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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6 | [세대횡단 문화읽기]
대학문화를 생각한다 ① 정체성의 위기, 그러나 한국사회의 희망은 거기에 있다.
글/원도연 「문화저널」편집장 (2004-02-12 11:20:42)
흔들리는 대학(?) 대학이 흔들리고 있다. 불과 얼마 전까지도 한국사회를 풍미했던 신세대 담론이 주춤하고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대학의 변화를 실감하고 있다. 실제로 90년대 초반까지의 대학사회의 팽팽한 긴장은 상당히 완화되어 있다. 대학의 풍속도가 달라지고 있는 것이다. 80년대에는 어림없었던 대학가의 쌍쌍파티가 등장하고 축제는 말 그대로 축제가 되는 한편, 어쩌다 열리는 학생회 주최의 집회현장은 썰렁하다 못해 측은해 보이기까지 한 것이다. 이러한 변화를 두고 많은 사람들이 우려의 눈길을 보내고 있다. 70년대와 80년대를 거쳐오면서 현실 변혁의 기지로 역할해 오던 대학이 이제 소비의 메카로 전락해 버린 것은 아닌가. 대학 문화를 둘러싼 논쟁은 대학의 역사만큼이나 오랜 것이지만, 최근의 대학문화를 두고 벌어졌던 토론은 자못 뜨거운 것이었다. 대학문화와 신세대를 먼저 문제삼은 것은 언론과 자본이었다. 90년대 초반의 대학문화가 이전과는 질적으로 다른 양상을 보이고 때마침 신세대 담론에 불을 지필만한 사건들이 곳곳에서 터져나왔다. 오렌지족이니 야타족이니 하는 신조어들이 속속 생산되면서 거의 모든 매체들이 이른바 신세대 담론에 주목했다. 그러나 역시 가장 발빠르게 신세대 담론에 적응한 것은 자본이었다. 신세대는 이미 문화상품이 노리는 최대의 소비시장이 되었고 그들을 겨냥한 온갖 아이디어 상품과 감각적인 광고들이 쏟아져 나왔다. 풍요로운 소비와 당당한 개성으로 무장한 신세대들은 확실히 이전의 세대와는 다른 감성을 보여주었다. 각광받는 신세대 80년대를 풍미했던 계급담론이 쇠락하고 문화가 해로운 담론구조를 형성하면서 신세대는 다양한 의미에서 각광을 받았다. 저항문화의 보고(寶庫)이면서 한국 정치사회사에 있어서 마지막 보루였던 대학은 이제 새로운 각도에서 조명받기 시작한 것이다. 90년대 이후 대학사회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대학구성원의 변화에서 찾아질 수 있고, 그것은 이른바 신세대군의 본격적인 대학진입으로 나타났다. 신세대의 등장을 놓고 사회학자들은 대개 세 가지 요인을 꼽았다. 첫째는 정치적 차원에서의 진단이었다. 즉 87년 이후 일정한 진전을 보일 민주화와 그로 인한 시민사회공간의 확장이었다. 즉 형식적 민주화와 의사개량화는 그동안 강권적인 국가권력에 의해 억압되어 왔던 시민사회의 공간을 열어주었고 이 같은 상황에서 개인들은 노골적인 억압에서 벗어나 과거에 경험하기 어려웠던 자유로운 분위기를 만끽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변화는 일반시민들의 정치적 관심의 격감을 초래했으며, 신세대에 있어서도 이같은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경제적 차원에서 물질적 풍요의 달성이었다. 한국사회는 80년대의 3저 호황에 힘입어 상당 정도의 흑자를 달성하면서 경제력 상승을 가져왔고, 이것은 경제규모의 확대와 함께 과소비와 향락문화로 상징되는 소비규모의 증가를 초래했다. 그러나 이처럼 경제적 차원에만 머무르지 않고 개개인의 행동양식과 사고방식, 정체성 형성 등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대중소비의 증대, 상품화의 확대, 소비의 개인화, 등에 따라 시민은 생산자라기 보다는 소비자로서 규정되기가 더 쉽고 계급적 의식보다는 자신을 둘러싼 생활조건에 영향받은 소비자로서의 정체성이 더욱 강화되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그 어느 때보다 비약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문화영역의 영향력이다. 