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6 | [문화칼럼]
한총련 출범식
새로운 집회문화를 열었다
이종민(「문화저널」 편집위원)(2004-02-12 11:18:21)
‘전북 도민을 위한 열린 음악회’ 등 문화행사에 중심을 두고 치러진 한국대학 총학생연합회제4기 출범식이 지난 5월 23일 전야제부터 25일 시청앞 광장의 ‘시민학생 결의대회를’ 끝으로 이틀간의 일정을 마무리했다.
서울이나 일반 시 단위의 대학으로는 처음으로 전북대학교에서 열린 이번 출범식에는 전국 3만에 명의 대학생들이 참석했다. 특히 전대협 6기, 한총련 4기를 맞아 대대적으로 진행된 이번 출범식에는 강연회, 문화제, 청년가요제, 통일장터 등 새로운 집회문화의 방향을 찾는 다양한 행사가 펼쳐졌다. 23일 전북대학교 대운동장에서는 「내일을 여는 시작의 노래」라는 주제의 ‘전북 도민을 위한 열린 음악회’ 와 전야제 행사에는 시민과 학생 4만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열렸다. 이날 저녁 문화 행사에는 ‘꽃다지’, ‘노래마을’ 등의 노래패와 각 대학의 문예패들이 함께 출연해 50여 미터에 이르는 넓은 무대를 젊음의 열정으로 메우면서 참가한 시민과 학생들을 환영했고 앞서 있었던 전주 고백교회 어린이들의 합창은 통일의 염원을 담아 한총련 출범식을 축하했다.
전야제의 공식 행사를 새벽 2시경에 마무리한 한총련은 24일 오전 10여 개의 강의실에서 「평화협정 체결」등 각 주제별로 강연회를 마련하고, 오후에는「전대협과 한총련 10년 기념 토론회」와 청년 가요제 등 각 부문 행사를 갖는 등 짜임새 있는 각종 행사를 꾸몄다. 이날 본 출범식은 밤 10시 3만여 명의 대학생들이 모인 가운데 대운동장에서 열렸다.
한편 23일 전야제에서는 유종근 도지사와 장영달 국회의원이 참석해 전북 전주를 찾은 3만여 대학생들을 환영하는 인사를 했는데, 도지사나 국회의원이 한총련 행사에 참여하는 일은 처음 있는 일로 민선자치 시대의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제66회 춘향제
짜임새 돋보인 향토 문화 축제
남원 지역의 전통 축제로 춘향의 얼을 기리고 전통 문화를 계승하기 위해 해마다 열리고 있는 춘향제가 23일 전야제를 시작으로 5월 24일부터 26일까지 나흘간 다채로운 행사로 열렸다.
23일 저녁 춘향제 개막을 알리는 백여 발의 폭죽을 쏘아 올리며 시작된 전야제 행사는, 시가지 등불 행렬과 완월정수중 무대에서 열린 인기 가수 축하 공연 등에 많은 시만과 관광객들이 함께 해 흥겨운 막을 올렸다.
민선자치시대를 맞아 처음 열리는 이번 춘향제는 전통과 현대를 새롭게 조화시켜 지역의 개성을 살리는 지역의 향토 문화 축제로서의 손색없는 짜임새를 보였다. 축제행사 5종목, 춘향 관련의 민속문화행사 27종목, 이벤트 행사 32종목 등 풍성하고 다채로운 행사가 곳곳에서 열리면서 요천 고수부지에 마련된 풍물시장과 함께 충분한 볼거리와 먹거리는 제공했다. 관광객과 시민들에게 선보인 정보통신관은 한국통신이 전기코너와 고객상담코너를 마련해 영상회의, 전자신문 등 첨단 정보통신 서비스를 시범 제공하는 등 전통 향토축제 마당을 통해 일깨우며 눈길을 끌었다. 또한 글짓기, 미술대전, 서예백일장, 시조 경창대회, 판소리 학술대회, 연극 <시집가는 날> 등의 행사에서는 ‘문학의 해’ 특색을 살린 향토 축제의 맛을 느끼게 했다.
한편 전국판소리면창대회, 전국춘향선발대회, 제51회 전국남녀궁도대회, 제2회 이도령 선발대회 등의 축제 행사가 춘향예술회관과 완월정 등에서 펼쳐졌는데 24일 예선을 걸쳐 25일 광한루원에서 열린 23회 전국판소리명창대회에서 영예의 대통령상은 심청가를 부른 김극선씨(54, 정읍시 시기동) 가 차지했으며, 우수상에는 김선이(37, 광주시) 준우수상에는 김형기(55, 서울)씨가 뽑혔다. 많은 예비 춘향이들이 참가한 제 66회 전국춘향선발대회에서는 김성현양(21, 기전여자 전문대학)이 미스 춘향으로 선발되었고, 제2회 이도령 선발대회에서는 손흥주군(20, 원광대학교 국악과)이 이도령으로 뽑혔다.,
이번 춘향제는 26일 전국판소리명창대회의 역대 명창들을 초청해 마련한 판소리 한마당 공연을 끝으로 나흘간의 춘향골 축제의 막을 내렸다.
이번 춘향제는 민선자치 시대에 들어서면서 처음 맞는 춘향제로 지역 시민들과 관광객들이 함께 어우러져 지방화 시대의 특성을 살리면서 화합의 축제 한마당을 이끌어냈다.
제2회 한지공예대전
한지의 고향, 그 전통을 잇는다.
천연 닥나무로 만드는 전통 한지는 바람이 잘 통하고 습기에 강하면서도 가볍고 보온성이 좋아 수명이 1천년 이상 장구하다. 예로부터 품질의 우수성 그 자체 만으로로 하나의 예술품이었던 전주 한지는 합죽선과 함께 이 지역의 특산품으로 명성을 떨쳐 왔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그 명성을 뒷받침해줄 실체를 찾기 어려울 만ㅋ브 전주 한지가 사양길에 접어들고 있는데이러한 우려의 목소리 중에서도 한지의 고향으로서 그 전통을 이어가려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우리 고유의 전통 문화와 예술을 살리고 한지의 고향 전주만이 가길 수 있는 특색으로 자리잡을 제2회 한지공예대전이 그 중의 하나이다. 지난해 전주예총이 개최해 지역전통문화발굴과 계승의 큰 계기를 마련했던 전국 한지대전은 올해 전국적인 공모전로서의 규모를 갖추고 두 번째 자리를 잇는다. 종이의 전통이 깊은 전주의 문화를 조명, 이 지역만의 독창적인 문화 상품으로 개발시켜 가기 위해 마련한 이 공모전은 근래 들어 한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분위기를 더욱 활기있게 하는 바탕이 되고 있다. 특히 전주예총은 이 공모전을 바탕으로 풍남제 기간에 한지 축제의 다양한 프로그램 개발을 준비하고 있다.
전국 5개 도시에 작품 접수처를 두어 전국공모전으로서의 체모를 갖춘 제2회 한지공예대전은 상의 규모도 확대하여 대상에 전통부문과 현대 부문으로 나누어 2점을 선정하는 것을 비롯, 입상자를 늘렸으며 대상에는 문화체육부 장관상을 시상, 본격적인 공예대상전으로서 권위를 세워가고 있다.
출품 부문은 지호 지승전지를 비롯한 전통 부문과 한지를 이용한 현대적인 생활 용품 및 관광 자원화 시킬 수 있는 작품들인 현대 부문의 2개 부문이다.
이번 공모전 작품은 서울, 부산, 광주, 대구, 마산에서는 6월 4일과 5일 이틀간 접수하며, 전주에서는 6월 6일과 7일에 작품을 접수한다. 이 작품들은 심사를 거쳐 입상작들을 풍남제 기간에 맞춘 6월 15일부터 20일까지 전북예술회관에서 전시한다.
한지의 관심이 높아지면서 한지를 이용한 현대적인 창작 예술품이 문화 상품으로 개발되고 있고 특히 생활 용품과 관광자원화 시킬 수 있는 작품 개발이 적극적으로 시도되면서 한지의 쓰임새가 다양화되고 있다. 한지공예대전은 이러한 움직임을 더욱 활발하게 하는 데 한몫을 해 나갈 것이다. 더불어 종이 부문의 전통공예기능 보유자가 거의 활동하지 않고 이러한 미약한 기능전수 부문도 입상자들이 생겨나고 해를 더할수록 계승의 움직임이 활발해지리라는 기대를 안겨주고 있다.
