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1 | [특집]
사실의 기록에서 광주의 정신까지
오월 문화의 작품들
정리/편집부
(2004-02-12 11:15:33)
광주의 명예회복, TV프로그램 <어머니의 눈물>과 <모래시계>
오월문화에 가장 인색했던 한국의 방송사들은 88년 국회에서 광주특위가 구성ㄷ되고 청문회가 여리면서 조금씩 역사의 진실에다가서기 시작했다. 89년 5월 문화방송의 특별 다큐멘터리로 제작된 <어머니의 눈물>은 80년 광주를 정면으로 다룬 최초의 TV프로그램이라는 의미를 갖는 것이다.
<어머니의 눈물>은 80년 광주항쟁의 진상을 당시 외국 방송사들의 자료필름과 89년 현지의 광주를 교차시키면서 진실에 한발 다가서는 노력을 보여주었다. ‘당신은 천서였오....’로 시작되는 광주의 한 묘비와 그 죽음과 삶에 얽힌 사연들은 애절했고, 그 속에서 일순간에 무너져버린 한 평범한 삶은 전국의 시청자들에게 어떤 말보다도 강렬하게 광주를 증언해 주는 것이었다. <어머니의 눈물>과 함께 한국방송공사는 <광주는말한다>를 특집 다큐멘터리로 제작해 방영했고, 90년에는 문화방송의 PD수첩이 이어졌다. 그러나 이후 양 방송사는 “역사적 평가는 일정한 시간이 지나야 정확하게 평가 될 수 있으며, 아직도 진상이 밝혀지지 않은 광주문제에 대해서 객관적인 접근이 어렵다”는 이유로 5월 광주에대해서 침묵했다.
그러나 95년 서울방송의 <모래시계>는 방송드라마 사상 최대의 화제를 불러오면서 광주는 아직 끝나지 않은 시대적 과제임을 다시 확인시켰다. 드라마 <모래시계>속의 ‘광주’는 전체 24부중 2부에 불과한 것이었지만 PC통신에 무려 1천여 건의 감상소감이 쇄도하고 때를 같이하여 시청율이 수직상승하면서 ‘80년 광주’가 여전히 국민적인 관심사로 남아 있음을 보여주었다.
오월의 상처를 어루만진 극단 ‘토박이’의 <모란꽃>
‘광주항쟁에 직접 참여했던 주부 이현옥은 항쟁이후 계속되는 악몽과 주위의 압력에 시달리다 정신과 전문의의 소개로 심리학 교수를 찾는다. 교수는 이현옥이 항쟁의 충격으로 심한 정신질환을 앓고 있음을 발견하고 사이코드라마를 통해 당시의 참혹한 진압광경과 그를 남파간첩 모란꽃으로 조작하려는 고문과정 등을 재현하낟. 그 과정에서 그녀는 스스로아픔을 치유하고 기쁨과 희망을 찾아간다.’ 광주항쟁을 다룬 연극 가운데 단연 대표작으로 꼽힐만한 연극 <모란꽃>의 줄거리이다. 광주의 민족극단 ‘토박이’의 <모란꽃>은 광주항쟁의 충격과 상처를 직접 드러내지 않고 심리극 기법을 사용 예술적으로 승화시켰다는 평가를 받고있다.
<모란꽃>은 작가이자 연출가이면서 광주항쟁을 시민군 홍보부장으로서 직접 겪었던 박효선 씨의 작품으로 <금회의 오월>과 함께 그와 극단 ‘토박이’가 80년 이후 지속적으로 만들어온 오월극의 대표작이다. <모란꽃>은 93년 10월 광주 민들레소극장에서 초연된 이후 94년 민예총이 선정한 제 4회 민족예술상을 수상했고 95년 5월까지 전남지역, 부산 대전, 청주, 등지와 캐나다. 미주 등을 순회하면서 연인원 20만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박효선 씨(42)는 광주항쟁 당시 소극장을 꾸미면서 <한씨 연대기>를 준비하던 중 “사람이 죽어가는데....”라며 하던일을 작파하고 단원들과 함께 도청으로 달려갔다. 80년 이후 그는 오월 광주에 대한 일련의 연극 작업들을 통해서 ‘오월 광주의 전도사’가 되었다. 그러나 그가 해온 작업들은 상처받은 사람들에 대한 치료와 대동세상으로 표현되는 항쟁기간 동안 광주의 공동체 정신을 계승하는 일에 집중되어 있다. “광주항쟁을 바라보면서 너무 역사성을 우위에 두고 사회사적이고 역사적 사건으로만 간주하는 경향 속에서 개인의 아픔과 고통은 간과되고 있다.”고 그는 말한다.
