 교육감을 지냈으며, 교육개혁추진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 전주케이블TV회장 저널초점-전주한지 우리문화의 보이지 않는 힘, 한지의 역사 전주 한지의 어제와 오늘 글/김태호 「문화저널」기자 미래사회에 대해 온갖 예측과 기대가 있지만 분명한 사실은 문화의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문화의 시대를 좌우하는 힘은 전통과 역사에 기인한다. 그러나 이른바 세계화 시대의 경쟁력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건강한 삶을 위해서 기억되고 보존되어져야 한다. 이번호 ‘저널초점’은 전북지역의 독창적인 문화유산 가운데 하나이지만 지금은 그 원형조차 사라져버릴 위기에 빠져있는 전주한지의 역사를 찾았다. 전주한지는 문화의 시대에 우리가 보존하고 가꾸어야 할 가능성있는 문화상품으로 꼽히고 있다. 앞으로 ‘저널초점’은 이같은 독창적인 문화유산들을 계속해서 점검해 나갈 것이다. (편집자 주) 우리나라에서 종이가 언제부터 만들어졌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중국에서 불교가 전래되었던 고구려 소수림왕 때 종이 만드는 기술도 함께 전해졌다는 이야기가 잇고, 자생적으로 종이 만드는 방법을 터득해서 이미 조이를 사용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고구려 건국부터 소수림왕 때까지의 일을 기록한『유기(留記)』(600년)에는 낙랑시대의 고분에서 닥종이 뭉치가 발견되었다는 기록이 있었다고 『삼국사기』에 적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우리나라 종이의 역사는 소수림왕때보다 훨씬 앞선 것으로 볼 수 있다. 우리 나라의 종이 사용과 관련해 저간의 상황을 짐작할 만한 기록은 일본서기(日本書記)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고구려의 승려 담징이 서기 610년 3월에 일본으로 건너가 제지기술과 함께 제묵법(製墨法)등을 전수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지는 질기고 빛깔이 고와 신라때부터 그 명성이 중국에 까지 널리 알려졌다. 특히 중국 송나라때에는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릴 때 종이가 먹을 먹는 품이 고려지만큼 겸손한 종이가 송나라 천지에는 없다’는 말이 전해질 정도였다. 종이에 대한 전통이 우리보다 훨씬 앞선 중국이고 보면 우리나라 한지의 우수성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고려시대에는 구책사업이 불겨의 간행으로 한지의 수요가 양적으로 증가했고, 현종이후 대장경의 계속적인 조판에 힘입어 제지업이 발달하게 되면서 종이 생산은 보다 활기를 띠게 된다. 예종때에 이르러서는 닥나무 심기가 권장되었고 명종때는 이를 법제화했음을 볼 대 종이 생산이 국가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사업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제지 수공업이 가장 왕성하게 발달된 것은 역시 조선시대에 이르러서였다. 이러한 전통하지는 조서시대에 기록문화의 발달과 함게 크게 활성화된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한문사용과 함게 한글이 창제되고 개인문집 발간등 기록문화의 여건이 왕성해지면서 고려시대의 일부 특권계층과 중인계급의 아전들이 한문과 이두를 사용했던 때와는 다른 조건이 형성되었다. 조선시대에 설치된 조지서는 교육제도의 발달과 함께 향교 서당 서원의 건립 등으로 급증하는 종이의 수요의 조달을 담당하였다. 이미고려시대에 그 우수성을 인정받은 한지는 조선시대에 양적인 팽창과 더불어 절정을 이루게 된것이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보면 종이만드는 기능을 보유한 장인을 ‘지장인’이라하고 수공업 공장을 ‘지장’이라하여 그 내용이 전한다. 이를 보면 함경도를 제외한 전국에서 닥나무가 생산되었으며 한지의 생산지역 역시 전국에 걸쳐 있었고 특히 각 공장에 소속된 지장인이 다른 수공업종에 비해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을 정도로 제지업은 성황을 이루었다. 한지의 원료로 주로 사용되는 것은 뽕나무과에속하는 닥나무다. 