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4 | [특집]
소리없는 희망과 통일에 대한 간절한 염원
글 / 원도연 문화저널 편집장
(2004-02-12 11:15:01)
‘80년 광주는 이제 한국 현대사에 새로운 상징으로 자리 잡고 있다. 작년 여름 한총련 의장이 ’전두환, 노태우를 기필코 감옥으로 보내겠다‘고 호기있게 말했을 때 우리는 아무도 그 말을 믿지 않았지만 ’역사‘는 이제 그들을 준엄하게 심판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놀라운 치부가 매일매일 드러날 때마다 우리는 다시 광주를 , 그리고 역사를 생각했다. 그러나 ’세기의 재판‘이 연일 세간의 관심을 모으고 그 자리에서 속시원한 진상들이 쏟아져 나올 것으로 기대했던 많은 사람들은 다시 그 기대를 거두어들이고 있다. 그들은 여전히 강하고 견고한 자신들의 성을 구축하고 있었으며, 무어솝다도 역사화 진실을 대하는 태도가 본질적으로는 다르다는 사실만 거듭 확인될 뿐이었다.
우리가 그들로부터 얻고 싶어하는 것은 무엇인가. 항쟁 16주년을 맞으면서 ‘그들의진실’은 상당한 정도로 밝혀져 있지만 또 많은 부분들은 여전히 미궁에 빠져있다. 그 역사적 사실과 오늘 우리가 알고 느끼고 있는 진실과는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두고 있는가. 광주는 이제 하나의 거대한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지만 그것은 하나의 독자적인 사건으로서가 아니라 현대사의 맥락 속에 위치하고있다. 문화가 한 시대와 사회를 반영하면서 일상의 언어와는 다른 고유한 문법을 지니고 있다면 80년 광주의 비극적 체험은 한 시대의 문화를 그대로 규정했다. 80년 광주는 우리의 현대사 속에서 한국전쟁 이후 가장 극적인 체험을 가져다 주었다. 그속에는 무자비한 살육과 극단적인 저항, 참담한 죽음 그리고 해방과 대동세상의 경험까지 녹아들었고, 그 짧았던 한달여의 시간은 마치 우리가 살았던 근대 백여 년의 역사를 압축한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고통은 죽은 자에게 뿐만 아니라 살아 남은 자들의 삶을 ‘살아 남았다’는 생존의 질서속에 규정했다.
80년 광주를 기억하라
80년 광주항쟁 직후 한국사회는 굴욕적인 침묵과 굴종속에 빠져들었다. 군사독재의 공포 속에서 ‘오월 광주’는 은밀한 구호가 되었지만 그것은 단지 정치적인 영역만을 지배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곧 집단적인 심리적 무력감과 강렬한 패배의식을 불러왔다. 그러나 그 극한적인 절망 속에서 오월은 다시 어김없이 찾아오고 있었다. 아직 많은 사람들이 감옥에 있었지만 ‘그날의 광주’는 독재자들과 제도 언론의 바램처럼 어둠 속에 묻혀 있지만은 않았다. 80년 오월의 사건은 대학가와 전국의 양심세력들에 의해서 서서히 그 참혹한 진상들이 밝혀지기 시자했다. 82년 부산 미문화원방화사건은 80년 ‘5월 광주’에 대한 인식을 민족사적으로 전환시키는 극적인 사건이었다.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이 일어난 이후 오월 광주에 대한 소리 없는 침묵은 서서히 활화산처럼 폭발했다. 83년 대학에서 경찰이 철수하기까지 간헐적으로 기습적인 공세를 펼쳐왔던 민족민주운동은 83년 이후 본격적으로 반격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렇게 열려진 판은 언제나 오월 광주로부터 시작했다. 여전히 80년 광주의 진실이 은폐되고 있을때 전국적으로 불어닥친 민민운동의 거대한 흐름은 광주의 진실을 먼저 물었다. 광주에서 어떤 일이있었는가,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는가, 그리고 그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정부의 발표는 모두 거꾸로 읽혀져서 그대로 진실이 되었지만 진상은 아직도 요원했다. 광주항쟁의 가해자들은 여전히 권력의 중심에 서서 진실을 억압했다. 거의전국적으로 본격적인 공세가 시작되었고 전실을 향해서 장강의 물줄기는 흐르고 있다.