‘토박이’는 올해 2월초부터 3월까지 지방극단으로서는 거의 처음으로 서울 대학로에 입성, 서울문화에 도전하면서 뜻깊은 성과를 거두었다. 광주항쟁과 관련해 13년간 미국에서 도피생활을 했던 윤한봉 씨는 서울공연을 보고 나서 “오랜 시간동안 나를 괴롭힌 ‘도망자’라는 생각에서 벗어나게 해주는연극”이었다고 평가했고 그만큼 이 작품은 광주의 상처를 인간적으로 접근한 수작으로 남았다.
광주항쟁의 사실기록, 임진택의 창작판소리 <오월광주>
(엇중모리)“광주시민 여러분 나는 대통령 최규하요. 이번 사태로 인해 얼마나 슬프시오, 원인이야 어쨋건 이대로 오래가단 국가안보가 위태롭소, 북한공산집단에서 악용하면 어쩔테요 야만적 대결보다는 대화로써 해결하여 문화국민이 됩시다.....”
광주항쟁 14년만인 94년 5월 광주에서는 이를 공식적으로 기념하는 첫 번째 문화제가 열렸다. 문예회관 대극장에서 열린 인잘 행사에는 오월 심리극 <모란꽃>과 함께 임진택의 창작판소리 <오월광주>가 초청되었다.
880년대 민족문화운동의 실천가이자 민족극의 선두주자였던 임진택의 창작판소리 <오월광주>는 79년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에서 시작해 전남도청 함락으로 이어지는 광주항쟁의 10일간을 걸쭉한 재담과 신랄한 풍자로 엮은 일종의 역사적 기록이다. 그가 사설을 쓰고 곡을 붙이고 소리를 한 이 작품은 황석영의 광주항쟁기록「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와 홍희담의 「광주민중항쟁비망록」을 저본으로 삼은 사실 그대로의 기록에 충실한 것이었다. 그러나 90년 서울의 마당극장 ‘한마당’에서 초연된 이 작품은 90년에 이르기까지도 여전히 비공식적인 작품활동으로 이어졌다.
그에게 이 작품은 ‘벗을 위한 진혼곡’이었다. 79년 12월말 광주에서 우연히 만난 문화패대표 윤상원 씨는 임씨가 불렀던 ‘소리내력’을 멋들어지게 불러제껴 임 씨와 가까워졌으나 그로부터 몇 달 후 도청을 사수할 때 최후의 지도자로 나서 항쟁하다 긑내 목훔을 잃고 말았다. 임진택 씨는 ‘가슴이 복받치게 통곡하는 장면을 연습하며 실제로 많이 통고했다’며 죽은 벗에 대한 그리움을 이야기했고 그래서 <오월 광주>의 끝은 윤상원 씨의 영혼결혼식 때 불려졌던 <님을 위한 행진곡>으로 마무리 되었다.
이 작품은 전통 판소리 다섯바탕의 견고함에 대한 과감한 시도로 평가되었으며 소리 대목대목마다 관중들과 함게 부르는 노래 함께 외치는 구호 등이 삽입되어 마당극적 요소까지 가미된 문화적 실험으로서의 의미도 동시에 지니고 있었다.
재독음악가 윤이상의 사모곡 <광주여 영원하라>
94년 8월 국내 언론은 일제히 재독음악가 윤이상 씨의 25년여만의 귀국을 보도했다. 그러나 윤이상 씨는 끝내 서울행 비행기에 오르지 못하고 그 다음해인 95년 11월 3일 독일땅에서 타계했다.