전북일보 주최
뿌리 깊은 전북의 한국화 제자리 찾기
근래 들어 지역문화예술의 독창성을 찾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동계 유니버시아드를 앞두고 이러한 움직임은 더욱 활기를 띠고 있으며 전북도가 장기적인 계획으로 추진하고 있는 사업들의 대부분도 지역의 전통 문화를 발굴하고 현대적으로 발전시켜 가는데에 중심이 실려 있다.
전주 대사습놀이가 이 지역에서 개최되는 전국대회를 그 위상을 높여 온 것처럼 이 지역 미술계를 대표할 만한 전시가 기획돼 관심을 끌고 있다.
6월 28일부터 7월 5일까지 전주시내 사설 화랑에서 동시에 열리게 되는 「전라한국화제전」은 위의 취지로 마련된 전시로 그 기간에 이 지역을 찾은 사람들이 어느 전시장을 찾던지 예로부터 뿌리깊은 전북의 한국화를 감상할 수 있는 독특한 문화적 체험을 갖게 되는 것이다.
특히 지역의 신문사가 지역문화예술발전의 한 틀을 제시하고 나서, 기업들의 문화예술분야에 대한 관심과 참여가 지역문화를 선도해 나가는데 기여하는 한 방법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앞으로 이 제전은 다른 지역의 한국화 전공 작가들을 초대하는 자리로 확대해 한국화제전으로서 면모를 갖추어 나갈 계획이다 한다.
이 지역 중견작가들을 중심으로 운영위원회를 구사하고 초대작가를 선정하는데 이 제전을 추진하고 있는 준비위원은 김문철, 곽선손, 유창희, 이철량, 조돈구, 이재승 씨와 각화랑의 대표들로 구성되어 있다.
참여 작가는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30대 이상의 한국화가 중에서 역량을 인정받는 작가들을 선정하되 전북 출신으로 서울 등 다른 지역에서 이름을 얻고 있는 중견작가들을 초대한다. 첫 해인 올해에 선정된 작가들은 1백여 명에 이르며 이들은 각 대학에 재직하는 교수는 물론 원로, 중자, 시간강사의 경력을 갖고 있는 작가들, 특히 이 한국화제전에 의미를 더하는 것은 작고 작가의 작품을 함께 전시하여 전북의 한국화 역사가 한눈에 보여질 수 있는 자리가 된다는 점이다. 전라도 한국화의 과거와 현재, 내일을 한눈에 볼 수 있는 한국화제전은 전주 시내 7개 화랑 얼화랑, 갤러리 고을, 정갤러리, 솔화랑, 민촌아트센타, 갤러리예루, 기린예원 -에서 동시에 진행된다.
이번 행사는 전북 지역이 전통 미술의 메카로 자리잡을 수 있는 기틀을 다져나가는 계기가 될 것이다.
제 24회 환경의 날 기념 전북환경운동연합 주간행사
환경보존을 위한 작은 실천뿌리 내리기
6월 5일은 UN이 정한 “제 24회 세계 환경의 날”이다. 72년 스웨덴 스톡홀롬에서 환경 선언 선포와 힘께 세계 환경의 날을 제정한 이래 매년 환경의 날이 되면 세계 각 국가와 민간 환경단체들에서는 각종 행사와 캠페인을 벌이고 다양한 환경보호 활동을 해왔다. 우리 지역에서도 이를 기념하는 행사가 전북민족미술인협회의 주최로 열린다.
6월 6일 오후 1시부터 전주시 다가공원 앞 광장과 전주천변 일대에서 다양하게 행사가 진행되는데 초등학생부터 일반인까지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행사 일정은 12시 30분부터 1시까지 참가자들의 접수를 받아 환경그림그리기, 글쓰기 대회, 전주천 환경오염답사, 다가공원 나무알기 답사, 다가공원 등 전주시대 문화유적 답사 등으로 나뉘어 4시까지 진행된다. 부분별 진행이 끝나면 4시부터 4시 30분가지 행사장으로 다들 모여 제 24회 세계환경의날 기념 인간사슬만들기 행사가 이어진다. 이후 풍물 및 노래 공연이 이어지고 5시 30분부터 6시까지는 환경그림전을 개최한다.
환경그림그리기, 글쓰기 대회는 아름다운 또는 보존되어야 한 자연 환경과 환경 및 파괴된 지역 또는 오염된 것 등 환경과 관련된 내용을 주제로 하는데 참가자들이 제출한 작품에서 당선자를 선정 6월 7일부터 9일까지 객사에서 전시한다.
전주천 환경오염지역 답사는 김완중(전북대 환경공학과 석사), 김병직(전북대 생물학과 석사)씨를 강사로 다가공원 앞 전주천에서부터 고사평 쓰레기 야적장 앞까지 이동하면서 진행하며, 다가공원내 나무알기 답사는 박종민 전북대 산림자원학과 박사가 안내하고 다가공원등 전주 시내 문화유적 답사는 황토현문화연구회 회장인 신정일 씨가 맡아 안내한다.
이외에도 전주천 수중생태계전시, 환경사진전, 환경포스터전, 저공해 상품전시 및 판매등 다양한 주변행사들이 이어지며 참가한 학생들에게는 사회봉사활동증을 배부한다.
도한 환경의 중요성과 환경요염의 심각성을 알리고, 환경문제의 해결을 위해 모두 나설 것을 촉구하는 전문 작가들의 그림과, 보존해야 할 지역과 환경오염 현장을 찍은 사진을 전시하는 환경그림·사진전인 「먹이사슬전」이 6월 6일부터 9일까지 객사 앞 뜰에서 열린다.
이외에도 세계환경의 날을 기념하여 전북환경운동연합에서는 전북 도민이 환경문제에 관심을 갖고 직접 참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전주를 비롯한 전북의 전 일원에 고정 측정 지점 200군데를 선정하여 간이 측정기를 설치하고 대기질 측정을 실시할 예정이며, 앞으로 계속 시민 대기질 감시망을 형성하고자 한다. 이 행사는 전국의 환경운동연합 27개 조직에서 동시에 실시되는데 이 측정 결과를 바탕으로 전북의 대기 오염도를 알려 작은 실천을 이끌어내고 정부의 대책을 촉구할 예정이라고 한다.
측정은 6월 3일 오후 6시에 측정하고자 하는 지점에 부착하여 24시간 동안 그대로 둔 다음 6월 4일 6시에 떼어 내는데, 환경운동연합은 공기의 오염 상태를 직접 측정하고자 하는 자원 특정 요원을 모집한다. 측정방법이 손쉬워 초등학생부터 일반 시민 누구나가 참여가 가능하다고 한다.
이 행사는 전국적인 환경 오염의 실태와 전북의 환경오염 실태를 비교 분석하여 전국대기오염지도를 작성함으로서 전국의 대기오염 공간 분포를 파악할 수 있고 환경 운동에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유도함으로서 대안 있는 환경운동, 전문적인 환경운동의 한 영역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익산시립무용단 창단공연
전북무용계, 새로운 도약의 계기
지난 5월 11일 익산시민문화회관에서는 익산시립무용단(채규정 단장·익산시 부시장) 창단 공연이 열려 도내에서는 처음 있는 시립무용단의 창단을 알리고 중견 안무가들이 특별 출연해 뜻 깊은 춤의 자리를 마련했다.
이날 창단 공연에는 이길주 상임 안무자가 이끄는 50여 단원들과 함께 서울시럽 무용단 배정혜단 장과 국립무용단 국수호 단장, 삼성무용단 정재만 단장이 초청되어 절제와 신명의 춤사위로 축하 무대를 함께했다. 특히 이날 무대에서는 이길주 안무자를 포함해 무용인으로서 활발한 활동을 해 온 중견 안무가 네 명의 춤사위를 한 자리에서 감상할 수 있었다. 배정혜 씨의 무속춤을 창작화한 작품「혼령」, 1993년 전통 명무 7인전에서 첫선을 보인 「허틍 살풀이」를 정재만씨가, 1930년대 고 조택원 선생의 대표작인 「가사호접」의 춤사위를 국수호 씨가, 남쪽 지방의 무당춤에서 유래된「살풀이춤」을 이길주 상임 안무자가 선보였다.
익산시립무용단 창단의 산파역을 맡아온 이길주 상인 안무자는 “시립무용단 창단은 지난 5~6년 전부터 거론되었는데 지방자치제가 실시된 지난해부터 구체적으로 창단 작업이 빠른 진행을 보여 올해 뜻 깊은 창단을 하게 되었다. 익산시립 무용단 창작은 이 지역 무용계에 보다 긍정적이고 많은 영향을 주게 될 것이다.”고 말하고 있다. 상임 안무자의 말처럼 익산시립무용단 창단은 많은 인재를 배출해 오던 이 지역 무용계에 푸른 신호를 던져주고 있다.
