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5 | [저널초점]
저널 여정
미당의 ‘질마재’에서 ‘선운사’까지
글/김태호 문화저널 기자
(2004-02-12 11:10:35)
철 없는 것들 속에서 들은 또다시 바쁜 철이돼간다.
고창 흥덕으로 간다. 버스는 많다. 전주 완산동 터미널에서 탄 버스가 흥덕에 도착하기까지는 시간 남짓 걸린다. 흥덕에서 선운사가 아닌 선운리 가는 시내버스는 그리 많지 않다. 그래도 삼십여 분, 밥 때라도 걸리면 사십여 분쯤 한눈팔고 있다보면 쉽게 버스가 온다. 그 사이 고픈 배도 달랠겸 터미널 안에 있는 가겟집 아주머니와 친해두면 눈빠지게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
전라북도 땅은 한국문학사의 커다란ㄹ 줄기를 크게 휘도는 한 굽이에 미당 서정주(81)를 낳았다.「문둥이」,「자화상」,「무등을 보며」,「동천」을 비롯한 그의 수많은 시어들 속에는 아름다움보다 더한 시적 자유가 담겨 있고 질박한우리의 말들이 살아있다. 그는 한국 시문학을 개척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면서 ‘친일문학인’이란 오명을 함께 안고 있다. 미당은 훗날 우리 민족의 자존과 강산이 침탈당했던 억압과 고통의 시절을 살면서, 부끄러운 날을 살았다고 자술한 적도 있다. 시는 다른 문학양식과 마찬가지로 일체의 정신적 산물이며 인간 정신 세계의 자유로운 확산이다. 우리는 시를 통해 우리의 인생을 바라보고 이웃한 세계를 감지해 낸다. 시는 해방이며 위안인 것이다. 그럼에도 1910년 창간된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1944년 12월 9일자에 싣고 있는 시인의「마쓰이 오장 송가」는 우리에게 너무도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웃집 아지매 둘째아들의 생때 같은 묵숨을 일제 군국주의의 칼 앞에 굴복한 자신의 펜과 맞바꾼 것이다. 그것은 그가 평생 짊어지고 우리가 짊어져와야 했던 너무도 서글픈 ‘부끄러운’자화상이었다.
그의 땅을 찾아간다. 그의 고향은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仙蕓里 ), 홍덕에서 정오가 훨씬 넘어서 탄 선운리 행 버스 안에는 읍내 유치원쯤이나 다녀오는 모양인 어린 오투이가 타고, 삽자루며 파종할 씨앗 뭉치를 사들고 탄 허리 굽은 큰고모같은 아주머니 둘이있고, 어디 시집간 언니 집에라도 찾아가는 모양인지 덜씬 큰 새악시도 앉아 있다. 몇 마장 가지 않아 버스는 고운 처녀를 내려놓고 달아나는데 누이는 졸리다 못해 잠든 동생의 무릎을 꼬집으며작은 소리로 “야아, 다왔어, 야아...”하며 무심한 동생을 깨우느라 속이 탄다. 그 사이 두 아주머니는 버스 요금 때문에 문을 열어주지 않는 젊은 기사와 실갱이를 하다 결국 40원을 더 내고 내렸다. 겨우 동생을 깨운 누이는 다음 마을에서 내린다. 이어 낡은 양복차림의 아저씨가 내리고 버스는 선운리 종점에 섰다. 십여 분 거리다.
이곳 사람들은 선운리를 질마재라고 부른다. 선운리는 서당머리와 신흥리와 질마재를 합쳐 부르는 말이다. 마을 뒤로 뒷담처럼 산이 하나서있는데 산 왼쪽 옆구리에 줄포,부안, 서울로 넘어가는 재가 있다. 이 재가 다름아닌 질마재다. 이 품세 좋은 산이 쇠산이라고도 부르는 소요산이다. 산 아래엔 아이 몇 안되는 다른 시골학교 형편과 다를 것없는 봉암초등학교 선운 분교가 있고, 입구에는 인촌 김성수의 동생 김연수 송덕비가 서정주 시인의 글로 쓰여 있다. 여기가 질마재다. 흐린 날씨 탓에 주위의 풍광이 눈에 쏙 들지 않지만 마을앞으로 줄포만 너머에 있는 변산반도가 건너다 보인다. 서정주 시인의 생가는 마을 위로부터 흘러내리는 작은 내를 왼쪽에 끼고 백여 미터 따라 오르면 오른 쪽에 위치하고 있다. 내를 따라 걸으면 키가 두길은 족히 되는 무성한 측백나무 울타리가 눈 앞에 보이는데 대문도 없는 두 번째 집이 시인의 생가다.
