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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5 | [신귀백의 영화엿보기]
영원한 오월의영화 <꽃잎>
글/조인숙 부산예술대 강사■영화평론가 (2004-02-12 11:07:15)
지역 감정은 망국병이라는 언론들의 한결같은 질타가 계속되던 지난 총선에 즈음해서 영화 <꽃잎>은 우리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전라도의 지역 감정과 경상도의 지역 감정이 한 목소리로 도마 위에 올려지고 있을 때,「광주의 아픔」은 그렇게 이야기 되고 있었다. 어찌하여 푸대접으로 서린 한(恨)과 우대나 기득권에 대한 집착을 똑같은 지역감정으로 몰아세울 수있을까 하는 생각이 고개를 들며 어리석게도 또 다른 물음이 생긴다. 왜 하필「광주」였나?하고. 그만큼 착잡한 마음으로 영화 <꽃잎>을 대하게 된다.「&#44279;잎이 피고 또 질 때면 근잘이 또 다시 생각나 못 견디겠네......」영화 시작을 알리는 노래다. 장엄한 분위기가 아닌 김추자의 노래「꽃잎」이 영화 주제가로 택해졌다는 건 이미 영화가 광주 문제를 진상 규명 차원으로 다루지 않으리란 사실을 예견한다. 광주의 상처를 처연하게 구성한 이 영화는 감독의 말마따나한판 씻김굿이다. 그 때의 광주를 무엇으로도 그려내지 못했고, 증언도 하지 못했던 부끄러움, 그래서 이 사회를 착잡하게 짓누르고 우리 모두의 죄의식에 대한 일종의 씻김굿인 것이다. 토럭과 버스 위에 올라타 함성ㄹ을 지르는 청년, 무장 군인들과 진군하는 탱크, 시신을 질질 끌고가는 계엄군과 땅에 쓰러져 있는 시민들을 보여주는 독일 방송국의 기록 필름 위로 타이틀이 시작된다. 이어 영화는 이 처참한 학살 현장을 목격한 한 소녀인 ‘나’, 소녀를 짐승처럼 덮치지만 그녀의 상처를 이해하게 되는 인부 ‘장씨’, 그리고 소년를 찾아 해매는 ‘우리들’ 이렇게세 갈래 시점으로 역사적 진실에 접근해 간다. 먼저 광주의 아픔을 대변하는 소녀, 작은 보따리를 꼭 안은 채 인부 장 씨를 따라가는 ‘나’는 계엄군의 총칼에 대한 공포뿐이 아니라 총에 맞아 죽어 가는 어머니의 손을 뿌리치고 달아났던 죄책감으로 더욱 미쳐서 떠도는 원혼이다. 신 내리듯 회한을 토해내는 무덤 앞 소녀의 연기는 가히 압권이다. 소녀가 그날의 금남로 현장, 오빠 친구들 앞에서 불렀던 노래, 한사코 떼어놓았던 어머니의 손으로 채워진 깊은 악몽에서 깨어나면 오빠를 닮은 인부 ‘장씨’가 있다. 비뚤어진 성격의 거친 막노동자 장 씨는 소녀를 겁탈하기도 하지만 강간당하면서도 웃는 소년를 보곤 두려움과 연민에 빠지게 되고 차츰 그녀의 아픔을 헤아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또다른 인물군, 세 남자와 한 여자로 구성된 ‘우리’는 죽은 친구의 여동생, 소녀를 찾아 방방곡곡 떠돌아디니면서 무력함을 드러낸다. 이렇게 여러 인물들의 다중 시점을 통해 핵심에 접근해 나가는 영화의 서술구조는 일견 탄탄해 보인다. 하짐반 감독이 애초에 우리에게 기대어 왔던 분노와 죄책감을 치워 버린다면 그 구조는 비틀거리고 만다. 세가지 시점 중 하나의 선택인 소녀의 비중을 둔 점은 수긍이 간다. ‘나’는 체험의 당사자, 광주의 화신임에 이견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고생이란 선입견을 접어두고라도 뛰어난 연기를 유감없이 보여준 이정현을 통해 관객들은 상처로 갈기갈리 찢겨진 소녀의 아픔에 쉽게 몰입된다. 그렇게 동어 반복적인 회상 장면을 지나치게 강조하지 않았어도 타이틀 자막에 사용된 기록 필름과 그날의 발포상황을 재연한 장면은 이미 최루탄 냄새까지 풍길 정도로 강한 인상을 심어주고 있단 얘기다. 이제 근잘로부터 16년, 많은 자료들이 공개됐고 원작「저기 소리 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가 발표된 지 8년이 지났고,「오 꿈의 나라」와「부활의 노래」가 발표됐고, 또 학살의 원흉은 감옥에 있을만큼 시대는 변했다. 따라서 소녀가 받은 상처의 원인보다는 그 아픔을 바라보는 ‘우리들’쪽으로 무게 중심이 옮겨져야 했다. 광주를 몰랐던 ‘장 씨’가 소녀를 통해 광주를 알게되는 심리적인 변화과정에 더욱 비중을 두고 ‘우리’들의 여정에 “왜”라는 물음을 강조시켰어야 했다. 그리고 그 당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무기력한 소시민들, 그리고 영화에서 전두환이 자랑스럽게 국민들의 압도적인 지지로 헌법이 통과되었다고 연설하는 TV중계 장면이 길게 넣어졌는데 그렇다면 그런 투표를 한 우리들이 갖고 있는 응어리를 씻어내는 어루만짐이 있어야 했다. 이미 96년에 돌아보는 광주민주화항쟁이 더 이상 고발의 소재가 아니라면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언변이 다소 어눌한 인권 운동가의 진실이 가슴에 와 닿을 때 그의 말솜씨를 탓하진 않는다. 다소 형식상 설득력이 떨어진다 해도 장선우의「꽃잎」은 희망을 가져다주는 힘이 느껴지는 영화다. 광주를 기억하게 하고 또 지금 이 시대에도 있지말란법 없는 개인적인 폭력이든 집단적인 폭력이든 말의 폭력이든 칼의 폭력이든 그 폭력의 주체와 피해자에게 관심을 갖게 하기 때문이다. “혹시 찢어지고 때묻은 치마폭 사이로 맨살이 행해 당신 눈에 띄어도 아무것도 보지 못한 듯 고개를 숙이고 지나가 주십시오. 당신의 옷자락이나 팔꿈치를 잡아당겨도부드럽게 떼어놓아 주십시오. 어느 날 그녀가 쫓아오거든 그녀를 무서워하지도 말고 무섭게 하지도 마십시오. 그저 잠시 관심 있게 보아주기만 하면 됩니다.”마지막 장면의 이 내레이션이 전국의 극장에서 울리ㅗ있는 때 민주화의 메카 광주에는 또다시 5월이 다가왔다. 조인숙/1961년 서울 출생으로 이화여대 불어과와 같은 대학원에서 미술 사학을 전공했다. 프랑스 빠리 제 7대학에서 영화학 석사후 빠리 사회과학 고등연구소(EMESS)박사과정을 수료, 현재 영화 평론과 부산의 여러 대학에서 영화학을 강의하고 있다. 80년 봄 대학 신입생이던 때, 서울시청 앞에서 데모 진압 전경에 &#51922;겨 잃어버린 새구두 한 짝을 휴교령으로 차압당한 캠퍼스보다 더 아까워했던 부끄러움이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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