닥나무는 옛날에는 저포라고 불리는 일종의 피륙을 짜는 데 사용되었고, 제지원료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고려시대 이후인 것으로 보고 있다.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닥나무를 원료로 하여 종이를 만드는 것이 본격화되어 태종때 에는 대호(大戶)는 200조, 중호는 100조, 소호는 50조식 재배하도록 강요하기도 하엿다. 나라에서는 당시 전국 각지에 지장을 배치해 한지의 분업화를 정책적으로 지원햇는데 전주와 남원 등지에 23명, 밀양에 17명, 광주 19명 등을 배치했다고 한다. 그 수를 봐서도 전주의 한지가 정책적으로도 인정받고 있엇을믈 잘 알수 있다. 전주 한지는 그 질의 우수성으로 양적인 생산의 증가를 가져오는데 이는 전주를 중심으로 서화가 발달하게 되는 바탕이 된다. 또한 뛰어난 예술적 장인적 감각을 가진 호남인의 기질과 만나 전국적으로 이름을 떨치는 부채나 생활 고예품들을 낳았다.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서 활기를 띠는 간행사업은 서울의 경판본, 안성의 안성판본과 함게 전주에 국립 인쇄소를 두고 소위 ‘완판본(完板本)’을 간행하기에 이른다. 전주 한지의 우수성은 그 제조공정에서 절대적을 필요한 물과 따로 떼어 얘기할 수 없다. 닥나무의 공급과 함께 전주를 남에서 북으로 관통하고 전주천은 물이차고 맑아 질좋은 한지를 낳게 한 것이다. 하지만 조선시대 전통 한지가 누린 영화도 새로운 서구 문물의 유입과 더불어 점차 설자리를 잃어갔다. 조선 후기에 이르면서 한지 생산은 오히려 침체기를 맞게 된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의 난리로 인해 제지시설이 판손되고 지장들이 흩어지면서 제지 생산에 큰 차질을 빚게 됐고 생산량도 뒷받침되지 못해 생산자체가 어렵게 되었기 때문이다. 조선 태종 15년(1415)에 관설 제지소로 출발한 조지서는 형식으로나마 조선후기까지 그 명맥을 유지해오다가 고정 19년(1882)에 4백여년간의 세월을 마감하고 폐지되었다. 1884년 서양식 종이와 근대식 인쇄술이 도입됨에 따라 전통 한지는 설 자리를 잃게 되었다. 예부터 명서이 높았던 전주를 비롯한 전북일원의 한지도 이러한 흐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지만 해방 이전가지만해도 전주는 여전히 한지의 메카였다. 그러나 이곳 역시 해방 이후 산업화의 영향으로 한지의 수요가 급격하게 줄어들면서 제지공장이 페쇄되고 제지 기능인들도 구심점을 잃어 흩어져 그 맥이 끈길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물론 임실이나 완주·전주 등지에서 한지생산이 개인적으로 혹은 협동단지의 형태로 이어지고 있지만 그중에서 한두곳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기계화 된 대량 생산공장을 운영되고 잇는 까닭에 전통 한지 제작의 명맥을 잇기엔 부족하다. 우리의 옛것을 되찾자는 움직임이 활발해지면서 서예나 각종 한지공예에 뜻을 둔 전문인들이 늘어나면서 명맥만 유지하던 한지생산이 다시 한번 부활의 전기를 맞고 잇다. 지금은 원주, 전주, 남원, 가평, 괴산, 의령 등지에서 한지의 맥이 이어지고 있다. 지난 1991년 까지만 해도 전국 한지 생산량의 70%를 차지했던 전주 한지는 현재 한지협동화 단지를 비롯해 남원아영 부업단지 등 37개 업체가 조업중이지만 값싼 중국산의 수입과 닥나무 재배가 끊기면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이처럼 하지의 역사는 서화와 함게 문화적 생활양식의 바탕으로 오늘에까지 이어져왔다. 서구 문명의 수용과 함게 잊어왔던 우리 고유 한자의 우수성과 멋은 다시금 우리의 생활과 어우러지는 기회를 맞고 잇는 것이다. 근대이후 잊어 온 한지의 우수성과 생명은 결국 현대인의 생활을 윤택하게 하는 새로운 부활로 부각되어야 한다. 저널초점-전주한지 「송가종이」전통, 그용기있는 선택 전주의 마지막 지장 송우석씨 글/원도연 「문화저널」편집장 인류의 역사에서 진보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는 보다 나은 삶에 대한 희망이다. 과학기술과 산업조직이 집요하게 추구해온 근대화는 금세기들어 인간의 생활을 질적으로 바꿔놓았다. 그러나 그 근대성이 가져다주는 편리함의 이면에는 언제나 그와 맞바꾼 크나큰 상실이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그 잃어버린 많은 것들은 단지 옛것이기 때문에 다시 그리워지고 찾아지는 것만은 아니다. 