윤이상 씨는 1967년 ‘동백림 사건’때 간첩으로 몰려 독일에서 한국으로 납치되어 갖은 고문과 악형 끝에 2년 동안 옥살이를 하고 독일로 돌아간 뒤 다시는 고향땅을 밟지 못한 비운의 천재 음악가였다. 그는 분단의 현실을 몸으로혹독하게 체험했고 그만큼의 고통으로 통일을 염원했다. 그는 독일에서 80년 광주항쟁의 침상을 목도하고 81년 독일 WDR방송의 위촉을 받아 <광주여 영원히>를 작곡했고, 이 작품은 그해 5월 와카스기가 지휘한 쾰른 방송교향악단에 의해서 초연되었다. 과거 현재 미래의 3부로 구성된 이 곡의 1부는 봉기와 학살, 2부는 경악과 비탄과 통곡, 3부는 한국의 민주주의와 정의회복을 호소하는 내용을 담았다. 이 곡은 탐파니■실로폰을 통해 분노의 함성과 격동적인 상황을 표현하였으며, 이어 금관악기와 팀파니로 호소하는 듯한 외침소리를 사실적으로 형상화해 결정에 이른 뒤 트럼펫과 트럼본으로 민주주의에 대한 염원을 나타냈다.
윤이상의 <광주여 영원히>는 그의 ‘참여음악’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분류되었으며, 94년 9월 서울, 광주, 부산 등에서 열린 ‘윤이상 음악제’를 통해서 국내에서는 처음으로연주되었다. 이 음악제를 통해서 ‘불온한 반체제인사’ 윤이상은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음악가로 추인되었고, 그의 음악이 갖는 정교한 고난도 테크닉은 사회적 메시지와 예술적 완성도를 잘 결합시킨 높은 예술성을 보여주었다. 특히 서울시립교향악단(지휘 임원식)의 연주로 진행된 광주공연에서는 광주문예회관을 가득 메운 1천 7백여 명의 시민■학생들의 열렬한 박수를 받았다.
현대무용의 제도권으로 진입, 현대무용단 ‘사포’의 <그해 오월>
전북에서 활동하고 있는 현대 무용단 ‘시포’(예술감독 김화숙)는 95년 5월 광주문예회관에서 <그해 오월>을 올렸다. 이 공연이 남다른 의미를 가졌던 것은 ‘사포’가 그동안 끊임없는 창작 활동과 실험적인 무대를 꾸며왔지만 주로 추상적인 현대춤의 영역을 개척해왔던 흐름에서 80년 광주를 직접적으로 형상화했다는 점 때문이었다. 그동안 민족춤 지향적인 춤꾼들에 의해서 형상화되어왔던 오월이 이른바 제도권 춤의 영역에서도과감하게 다루어지기 시작했다는 점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사포는 이 공연의 목적에서 “그 해 오월은 우리 모두가 증인이었던 역사 속의 사실을 오래도록 마음에 남을 수 있는 예술작품으로승화시키고 객관적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는데 창작과 공연의 목적이 있다.”고 밝혔다. 이 공연은 모두 4개의 장면과 7개의 이미지로 구성되었다. 첫 번째 장면은「어머니, 이제 그만 울어요」라는 주제 속에 ‘낮은 신음소리’, ‘볼 수 없는 얼굴들’이라는 두개의 이미지가 춤으로 표현되었으며, 두 번째 장면은「젊은 무등」이라는 주제속에 ‘참지 못할 분노’, ‘고독한 거리’가 이미지화되어 그날의 치열한 현장을 생생하게 재현해냈다. 세 번째 장면은 항쟁이 끝난 황량한 거리의 사람들이 「숨길 수 없는 노래」라는 주제로 그려졌다. ‘질퍽이는 눈동자’, ‘지워야 할 기억’이 세 번째 장면의 주요 이미지로 구성되었다. 마지막 네 번째 장면은 광주항쟁의 정신과 관련된 주제로 구성되었다.「참 좋은 세상」이라는 주제 속에 남은 하나의 이미지는 ‘우리가 그리던 세상’이었다.
■인터뷰
치열한 작가정신의 80년대
송만규(화가■전 민미련 공동의장)
카톨릭 센터에서의 집회, 전북대 학생회관에서 숨어서 며칠 동안 잠못자고 그려대던 걸개그림, 수없이 찍어댔던 판화, 밤새워 계속되는 수많은 회의와 토론들... 80년대 초의 모습이다. “83년 이리에서 열었던「땅」전을 기억합니다. 아마도 전북지역에서는 가장 처음으로 한국 근대사와 80년 오월을 매개한 죽품들이 출현했던 전시회였습니다.”