민족민중문화의 실험 - 대중 속으로
광주의 진실에 가장 먼저 접근했던 것은 문화운동의 선두주자들이었다. 70년대 중반에 태동하기 시작했던 민족문화운동은 80년대 초반에 이르러 적극적으로 ‘오월 광주’를 화두로 삼아가기 시작했다. 대학가의 집회문화가 상시적으로 자리잡으면서 문화일꾼들은 그들의 언어와 몸짓으로 광주의 진실을 보여주었다. 제한된 정보 속에서도 그들의 문화적 감성은 광주를 살아있는 역사로 되돌려 놓았다. 서투른 예술이었지만 진실을 말해주고 보여주는 천철살인의 마당극과 비장한 노래 그리고 아직도 피흘리는 듯한 시인의 절규는 사람들을 울렸고 그 눈물은 투쟁의 에너지로 전환되었다. 70년대에 이르러 태동했던 민족문화운동은 여전히 독자적인 무대로 존재하지 못했지만, 한국문화운동사에 가장 빛나는 시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이들이 무기로 삼았던 것은 진실이었고, 그 진실은 곧 강력한 투쟁의 무기가 되었다.
이 시기의 민족민중문화는 독특한 역사적 체험을 겪고 있었다. 그것은 이 시기의 문화운동이 내용적으로는 그 어느때보다도 밀도 있게 민족적 민중적 감서의 기반에 서있었다는 점이었고, 형식적으로는 자의든 타의든 기존 제도문화의 틀을 깨트리지 않고서는 진실을 말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는 사실에 근거한 것이었다. 춤과 노래, 연희의 장르가 복합된 집체극이 대량으로 생산되었고, 그것은 대중들의 수동적인 피사체로서가 아니라 대중 속에서 보호받고 인정받았으며 대중들의 참여 속에서 완성되었다. 미술운동 역시 개인적 작업을 넘어서 집단적인 창작의 분위기가 대세를 이루었다. 작가들은 각기 강력한 하나의 선전일꾼이었다. 미술운동에서 작가들은 대량복제와 속도전에서 장점을 발휘하는 판화형식에 주목했고, 대형 걸개그림이 밤새워 집단적으로 제작되었다.
이렇게 생산된 집체극과 걸개 그림 그리고 노래들은 기존 문화 상품들의 유통구조를 철저하게 무시하고 있었지만 강인한 생명력으로 전파되었다. 그들은 무엇보다도 작가적인 문법이 아닌 대중적인 어법으로 알기쉽고 사실적으로 문화운동에 접근했으며, 그것은 곧 리얼리즘 문화의 전범으로 평가될 만한 것이었다. ‘대중과함께’라는 새로운 문화적 실험은 80년대 민족민중문화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었지만 그러한 접근은 그 아마추어리즘과 곰삭지 못한 계급적 편향, 그리고 그로부터 파생하는 관념성과 도식성으로 인해 80년대 후반에 이르면서 발전적으로 계승되지 못하는 아쉬움을 남겼다.
계속되는 탄압 속에서 단련되다
80년대 중반에 이르면서 전두환 정권은 더욱 강력하고 폭넓은 민민운동의 저항에 직면했고, 그것은 곧 정권의 위기를 가져왔다. 민민운동의 거듭되는 공세와 한층 강화된 힘은 문화운동에서도 새로운 형식과 내용을 필요로 했다. 오월 문화는 이제 더욱 폭넓은 문제의식과 세련된 양식으로 새로운 무대를 찾아 나섰다.
85년 민족민중미술을 꿈꾸는 일단의 작가들은 서울에서 ‘1985년, 한국미술 20대의 「힘」전’을 열었다. 20대 신예작가들은 ‘80년 광주로부터 자양분을 얻어 근대민족사의 흐름을 그들만의 고유한 문법으로 그려냈다. 그러나 「힘」전은 예상대로 정권의 대대적인 탄압을 불러왔고 그 과정에서 미술운동은 거듭 단련되었다. 「힘」전은 ’광주‘의 문제의식을 근대 민족운동사에까지 확장시켰다는 의미를 갖는 것이었지만, 그러한 탄압과 단련은 미술운동 뿐이 아니었다. 거의 모든 문화영역들이 이른바 무대라는 제도화된 공간 속으로 진입해 들어가면서 갖은 탄압과 단련을 거듭하고 있었다.
87년, ‘오월 문화’의 개막
87년 전두환 정권이 막바지에 달하면서 일어난 6월 항쟁은 민족사의 화려한 부활을 예고했다. 짧게 보아 80년 이후, 그릭 길게는 50년대 이후 단절된 민족운동의 전통이 복원되고 변혁운동의 열정이 한 시대를 뒤덮었다. 노동운동이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곳곳에서 진보운동의 전선이 형성되었다. 87년을 기점으로 민족문화운동은 아연 활기를 띠게 되고 각 장르별로 전국적인 민족문화운동체들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민족문학을 표방하는 자유실첝 문인협의회, 민족문학작가회의, 민족문학인협의회 등이 각기 이름을 달리하면서 지역별로 결성되기 시작했고, 미술분야에서는 민족민중미술운동연합 등의 엄격하게 말하면 문화예술단체라기 보다는 문화운동체들이 속속 등장하기 시작했다. 다른 한편에서는 현장에서의 문화운동을 중시하는 움직임들도 활발하게 전개되기 시작했으며, 각 장르별로 특화된 문화예술단체들도 속속 등장하기 시작했다.