우석대, 원광대, 전북대, 조선대 등 호남 지역 4개 대학에서는 해마다 많은 무용 자원을 배출하고 있지만 대부분 우수한 인재들은 타 지역으로 활동 무대를 찾아 떠나는 실정이다. 이러한 여건 속에서 창단된 익산시립무용단은 재능과 기량을 갖춘 이 지역 젊은 인재들에게 보다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활동 무대를 제공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러한 돌파구는 질 높은 창작 활동과 함께 장기적으로는 전북 무용 문화의 발전에 견인찬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현재 익산시립무용단은 아직 정규 단원이 없는 실정이지만 곧 단원 선발 과정을 거쳐 정규 단원을 모집할 계획이다. 창단 공연에 출연한 단원들은 그 동안 이길주 무용단에서 활동해 오던 단원들이다.
익산시립무용단은 올 가을 정기 공연을 계획하고 있으며, 서울에서 열릴 예정인 시립무용제에 참가, 전북예술회관 개관 기념 공연도 준비중이다. 7월 중에는 이스라엘에서 열리는 까뮤엘 댄스페스티벌에 참가할 예정이다.
문화칼럼
아무리 우겨도 예향은 전주다
글/이호선 전주대 교수·일어일문학과
프랑스 하면 파리요, 파리하면 세느강이다. 결코 서두름없이 한가롭고 유장하게 밑바닥으로부터 치올라오는듯하는 물 폭으로 넓은 강둑을 채우며 파리의 심장을 뚫고 흐르는 푸른 세느강 그 넓은 수면을 타고 대로는 감미롭고 때로는 센티멘탈한 샹송의 비음이 마음속 거문고의 줄을 퉁이겨 오늘도 쉬지 않고 흐르고 있다.
<라 세느>
세느는 노래하네
파리를 향하여 연정을 노래하네
사랑을 앓는 여인은 세느강이고
파리는 사랑을 앓는 사나이이고
이윽고 밤이 되면
파리와 세느는 서로 보듬어 안고
잠 속에 드네
(후라비앙·모노오 작시, 비앙상·스코트 작곡)
그 세느강 기슭에 이룩된 명소의 하나가 말라케에 하안(河岸)이다. 세느강 왼쪽, 수백년을 강물과의 대화로 늙어 온 고목들의 가로수가 가지런히 줄 서있는 강뚝로 따라 파리의 지성을 상징하고 진가를 높여 주는 고서점(古書店)들이 즐비하게 자리하고 있는 것. 그 뿐 아니다. 세계 각국에서 찾아오는 호학(好學)의 선비들이 기웃거리며 서성이는 이곳에 이웃하여 프랑스의 지성을 상징하는 한림원이 의연하고 강 건너 저편엔 루불 박물관이다.
해서 한가로이 거니는 발걸음 하나 하나마다 역사의 이끼가 묻어나고 학예(學藝)의 내음이 배어나는 착각으로 지성의 발길들은 오늘도 말라케이 고서점 거리에 섰음을 자랑으로 여긴다.
그러나 단연코 이곳의 상징이오 명물인 존재는 서점주들이다. 오두막 고서점 안의 낡고 때묻은 고서들을 닮았지 싶게 나이 지긋한 점주들이 많아 특히 두리번거리는 외국 손님을 책보처럼 따뜻한 마음과 넓은 지식으로 감싸준다는 것. 그들의 대부분이 자국어 외에 수개국의 외국어에 능통하다는 것도 큰 장점이다.
그리하여 그들의 진면목은 그렇게 능숙하듯 말하고 슬 줄 아는 외국어들의 마탕 위에 펼쳐지는 책들에 대한 놀라운 지식에서 발휘되고 있다. 듯이 통하는 손님을 만나면 끝없이 이어지는 그의 화제가 문학·미술·음악의 영역을 왕래하고 천문과 지리를 오르내리며 종교와 역사를 노크하고 경제와 과학에 언급하여 더듬거리는 법이 없다고 한다. 유명한 소설자 아나톨 프랑스도 이곳 고서점 출신으로 가게 명칭인 프랑스를 필명으로 삼았다 하니 그이유를 알 만하다.
어째서 이렇게 고리타분하게 이끼 낀 얘기를 글머리에 썼느냐면 이미 우리 전주(全州)에서도 이 비슷한 거리나 구역이 생겼어야 했을 터인데 하는 아쉬움 때문이다. 지금이니까 서로 예향(藝鄕)임을 전국의 도시들이 다투어 입질하고 있고 특히 가까이에서는 광주(光州)가 앞선 느낌까지를 주고 있지만 아무리 우겨도 예향은 전주다.
무엇보다 큰 이유는 예술의 분포와 이해 능력의 평균성(平均性)에 있다. 예향이란 그 고장에서 유명한 예술인이 몇 사람이나 배출되었냐는 특정인물의 숫자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여, 그 고장 사람들의 거의 모두가 예술을 이해하고 사랑하며 삶속에 밀접하게 연관지어 있고 그 고장 구석구석까지 예술의 여러 모습이 스며들고 있고 배어 있을 때 그곳을 우리는 예향이라 부르는 것이다.
그렇게 볼 때 전주는 가장 그에 가까운 고장이라고 생각한다. 일찍이 전주를 녹도(綠都)로 별칭했듯 전주인은 집집마다 화초와 수목 가꾸기를 삶의 기본으로 삼아 왔다. 그리고 방방마다 서화와 골통을 두어 자랑으로 삼았다. 다시 말해서 전주인들은 매호수화(每戶樹花), 각실서화(各室書畵)를 삶의 기본으로 삼고 예술의 향에 배어 살아온 것이다.
뿐만 아니라 거기 더하여 전주인들은 호남제일성으로 수도를 삼고 감영을 중심으로 판소리에 바탕한 독특한 문화를 형성하고 있었다. 가무음곡의 예능에 옥반가효(玉盤佳肴)의 풍미를 곁들인 소리와 춤사위의 멋에 미미(美味)음식의 맛이 어울려 빚어내는 정서로 하여 다른 어떤 고장도 흉내내고 따라올 수 없는 예술문화를 꾸며냈던 것이다. 전주가 예향으로 불리는 분명한 이유의 하나다.
금상첨화로 전주천은 어머니의 젖줄 인양 멋쟁이들의 마음을 살찌우고 정서를 채색하고 풍류를 단장해주었다. 기린토원(麒麟吐月)에서 서천표모(西川漂母)에 이르는 물길 따라 강물은 한벽(寒碧)에서 옥류로 부서지고 다가에서 배를 띄우다가 추천(楸韆)에서 산천천을 안아 금강으로 달음질쳤으니 이 아니 세느강이랴.
그리하여 한벽엔 선비들의 글 읽는 소리 숲속에 깔리고 다가엔 말 달려 활시위 당기는 힘이 바위도 깨여했으니 이 지(知)와 용(勇)이 창(唱)의 멋과 어울려 이뤄낸 민족의 자랑거리가 ‘대사습’이다. 새삼 전주의 예향임을 다짐하지 않을 수 없음을 절감하게 된다.
그러므로 지금부터라도 늦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예향 전주’를 다시 새롭게 조성하는 운동과 시책이 일어나고 세워지기를 주장하고자 한다. 우선 경기전을 중심으로 고서와 서화 골통의 점포들이 집중토록 하는 시책이 있을 수 있으니 이주업체에 대한 지원금지급과 세제 혜택 등으로 권장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다가산을 중심으로 본격적인 대사습 광장의 조성이 필요했지만 이미 아파트 업자들의 돈벌이광장이 돼 버렸으니 아쉽기 그지없다. 다로 적지를 찾아 학(學) 무(武) 예(藝)의 종합 광장인 대사습터의 조성이 있었으면 싶다. 한벽루와 오목대, 이목대를 엮어 건너편 남고산성과 연결하는 대대적인 음식 시장의 조성도 바람직하며 이 또한 이주비 지원과 세제 특혜로 권장함 직 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남고산성의 보수와 개축이 선생될 필요가 있음도 상식이다.
문제는 멋을 아는 시정 담당관들의 출현과 예술이 뭔지를 아는 시의원(市義員)들의 참여다. 거기에 문화예술의 진흥에 목말라 하는 시민들의 자발적 운동이 합쳐 삼위일체를 이루면 전주천변에도 ‘말라케에’ 거리의 출현이 꿈만은 아니지 싶다. 문화인이여, 분발하자.