그 옛것에 녹아잇는 선인들의 삶속에 어쩌면 우리가 나아가고자 하는 가장 인간다운 삶이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깊은 회의가 우리 가슴 깊은곳에 있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전주는 물산이 풍부하고 산세가 원만하여 사람이 사는데 가장 좋은 조건을 두루 간진 땅으로 꼽혀왔다. 그리고 천혜의 자연속에서 전주의 예술은 곧 이 땅을 대표하는 문화와 예술이 되었다. 그 빛나는 문화가 있기까지는 질박한 땅의 임심과 함께 수많은 사람들의 땀과 노고가 베어 있엇다. 특히 전주의 예술을 이야기하면서 빼놓을수 없는 서화의 바탕에는 먹을 배척하지 않는 부드럽고 따뜻한 전주한지가 잇었다. 전주의 초지장 송우석씨(73·전주시 완산구 평화동 1가 311). 그는 칠십평생을 한지와 함께 해온 얼마 남지않은 전주 전통한지의 명인이다. 그는 애써 스스로를 드러내려 하지 않지만 내노라하는 한국의 화가들과 서예가들 사이에서 ‘宋家종이’의 명성으로 기억되고 있는 지장이다. 대부분의 쟁이들이 그러듯이 그 역시 운명적으로 한지와 만낫다. 전주 한지는 그 집안의 가업이었다. 그의 증조부 송승완은 고종때 제지소를 운영하면서 조선중엽 이후 사라졌던 「태지」를 재현해낸 솜씨좋은 지장이었고 그렇게 시작된 가업은 그의 조부(송길환)와 부친(송기헌)을 이어 그에게 이어졌다. 그리고 이제는 그의 셋째 아들 재훈씨까지 가업을 이어받아 한지 제작공정의 자동화와 기계화에 크게 한몫하면서 가업을 이어오고 있다. 한때 젊은 나이에는 지장으로서의 운명을 거슬러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일본으로 단신 유학하여 중하교까지 마쳤으나 끝내는 지장으로서의 운명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의 일본 유학은 그에게 새로운 문물과 신식학문에 대한 커다란 깨우침이 되었다. 일본에서 돌아온 20대 초반의 나이에서부터 초지기술을 전수받은 그는 지금껏 한지와 함께 씨름해왔다. 그는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은 초지기술을 간직한데서 멈추지 않고 한지 생산의 공정을 기계화하고 새로운 한지개발에 몰두했다. 일본에서 새로운 기술이 개발되면 한달음에 달려가 자료를 모으고 다시 연구하면서 자신의 작업에 적용시켰다. 그점이 그가 오늘에 와서 남다른 초지장으로 대접받는 까닭이고, 해방이후 쇠퇴일로를 걷던 한지를 여지것 놓지 못하는 이유가 되기도 했다. 그의 증조부대에 개발되어 지금가지도 송씨 가문이 자랑하는 한지는 태지이다. 태란 빗물로 씻기우는 시내물이나 수돗물이 아닌, 끊임없이 생수가 솟는 우물이나 웅덩이에 고여있는 물이 자연스럽게 넘쳐 흐르는 곳에 달마다 생겨나는 이끼로 파랗게 물이 오른 이끼를 채취하여 지료와 혼합하여 만들어내는 것을 태지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의 부친은 완주군 구이에 제지공장을 경영하면서 태지생산에 전념하여 생산량의 80%를 일본으로 수출하기도 했다. 이렇게 가업으로 이어진 태지는 이승만 대통령의 전용 편지지로 쓰여지기도 했고, 송우석씨가 대만에 보낸 태지는 그 부드러움과 따뜻함에 장개석 총통의 부인 송미령 여사로부터 감사의 편지로 보답받기도 했다. 전주를 대표하는 한지의 명가답게 그의 증조부대부터 이어진 한자 연구는 송우석씨에게도 이어졌다. 해방후 물이 차고 맑은 곳을 찾아 현재 평화동 골짜기로 이사한 그는 그곳에 공장을 세우고 부친과 함게 한지생산에 몰두했다. 점차 한지명가의 지가가 알려지면서 1965년에는 전락북도 한지공업협동조합의 한지 초지공양성강습 강사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 이후부터 그의 공장을 거쳐나간 4-50명의 지장들은 60년대까지만 해도 융성했던 전주한지의 주역이 되었다. 오늘까지 ‘송가종이’의 명성을 이어주는 것은 송시가 특별하게 개발한 화선지로부터 유래했다. 초지공 강사로 활동한 이후 그는 특수지의 개발에 더욱 전념하면서 마침내 옛날부터 중국으로부터 수입해서 쓰던 화선지를 연구 개발하는데 성공햇고 1957년에는 발명특허를 받기도 했다. 한지에 실을 먹인 새로운 한지도 그의 손에서 시작되었다. 그 후에도 일본 대만을 넘나드는 끊임없는 연구와 상품개발에 힘을 써 76년 에는 갈대를 이용한 화선지를 새로 개발하여 비로서 ‘송가종이’의 영예를 이루었다. 그러나 미술사에 빛나는 작가들의 작품이 바로 그 ‘송가종이’로부터 시작되었고, 격조와 권위의 상징으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지만 전통 한지도 근대화의 물결을 거스르기에는 힘이 부쳤다. 