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6 | [문화저널]
새로 찾는 전북미술사 31
암울한 현실 속에 피어난 근대미술의 여명
전북 서양화의 형성 과정
글/이철량 전북대 교수·미술교육과
(2004-02-12 11:27:18)
전북이 호남 화단의 중심지로서 전통 회화의 맥을 형성하고 많은 작가를 배출해냈던 근대 초기 화단에 서양화라고 하는 이색적인 그림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대략 1920년대라고 할 수 있다.
1920년대는 서울 화단이 대단한 변화를 겪고 있던 시기이다. 이미 우리 나라의 화가들이 상당수가 일본이나 파리 등에 유학하여 서양화를 공부하기 시작했을 뿐만 아니라 일본인 서양화가들이 한반도에 들어와 활동하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1922년에 조선미술전람회가 창설되어 서양화부가 개설되고 있었을 만큼 서양화를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그것은 이미 서양화라고 하는 그림이 상당수 보급되어 낮설지 않은 분야가 되었다고 생각된다. 고희동이 최초로 서양화를 공부하러 떠난 1910년에서 불과 십수년의 기간이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알려진 사실로 미루어 보면 전북인으로서 최초로 서양화를 공부한 이순재가 1920년대 전반에 일본에 건너갔었다고 본다면 고희동과 이순재는 약 10여 년의 시간의 차이가 있다. 물론 이 시간은 서울과 전북의 신미술 수용의 기간 차이라고 보아야 한다. 현재의 기록으로 보아 서울, 그리고 평양, 다음으로 전주가 신미술 수용에 앞장섰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초기의 서양화가들인 고희동 김관호, 김찬영, 나혜석, 이종우 등이 1910년대에 양화를 공부했다. 그러나 이들 대부분은 전문적이며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했다고 보기 어렵다. 당시 봉건적인 사회 체제가 이들의 새로운 활동을 이해하지 못했고 또한 본인들 스스로가 뚜렷한 주체 의식이 강하지 못했다. 나라가 망하고 일제의 탄압이 가중되는 현실 속에서 허탈하고 희망이 없는 막연한 기분 속에서 자신에 대한 회의감으로 지냈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이러한 분위기는 전북 화단의 첫 서양화가였던 이순재에게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그는 수 차례선전에 입선까지 하는 경력을 보였지만 곧바로 붓을 버리고 말았다. 사회의 냉대와 미래에 대한 불안감에 좌절해야 했던 것이다. 단지 당시의 어려웠던 현실 속에서 희망을 걸었다면 후배 화가들을 격려하고 적극적인 도움을 주면서 자신의 좌절을 보상받으려 하였던 점이었다.
이순재를 뒤이어 일본에 건너가 신미술을 공부한 사람은 박병수(朴炳洙), 김영창(金永昌), 이경훈(李景薰), 문윤모(文允模), 권영술(權寧述), 김해(金海), 진환(陳幻) 등이었다. 박병수와 김영창이 영목(鈴木)에서 천구마(千久馬) 회화연구소에서 공부했고 이경훈과 문윤모가 동경제국미술학교를 다녔다. 그리고 권영술은 일본대학 미술과를 다녔고 김해는 태평양미술학교에서 공부했다고 전한다. 이들 중에서 박병수와 김영창이 특히 지역 미술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박병수는 임시에서 제일가는 부호의 아들로 자라났다. 일본에 건너가서 와세다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안정된 길을 원했던 부모의 기대를 버리고 다시 그림 공부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영목천마미술연구소에서 유화를 공부하고 귀국했다. 그가 전주에 돌아와 고사동에 화실을 개설하고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는데 이때 함께 어울렸던 김영창, 이순재 등이 이곳에 드나들면서 신미술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이곤 했다. 박병수의 아틀리에는 자연 채광을 직접 받아들일 수 있는 2층에 마련되었다고 전하며 그 규모는 전국에서도 제일 가는 것이었다고 한다.
남원에서 태어난 이경훈은 서울중동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유학 길에 올랐는데 1947년에 이리에서 개인전을 가졌을 만큼 열성적인 활동을 했다. 그의 재능은 이미 1937년 조선일보사와 1938년 동아일보사 학생미술공모전에서 최고상을 받아 널리 알려졌다. 유학 후에는 주로 전주와 이리 등지에서 활동했다.
이순재, 김영창, 박병수, 이경훈 등 일본 유학파들이 이 지역에 신미술의 보급에 앞장서고 있을 때 1925년에 창설된 전주고보와 1937년에 창설된 전주사범 등에서 젊은 인재들이 배출되기 시작했다. 이들 중 김용봉(金用鳳), 추광신(秋光信)은 전주고보에서 유화를 공부했고 전주사범에서는 유경채(柳景埰), 고화흠(高和欽), 추교영(秋敎榮), 한소희(韓召熙), 김현철(金顯鐵) 등이 공부했다. 한편 김영창은 1939년 일본에 건너가기 전에는 전주고보에서 공부하며 교편을 잡고 있었던 삼린평(森麟平)에게 유화를 공부했었다. 어떻든 이순재, 김영창, 진환, 이경훈, 박병수, 등이 지역 화단에서 신미술의 제 1세대로 자라났고 뒤를 이어 국내파인 김용봉, 추광신, 유경채, 김현철, 추교영 등이 유화를 공부했다. 그리고 이들의 활동은 초창기 전북의 서양화를 뿌리내리게 하는 큰 역할을 했다. 그 가시적인 성과로서 기록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대략 다음과 같다.