이호선 / 전북대 영문과 졸업. 일본 스쿠바대학 문학박사 학위. 서해방송보도국장 전북일보 편집국장 역임. 1979년부터 전주대 재직. 칼럼짐「吾山은 완산」,「따갑게 미소롭게」등 현재 전주대 일어일문학과 교수로 재직해 있으며, 요즘은 문학(수필)에 애정을 두고 있다.
추모특집 / 명창 강도근
남원 사람의 감성으로 예술세계 구현한 진정한 소리꾼
강도근의 예술세계
글/최동현 군산대교수·판소리연구가
강도근의 예술세계는 동편제 판소리와 뗄레야 뗄 수 없는 연관을 맺고 있다. 동편제 판소리 하면 강도근. 강도근하면 동편제 판소리를 떠올릴 정도로 강도근과 동편제 판소리는 동일한 실체나 다름없었다. 사실 강도근이 동편제 판소리의 전형적인 소리꾼이란 말은 맞다. 그러가 같은 동편제 판소리라고 하여도 그 지시 범위가 넓어서 세세한 부분에서는 많ㅇ은 차이를 보인다. 예컨대 박초월이 동편제 소리꾼이라는 것과 보성소리 춘향가가 동편제 춘향가라는 것, 그리고 박동진의 적벽가가 또 동편제 판소리라고 할 때는 그 각각의 의미가 같을 수 없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동편제 판소리라고 일컫는 소리는 실제로는 상당히 다른 소리의 집합체이다. 본래는 같거나 거의 비슷했을지 몰라도, 세월이 흐르면서 여러 소리꾼들에게 전승이 되는 동안 많은 변화를 겪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에 와서는 동일한 실체라고 하기 어려울 정도로 다른 모습을 보이게 된 것이다.
흔히 동편제 판소리는 송흥록이나 김세종, 정춘풍의 소리양식을 계편한 판소리를 가르킨다. 그러나 김세종이나 정춘풍의 소리는 후에 다른 소리들과의 상호 교섭을 통해 많은 변화를 입었기 때문에, 아무래도 정통 동편제 소리라고 하면 송흥록으로부터 시작하여 송광록, 송우룡을 거쳐 송만갑에 이르는 소리를 치는 것이 보통이다. 송흥록으로부터 시작된 동편제 판소리는 송우룡에 이르러 크게 유성준과 송만갑으로 갈라지게 되고, 송만갑의 소리는 박봉래, 박봉술로 이어진 소리와 김정문, 강도근으로 이어진 소리로 나뉘어진다. 그런데 송만갑, 김정문으로 이어진 소리가 박봉래, 박봉술로 이어진 소리보다 훨씬 동일성이 강하다. 송만갑과 김정문의 소리는 전문가도 구별하기 힘들 정도이다. 강도근은 바로 송만갑과 김정문으로부터 배운 흥보가를 생애 내내 장기로 삼았다. 강도근 또한 김정문이나 송만갑과 구별하기 힘들 정도로 유사한 창법을 구사하였다. 그래서 강도근이 다른 동편제 소리꾼들을 제치고 동편제 소리의 대명사가 되었던 것이다.
동편제 판소리는 ‘목으로 우기는 소리’라고 한다. ‘목으로 우기는 소리’란 좋은 성대의 기량을 자신의 판소리 기량을 중심으로 펼쳐 나가는 소리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동편제 판소리를 제대로 부르려면 성대가 좋아야 한다. 송만갑, 김정문, 강도근은 모두 성대가 좋은 사람들이었다. 고음과 저음을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 좋은 성대, 이것이 동편제 판소리를 할수 있는 첫 번째 조건인 것이다. 똑같은 동편제 판소리를 이어받았으면서도, 유성준이나 박봉술은 성대의 기량이 송만갑이나 강도근에게 미치지 못했기 때문에, 동편제 소리를 대표하는 사람으로 대우받지 못했다.
목으로 우긴다는 말은 또 전력을 다해놓고 힘찬 소리를 구사한다는 말이다. 동편제의 전형적인 소리꾼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모두 통성으로 전력을 다하는 치열한 창법을 구사한다. 통성이란 가성을 쓰지 않고 뱃속에서부터 그대로 힘차게 뽑아올리는 소리를 말한다. 통성으로 전력을 다해 소리를 내지르다 보니 어떨 때는 소리가 갑갑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김소희같은 사람은 생전에 지나치게 소리를 되게(높고 힘차게)만 하려다가, 발음이 분명하지 않은 경우도 많다고 흠을 잡기도 하였다. 이 말은 사실이다. 송만갑이나 김정문, 강도근은 너무 되게 소리를 하려고 하다가 가사를 분명하게 발음하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를 나쁘다고만은 할 수 없다. 전력을 다할 때 나오는 치열함이 있기 때문이다. 현대에 와서 전형적인 동편제 판소리가 별다른 호응을 못받은 이유 중의 하나도 이 치열성 때문이었다. 쉽고, 달콤하고, 부드러운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감성에는 아무래도 동편제 소리는 부담스러웠던 것이다.
좋은 성대로 전력을 다해 소리를 하다 보니, 당연히 동편제 소리는 자잘한 기교를 부리지 않게 되었다. 소리를 떨고 꺾어 아기자기하게 엮어 간다든가, 장단의 기교를 부린다든가 정교한 너름새(육체적인 동작)를 곁들인다든가 하는 일을 하지 않는다.그러다 보니 동편제 소리꾼들은 거의 뻣뻣하게 서서 건조하게 소리를 한다. 강도근은 그렇게 소리를 하던 사람이었다. 자연히 동편제 소리에는 투박하고 억센 남성적 힘이 넘쳐 흐른다.
송만갑으로부터 강도근에 이르는 소리의 특징 중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소위 철성(철성)의 전통이다. 철성이란 쇠같이 단단한 느낌의 소리를 이르는 말이다. 판소리에서는 보다 거칠고 쉰 목소리를 수리성이라고 하는데, 여기에 오랜 수련을 통해 단련된 단단한 맛이 더 붙으면 철성이 된다. 강도근은 현대에 남은 유일한 철성의 소리꾼이었다. 송만갑에 비해 강도근이 부족한게 있다면, 깊고 부드러운 저음과 교묘한 성음의 변화였다. 생전에 강도근은 송만갑 선생의 저음은 자신이 도저히 흉내날 수 없다고 했다. 이는 강도근이 부족한 소리꾼이라기 보다는 송만갑이 너무 훌륭한 소리꾼이었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강도근이 이러한 동편제 소리를 그대로 지켜올 수 있었던 것은 , 우선 그가 정통 동편 소리의 대가로부터 소리를 이어받았다는 점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판소리는 전승예술이기 때문에, 어떠한 소리를 이어받았으냐 하는 것이 자신의 예술 세계를 구축하는 첫 번재 관건이 되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들 수 있는 것은 배운 것을 나름대로 고쳐 부르려고 하지 않는 강도근의 고집이다. 강도근은 늘 <나는 자작은 안 한다. 배운 그대로만 한다>고 말하였는데, 이는 그만큼 그가 전통에 충실하려고 한 소리꾼이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그는 평소 ‘선생님께 배운 소리는 한자 획도 마음대로 바꾸지 않는다’고 하는 원칙을 목숨보다 중히 지키면서 판소리를 지켜왔다. 강도근이 온갖 유혹에도 불구하고 남원을 떠나지 않고, 남원을 지키며 제자들을 양성할 수 있었던 것도, 동편제 소리의 전통에 대한 자부심과 고집 때문이었을 것이다.
여기에 강도근의 지극한 성실성을 보아야 한다, 강도근이 마지막 동편제 소리의 대가로 남을 수 있었던 근본적인 원천이 되었던 것은, 아무래도 칠십이 훨씬 넘어서까지 쉬는날이면 도시락을 싸들고 지리산 골짜기를 찾아가 연습을 하는 소리에 대한 지극한 열성이었을 것이다. 명창이 되고 문화재가 되어서도 쉼없는 소리에 대한 열정이 없었다면, 그 힘든 동편 소리를 생애의 마지막 순간까지 지켜내지는 못했을 것이었다.
강도근은 또한 남원의 소리꾼이었다. 남원의 소리꾼이라는 말은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닌다. 먼저 그는 남원 출신이다. 그리고 남원지방을 중심으로 전승된 소리, 그러니까 동편소리를 이은 사람이다. 도한 강도근은 남원에 살며 남원에서 제자를 양성하던, 그야말로 남원의 터줏대감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몇몇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것은 , 그가 남원 사람의 감성으로 자신의 예술 세계를 구축해 왔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러한 의미에서 강도근은 진정한 의미에서 남원의 소리꾼인 것이다.
