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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6 | [서평]
주체성 없는 사람들의 눈가리개 벗겨내는 역할 『한국근대음악사』
글/윤화중 전북대 교수·국악과 (2004-02-12 11:28:29)
『한국근대음악사 1』은 1860년부터 1910년까지의 50년간의 음악사를 다룬 책이다. 이 책은 노동은이 그동안 관심을 가지고 일관하여 온 민족주의에 입각한 음악 사관을 총체적으로 보여주는 것들의 집적이라 할 수 있다. 노동은은 우리음악의 역사와 미학, 우리 음악의 정체성을 찾는 작업을 계속하여 왔다. 평소에 그는 우리 전통 음악을 정악과 민속악으로 양분하는 것을 아주 못마땅하게 생각하여 왔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민중의 예술인 민속악에 속(俗)자를 집어넣은 것도 음악의 이데올로기를 보여주는 것이라 하여 ‘민악(民樂)’이라 부르자고 강변하여 왔다. 이러한 점을 보더라도 그가 우리 음악을 어떻게 보고 있으며 요즘의 세태 속에서 어떠한 작업을 홀로 진행하고 있는지를 짐작할 수 있겠다. 노동은 조선시대와 현대를 연결하는 1860년부터 1945년의 근대를 음악사에 있어서 둘로 나누어 우선 『한국근대음악사 1』을 저술하였으며, 이 책으로 올해의 단재 신채호 학술상을 수상하였다. 1장에서는 우리 음악 역사의 인식과 과제, 시대구분과 그 성격을 밝히고 있다. 말하자면 양악의 제국주의에 맞서 민족 음악을 수립하자는 내용으로, 모든 음악 현상은 그 현상을 가능케 하는 역산에서의 사회문화적 체계와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음·악」의 도표로 설명하고 있다. 2장에서는 그 시대의 사회, 경제적 상황의 변화를 먼저 알아보고, 그 때 존재했던 음악세계, 행위들을 조직이나 집단에 의한 구분에 따라 서술하였다. 안으로는 성리학의 가치관과 신분제가 흔들리고 경제 체제가 바뀌었으며, 밖으로는 제국주의의 침략이 있었다. 여기서 맞선 반봉건·반외세의 기운이 음악 행위에 구체적으로 나타나는데, 민악에 바탕을 둔 산조와 창극의 발달·중인층의 활발한 음악활동·자주적인 가사로 부르는 동학가들이 전자에 해당하는 것이고, 애국 계몽 창가의 발전과 군악대 문화 등은 후자에 속하는 것이다. 노동은은 1장에서 기층민의 음악 기관이었던, 그래서 이제까지는 별로 중요하게 다루어진 적이 없는 신청과 떠돌이 예인 집단들을 먼저 다루고 뒤에 국가 차원의 음악기관과 그 조직들을 서술함으로서 그의 기층민 중심의 음악사관을 보여주고 있다. 3장부터 7장까지는 근대 전기를 총 4기로 구분하여 상술하고 있다. 제 1기는 1860년부터 1876년까지 약 16년을 잡고 있다. 이때의 음악에서는 기층 민중 음악의 부상과, 궁중과 민간 상류층에서만 연주되던 소위 아악의 민간화를 들 수 있다. 그리고 이 시기에 일어났던 동학과 유교의 가사와 신재효의 단가 가사에서 보여주는 자주성을 보여주고 있다. 또 개신교와 천주교의 음악을 어떻게 자주적으로 수용하고 있는지는 서술하였으며, 조선 말기 실학자들에 의해 이어진 개신악학 전통이 당시 최한기의 ‘음·악 기학론’으로 우리 음악의 지평을 밝히게 되었다고 한다. 제 2기는1876년의 개항부터 1894년 동학농민전쟁 직전까지의 18년간으로 설정하였다. 이때는 중국 중심의 음악 관계에서 벗어나 서양과 일본의 음악을 파악하여 자주적인 근대 음악을 세워나간 시기이다. 