더욱이 전국에서 최고로 꼽혔던 전주 한지는 급격히 쇠락해갔다. 60년대까지만 해도 화황을 누리던 태지생산은 점차 생산량이 줄어들어 지금은 거의 생산이 중단되채 명맥이 끊겨있다. 태지뿐만아니라 한지의 수요 자체가 줄었고 양지의 사용이 보편화되어 특별한 수요계층을 갖게 되면서 한지는 급격히 몰락해나갔다. 한지에 대한 자부심으로 장인의 길을 걷던 많은 지장들이 한지를 버리고 각기 새로운 생업을 찾아가면서 이제 전통적인 지장을 만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게 되었다. 전통 서화가 여전히 각광받고 내노라하는 예술가로 대접받지만 그 예술을 지탱해주는 지장의 영예와 자부심은 끝간데 없이 무너져 갔다. 우리 생활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던 전통한지의 제작은 이제 진귀한 볼거리가 되었지만 송우석씨 같은 고집센 지장들은 여전히 그속에서도 온전하게 대접받지 못한다. 지난 73년 문화재과리국의 국가무형문화재기능보유자 지정을 위한 조사대상자가 되기도 햇지만 여지껏 지방문화재로조차 지정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인 까닭이다. 그가 운영해온 「송지방」은 이제 그저 운영해 나가는 것만도 벅찬 것이 현실이다. 몇 년전부터 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발길이 끊이질 않지만 전통하지를 되살리는길은 묘연하기만 하다. 거기에 환경 폐수대문에라도 전통적인 수공으로 한지를 생산해낼 수가 없고, 85년부터는 값싼 중국산 한지가 밀려들면서 ‘송가종이’는 지금껏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한때 지장으로서 대접받지 못하는 현실에 분개하여 사진예술에 손대기도 했지만 여전히 그는 지장이다. 지금도 「송지방」의 한켠에는 그의 손때가 묻은 수공 기구들이 쌓여져 있고 틈틈이 수공한지를 재현해보기도 하지만 그의 손에서 비롯되는 부드럽고 따뜻하며 가볍고 질긴 한지를 다시 만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제 전통한지를 재현하고 전수하고자 하는 그의 소망은 사람들의 호기심을 넘어 국가의 정책적인 관심에 맡겨져 있다. 명성높은 전주한지를 앞으로 새로운 문화상품으로 인식하고 정책적으로 지원하면서 종이박물관과 같은 제도적 장치를 통해 그 원형을 보존하는 것이 어쩌면 우리에게 남겨진 막다른 선택인지도 모른다. 전주한지의 새로운 가능성 모색 전주한지공예대전 글/허옥철 「문화저널」기자 옛말에 ‘천의 수명은 오백년이요, 종이의 수명은 천년’이라 햇다. 우리나라 종인인 한지는 질기고 가볍고 수명이 길어 책을 만들 때나 그림은 그릴때는 물론 공예품을 만드는 데도 널리 쓰였다. 아이가 태어나면 숯과 함께 한지를 매달아 잡균의 근접을 막고, 한지를 노끈처럼 꼬아서 망태기 바구니, 색한지를 오려 붙인 반짇고리 혼수함 삼층지창, 연 부채 탈 등의 생활용품을 만들어 사용했다. 이러한 종이를 이용한 고예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예부터 성행했는데 한지의 역사와 더불어 한지공예 역시 줄잡아 1천 5백년이 넘는 것으로 짐작된다. 한지는 강인하고 부드러우며 은은할 뿐만 아니라 깨끗하고 정감이 있어 우리 민족성과 비교하곤 한다. 아울러 투박하지만 빛깔과 질감이 곱고, 한지 특유의 향긋한 냄새가 난다. 고려시대 대 전주와 남원은 한지 최고 생산지였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뒷받침으로 조선시대에는 한지공예가 가장 성행했는데 이는 문서와 서책의 간행이 활발하여 종이의 생산량이 많아져 종이가 널리 보급된 시기와 일치한다. 실용성과 장식성이 뛰어난 전통 한지공예작품들은 지금까지도 그대로 전해져 올만큼 수명이 길고 튼튼하고 멋스러운 격조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문명의 발달과 더불어 저렴하고 편리한 각종 생활 용품이 일반 가정에 까지 고루 보급되고 값싼양지에 밀려 한지의 생산량이 줄어듦에 따라 한지가 귀해지고 비싸 지면서 전주한지의 전통은 쇠퇴했다. 지난해 처음 마련돼, 사양길에 접어든 전주 한지의 활로를 찾고 한지의 고향 전주만의 고유한 특색을 살려냈다는 호평을 얻은 하지공예대전은 생활용품으로서의 질감과 아름다움, 다양성이 돋보이는 한지 작품의 전통을 되살려 낸 의의가 크다. 