강도근이 남원의 소리꾼이라는 것은 그의 남원 사투리에서 가장 두드러진다. 남원 지방의 전형적인 사투리가 강도근의 판소리에는 가득하다. 지나친 사투리의 사용은 때로, 강도근 판소리의 사설에 오자(誤字)가 많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키기까지 할 정도였다. 이러한 사투리를 통해서 표현되는 것은 남원 부근 민중들의 감성과 정서이다. 그렇다고 해서 강도근의 판소리가 남원이라는 지역에 한정되는 특질을 지니고 있다는 뜻은 아니다. 다 같은 민족예술인 판소리이되, 정권진의 판소리가 남도 사투리의 억센 맛에 독특한 묘미를 담고 있듯이, 강도근의 판소리는 남원 사투리의 독특한 맛으로 인하여 민중적 색채를 강하게 띠고 있다는 말이다.
시골에서 옛 판소리의 전통을 고집스럽게 지키고 있던 강도근인 1980년대 들어서야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물론 그 이전에도 강도근은 명창으로 이름이 높았었지만, 그것은 한낱 시골 소리꾼의 그것이었다. 적당히 잔꾀를 부려 소리를 꾸미고, 곱고 슬픈 목소리로 청중의 기호에 영합해가던 소리판에서 꾀부리지 않고, 자신의 소리를 고집하며 혼신을 다해 뽑아내는 선생의 우람한 소리가 충격으로 다가갔고, 마침내 인정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1988년에 강도근은 동편제 판소리 홍보가로 무형문화재 보유자로 지정되었지만, 한평생 그가 목숨보다 소중하게 지켜온 우리 것에 대한 보답으로는 차라리 너무 늦고 작은 것이었다고 하는게 옳으리라.
강도근은 이제 저 세상으로 갔다. 그러나 그가 생전에 남긴 수궁가 한 종류와 흥보가 두 종류의 음반, 그리고 영상을 담은 한 종의 레이저 디스크가 오래오래 우리와 함께 하면서, 그 웅장했던 동편제 소리의 진수를 보여줄 것이다.
지리산 계곡과 섬진강 물줄기를 잇는 소리
강도근의 소리와 인생
글/윤영근 소설가·예총 남원지부장
강도근은 소리꾼이다 그것도 남원의 소리꾼이다. 여기서 구태여 그를 남원의 소리꾼이라고 지역적으로 한계를 지어 얘기를 하는 것은 그의 태생지가 남원이고 소리의 시작부터 끝까지 남원을 텃밭으로 해서 일구어진 동편제를 지켰으며, 해방전 젊어 한때 창극단을 따라 다닐 때를 빼놓고는 남원에서 살아왔다는 그런 의미가 아니다. 그의 소리를 듣고 있으면 남원 사대부의 냄새가 난다. 아침저녁으로 카랑카랑한 기침소리와 함께 자신의 존재를 이웃에 알리려는 고집스럽지만, 줏대도 있고 감히 함부로 범접할 수 없는 위엄도 갖추고 있는 남원 사대부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외모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외모로만 따지자면 그가 스무해 이상을 타고 다녔던 헌 자전거처럼 소박하고 촌스럽고, 방금 못자리를 끝내고 나온 농부처럼 소탈했다. 그러나 그것은 무대 밖에서의 얘기이고, 일단 정장을 하고 무대에 서서 ‘저 제비보소, 보은표 박씨를 입에다 물고 이리저리 나온다. 단상봉황이 죽실을 물고 오동 속에서 넘논 듯, 북해 흑룡이 여의주를 물고 채운간에서 넘논 듯, 집으로 펄펄 날아들어 흥보 앉은 처마 끝에 들어갔다 나갔다, 무엇이라 지지우지 우지주지, 함자표지, 우지매라. 찬찬히 살펴보니 절골 양각이 완연하고 당사실로 감은 다리가 아리동 아리동 뫼야, 박씨를 떼그르르 던져놓고 백운간으로 날아간다. ’ 하고 흥보가 중 ‘제비노정기’라도 한바탕 불러 제낄 때면 약간 쉰듯하면서도 통목으로 내지르는 수리성이 좌중을 꼼짝 못하게 휘어잡았으니, 그때는 이미 촌스러움과 소박함과는 거리가 멀었는데, 소리 중간중간에 관객들을 한번씩 휘둘러 볼 때면 지리산 천황봉같은 고고함이나 오만함이 물씬 배어 나오기도 했던 것이다. 그래서 남원의 소리꾼이고 남원의 사대부 냄새가 난다고 했던 것이다.
강도근은 1917년 남원시 용정동(기왕에 나온 전기에서는 남원시 향교동으로 되어있으나, 이 글을 쓰기 위하여 조사를 해보니용정동 출신이 맞음) 구공다리 깨에서 아버지 강원중과 어머니 이판녀 사이의 구남매 가운데, 넷째로 태어났는데, 어린 시절의 그를 마을 사람들은 도근이라는 이름대신 ‘들돌’이라고 불렀다. 마을 사람이 그렇게 부른 것은 키는 작달막하지만 행동거지며 말투가 야무졌을 뿐만 아니라, 남원 사투리로 상당히 땡갈지게 생겼기 때문이었다. 요즘은 사라지고 없지만, 지금부터 스무해 남짓 전까지만 해도 마을마다에는 회관이나 정자나무 아래 같은 곳에 마을 장정들이 힘자랑을 하는 ‘들돌’이라는 것이 있었고, 그것은 눈으로는 시퍼보였지만 워낙 단단하여 실지로 들어보면 쉽게 들어올려지지 않은 돌이었다. 강도근은 들돌이라는 별명답게 소리도 어려서부터 마을 사람한테는 “얼씨구 잘한다”는 추임새를 받을 만큼 제법 잘했고, 그것이 빌미가 되어 비교적 어린 나이인 열살 남짓 때부터 구례의 박봉래 명창에게 정식으로 소리공부를 시작했다. 그가 어린 나이에 소리공부를 시작하여 소리꾼의길로 들어선 것은 집안의 내력과도 무관하지 않다. 즉 그의 아버지 강원중은 남원 요천수를 가로지른 다리중에서 가장 먼저 놓여진 승사교의 낙성식 때에 모래밭에 줄을 매고 줄타기 묘기를 보이기도 했던 소문난 줄타기꾼이었는데, 소리도 썩 잘했다는 것이다. 지금도 용정동에 가서 나이 많은 노인들한테 물어보면 강원중이 마당에 줄을 매놓고 석근의 동생인 도근에게는 북장단에 맞추어 춘향가며 흥부가며 하는 소리를 가르쳤던 것을 기억하고 있는데 아버지에게서 소리의 맛을 익힌 강도근이 정통 소리를 배우기 위하여 박봉래의 문하로 들어간 것이었다. 박봉래는 구례출신 소리꾼이었는데, 송만갑의 제자였으나, 스승과는 달리 오로지 동편제만 고집하고 자신도 부르고 제자들에게도 가르친 사람이었다. 그러나 박봉래와 강도근의 인연은 길래야 길 수가 없었다. 박봉래가 서른 셋이라는 젊은 나이에요절을 했기 때문이었다.
박봉래에게 소리를 익힌 강도근이 창극단을 따라 다니기 시작한 것은 그의 나이 열네 살 때부터였다. 살아 생전 강도근의 기억에 의하면 그가 열네 살 무렵에 남원의 김억득이라는 사람이 창극단을 조직하였으며, 근방의 명창들이 다 모여들었을 뿐만 아니라, 해금을 잘 부는 장계량이며 가야금을 잘 타는 금지 사람 김옥돌이며 고수로 이름을 날리던 조평욱 같은 사람도 김억득의 창극단에 함께 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조직된 김억득의 창극단은 구례며 곡성이며 함양이며 거창같은 남원 인근의 고장과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소리도 하고 창극도 공연했다. 어린 나이라서 심부름을 주로 많이 했지만 무대에 올라 춘향가, 흥부가, 적벽가를 부르며 관중들의 박수도 꽤나 많이 받았다고 하니, 강도근의 소리 재질은 그때부터 발휘된 셈이었다. 그러나 강도근은 어린 시절에 창극단을 따라 다녔던 기억이 썩 유쾌하지만은 않은 듯 했다. 그것은 소리꾼 중에는 아편 중독자가 많았고 더럽고 추접스러운 게으른 사람들이 많아서 어린 강도근이 보고 배울 것이 소리를 빼놓고는 없었다는 것이다.