이순재가 1928년 제7회 선전에 입선하면서 두각을 드러내는데 1931년 10회전에는 이순재와함께 김영창, 박병수가 입선에 오른다. 진환은 1934년 일본미술학교에 입학하고 뒤이어 1936년에는 신자연학파협회전에 출품한다. 또한 1937년에는 신자연학파헙회의 회우가 되어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간다. 뿐만 아니라 진환은 1941년에 동경유학생들의 모임체인 조선신미술가 협회를 가입, 이중섭, 이쾌대 등과 활동 무대를 넓혀 나갔다. 또한 김해는 독립미술가협회에 연거푸 8회 입선하면서 꾸준한 활동의 저력을 넓혀 나갔다. 그런가 하면 이경훈은 중등학교 재학중인 1939년에 선전에 입선하기도 했고, 추교영, 서정조, 윤후조, 고화흠, 유경채 등이 선전에 입선하고 있었다. 이러한 활동들은 곧바로 후배화가들에게 격려와 활동의지를 부추기는 효과로 나타났다.
1945년 해방되기 전에 박병수의 개인 연구실이었던 고사동 아틀리에에 동광미술연구소가 문을 열었다. 이곳은 박병수와 김영창이 선생을 맡았고 이순재 등이 이들을 후원했다. 말하자면 최초의사설 미술교육기관이었던 셈이었다. 이곳에서 공부를 한 인물들로는 이의주(李義柱), 천칠봉(千七峰), 배형식(裵亨植), 이준성(李俊成), 허은(許銀), 하반영(河畔影), 소병호(蘇秉鎬) 등이 있다. 이들은 해방된 1945년 10월에 전주 성심여중에서 1회 동광미술전람회를 열었다. 최초의 단체전이 열렸던 셈이었다. 이들의 활동은 지역 화단에 새로운 활력으로 작용하였고 뒤이어 1947년에는 금융조합 도연합회에서 새로운 그룹전이 열렸는데 이때 참여한 작가는 이경훈, 유병희, 김용봉, 이변하, 허병 ,한소희, 김해, 권영술, 추교영 등이었다. 또한 1950년대는 녹광회(綠光會)가 창립되어 본격적인 그룹 활동이 지역 화단에 뿌리내리고 있었다. 녹광회는 회장에 김용봉 그리고 회원에는 문윤모, 박승호, 최칠우, 허은, 허병, 서정조, 이병하, 장윤철 등이었다. 녹광회의 이름이 동광미술연구소의 동광에 뿌리를 두고 출발했다는 것만으로도 지역 화가들의 정신적 연대감을 엿볼 수 있다. 이렇게 그룹 활동이 점차 뿌리를 내려가면서 지역 서양화단을 확대시켜가고 있을 때 몇몇 작가들은 이에 그치지 않고 개인전을 열어 창작의욕을 보여주었다. 1947년에 이경훈과 김영창이 개인전을 개최한 이래 이듬해는 이병하와 김용봉이 그리고 1952년에는 김현철과 김종하가 개인전을 가졌다. 이들의 활동은 전북 근대미술의 여명기에 두드러진 활동으로 평가받아야 할 만 했다. 그러나 이들의 작품들이 오늘날 대부분 유실되어 당시의 상황을 깊게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준다. 한국미술의 암흑기를 살다간 이들의 활동이 오늘날 새롭게 평가받아야 할 것이다.
이 무렵의 대체적인 흐름은 인상파류의 화풍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추정은 지금까지 소개된 몇 안되는 작품 속에서 이해된다. 다만 이 범주에서 다르게 해석될 수 있는 인물은 진환이라 할 수 있다. 진환은 대체적으로 표현파 화풍에 가깝다. 당시의 흐름속에서는 비교적 진보이었다고 보여진다. 그러나 우리 화가들이 인상주의의 한계를 벗어나기 어려웠던 당시의 시대적 정황을 살필 수 있다. 말하자면 일본을 통해 유화를 경험했던 우리 화가들이 당시 일본 화가들이 크게 받아 들였던 인상파 화풍을 쉽게 수용했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실상 이 무렵 우리 화가들에게는 유화를 한다는 새로운 흥분과 기대감 외에는 달리 선택의 여지는 없었을 것이었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당시의 분위기에 흡수되었을 뿐이었다. 초창기 한국 화단의 전반적인 측면에서 보면 몇몇 진보적인 화가들이 없지 않았으나 전북 지역의 현실 속에서는 그나마 많은 어려움을 갖게 될 수밖에 없었다. 어떻든 1950년대를 기점으로 미국의 현대미술이 들어오기 이전의 우리의 서양화는 극히 제한적인 창구를 통해 얻어지는 유화라고 하는 신미술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업적, 다시 말하면 참담하고 암울했던 현실 속에서 새로운 미술에 대한 열정과 노력들은 가치있게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