현대사회에서의 욕구는 이제 정치적·경제적 욕구라기보다 끊임없이 새로워지는 문화적 욕구가 되고 있다. 문화적 차원에서 가장 주목받는 현상은 역시 소비문화의 확장이다. 상품소비는 물질적 소비욕구의 일차적 만족을 벗어나 정신적 소비와 서비스 소비로 발전했으며, 재화의 소비 차원을 넘어 상징의 소비, 기회의 소비로서 그 자체가 의식과 행동방식을 규정하는 요인이 되었다. 이같은 현상을 두고 보들리야르는 자본주의가 상품 그 자체보다는 기호(sign), 이미지, 기호체계의 생산에 큰 관심을 기울이는 이행이 나타나고 있다고 통찰한 바 있다. 90년대의 한국의 신세대와 같은 집단은 대중소비사회의 단계에 진입한 발달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출현한다. 따라서 신세대의 감성과 사고방식, 생활양식은 철저히 소비적인 범주의 것들이다. 신세대들은 대중매체들이 유포하는 젊음과 아름다움, 사치와 부유함의 이미지들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대학문화, 혼돈 속의 질서 그러나 오늘날의 대학문화를 섣부르게 신세대 문화와 등치시키는 것은 아직 위험하다. 오히려 ‘신세대’는 과대포장되어 이데올로기화된 개념이라는 혐의가 짙다. 신세대에 대한 수많은 논의들이 쏟아져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신세대에 대한 명확한 개념은 분명치 않다. 엄밀한 의미에서 신세대는 유사 이래로 반복적으로 존재해왔다. 그들은 언제나 기성세대와는 다른 가치를 공유하고 세계를 새롭게 바라보며 한 시대를 이끌어 갔으며, 다시 그들의 지위를 다름 세대에게 넘겨주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신세대가 유난히 강조되고 있는 것은 사고방식이나 행동양식 등에 있어 기성세대와 다름을 보여주는 그 세대차가 과거의 그것에 비해 그폭이 매우 크고 단절적으로 보이는 속성들이 많이 체감된다는 점에 있다. 그러나 그동안 무차별적으로 쏟아져 나온 신세대 담론들은 막상 신세대를 바르게 이해하지 못했다는 비판에 부딪혀왔다. 무엇보다도 대학에서 신세대 담론들은 완강히 거부당했으며, 그들 스스로가 그런 식으로 재단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90년대 한국사회의 신세대들이 가지는 가장 커다란 특징이라고 볼 수 있는 창조적인 개성과 자유분방함을 기성세대가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신세대 담론을 통해서 오늘날의 대학사회가 단면적으로 조망될 수는 있었지만 그것이 대학의 본질적인 구조라고 볼 수는 없다는 것이다. 대학사회가 80년대 식의 치열한 자기반성과 민족민중적 감성에 기반한 시대정신을 구현하고 있지는 못할지라도 여전히 대학은 살아 꿈틀거리는 생명체로서 존재하고 있다. 그것은 단순히 대학의 도서관이 얼마나 붐비고 있으며 학생운동의 영향력도 결코 쇠락 일로를 걷고 있지만은 않다는 상징적인 선언으로서만이 아니다. 오늘날의 대학문화는 분명 이전과 달라지고 있지만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고유한 문법으로 존재하고 있다. 대학문화를 주제로 한 한 방송사의 프로그램에서 만난 전북대 신문사의 정세량 씨(사학과 4년)는 오늘날의 신세대가 ‘자기 주관이 뚜렷한 창조적 개성과 삶에 대한 책임감을 지닌 세대’라고 규정한다. 본인 스스로가 신세대임을 당당히 긍정하는 그는 80년대 학번에 대한 평가를 묻는 사회자의 질문에 ‘80년대 학번은 다분히 계몽적이며 변화를 두려워한다.’고 답변했다. 