80년대 중반 이후 차츰 조직화되고 단련되기 시작한 미술운동은 ‘민족미술협의회’를 거쳐 88년 ‘민족민중미술운동전국연합’이 창립되면서 미술운동의 새 장을 열었다. 이때 송만규 씨는 홍성담 씨와 함께 공동의장을 맡아 미술운동의 주축에 섰다. “80년대 초 오월문화에 있어서 예술인들의 개인적인 작업이란 엄두도 낼 수 없었습니다. 모두가 선진일꾼이었습니다”
80년대 오월문화의 한 축을 받들고 있었던 미술인들은 작가라기보다는 각기 개별적인 활동가들이었다. 그러나 그 시기 문화운동들은 장르를 통합하는 집체적인 성격을 지니고있었고, 미술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당시 문화운동을 이끌던 송만규 씨는 “이제는 그 당시를 기억해내고 정리해야할 필요가 느껴진다.”고 말한다.
광주의 깊은 상처의 영화 <꽃잎>
‘오월, 그날이 다시오면.’이라는 노래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꽃잎’의 의미를 어렵지 않게 바로 알아낸다. 장선우 감독의 영화 <꽃잎>은 80년 5월 광주에서 꽃잎처럼 스러져갔던 사람들에 대한 기록이다. 비제도권 영화<오 꿈의 나라>, 최초의 극장영화로 제작되었지만 검열과정에서 무차별적으로 삭제당하는 규제와 내적 역량의 한계를 동시에 보여주었던 <부활의 노래>이후 거의 처음으로 광주의 진실을 한구영화가 담아냈다.
운동권 오빠를 잃고 80년 5월 엄마마저 계엄군의 총에 잃은 채 천지를 떠도는 한 소녀의 회상과, 그 소녀와 운명적으로만나 서로의아픈 상처를 치유해가는 공사판 인부 장의 이야기가 전체적인 줄거리를 이룬다. 영화는 소녀의 회상을 빌어 80년 광주 금남로의 거리를 완전하게 재현해냈고 광주의 한과 상처를 극적으로 보여주었다. <꽃잎>에 주연으로 출연한 여고생 이정현은 귀기 서린 표정으로 배역을 소화해내면서 스타점에 올랐고 영화는 칸 영화제에 출품되었다.
이 영화는 80년 광주의 한과 아픔을 정면에서 다루면서도 시점을 현재 진행형으로 돌려놓는 영화예술의 장점을 최대한으로 살려냈으며 광주문제의 달라진 위상을 다시금 확인시켜 주었다.
광주항쟁의 승고한 상징, TV다큐드라마 <시민군 윤상원>
80년 광주항쟁 당시 마지막까지 전남도청을 사수하다 80년 5월 27일 새벽 산화해간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의 일대기가 광주문화방송의 5■18 16돌 기념 다큐드라마로 제작되었다. 전체 2부로 제작된 이 프로는 항쟁 장면과 그에 관한 기억을 떠올리는 동지들의 증언으로 구성되었다.
1부 ‘투사회보’는 윤상원의 출생부터 항쟁 초기까지의행적을 보여준다. 전남대 78학번으로 정외과를 마친 그는 주택은행 서울 봉천동지점의 평범한 은행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하지만 어느날 그는 돌연 낙향해 위장취업자로 그리고 노동야학교사로 달려져 간다. 그러던 그에게 80년 5월이 다가오고 그는 야학생들과 함께 투사회보를 발간하면서 선전일꾼으로서 광주항쟁의 소용돌이 속에 들어선다.
2부 ‘마짐막 장면’은 80년 5월 25일 진압군의 최후통첩 이후 27일 새벽 도청에서 산화하기까지 사흘간의 항전 기록이다. 시민군 내부의 혼란을 수습하면서 결사항전의 새로운 대오를 꾸리던 그의 곤뇌와 결단의 시간이 2부의 주요한 내용들이다. <시민군 윤상원>은 광주 항쟁 당시 광주를 취재했던 외신 기자들과 그의 최후를 끝까지 지켜보았던 동료들의 인터뷰를 미국, 일본 등에서 현지 취재했으며, 제작기간 1년, 총 출연자 100여 명이 참가한 대작으로 오는 14일과 15일 광주지역에서 방영예정이다. 이 프로그램의 작가 박효선 씨는 주인공 대역을 맡았고 광주의 극단 ‘토박이’ 단원들이 출연했다.
<시민군 윤상원>으느 광주항쟁의기록들이 광주의 진상과 살아남은 자들과 희생자들의삶에 대한 애절한 추모의 내용으로부터 시민군의 주체들을 구체적으로 조명하고 그들의 신념을 기록하는 단계로까지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