강도근이 김억득의 창극단 생활을 그만 둔 것이 창극단이 해체되어서 그랬는지, 아니면 본격적으로 소리공부를 하고 싶은 열망 때문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그가 진짜 스승다운 스승을 모시고 소리공부를 시작한 것은 열 일곱 살 때 남원 주천면의 주레기라는 곳에 사는 김정문의 문하에 들어가면서 부터였다. 강도근의 말에 의하면 김정문의 집에서 머슴을 살다시피 하면서 소리공부를 했다고 하는데, 김정문의 가르침이 꽤나 까다로왔던 모양이었다. 소리를 가르틸 때에 소리가 삐뚤어지면 담배대로이마를 사정없이 내리치는 것은 물론 피우던 댐배불로 발등이며 손등을 지지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도한 소리를 가르치다가 잠시 쉬는시간에는 꼭 낮잠을 청했는데, 그럴 때면 강도근이 스승의 발을 씻어주고 발바닥을 살살 긁어주어야 잠이 들었다고 했다. 또한 아편을 하는 김정문이 아편에 취해있을 때면 눈가에 눈꼽이 덕지덕지 끼었고, 그 눈꼽을 닦아주는 것도 강도근의 몫이었다. 아무튼 강도근은 꽤나 까다로운 스승 밑에서 2년여 동안에 판소리 다섯 마당을 뗄 수 있었다.
1935년 스승 김정문이 죽자 강도근은 서울 종로구에 있는 조선성악연구회를 찾아가 송만갑, 정정렬, 이동백 등을 만났다. 그때에 송만갑으로부터 김정문 스승에게 미처 다 배우지 못한 흥보가는 물론 춘향가 심청가 적벽가를 배울 수 있었다. 그러나 번잡한 서울은 강도근에게는 있을 곳이 못 되었다. 일년도 못 되어 낙향을 하여 구례로 내려가서 박봉래의 형 박봉채에게서 가르침을 받는 한편 쌍계사에 들어가 독공을 했다. 이때부터 쌍계사는 구례 산동의 수박폭포와 남원 대복사 토굴과 더불어 강도근의 독공장소가 되었다. 더구나 이 쌍계사의 주지스님이 판소리를 좋아하여 강도근이 독공을 들어가면 두 손을 들어 환영을 했고, 강도근은 그런 쌍계사가 좋아서 이후 이십여년 동안을 들락거리며 소리공부를 했다. 어느땐가는 주지 없는 절에서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은 채 주인 노릇을 하면서 소리공부를 했는데, 화개근방에 있는 섬거주조장 주인인 구 처사라는 사람이 열흘에 한 번식 돼지 다리를 하나씩 가져와 먹을 것이 없어 마뿌리를 갈아 끼니를 때우던 강도근에게 몸보신을 시켜주기도 하였다.
나이 서른 살 안쪽의 어느 해, 쌍계사에서 독공을 마친 강도근이 학동 악양에 살고 있는 유성준을 찾아가 수궁가를 배운 적이 있었다. 그 당신 유성준의문하에는 임방울도 함께 있었는데, 제자를 하나만 두고 싶어하던 유성준이 임방울만 예뻐하고 자기는 마음에 미워한 통에 마음고생이 많았다. 그러나 그걸 견뎌 내고 김정문에게 미처 다 배우지 못한 수궁가를 마저 배우고는 두 달만에 유성준의 문하를 떠나왔다.
이후 강도근은 호남창극단이며 동일 창극단이며 조선창극단 같은 창극단을 김소희, 한갑득, 박봉술, 배금향 등과 함께 다니며, ‘춘몽전’같은 창극에서는 농사꾼 역할도 하고, 벙거지에 꿩털 꽃고 칼을 들고 설치는 의병노릇도 하다가, 기회가 닿으면 흥부가며 수궁가 같은 전통 판소리도 부르면서 암울한 일제시대를 견디어 냈다.
강도근이 해방을 맞은 것은 김소희, 한갑득 등과 함께 했던 호남창극단의 통영 공연에서였다. 목메이게도 그렸던 해방이 되고나자 단원들의 마음이 들떠서 공연이 제대로 될 수가 없었다. 경상도 진영에서 창극단을 해체하고 단원들은 뿔뿔이 흩어졌는데, 강도근이 미군을 본 것도 이때였고, 미군의 차를 얻어타고 남원까지 올 수가 있었다. 남원으로 온 강도근은 국악원에 농악대를 조직하여 마을마다 공연을 다니기도 했고, 제자들을 모아 소리를 가르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또한 6.25때는 목포, 전주, 이리, 여수, 순천 등을 다니며 소리를 가르쳤는데, 한때는 광한루 옆에 있는 ‘칠선목’이라는 요정에서 기생들에게 소리를 가르치기도 했다. 강도근은 자신이 꽤나 까다로운 스승 밑에서 까다롭게 소리를 배운 것과는 달리 제자들에게는 비교적 너그러웠다고 한다. 그는 제자들을 모아놓고 단체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식 마주 앉아서 일대일로 가르치는 구전심수(구전심수)의 방법을 주로 사용하였는데, 어쩌다 제자의 소리가 삐뚤어지면 ‘에라이, 그것도 소리라고 허고 자빠졌냐? 가서 똥물이나 한 바가지 퍼묵어라’ 하는 말이 꾸중의 전부였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길러 낸 제자가 안숙선을 비롯하여 동편제의 맥을 이어가고 있는 이난초, 전인삼 등이었다. 이제 그의 육신은 비록 갔지만 소리는 남아서 지리산의 수많은 봉우리며 골짜기를 울리고, 길고 긴 섬진강 줄기처럼 영원히 그 맥을 이어갈 것이다. 그만큼 강도근은 큰 소리꾼이었다.
윤영근 / 소설 ‘동편제’로 널리 알려진 판소리 연구가이자 소설가이다. 남원에서 윤한의원을 운영하는 한의사이기도 하며 남원의 민속과 예술에 대한 관심과 애정으로 평생을 살아왔다. 지금은 예총 남원지부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시
遲耘 金錣洙 선생
이용범
봄비 내리는 토요일
지운 김철수 선생을 찾았습니다.
너무 늦게 찾았습니다.
당신 봉분 앞에서
세상은 작았습니다.
작은 비석 앞에서
초라했습니다.
당신 사상
꿈꾸던 세상
당신이 강릉서 가져왔다던 오죽(오죽)이
지운당 앞에 늘 외롭고 높고 당당히 자라있습니다.
당신 기일
모스크바에서 달려온 증손주처럼 훤칠했습니다.
당신의 모종을
정성으로 기르는 사람들이 먼저 술잔을
비웠습니다.
싸르르 온몸을 후렸습니다.
마당 한가운데
키 큰 산목련이 봄을 재촉합니다.
당이 젖어들면서
우리는 나섰습니다. 질척이는 황토
밟으며
온몸 젖으며
이용범 / 부안백산고등학교 교사, 1961년 줄포 산, 1986년 원광대학교 국문과 졸업.『소설문학』시부문 당선 시집『너를 생각는다』(1995)등. 올바른 교육활동을 생각하며 통일의 내용을 담은 좋은 시를 쓰고자 한다.
제 48회 백제기행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이 작은 들꽃
글/유혜숙 코끼리 유치원 원장
말만 들어도 설레이는 ‘섬진강변의 들꽃기행’이라는 타이틀에 이끌려 우리끼리 의견을 모으고 전화를 했을때는 이미 손잡고 나설 자리가 없이 되어 버렸다는 것이었다. 사람 마음이란 참.
이왕 내친김에 다른 곳으로 떠나 볼까했으나 ‘섬진강변의 들꽃’으로 흔들어진 마음을 추스릴 수가 없었고 급기야 우리는 가장 한국인다운 정서로(?) 문화저널에서 일하시는 Y씨에게 줄을 대어보고 그래도 어렵다 해 겨우겨우 승낙을 받아승용차를 타고 따라붙기로 작정을 하고 말았다.
마침내 그날.