작약, 철쭉, 영산흥, 살구나무, 감나무 등 무성하게 방치된 울 안의 나무들이 주인을 대신하여 객을 반긴다. 봄은 오겠디만 울 안은 아직 봄맞을 채비가 되있지 못하다. 광이있고 부엌 하나 방하나 있는 집은 낡을대로 낡아 쇠락한 모습이다. 절구통 하나가 바른쪽 기둥과 함께 작은 마루를 떠받치고있는 데 십 년 가까이 사람의 온기를 누리지 못한 농가의 마루같지 않게 아직도 짱짱하다. 윤기 잃은 마루에 걸터 앉아 멀리 변산반도쪽을 바라보지만 거기엔 흐린 하늘만이 있다.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기퍼도 오지 않는다. / 파뿌리같이 늙은 할머니와 배초꽃이 한 주 서 있을뿐이었다. / 어매는 달을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하였으나....(중략) 스물세햇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 / 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하드라 /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을 읽고 가고 / 어떤이는 내 입에서 천치를 읽고 가나 / 나는 아무 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 (중략) /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트린 /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 (서정주, 「자화상」가운데)
이 ‘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 하드라’고 한 시인은 이곳에서 나 어린 시절을 보내고 아홉 살 때 이곳을 떠나 줄포로 다시 전주로 그리고 서울로 갔다. 그는 고향을 떠났고 그의 여섯 번째 시집 「질마재신화」(1975년)를 낳아 일년이면 오륙백 명 정도의 방문객이 이곳을 다녀간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일 년이면 두어 차례 부모의 묘가 있는 이곳에 내려왔다가 선운사 앞 그의 시비가 서 있는 호텔에서 묵는다고 한다. 1989년부터 이곳 미당의 생가 옆에 와서 혼자 살고 있다는 미당의 동생 서정태 씨(73)의 말들이다.
그의 집을 나와 마을 앞길에는 왼쪽으로 꺾어져 간다. 오른쪽에 줄포만을 두고 소요산을 왼쪽으로 끼고 돌아 선운사까지 걷기로했다. 선운사(禪雲寺 )는 소요산을 사이에 두고 질마재에서 십여 리 정도 떨어져 dT다. 사십여 분 걸린다고 한다. 버스를 기다리고 갈아타며 그 시간을 보내느니보다는 걷는 편이 훨씬 낫다. 줄포만에서 부는 바람이 제법이지만 걷기 시작하고 금새 몸에서 온기가 올라온다. 산을 돌아드는 한적한 아스팔트 길을 걷다보면 연분홍 질달래가 산허리를 감고있는 모습에 홀딱 빠지기 십상이다. 소요산 서로 돌아내려 남쪽 자락이다. 그렇게 한눈을 팔며 걷다보면 놓여진 지 얼마 안되는 제법 큰 다리가 멀리 선운산과 함께 눈에 들어온다. 지난 12월에 완공된 용선교다. 용선교 밑으론 줄포만으로 흘러드는 큰 물이 흐르는데 수다마을 아저씨는 장수강이라고 한다. 선운산 계곡의 물이 함께 휘돈다. 다리를 건너 왼쪽으로는 고창■흥덕에 이르고 오른쪽은 영광■공음에 이른다. 왼쪽으로 간다. 다리품을 아끼려고 지나가는 트럭 빈 자리를 얻어탔다. 수다마을을 지나 모퉁이를 돌면 곧 선운산 입구가 나온다. 풍천 장어로 이름난 연기 식당이 물쪽에 있다. 여기가 선운사 입구의 집단시설지구까지는 금방이다. 여기서 다시 매표소까지는 5분여 거리다.
선운사 고랑으로 /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 / 동백꽃은 앚기 일러 피지 않았고 / 막걸릿집 여자의 육자백이 가락에 / 작년것만 오히려 남았습니다. / 그것도 목이 쉬여 남았습니다. (서정주, ‘선운사 동구’ 전문)
매표소 못미처 오른쪽으로 약간 비켜 서 있는 ‘미당 서정주 시비’의 전문이다.
10년만에 다시 오는 길이다. 어디고 좋다하면 사람들로 몸살을 앓는 게 요즘 우리 산천의 형편이다. 선운산 입구도 다르지 않다. 격에 맞지 않는 모습이 다른 곳보다 덜한 것 같기도 하지만 뜯어 고쳐놓고 발라놓은 모습이 눈에 설기는 역시 마찬가지다.
남녘 해남의 동백꽃은 지천이면서 손에 닿지도 않게 높은 숲을 이루고 있지만 선운사 동백꽃은 눈 앞에 열두 폭 병풍처럼 알씬하니 펼쳐놓고도 그저 바라고만 한다. 줄포만으로 부는 늦바람에 철없는 꽃을 피우면서 철망을 치고 만지지 말라 한다.
섬진강 김용택 시인이 봄꽃은 저녁 무렵 보라고 했던가. 붉게 핀 동백꽃이, 저무는 ‘호남의 내금강’ 선운산 자락에서 습기를 물고 더욱 붉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