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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5 | [저널초점]
저널이 본다 ‘흥보가 기가먹혀’와 ‘흥보가 좋아라고’의 사이
글 / 천이두 문화저널 발행인 (2004-02-12 11:11:08)
지난 여름에 소설가 이정준 씨로부터 전화를 받은 일이 있었다. 전남 정성인데 임권택 씨가 한 번 만났으면 하는데 내일 형편이 어떠냐는 것이었다. 임권택 씨와 같이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다음 날 셋이서 만났다. 소설가 이청준 씨는 <서편제>라는 영화의 원작자고 임권택 씨는 그 <서편제>를 감독한 분이다. 이청준 씨와는 익히 알고 있는 터였으니 임감독과는 초면이었다. 점심을 같이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임 감독이 하는 말인즉, 지난번 <서편제>가 뜻밖의 성공을 거두었는데 이제 그 후속 작품을 내야 할 때가 되었는데, 어떤 방향으로 후속 작품을 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나를 만나자는 용건이 바로 이 물음이었던 모양이다. 허나 나에게는 너무도 엉뚱한 물음이 아닐 수 없었다. 그 방면에 완전히 문외한인 나에게는 그야말로 선문답의 무슨 화두(話頭)라도 만난 듯한 느낌이었다. “글쎄요...”하고는 묵묵히 술잔만 주고 받다가 문득 요즈음 테렐비전에 조석으로 흘러나오는 노래가 생각이 나서 “왜 거, 요즈음 한창 유행하는「흥보가 기가 막혀」라는 노래 있지요? 그거 재미있습니다.”라고 무심히 한 마디 하였다. 그랬더니 그는 무릎은 탁 치는 것이었다. 나는 깜짝 놀랐다. 별 생각 없이 한 마디 한 것이었는데, 이 영화의 천재는 그 말에서 뭔가 짚이는 게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무엇이 어떻게 짚이어 무릎까지 치는지, ‘정작 발설한 나로서는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렇다고 왜 무릎을 치느냐고 물어 볼 수도 없는 일이어서 그저 술잔만 주고받으며 흔한 세상 이야기로 한 나절을 보내고 헤어졌다. 이 노래가 전파를 타고 흘러나온 지 얼마 안되어 우리 집 꼬마 아이들이 그 몸짓과 노래를 흉내내기 시작하였다. 익살스런 이 가수들의 몸짓과 가락수가 흥보의 딱한 정황과는 영 어울&#47554; 않은데, 그런 점이 나에게는 어떤 익살기 같은 것을 느끼게 하였던 것이다. 그런지도 벌써 반년 이상이 지난 듯하다. 그 뒤 서편제의 후속 작품이 나왔는지 어떤지, 나왔으면 꼭 한 번 보려니 하고 있는데 나왔다는 소문이 아직 듣지 못하였다. 임 감독과의 무슨 선문답 같은 대화가 있고 난 이후 나는 나대로 생각되는 게 없지 않았다. 육각수라는 젊은이들이 부른 이 노래는 판소리 흥보가의 한 대문을 따온 일종의 패러디이다. 얼마 전 명창 박동진 씨는 텔레비전에서 이 노래를 걸쭉한 재담으로 평하였는데 칭찬하는 내용은 아니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노래는 그 박자나 톤이 흥보가 처한 당시의 정황과는 영 맞지 않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욕심쟁이 놀부가 자기 동생 식솔들을 아무 미련도 없이 내쫓는 장면인데, 그야말로 어느날 갑자기 나가라는 형의 통고를 받고「흥보가 기가 막혀」형더러 그 통고를 철퇴할 수 없느냐고 하소연하는 장면이다. 정황이 이러하무르 판소리에서는 느린 중머리 장단에 하소연하는 계면조(슬픈 가락)로 노래하는 것이다. 그런데 육각수의「흥보가 기가막혀」는 아주 빠른 박자의 경쾌하고 해학적인 가락인 것이다. 판소리의 가락수로 치자면 휘모리 장단에 평우조 가락이라고나 할까. 그 가락은 흥보가 기가막혀 형 놀부에게 하소연하는 가락이라기 보다 흥보가 탄 박통 소에서 쌀이 나와, 밥을 해놓고 하도 좋아서 밥을 뭉쳐 공중에다 던져 놓고 받아 먹고, 던져 놓고 받아 먹고 하는 장면을 노래한 부분과 방불하다. 말하자면 흥보가 형에 의하여 집을 쫓겨나는 마당에 기가 막혀 탄식조로 하소연하는 장면을, 그보다 약 2백년 뒤의 후손인 육각수는 흥보가 밥을 보고 좋아라고 먹는 휘머리의 경쾌한 가락에 얹어서 노래하고 있다는 말이다. 약 2백년 전에 느린 한탄조로 노래하던 부분을 요즈음의 젊은이들은 해학적인 빠른 가락으로 노래하고있으니 그 사이 감성의 표현이 얼마만큼 달라져 있는가를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재미있다고 느낀 것이 바로 이 점이었다. 얼마 전에 언론에서 요즈음의 젊은이들의 노래 취향이 아주 밝아지고있다는 요지의 보도를 한 바 있었다. 사실, 서태지, 김건모, 육각수 이런 가수들의 노래는 박자도 사뭇 빠르고 가락도 경쾌하다.「황성 옛터」니「목포의 눈물」이니 하는 노래에서 보게되는 탄식존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그만큼 젊은 세대의 감성이 밝아진 것이다. 이렇게 감성이 밝아진다는 것은 일단 좋은 일이라 하겠다. 이렇게 밝아진 감성의 젊은 세대들에게 <서편제>같은 매우 어두운 분위기의 영화가 받아들여졌다는 것은 하나의 수수깨끼가 아닐 수 없다. 이런 수수께끼를 풀기 위하여 임 감독은 다시금 수수께끼 같은 제 2의 화두를 준비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야 어떻든「흥보가 기가 막혀」와「흥보가 좋아라고」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이 차이를 분명히 변별하는 일은 문화 예술의 기본 과제이다. 좋아할 일이 많은 것은 기가 막힐 일이 많은 것보다 분명 좋은 일이요, 따라서 좋아할 일을 좋아라 하는 것은 물론 좋은 일이다. 그러나 어느 시대 어떤 민족의 경우라도 결국 좋아라 할 일이 있는 반면 기가 막혀야 할 일도 있기 마련이다. 모든 형상은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을 아울러 갖추어서 이루어지는 것이며, 문화 예술이란 요컨대 그 이쪽 저쪽을 아울러 포괄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요즈음의 청소년 문화에서 볼 수 있는 바 밝은 면이 많아진 것은 일단 좋은 일이지만, 그러나 그 밝은 면의 다른 한짝이 곧 어두운 면이라는 사실을 모른다면 이는 &#50522;기 성숙한 성인의 문화라 할 수 없다. 역시 인간은 흥보가 그러했던 것처럼 좋을 때는 좋아라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요 기가 막힐 때는 기가 막힐 수밖에 없는 것이 자연이다. 문화의 지속성 전통의 동질성 같은 문제도 이런 기반 위에서만 운위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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