양악을 받아들여 서양식 군악가가 발달하였고 교회·학교를 통해 서양음악이 쓰여졌으며, 전통 음악에 있어서는 삼현육각의 음악이 일반화하였고, 현재 우리 음악의 모든 미학을 보여주고 있는 산조가 출현하였다. 제 3기는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난 1894년부터 애국 계몽운동과 외병전쟁이 본격화하는 1904년 직전까지의 약 10년간이다. 이 시기에는 외세의 침략이 강화되었고 안으로는 봉건사회가 해체되어 갔다. 동학과 갑오농민전쟁의 음악과 왕권강화를 위한 군악·공호대의 출현 등이 이러한 사회상을 여실히 반영하고 있으며, 대한제국의 상징으로 국가가 제정되었고 민간의 애국가 제정 운동이 일어났다. 우리의 민족 음악인 기층민들의 전통 음악은 상설 무대가 마련될 정도로 인기가 있었으며, 위대한 전통문화인 일인음악극(一人音樂劇)의 판소리가 연극적 요소가 강화되어 창극화하였다. 제 4기는 1904년부터 1910년까지의 짧은 시기이지만 계몽운동·항일의병전쟁과 일본의 식민지화가 대립하는 시기이다. 이 시기는 상·하기로 나눌 수 있는데 상기에는 일제의 식민정책이 강화되면서 통감부의 학교령에 따라 음악 교과목이 세워지고 온갖 지도적인 개편이 시행되었고, 이에 맞서 조선 민중들은 계몽운동의 기치 아래 애국적인 노래 운동을 펼쳤다. 제 4기의 하(下)기에는 기독교 문화가 학교와 교회를 통해 새로운 변수로 등장하고 양악 음악회가 일반화되었다. 또 축음기 문화가 형성되었고 무대의 상설화로 전통 음악에 있어서도 공연 경제에 대한 변화가 생겼다. 한편 일본통감부의 통제에 대한 대응으로 사회를 비판하는 항일의병노래·배움과 운동노래·계몽노래·친일비판의 노래·봉건타파의 노래 등의 노래운동이 일어난다. 즉 이 시기에는 창가와 민요형식의 노래가 대중들의 투쟁 양식으로 자리잡았고, 창극을 통해 음악전문인들에 대한 음악운동이 벌어졌다. 1860~1910년은 안으로는 신분을 넘어서서 다양한 음악 사회가 형성되었고, 밖으로는 서양과 일본의 제국주의에 대응하면서 양악도 자주적으로 수용하여 이전과는 사뭇 다른 음악 사회가 전개되어 음악사의 ‘근대’가 형성된 시기이나, 민중의 노래인 의병가·계몽가 등으로 삶속에 녹아 있는 민족음악이 등장하였고, 기층민들의 음악이었던 산조·창극의 발달이 있었다. 쉽게 허물어지지 않는 봉건상태와 낯선 외세의 문화를 자주적으로 수용하여 민족음악으로 발전시킨 중요한 이 시기는 1910년 한일합방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앞으로 노동은은 1910년부터 1945년까지의 『한국근대음악사 2』,『한국현대음악사 1』(1945~1950), 『한국현대음악사 2』(1950~1990)를 저술하여 ‘한국 근현대음악사’를 완성한다고 한다. 『한국근대음악사 1』은 민족음악사관에 입각하여 쓰여진 것으로, 음악인뿐만이 아닌 주체성 없는 사람들의 눈가리개를 벗겨내는 역할을 할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을 디딤돌로 하여 이와 같은 방향을 가진 연구들이 많이 이루어졌으면 한다. 굳이 이 책의 단점을 지적한다면 간혹 의미 전달에는 무리가 없으나 문맥이 매끄럽지 않은 점이 옥의 티라고나 할까? 그의 노고에 같은 음악행위를 하는 사람으로서 감사를 보낸다. 윤화중 / 서울대 간호학과를 졸업하고 만학을 무릅쓰고 다시 서울대 국악과를 졸업했다. 전북지역의 대표적인 거문고연주자 가운데 한명이며 활발한 연주활동을 하면서 후진을 양성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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