전국 공모전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두 번째를 맞은 올해 한지고예대전은 특히 전통부문 뿐만 아닌 현대 부분까지 규모를 확대하여 생활용품이나 관광 자원화 할 수 잇는 상품으로서의 가치를 조명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많은 관심을 끌엇다. 종이의 전통이 깊은 전주의 문화를 조명, 이 지역만의 독창적인 문화상품으로 개발시켜 가기 위해 마련한 이 공모전은 근래 들어 한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분위기를 더욱 활기 있게 하는 바탕이 되고 있는 것이다. 출품 부문은 지호 지승 전지를 비롯한 전통 부문과 한지를 이용한 현대적인 생활 용품 및 관광 자원화 시킬 수 잇는 작품들인 현대 부문으로 나뉘어져 있다. 한지를 여러 겹 덧발라 살을 두텁게 하여 골격을 만들고 그 위에 색한지와 문양을 붙여 완성하는 전지공예, 종이를 일정한 크기로 잘라 그것을 종이끈처럼 이어가면서 꼰 다음 옷감을 짜듯 엮어서 형태를 만든 지승공예, 종이를 물에 불린 후 풀을 섞어 찧은 것으로 형태를 만들고 그 위에 색칠을 하거나 색지를 발라 완성하는 것이 지호공예이다. 올해 대상은 전통 부문에 김종원씨의 작품「6폭 머리맡 병풍」에 주어졌다. 상단은 다양한 서체의 백수백복을 소재로 조각도로 글자를 따서 붙이고 하단은 김홍도의 풍속도를 우리 전통생을 살려 구성한 작품으로 전체적인 색상의 조화와 정성이 한결 돋보인 작품이었다. 현대 부문의 대상은 「한지를 이용한 장식커튼」을 출품한 이양숙, 김순옥 씨에게 주어졌다. 이 작품은 한지가 가지고 있는 재료의 특성을 잘 살리고 실용성과 장식성을 적절하게 표현하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밖에도 한지를 이용한 포장용기, 팬시용품, 장신구등 상품화시킬 수 있는 수준 높은 작품들이 많이 출품되어 이제 시작한 신생 공모전임에도 한지공예 활성화와 한지에 대한 관심을 높이는데 한몫을 해 나갈 것으로 기대를 모았다. 한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한지를 이용한 현대적인 창작 예술품이 문화 상품으로 개발되고 있고 특히 생활용품과 관광 자원화 시킬 수 잇는 작품 개발이 적극적으로 시도되고 한지의 쓰임새가다양해지고 있다. 그리고 한지공예대전은 이러한 움직임을 더욱 활발하게 하는데 단단히 한몫하고 있는 셈이다. 40-50년전 까지만 해도 장이 열리면 색실상자 혼수함등 여러 가지 소품을 파는 것을 쉽게 볼수 있었으나, 플라스틱 스테인레스의 등장으로 점차 우리 생활에서 사라져갔다. 이처럼 한지공예가 계속 발전하지 못한 이유는 문화유산의 계승과 발전을 등한시한 우리의 무관심이 가장 큰 원인일 것이다. 요즘들어 한지공예를 되살리려는 노력이 활발해 진 것은 반가운 일이다. 특히 한지공예대전은 그 대표적인 작업으로, 전주의 한지를 특산화 하고 그것을 상품화시키는 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리라는 기대가 크다. 여러 가지 지역문화 유산의 상품화와 함께 한지축제 역시 독창적인 문화축제로 자리하고 있다. 이 축제가 일회용 행사에 그치지 않고 생산과 상품화의 연계 작업에서 이루어질 때 비로소 그 의미가 더욱 확고해질 것이다. 사람과 사람 ‘꼴찌’를 두려워하지 않는 젊은 교사 군산 수송초등학교 김종필 선생님 글/김연희 전주문화방송 구성작가 ‘남북어린이 어깨동무 그리고, 북녘 친구들에게 내얼굴을..... 시끌시끌 짜끌짜끌 아이들 소리와 함께, 나지막한 교실 창문 넘어 눈에 처음으로 들어온 슬라이드 글씨다. 낯선 사람의 방문에 놀란 토끼 눈을 뜨고, 붓과 크레파스의 손길을 멈춘 아이들은, 서슴없이 누구예요?라는 질문을 쏟아냈다. 그림 그리는 아이들의 모습을 사진에 담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 카메라 셔터를 눌렀지만, 서로 찍어 달라며 카메라 렌즈에 달려드는 아이들 때문에 포커스를 제대로 맞출수 없을 정도로 밝은 분위기의 수업시간이었다. 그 다음에 벌어진 일은 난데없는 사인세례. 무슨일 하는 사람인지 알 필요도 없이, 한 아이가 노트 한 장을 쭉 찢어 ‘사인 하나 해주세요’라며 뛰어드는 소리에 몰려나오는 아이들. 아니 웬 사인? 생전 한 번 해보지도 않앗던 사인을 어떻게 해주어야 하나? 방송의 유명세 덕택ㅇ에 사인 인사를 간곡히 거&#47106;ㄹ한 것은 있었지만, 막무가내로 달려드는 아이들 앞에는 어쩔수 가 없었다. 마음을 고쳐먹는 수 밖에..... 매달리는 아이들을 너무도 예쁘다는 듯이, ‘그렇게 하면 부담되시잖아’ 하다가 아예 ‘팔 아파서 어떻하죠?’