진짜 일행은 한 사람도 나타나기 전인 출발 장소인 전주공전의 벤취에 6명 전원이 진을 치고 앉았다. 각자가 싸가지고 온 소풍가방(?)을 내려보고 시계보랴 버스쪽 눈치보랴 마음이 바쁘다. 약속된 출발 시간이 되었을 때 인솔자에게 혹 빈자리가 있을지... 슬쩍 얘길 꺼내보지만 전날 저녁까지 다시 확인했으나 한 사람도 불참자가 없었다는 답을 듣고 일단 포기, 승용차에 올라 따라붙을 준비를 한다. 그 뒤 몇분쯤 뒤였을까. 웬걸. 어젯밤 과음으로 그리고 오늘 피치못할 결혼식 참석으로 무더기 결석생이 생겼다는 ‘희소식’...우와~ 그럼 그렇지. 특공대 작전에 성공하여 전원 무사히 구출이라도된 듯 우린 정신없이 기쁜 마음으로 보무도 당당하게 버스에 오른다.
룰루랄라. 차창밖으로 보이는 먼 산의 진달래며 시골집 담장의 개나리, 그리고 희끗희끗 노릇노릇 발그레한 들꽃들. 여유롭게 풀 뜯는 소... 그 정도는 전주시내만 벗어나면 언제라도 볼 수 있는 것이었지만 들꽃기행에 대한 기대 속에 그지없이 행복한 마음으로 어느것 하나라도 놓칠세라 우린 눈을 크게 뜬다. 얼마쯤 가다가 문화저널 편집장이며 총각같은 원도연 씨의 사회로 일행들의 각자 소개가 시작되었는데 설예원, 예수병원, 코끼리 유치원, 순창의 백조, 정판사 식구 등등.
온 나라가 다 벚꽃 구경하러 나갈때에 잔조롬히 들꽃보러 나온 사람들인만큼 차안의 분위기는 다분히 가족적이고 눈만 마주쳐도 웬지 더 정겹기만 했다. 중·고등학교때 소풍가는 기분이 되어 간식준비하며 밤새 설레였다는 듯 코끼리 최 성생의 이야기로 차안에 웃음이 번지고 최선생의 가방에서 쏟아져 나오는 삶은 달걀이며 방울토마토, 과자 등은 장난이 아니었다나. 그 간식을 압수(!)해다가 이리저리 맘대로 인심쓰고 다니시는 정판사님 덕에 웃고, 쌍둥이 조카(?) 둘을 데리고 왔다는 NO총각 최경수님의 “최선생 가방속에 또 뭐 있어?”라는 장난어린 관심에 웃으며 한시간 남짓 갔을까.
임실군 진메마을 어귀에 내렸을 때 일행 중 누군가가 김용택 시인이 마중나와 있다고 한다. 어디 어디...? 김용택 시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길안내하러 나온 듯한 머리모양과 체구가 코미디언 송해 닮았지만 송해보다는 좀 예쁘게 생긴 젊은 아저씨가 한 분 서서 웃고 있다. 설마... 설마가 사람잡았다. 그분이 바로 우리가 만나고 싶어했던 섬진강의 시인 ‘김용택 님’이시란다. 아하 그랬구나 참 작은 분이셨구나. 고추에 비하면 재래종 고추이고(실례!)
꽃에 비한다면 또끼풀을 닮아 있는 그분을 보며 지도에도 나와있지 않은 동네강변과 식물도감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은 풀에 의미를 부여해준『섬진강』시가 생각났다. 어딘가에 그윽한 시심과 끈적이는 ‘우리’에 대한 애착이 숨어있겠거니... 부지런히 모습을 훔친다.
김 시인의 뒤를 따라 그가 자랑해 마지않는 진메마을을 향해 푸석하고 우둘투둘 멋없는 흙자갈길을 걸을 때, 어딘가에 흐드러지게 피어있을 들꽃에 대한 기대로 발걸음이 가볍다. 그렇게 30분쯤 걷다가 강이 보이는 편편한 들판에 멈춰서고 40명쯤 되는 우리일행이 오손도손 자리잡고 앉았다. 한때 시인의 출퇴근길로 진메마을에서 천담분교까지 매일 강길 십리를 걸으며, 그가 보았던 세세한 변화와 경이와 시원한 전라도 사투리에 실어 강연을 시작했다.
작은 돌멩이 구르는 소리 하나에도 근원을 생각한다는 시인은 우리들 생명의 근원인 어머에게도 남다른 애정을 가진 듯, 어머니 얘기를 더욱 신명나게 이어간다. 제대로 학교 한번 다녀 본 적이 없는 분이 임실 일중리 가는 차를 정확히 타고 오시고, 장독대 돌멩이 하나 옮길때에도 손 없는 날을 찾고, 뜨거운 물 한 바가지 버릴 때에도 땅 속의 미물들이 다칠까 마음쓰시며, 학명은 모르나 130여가지 풀이름까지를 다 알고 계신다는... 자연과 더불어 사신 당신의 어머니 이야기가 줄줄이 이어져 내릴 때 듣는 우리들 마음 또한 어느새 어머니에 닿아있다. ‘마을 앞산만 바라보고도 가슴뛰게 감동하며 천년을 살수 있겠다’는 시인은 ‘국내 어느 봄나들이보다도 우리 동네 감나무 위로 오는 봄이 제일 아름답다.’ 고 이야기한다. 우리 것에 대해 무심하고 무지하며 모르고 사는 우리들을 깨우치기에 충분한 말씀. 늘 보는 것에 대해 감동할 줄 아는 마음을 소중하게 배운다. ‘물괴기 잡는 얘기만 헐래도 하루 죙일이고 헐 얘기가 너무너무 많아서 클났다.’고 소리내어 웃는 시인의 말씀을 끝으로 자리를 털고 일어나 ‘다래를 잘구로 겁나게 따 담으며 왔었다.’는 그길의 나머지를 걷는다. 앞서거니 뒷서거니 서로 부르고 손잡으며, 중간 어디쯤에서 하 - 웃으며 모두 모여 단체사진을 한 장 박아둔다.
서로 다른 모양의 잎과 꽃색이 다른 민들레를 보면서 달래를 보았고 꺾으면 노란 진이 나오는 얘기똥풀, 흰색으로 흐드러지듯 핀 이팝나무(쌀밥과 같다고 해서)와 조팝나무, 현호색, 싸리나무, 꽃다지, 개불알꽃... 우린 수없이 묻고 확인하고 되물으며 길을 걸었다. 아! 들꽃은 정녕 이름모를 꽃이어서 아름다운게 아니었다. 그 작은 꽃 하나하나에 꼭 어울리는 이름을 갖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더 신기하고 더욱 아름답게 느껴졌다.
누구의 손엔가 『쉽게 찾는 우리 꽃』이라는 작은 책이 들려있음을 보았고 공부하러 작정하고 준비해 온 그가 우리 일행 중 젤 자랑스럽게 느껴져 다시 한번 바라본다. 눈이 마주치니 웃는 얼굴이 들꽃같다.
20분쯤 걸어서 당도한 마을. 임진왜란 때 나주와 남원 방면으로 이 땅을 유린하던 왜군에게 쫓기던 농민들이 깊고 깊은 산중으로 피신을 와서 이룬 마을로 마을 앞산이 그 크기와 높이에 비해 유난히 길어서 진뫼마을→진메마을이라 불리었다지. 누가 그렇게 지었는지는 모르지만 우리네 산골이나 농촌 어디를 가든 그 지형의 특징을 딴 마을 이름들이 많은 걸 볼 수 있는데 그 이름들 또한 부르기 쉽고 생긴 모양대로여서 일부러 외울 것도 없고 가르칠 것도 없었으며 사람들이 살아가며 스스로 눈에 발에 몸에 마음에 익혔다고 한다. 예를 들어 물 위에 있으니 물우리마을, 새로 생긴 마을이니 새말, 해가 마을 한가운데 뜨니 일중리, 비묻어오는 골짜기는 우골이요 삼이 잘되어 삼밭골, 절이 있던 곳은 절골, 밭이 평평하면 평밭, 벌이 잘 붙으면 벌통바위, 자라가 많이 올라오면 자라바위, 쏘가리가 앉으면 쏘가리방죽, 다슬기가 많으면 다슬기 방죽, 논도 생긴 모양대로 해서 장구배미, 자라배미... 이런 식으로 끝도 한도 없는 이름들이 재미스럽기만 하다.
그냥 지나칠 수 있는 평범한 시골마을 이었지만 마을에 대한 자부심과 긍지가 대단한 김 시인의 마을이어서인가. 몇 채 안되는 마을 바로 앞으로 섬진또랑(섬진강이라고 하기에는 좀...)이 흐르고 그 또랑 가에 층혼을 이룬 바위들이 여기저기 잇대어 펼쳐놓여져 있었고 물건너로 이 마을의 이름을 결정지워준 긴 산이 마을 앞쪽을 한폭의 동양화같은 풍경으로 연출해 내고 있는 셈이다.