‘오월 문화’는 비로소 본격적으로 무대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오월 문화의 진원지는 광주였다. 광주의 민족극단 ‘토박이’는 88년 <금희의 오월>(박효선 작■연출)을 무대에 올렸다. <금희의 오월>은 80년 그 10일 동안의 이야기를 요약적이면서 정공법으로 그려냈다. 이 작품은 대학생 이정현을 주인공으로 삼아 시민군을 중심으로 한 항쟁의 주도층을, 이정연의 가족을 그림으로써 가족들의 고통과 갈등을 이정연의 부모가 일하는 시장을 무대로하여 일반 광주시민들의 이야기를 그려내고, 이 세 가닥을 엮음으로써 그 항쟁 속의 인간들의 움직임을 총체적으로 형상화한 것이었다. 연극평론가 이영미는 이 작품을 “기록과 증언에 의존한 작품에서는 느낄 수 없는 생생한 인물행동과 심리묘사는, 이제 뻔하다고 느낄 수 있는 그 사건의 실감을 다시 한번 일깨운다.”고 평가했다. <금희와 오월>과 함께 광주의 놀이패 ‘신명’은 88년 서울에서 열린 제 1회 민족극한마당에서 <일어서는 사람들>(김정희 작■연출)을 초연했다. 이작품은 광주항쟁의 사실주의적 묘사에 얽매이지 않으면서도 또 다른 의미에서 광주의 질감을 표현하고 있었다. <일어서는 사람들>은 그래서 다분히 상징적이면서도 편하고 쉽게 사람들에게 광주를 이해시켰다. 절제된 대사와 춤을 통한 치밀한 압축, 특히 긴 천을 이용해서 그날 광주를 뒤덮었던 현수막과 시체를 덮는 천, 죽음에 대한 흔적과 멍에, 민주시민의 머리띠로까지 싱징화했던 표현은 완성도 높은 예술성을 보여주는 것이었다.89년에 들어서면서 ‘이제는 뻔하다고 느껴졌던’ 광주의 오월은 본격적으로 무대에 진입하면서 예술적 완성도를 높였다.
88년 광주 청문회와 오월문화
6공 정권이 출범하면서 본격적으로 광주문제는 정치쟁점화되었다. 여기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이 뒤따르지만 역사는 진보하고 있었다. 88년 6월, 국회에서 ‘5■18 광주민주화운동 진상조사특위’가 구성되고 12■12 군사쿠데타와 군사항쟁이 국회 청문회의 테이블에 오르면서 오월 문화는 밀도있게 그날의 사건을 재현하기 시작했다. 특히 89년 문화방송과 한국방송공사가 광주항쟁 특집으로 각각 내보낸 <어머니의노래>와 <광주는 말한다>는 광주항쟁이 최초로 TV라는 공공의 대중매체에 등장한 것이었다. 문화방송의 <어머니의 노래>는 외국 방송사들의 자료 필름을 통해서 생생하게 그날의 현장을 구성하면서 광주항쟁의 비극과 참상을 고발했으며, 무엇보다도 광주가 아직 끝나지 않은 역사라는 사실을 환기시켰다.
광주는 비로소 완전하지는 않으나마 ‘폭도의 도시’라는 오명에서 공식적으로 벗어났고 한국 민주화운동의 메카로서 그 위치를 다지고 있었다. 그와 때를 같이해서 오월문화는 보다 폭넓게 광주문제에 천착했다. 민족미술의 선두주자들은 88년 7월 <오월 미술전>을 계기로 민미련을 결성했고, 광주에서는 광주미술인공동체가 89년부터 거리미술제를열기 시작했다.
민족춤의 선두주자였던 청주의 강혜숙 춤패는 88년 5월 광주에서 <하나됨을 위하여>라는 통일춤 한마당을 펼치면서서 한국의 근현대사와 통일된 조국의 미래를 주제로 그속에서 5월 광주를 사실적으로 그려냈다. 민족춤의 선두주자로 꼽히는 그는 88년 광주의 공연을 다녀와서 “처음에는 현대사에서 광주가 의미하는 것, 그리고 중요한 진상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공연과정에서 광주시민들과 만나면서 그들이 진정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80년 5월 열흘간의 자치기간동안 자신들의 쟁취했던 민주화된 세상, 사랑의 공동체, 그런 것들이었다. 그리고 그 대동세상의 가치는 인류의 이상이 실현되는 단초가 도리 수 있는 것이었다.”라고 말했다. 이 문제는 그때로부터 지금까지 오월 문화의 가장 중요한 관건이자 광주의 바램이 되고 있다.