하면서 아이들을 받아주라는 은근한 압력! 이것이 김종필 선생님(33)이 아이들을 가르치는 방법이었다. 군산 수송초등학교 5학년 1반. 김종필선생님과 아이들의 하루는 신문을 읽는것부터 시작한다. 여느반과 달리 아침 조회시간에는 아침의 화제거리로 난상토론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어떤 주제가 되든 간에 선생님의 설명을 듣고, 한마디씩 던지는 아이들의 생각은 상상을 뛰어넘는 의외의 대답부터 박수를 보내고 싶은 대답까지, 김종필선생님은 교육이 살아있어야 하는 이유를 충분히 느끼면서 수업을 하고 있는 것이다. 아이들에게 국어, 산수를 가르쳐야 하는 우리 학교의 현실에서 잘 철저히 직권남용(?)을 하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하지만 로고나 함수가 살아가는데 도움이 안되는 것이라면 지금의 교육열은 단지 대학을 가기 위한 학교열일뿐이라고 일축한다. 이런 일이 익숙해지기까지 김종필 선생님 대화의 대상은 아이들이었다. 표정만 보아도 그 아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잇게 되기까지 많은 시간과 대화가 필요한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는 일 아닐까? 아침에 엄마에게 돈 천원 때문에 혼나고 불만을 가지고 나왓는데 세상이 아름답게 보일리 없고, 아빠가 억울하게 교통사고를 내고 옥살이를 하고 있는데, 차가 편리한 교통수단이라는 것이 실감나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이런 아이들의 작은 아픔을 겉돌지 않게 쓰다듬어 준다는 것은 보통의 정성이 아니면 안되는 일이다. 김종필 선생님의 수업시간은 풀어놓은 자유시간이다. 움직이고 싶고, 떠들고 싶어하는 이 아이들에게 쉬는 시간까지도 종용할 것을 강요하는 학교생활에서, 수업시간만큼은 풀어놓고 싶은 것이다. 정숙하게 정렬시켜 놓고 한 시간 그 교과에 대해 단순히 진식을 전달하고 나도 피곤한 생활인데, 모듬 형태로 앉아 분반 토론하도록 하고, 직접 환경신문을 만들고, 재활용 비누를 만들어보고, 슬라이드를 열심히 활용하는 수업은 여간 부지런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노릇이다. 김종필 선생님이 세간에 관심을 끈 것은 고사리 손길로 모은 4만 2천 50원의 소중한 성금이 한겨례 통일 문화재단 보내지면서 부터였다. 초등학교 6학년 아이들이 용돈을 모아 통일문화재단의 발기인으로 집단 참여할 수 있게 된 것은 물론 아이들의 의견이었고, 학급회의의 판단이었다. 하지만 그런 결정을 하도록 도운 책임을 김종필선생님은 면하기 어려운 일 아닐까? 얼마전 강원도 고성이 산불로 많은 피해를 입었을때, 즐거운 어리이날을 맞기 어려웠던 고성어린이들에게 4만9천3백30원의 성금을 보내기까지도 김종필 선생님의 생각은 크게 작용하지 않았을까?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기도 바쁜 시대에 북한어린이를 생각하고, 고성의 어린이를 생각하게 하는 것은 보내진 돈 얼마보다도 더 큰 값어치의 일이었다. 7년전 작은 시골에서 시작된 교직생활을 교실안 보다도 산과 들에서 더 많이 보냈다는 김종필선생님은 학교 생활만큼이나 자신의 삶도 부지런히 살고 있다. 내일 모레면 그의 첫 장편동화집 『땅아 땅아 우리땅아』가 나온다며 만족스러워 하는 그 표정은, 또 하나의 이야기 거리를 만들어낸 호기심어린 아이들의 표정과 다를 바 없었다. 유달리 독특한 수업방식 때문에 대학 다닐 때 지독한 운동권 학생이지는 않았나, 그래서 고집스런 수업을 이어가고 있진 않나 하는 오해 아닌 오해를 받은 때도 있었고, 학교의 제재가 있었던 것은 한두번의 일이 아니었다. 물론 전교조 선생님3들의 목소리에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관례를 벗어난 행동이 불필요한 오해를 낳았을 뿐이다. 그는 대학 문학반에서 시와 소설을 쓰며 현실을 바꿔보고자 했던 문학지망생이었다. 그래서 우르과이라운드가 우리 농촌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이라는 교육방침에 양심을 맞긴 채 가만히 잇을 수없어 펜을 든 것이, 내일 모레면 나온다는 그의 첫 작품집 『땅아 땅아 우리땅아』이다. 이제는 선생님이 아니라 필자로서 아이들의 매서운 평가만이 남아있다. 첫 학교생활을 시작했던 곳이 시골이어서였는지, 농촌 교육문제에 대한 관심이 남다르다. 