‘여름밤엔 아무데나 둔너버리면 잠을 잘 수 있다.’는 벼락바위에 모두 앉았을 때 진메마을 앞 강변과 강물을 지켜주는 신이 된 느티나무를 가리키며 옛날 도군이었다는 홀애비 서춘 할아버지가 백년쯤 전에 뱃마당가에 심었다는 이야기를 하다가 “하루종일 깐닥깐닥 헐꺼싱게 밥이나 먹고 합시다.”는 말씀에 고기굽는 냄새 속에 고픈 배를 고민하던 우리들은 모두 박수를치고 좋아한다. “클났네. 나는 얼매나 배고프겄어 으하하...” 마음을 비운 시인의 거칠 것 없는 웃음소리.
불판에 옹기종기 모여앉아 삼겹살을 구워내고 막 담궈온 김치와 풋고추와 상치를 곁들이니 진수성찬이 따로없다. 주최측의 총각기자가 막걸리병을 권할 때는 사양하던 우리도 어느새 분위기에 취해서 슬그머니 두병씩이나 산을 병풍삼고 흐르는 소리는 권주가 삼아 분위기있게 한 잔씩 걸치니 왕후장상이 부럽지 않더라.
진메마을 누군네의 뒷간을 구경삼아 모두 한 번씩 거쳐서 차에 오르고 시골길을 십여 분쯤 가니 물우리 마을에 이르른다. 시인이 근무한다는 덕치국민학교가 적당한 거리를 두고 보기좋게 내려다 보이는 마을 어귀 정자에 빙 둘러앉아 ‘이짜그 저짜그’ 가리키는 대로 고개 돌려가며 착하게 선생님 말씀을 공부한다.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격인 느티나무, 마을 앞에 저수지가 있다면 그건 그 마을에 불이 잘 난다는 표시, 마을의 젤 허한 곳에서는 소나무를 심어 그 기를 강하게 한다는 등등... 새로운 배움에 고개를 끄덕이다가 막걸리 기운과 곤한 식곤증에 졸기도 하더니 개량 한복을 잘 챙겨입으신 최명호 님의 대금연주로 모두 정신이 난다. 끊일 듯 끊일 듯 이어지면서 애를 태우는 노래를 서용석류 대금산조라나. 어찌 클라리넷이나 오보에 소리에 비하겠는가. 역시 우리 것이 좋은 것이여!
연주가 끝났을 때 누군가가 즉석에서 물을 끓여 청하는대로 후하게 타준 커피 맛은 그 자리에 앉아 평생을 커피만 마시고 있으래도 좋겠다 싶은 꼭 그만큼이었다. ‘창원의 정판사님’이 아닌 창원 정판사의 송사장님 내외였다. 땀도 가시고 졸음도 가시고 충만한 마음으로 되돌아 걸어 차에 오른다. 작은 구멍가게에서 신 자두맛 사탕을 배급주고 입에 오물거리며 왜들 안오나 했더니 도중에 월파정에 들러 온단다. 되돌아오는 길 어디에 그런게 있었나.
다시 차를 움직여 골짜기로 더 깊숙히 들어갔는가 했더니 회문산어귀 안정리란다. 임실, 순창, 정읍의 경계선인 회문산. 아침부터 훈련 해온대로 감동하는 마음으로 바라보아서인지 산등성이 군데군데 희끗거리는 이팝나무 한두그루. 분홍빛으로 흐드러진 산복숭아 몇 그루가 참으로 아름답다. 더구나 회문산은 이태 씨의 『남부군』과 조정래 씨의 대하소설『태백산맥』에서 익혀온 터라 입구에서부터 제법 울창해 뵈는 어디선가 제복을 입은 빨치산이라도 나옴직하고, 한 조국을 두고 상반된 이데올로기로 피흘리며 고뇌했던 그들 생각에 잠시나마 가슴이 뻐근해지고 눈앞이 흐려진다. 이른바 해방구였다는 이곳 지형을 보매 더욱 그럼직하다.
산골짜기로 줄줄 흐르는 물가 바위에 모두 걸터앉고 맞은 편 높고 큰 바위에 솟아 앉아 우리를 향해 연설하는 김 시인이 마치 빨치산 위원장쯤 되보인다며 웃는다. 그저 심심해서 시를 쓰기 시작했다는 김 시인의 진솔한 고백에 이어 좋은 문학은 죽어가는 것을 살려내는 것이라 힘주어 말하더니 무엇이나 정확하게 알고 잘 쓰는 시인이 김용택이라는 자찬은 빼놓지 않는다. 자랑도 할만하면 해야지요.
이야기는 어느덧 회문산 일대에서 영화찍은 이야기까지 갔는데 연신 싱글벙글 철없는 중고생같은 표정이 되어 안성기, 박중훈같은 배우들하고 같은 나라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 그렇게 자랑스럽고 행복할 수가 없다고 생각한다. 이야기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1박 2일의 일정과는 달리 당일코스는 겨우 마음이 열리는가 싶으면 끝날 무렵이 된다. 어느새.
한 번 이름을 들으면 평생 잊혀지지 않을거라 장담하는 문효녀 씨가 우리를 대표해 노랫말이 그리도 잘 어울리는 장소에서 산노래 ‘한계령’을 회문산에 선사하고 우리의 하루를 이끌어 주신 김용택 시인과 헤어져 돌아오는 길.
영화의 한 장면처럼 섬진강변 어딘가에 흐드러진 들꽃을 볼 수 있겠거니 했던 우리들의 기대는 사라져 입을 모아 아쉬움을 애기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 우리 산하에 피어있는 작은 들꽃에 눈돌릴 줄 알게 되었고 늘 보는 진달래며 개나리가 겨우내 어찌 지내다 때가 된 걸 알고 저리도 예쁘게 피었을까 감동하는 마음 그것이다. 그래 지금 당장 서점에 들러 김용택 시인의 시집을, 그리고 우리 꽃에 관한 책을 사 들고 들어가리라. 하찮아 뵈는 세상의 모든 것에 감동하며 유명시인이 되어서도 마을을 지키며 죽는 날까지 욕심없이 살아갈 시인의 마음을 닮아보리라.
대학문화를 생각한다 ①
정체성의 위기, 그러나 한국사회의 희망은 거기에 있다.
글/원도연 「문화저널」편집장
흔들리는 대학(?)
대학이 흔들리고 있다. 불과 얼마 전까지도 한국사회를 풍미했던 신세대 담론이 주춤하고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대학의 변화를 실감하고 있다. 실제로 90년대 초반까지의 대학사회의 팽팽한 긴장은 상당히 완화되어 있다. 대학의 풍속도가 달라지고 있는 것이다. 80년대에는 어림없었던 대학가의 쌍쌍파티가 등장하고 축제는 말 그대로 축제가 되는 한편, 어쩌다 열리는 학생회 주최의 집회현장은 썰렁하다 못해 측은해 보이기까지 한 것이다.
이러한 변화를 두고 많은 사람들이 우려의 눈길을 보내고 있다. 70년대와 80년대를 거쳐오면서 현실 변혁의 기지로 역할해 오던 대학이 이제 소비의 메카로 전락해 버린 것은 아닌가. 대학 문화를 둘러싼 논쟁은 대학의 역사만큼이나 오랜 것이지만, 최근의 대학문화를 두고 벌어졌던 토론은 자못 뜨거운 것이었다.
대학문화와 신세대를 먼저 문제삼은 것은 언론과 자본이었다. 90년대 초반의 대학문화가 이전과는 질적으로 다른 양상을 보이고 때마침 신세대 담론에 불을 지필만한 사건들이 곳곳에서 터져나왔다. 오렌지족이니 야타족이니 하는 신조어들이 속속 생산되면서 거의 모든 매체들이 이른바 신세대 담론에 주목했다. 그러나 역시 가장 발빠르게 신세대 담론에 적응한 것은 자본이었다. 신세대는 이미 문화상품이 노리는 최대의 소비시장이 되었고 그들을 겨냥한 온갖 아이디어 상품과 감각적인 광고들이 쏟아져 나왔다. 풍요로운 소비와 당당한 개성으로 무장한 신세대들은 확실히 이전의 세대와는 다른 감성을 보여주었다.
각광받는 신세대
80년대를 풍미했던 계급담론이 쇠락하고 문화가 해로운 담론구조를 형성하면서 신세대는 다양한 의미에서 각광을 받았다. 저항문화의 보고(寶庫)이면서 한국 정치사회사에 있어서 마지막 보루였던 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