90년대에 접어들면서 오월문화는 화려하게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소리꾼이자 마당극 연출가인 임진택은 90년 5월 <오월 광주>라는 창작판소리를 내놓으면서 전통 판소리의 형식 속에 광주항쟁을 사실적으로 담아냈다. 임진택의 <오월 광주>를 기점으로 오월 문화는 거의모든 장르에서 폭넓게 다루어지기 시작했다. 90년 문화방송은 <어머니의 노래>에 뒤이어 PD수첩 3부작으로 <90년 5월, 광주>를 제작 반영했고, 91년에는 광주항쟁을 다룬 최초의 극장영화였던 <부활의노래>(이정국 감독)가 영화관에 걸렸다. 그러나 이때까지의 오월문화는 여전히 많은 제약과 교묘한 탄압을 받고 있었다. 임진택의 창작판소리는 90년의 초연 이후 계속 해서 비합법 공연무대에만 설 수 있었고, 음반은 지하 유통 구조를 통해서만 전파되었다. 이정국 감독의 <부활의 노래>는 90년 공륜의 1차 심의에서 무려 25분여의 분량이 삭제당했고 전투장면과 도청집회장면, 옥중 단식장면 등이 잘려나갔다.
그런 가운데서도 오월문화는 이제 그 항쟁의 중심과 주변에서 살아왔던 사람들의 이야기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93년 광주의 극단 ‘토박이’는 오월 심리극 <모란꽃>(박효신작■연출)을 올렸다. ‘광주는 계속되고 있다’거나 ‘끝나지 않았다’는 역사적 당위 속에서 이해되었던 광주는 이제 사람들의 문제로 제기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오월에서 통일로
93년 이른바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오월문화는 더욱 활기를 띠었다. 94년부터는 광주에서 광주항쟁을 기념하는 문화제가 열리기 시작했다. 이때 광주 무대에는 임진택의 <오월 광주>와 극단 ‘토박이’의 <모란꽃>이 올라갔다. 이어서 95년 5월에는 여기에 윤이상의 교향시 <광주여 영원하라>가 연주되었고, 학살자 35인의 얼굴을 풍자한 얼굴전을 비롯해 거리굿■영화제■재판극■연희극■사진전 등 다양한 예술 마당이 펼쳐졌다.
95년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던 방송드라마 <모래시계>는 광주항쟁을 드라마 속에 삽입하면서 80년 광주의 거리를 드라마 속에서 재현해 냈고, 때를 같이하여 문화방송의 드라마 <제 4공화구>과 SBS의 <코리아게이트> 역시 역사 드라마에서 오월 광주를 그려냈다.
광주의 오월이 역사적으로복권되면서 오월 문화는 암울한 기억 속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광주를 새로운 시각에서 해석하고 조명하는 작품들도 쏟아져 나왔다. 80년 당시 가해자의 입장에 있었던 사람들의 고백전인 작품들이 등장하고 80년 광주항쟁으로 인해 인생이 뒤바뀐 사람들의 삶이 제각기 조명되기 시작했다. 보다 인간주의적인 접근들이 사람들의 공감을 얻어갔다.
80년 광주를 직접적으로 다루고있는 많은 문화예술작품들은 초기의 진상규명에서 역사적 현실이라는 관점으로 그리고 다시 인간주의적인 방식으로 그 접근방법들을 조금씩 달리해왔다. 그 가운데서도 광주의 정신은 하나의 일관된 역사성과 지향성을 갖고 전개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곧 통일의 문제였다.
95년 광주에서 열린 ‘광주비엔날레’는 그 정치적 저의에도 불구하고 역으로 광주의 오월문화를 새롭게 관철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안티 비엔날레’라는 이름으로 불려진 ‘95광주통일미술제’는 광주의 오월 묘역입구에 ‘천하 민족통일 대장군’과 ‘지하 오월정신여장군’을 같이 세우고 1천 2백개이 만장으로 가을 하늘을 뒤덮었다. 그리고 그 위로는 수도 없이 쓰러져간 민주원혼들의 천도와 통일열마의 축원을 띄워 올린 꽃상여가 길 위에 묵직하게 매달려 있었다. ‘민주’와 ‘통일’이라는 간절한 염원은 광주의 오월을 통해서 하나가 되면서 민족문화의 지향을 담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