하나 둘씩 문을 닫아가는 학교와 눈에 띄게 줄어든 학생들 사이에서 어렵사리 그땅을 지키고 있는 몇몇 학교의 모습은, 현직 교단에 몸담고 있는 그에게는 많은 숙제를 던져주고 있는 것 같다. 19개월된 큰 아이와 이제 백일을 맞은 둘째 녀석의 수발로 아침을 여는 일은, 이웃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내의 손을 덜어주는 일이다. 아이들을 무사히 이웃집 아주머니에게 인계하고, 나란히 출근한 후에는 수업시간 못지않게 피곤한 잡무속에 파묻히게 되고, 일과 수업을 마치고 난 후에는 영어공부, 컴퓨터공부, 글쓰는 작업.... 하루해를 이렇게 보낸다. 초등학교 선생님을 보고 흔히 아이들만큼 어리게 산다고들 한다. 사회생활의 부족함을꼬집는 말일 수도 있지만, 아이들과 똑같은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눈높이를 맞춰가면서 생활할 수 있느냐며, 사람사는 사회는 다 똑같은 것이고, 오히려 어른들이 가진 속임을 아이들은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더 많이 통할 수 있다고 은근히 자랑을 한다. 김종필 선생님은 전북대학교 국문과로 대학을 출발했다. 하지만 뭔가 잘 적응이 되지 않았고 다시 전주교육대하에서 출발하면서 가지게된 교육에 대한 관심을 지금 교단에서 실천하고 있는 것은, 피가 꿇어서 했던 말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김종필 선생님이 두려워하지 않는 것을 바로 꼴찌. “모든 것을 중간을 하고자 하는 것은 욕시입니다. 우리반이 학년에서 성적에서 꼴찌일지 모르지만 일등인 것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반 아이들의 무한한 상상력은 어느반도 따라 올 수 없을 정도로 꼭대기에 있습니다. 욕심이 꼴찌를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꼴찌를 두려워하지 않는 패기만만한 젊은 교사. 용기있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행복의 당당함을 마음껏 누리는, 혼자가 아니라 아이들과 함께 느끼는 사람이었다. 옹기장이 이현배의 이야기 라면 끓이기와 삶의 미학(?) 적은 돈으로도 맛있고, 멋있게 살 수 있다 ●준비 ­라면(싼 게 좋다. 왜냐하면 비싼 것은 기계적 논리로 조리가 더 된 거라 오히려 참맛을 내기가 아렵다. 싸면 쌀수록 좋다)·고추가루·풋고추·양파·마늘 ●만들기 ­찬물에다 고춧가루와 스프를 넣고 끓인다. 물이 끓으면 라면을 넣는다. 라면이 덜 익었을때 미리 썰어놓은 풋고추와 양파를 넣는데 어느 시기냐면 조리를 끝냈을 때 풋고추와 양파가 데쳐진 정도여야 한다. 막 내려놓기 전에 다진 마늘을 넣은 후 뚜껑을 덮구서 불을 끈다. ●해설 ­아무래도 조선사람은 밥을 먹어야 하니 다만 몇 숟가락이라도 밥을 말아서 먹을 수 있도록 국물을 넉넉하게 잡는게 좋다. 국물이 남으면 기름기가 있어 자연환경을 오염시키니 나중에 다아 낼 그릇으로 물의 양을 짐자하면 틀림없다. 고춧가루와 스프를 찬물에다 넣고 끓이는 것은 맑은 맛을 내기 위함이고 얼큰하게 먹고 싶으면 거짐 조리가 끝날 때 고춧가루를 넣으면 된다. 대개는 풋고추만으로도 얼큰해지니 풋고추의 매운 정도를 미리 알아두는게 좋다. 스프를 미리 넣어 느끼한 마을 없앴으나 마늘이 푹삶아지면 잡내를 없앨 수 없으니 꼭 내기 전에 넣어 열이 살짝만 닿게 해야한다. ●뒷이야기 ­서울서 십년을 살았다. 그 십년의 절반을 용산서 살았다. 용산역, 시계탑만화방, 땡땡거리, 제1한강교, 에이치형 아파트 그리고 화실. 첫애도 용산서 낳았다. 화실에서 조소 전공은 많지 않았고 선생님보다 나이가 많은 학생이었기에 아저씨라 불렸다. 내 사는 집이 가까워 우리는 가끔 라면을 끓여 먹었다. 그때 고 1 재수생이었던 영진이와 총식이가 대학 졸업반이 되어 지난 겨울에 왔드랬다. 그때 그 맛을 잊지 않고 있다며 다시 한 번 끓여먹자하면서..... 여성과 문화 일하는 엄마, 눕고 싶은 하루 글/전춘근 전주시립극단 단원 아침에 자리에서 일어나든 꼴로 밥통에 쌀을 씻어 앉히고, 오늘 아침 국은 무엇으로 할까, 반찬은 무엇으로 할까 생각하다 냉장고를 뒤적거린다. 이도 저도 여의치 않아 그냥 김치찌개를 올려놓고나니 막 잠에서 깬 아들녀석이 엄마를 부르며 칭얼댄다. 잠시 안아서 얼러주고 있으면 찌개가 끓어 넘치는 소리가 들리고, 그럼 허겁지겁 달려가 내려 놓는다. 아직 덜 차린 밥상에 손을 대는 아이놈에게 아빠 깨워! 쉬해! 손닦아! 소리를 고래고래 질러댄다. 이 난리를 치르면서 아침밥을 먹고 나면, 애기 아빠더러 밥상을 치우라고 해놓곤 세수하고 이빨닦고 얼굴에다 로션을 대충 찍어 바르고 나선 출근이다. 