또한 원광대 경영학부의 한 새내기 대학생은 ‘신세대 개념은 연령개념이 아닌 태도 개념’이라고 정의하고 ‘가장 싫은 것은 기성세대가 늘 가르치려 고 하는 듯한 태도’라고 지적했다. 오늘날의 신세대가 지향하는 가치와 세계관을 엿볼 수 있는 답변이었다. 대학, 두 개의 문화 얼핏 보면 오늘의 대학은 신세대 담론을 중심으로 두 개의 문화(two culture)가 존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여전히 80년대식 감성에 머무르면서 한국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직시하고 학생운동을 이끌어가고 있는 학생들이 있는가 하면, 신세대 개념을 보다 적극적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면서 자기중심적인 세계관으로 무장한 이들이 동시에 공존하고 있다. 그러나 이 두개의 문화는 쉽게 구분되지 않는다. 대학문화를 저항과 시대를 선도하는 세계관이라는 관점에서 조명했을 때 이 두 개의 문화는 서로 대립적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그것은 역사적으로도 증명되고 있다. 1960년대 청바지와 로큰롤을 즐기고 자유분방한 성생활을 추구했던 미국의 히피족은 당시의 기성세대들로부터 철저하게 외면당했지만 그들은 월남전의 부도덕함과 미국사회의 억압에 대한 저항의 이미지를 그렇게 표현했다. 그리고 그것은 미국사회를 넘어 세계적인 시대정신의 표상이 되었다. 오늘의 신세대를 60년대의 로큰롤 세대와 단순 비교할 수는 없으나 신세대적 감성이 그 동안 우리사회를 지배했던 억압 기제에 대한 반영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여기서 이들 신세대들이 생각하는 현재의 대학 민민운동에 대한 평가를 들어보자. “지금의 학생운동은 지나치게 경직되어 있고 조금도 변한 게 없다. 가장 진보적이라는 이들이 오히려 더욱 관료적이고 변화하는 세대의 감성을 따르지 못하고 있다. 90년대의 학생들을 80년대의 학생운동이 이끌어가고 있는 셈이다.” 전북대 양국현씨(화공 91학번)의 말이다. 오늘의 신세대들이 거부하고 있는 것은 학생운동의 이념과 민족민주주의에 대한 감성은 아니다. 90년대 신세대의 지향과 학생운동의 지향이 크게 다르지 않으며 그것은 오히려 하나의 뿌리를 가지고 있다. 우리들의 세대와 다른 까닭으로 문제가 그들 속에 있다는 섣부른 예단은 자칫 심각한 문제를 낳을 수 있다. 그들이 보는 세상 속에 미래가 지난달 전북대에서 열린 제 10기 한총련 출범식에서는 전국에서 4만여 명의 대학생들이 몰려들어 단일행사로는 전북지역 최대규모를 기록했다. 한총련은 확실히 학생들의 변화에 무디게 감각하는 듯 했지만 지도부보다는 훨씬 순발력있게 학생들은 변화했다. 장엄한 투쟁의 맹세 못지 않게 활기 있고 발랄할 저항의 몸짓은 여전히 학생운동의 건강성을 확인케 해주었다. 5.18문제에 대한 미국의 사과를 요구하고 대통령의 퇴진을 강요하면서도 자신만만하고 여유로웠다. 불확정성의시대를 살아가는 신세대들은 그들 나름대로 한 시대에 적응하는 방법들을 몸으로 체득하고 있다. 한편에서 우려하는 것처럼 그들은 무차별적인 소비대중이 아니며, 거시적으로는 한 시대를 반영하는 문화를 공유하고 있다. 그리고 기성세대가 염려해마지 않는 소비 중심적인 세대라는 개념은 계급의 문제와 세대의 문제를 여전히 혼돈하고 있는 상황에서 연유하는 것이다. 흔들리고 있는 것은 어쩌면 신세대가 아니라 대학과 대학을 둘러싼 구조적 현실이다. 전례없이 강력해진 경쟁과 문화적 정체성의 위기 속에 우리는 놓여져 있다. 지금의 대학문화가 견고한 자기중심의 세계관을 깨뜨리고 현실세계의 구조적 변화를 읽어내는 내밀한 자기변화를 남다른 감성으로 겪어낼 때 한국사회의 희망은 거기에 있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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