차안에서 숨을 돌리고는 어제 내가 무얼하다 말았지? 오늘 해야 할 일이 뭐지? 생각하게 된다. 그러다 어제하던 연극작업에 생각이 미치고 나면 짜증이 난다. 대체 연극 속에서 여성의 역할의 왜 남자 주인공의 순종적인 애인, 맹목적인 모성애의 어머니, 그것이 아니면 창녀, 이런것들만 해야 되는지... 연극속에서 여성은 곧잘 왜곡된 모습으로 나타난다. 여주인공은 무조건 예쁘고 날씬하고 청순하면 그만이다. 조연 여배우는 섹시하고 화장기가 많고 좀 나이를 먹었다하면 옆집 아줌마나 할머니 등 역할이 극히 제한되어 있다. 이놈의 세상은 예쁘지 않은 여자에게는 아무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 모양이다. 어머니는 자식을 위해 존재하고 옆집 여자는 수다쟁이로 동네방네 소문만 내고 다닌다. 우째 극작가들은 이따위 작품만 쓰시는지, 우째 등장인물 중에 남자가 그렇게도 많고 주인공은 남자만 해야 하는지... 옆자리에 앉은 아들놈이 할머니를 찾으며 울어대기 시작한다. 요새 애 할머니가 몸이 아파 며칠째 같이 출근하고 있는데 저도 할머니하고 떨어져 있는 게 싫은 모양이다. 그래 네가 할머니하고 같이만 있어준다면 이 애미도 얼마나 좋겠냐. 어머니는 손주가 생길 때마다 자식들 집을 돌아다니면서 애기들을 봐주다 팍사 늙어버리시고 몸이 많이 쇄약해 지신것이다. 이제 더 이상 어머니에게 애를 맡기는 일도 못할 짓이다. 아들놈은 아직도 오줌을 가리지 못한다. 헝겊 기저귀를 썼으면 벌서 가렸을텐데 쌀 때마다 매번 기저귀를 빠는 일이 힘들고 지쳐서 일회용 종이 기저귀를 채워준 때문이다. 애한테도 못할 짓인 것 같다. 애기 때문에 고충을 겪는 것은 나뿐만이 아니라 우리 극단만 해도 세 명씩이나 된다. 그래서 요즘 극단은 마치 유아원을 방불케한다. 5개월짜리 하나, 세살자리 하나, 다섯 살짜리 하나, 세트를 만드는 작업장을 아이들이 돌아다니며 곳곳에 위험한 세트와 연장들을 만지작거린다. 특히 우리 애는 세 살박이라 말도 못하는데다 장난꾸러기라서 정말 어울리지 않는 곳이다. 그러니 내가 일하다가도 종종 신경을 써야하고 수선스런 애들 때문에 작업에 방해를 받고 있는 것이 분명한 다른 동료들에게도 미안하다. 왜 직장에 아이를 데려와서 작업에 지장을 줄까 하는 불만이 동료들에게 생길 법 하지 않은가. 그런데도 동료들은 그런말을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양육비가 보통 40-50만원 정도라는 것을 알고 있고 그런 비용이 우리들의 형편에 어떠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왜 이렇게 마음 놓고 아이를 맡길 곳이 없을 까. 아이가 옆에서 왔다갔다 내 신경을 붙들고 잇으니 창의력이나 상상력은 간데없고 이놈이 어디서 다치지나 않을까 다른 사람한테 폐가 되지 않을까 항상 걱정이다. 15대 총선에서 육아 보육시설 확충 확대하겠다고 한 후보를 찍어주었지만 국회는 아직도 공전중이다. 직장내 탁아소는 영 가망이 없는 얘기인가. 여성 근로자 300명 이상 근무하는 사업장이 과연 전주시내에 몇군데나 된단말인가. 우리처럼 적은 수의 여성이 근무하는 곳은 어떻게 하라는 것인가. 더 이상 사교육비가 우리의 목을 조르지 않게 해다오. 퇴근 시간이 다가오면 나는 벌써부터 지쳐 어서 눕고 싶은 생각이 간절해진다. 집에 들어가는 길에 장을 보고 싶지만 그것도 수월치 않다. 집에다 우릴 데려다주고 애 아빠는 다른일을 보러간다. 이사람은 밤 열시나 되어서 들어올 것이다. 그동안 애 씻기고 옷 갈아입히고 빨래하고 대충 저녁을 챙겨 먹는다. 설거지를 하고 나면 뒤꿈치는 천근만근, 종아리도 땡땡해진다. 잠을 자려고 방으로 들어가면 애는 쌔근쌔근 잠이 들었는데 장난감이며 그림책들이 온 방안에 널려 있고 TV는 왕왕댄다. 그러다 낮에 걸려온 전화가 생각낫다. ‘여성과 문화’에 대한 원고 청탁, 갑자기 웃음이 터져 나왔다. ‘여성에게도 문화라는게 있나?’ 전춘근/전주대 사회교육과를 중퇴하고 85년 전주 시립극단에서 연극을 시작했다. 인형극단 ‘허수아비’를 이끌었었고 여성연극<여보세요>를 연출했다. 87년에는 제5회 전국지방연극제에서 연기상을 수상한바 있다. 93년 결혼하여 지금 세살짜리 아들이 있고. 전주 시립극단의 단원인 홍석찬 씨가 그의 남편이다. 특별기고 개발정책은 여전히 환경에 우선했다 지방자치 환경해정 1년평가 글/주용기 전북환경운동연합간사 1995년 6·27 지방자치 선거 이후 본격적인 지방자치시대가 시작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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