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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5 | [문화저널]
신미술의 몰이해 속에 사라져 간 시대의 희생자 이순재(李犉宰)
글/이철량 전북대 교수■미술교육과 (2004-02-12 11:03:42)
전북미술에 유화라고 하는 새로운 그림을 보여준 최초의 화가는 이순재였다. 그러니까 이순재는 이 지역에서 서양화를 공부한 최초의 인물이었던 셈이다. 이순재가 언제 어떤 경로를 거쳐 서양화를 공부하기 시작했고 그 과정은 어떠했었는지 구체적으로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1904년에 전주 명문가의 아들로 태어나 당시로서는 생소하기 짝이없는 서양화를 공부하기 위해 일본에까지 건너갔던 것으로 보인다. 1920년대는 전주 지방의 미술계가 새로운 변화의 전기르 맞고 있었다. 그것은 1925년에 전주고등보통학교가 창설되면서 근대적 교육이 시작되고 여기에 일본인 미술교사였던 삼린평(森麟平)이 부임하게 된다. 그리고 그 뒤이어 1927년에는 전주여자고등보통학교에 대진일차(大津逸次)가 역시 미술교사로 내려오면서 지역미술에 새로운 변화를 예고한다. 이처럼 1920년대는 전북미술에 새로운 자극이 형성되었으나 이순재가 이들에게서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는 흔적은 보잊 않는다. 그러나 이순재를 뒤이어 서양화를 공부했던 김영창이 삼린평에게서 서양화를공부했던 점으로미루어보면 이들 일본인 교사들의 부임으로 지역에 서양화를 이식시키는 주된 역할을 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순재는 이들보다 다소 먼저 서양화라는새로운 그림에 눈을 떴고 그것을 실행한 개척자였다 이렇게 본다면 우리 나라 최초의 서양화가였던 춘곡 고회동이 일본에 건너간 것이 1910년이었으므로 이순재는 그보다 한 십 수년의 차이르 보였다고 할 수 있다.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우리 나라에서도 많지는 않지만 상당수가 일본에건너가 서양화를 고웁하게 되는데 앞서 언급한 고회동을 필두로하여 김관호, 나혜석, 김찬영, 이종우 등이 그들이다. 그러나 몇 몇 선각자들의 새로운 경향에의 관심과 활동에도 불구하고 당시 일반인들의 서양화에 대한인식은 대단히 비참한 것이었다. 나라가 망한 암울한 시기에 그림을 그린다는 것만으로도 냉대의 대상이었던 형편에 더욱이 일본에까지 건너가 이상한 그림을 공부했다는 것은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었다. 그 좋은 예로 고회동은 다시 동양화로 돌아섰고 초기 대부분의 서양화가들은 고통스럽게 살아갔다.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일제는 한민족의 문화말살 정책에 더욱 힘을 쏟았다. 전주고보와 전주여고보에 미술교사로 일본인들을 내세웠고 더욱이 서양화를 했던 사람들을 부임시킨 배경도 역시 우리의 전통회화와 그 민족정신을 개조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이러한 상황을 이해했던 고희동은 민족화가들의 모임체를 형성하고 전시할동을 벌었다. 그것이 서화협회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일제는 서화협회에 대응하기 위해 1921년에 조선미술전람회를 만들고 신인들을 공모하며 심사는 일본에서 데려온 일본인 작가들이 맡게된다. 어떻든 이 시대의 미술계 상황은 대단히 긴장되어 있었다. 따라서 초창기 서양화를 공부했다는 것은 그만큼 심각한 질타의 대상이었고 따라서 한 작가가 새로운 회화에 도전하는 용기는 실로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이순재도 이러한 시대적 희생자였음에 틀림없었다. 청람(靑嵐)이순재가 전주 신흥고등학교에서 공부를 하다 어떤 연유로 일본에 건너가 새롭게 미술공부를 하게 되었는지는 깊이 알려져 있지 않다. 그리고 일본미술학교를 졸업했다고 전하여지나 이 또한 구체적인 사료는 정확하지 않다. 그러나 당시의 시대상황으로 보아 이순재가 일본에까지 건너가 낯설기만 했던 서양화를 공부했다는 것은 대단히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그는 일본에 건너가기 전에 이미 서양화에 대해 상당한 정도의 이해를 갖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이미 1922년에 제 1회 조선미술전람회가 열렸고 여기에 유화를 출품하는 다수의 일본인과 한국인 화가들이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순재가 일본에서 유화를 공부하고 돌아와 본격적으로 세상에 얼굴을 드러낸 것은 제 7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한 것이 계기가 된다. 이때가 1928년의 일로 전북화단에서는 획기적 사건이었다. 이 무렵 이순재의 그림에 대해서는 깊이있게 확인할 만한 자료가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일부 도판에 의하면 당시 가장 많이 그리고있던 화풍이었던 인상파 계열의 작품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경향은 한국화가들이 일본에 건너가공부했던 초창기의 작가들에게서 볼 수 있는 대체적인 경향이다. 당시 일본에서는 뒤늦게 들어온 서구 인상파 화풍을 나름대로 소화해내고 있었고 한국화가들은 일본화풍을 수용하는 모습이었다. 이순재의 「이른봄」이라는작품이 첫 입선한 뒤에 계속되어 「신학교 입구」가 제 8회에 입선하고, 제 10회 때에는「늦은 봄의 농가」로 또다시 입선의 대열에올랐다. 이해 1931년 제 10회에서는 이순재뿐만 아니라 그의 뒤를 바짝 따르고 있었던 김영창이 함께 입선해 올라 이 지역의 서양화가 본격적으로 뿌리를 내려가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렇듯 개척기 서양화의 선구자적 역할을 보이며 화려한 출발을 보였던 이순재는 선전 제 10회 이후 그 얼굴을 숨겨버렸다. 그는 이 무렵 철저한 생활인이 되지 못했던 예술가로서의 분방한 삶 때문에 가산을 탕진하게 되었고 그의 작품은 사회적 냉대 속에서 외면당해야 했다. 그는 제 10회 선전을 끝으로 붓을 던졌다. 그리고 개척사라는 간판점을 차리고 현실에 뛰어들었다. 개척사, 이 간판점의 이름에서 그의 기질과 삶의 의식이 그대로 드러난다. 새롭게 이색적인 서양화에 눈을 돌린 개척정신과 우연히 알게된 천부적 재질을 갖고 있었던 후배 화가 김영창에게 보인 애정 등에서 미래를 꿈꾸는 그의 삶의 정신이 그대로 드러난다. 그가 설립한 간판점에는 김영창과 이응노 등 당대의 화가들이 들락거렸다. 그리고 그는 이들 후배 화가들의 후견인 역할을 하고 있었다. 특히 고암 이응노는 이 간판점에서 함께 일을 하며 전주생활을 너끈히 견뎌냈던 것이었다. 다행스럽게도 당대에 유학까지했던 일류화가의 간판점은 운영이 잘되어 이응노, 김영창을 비롯하여 진화과 시인 신석정 그리고 가람 이병기 등 문인들도 함께 찾아들었다고 한다. 언제부터인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이순재는 전북일보의 자매지였던 동광신문에 삽화를 만화를 그렸다고 전해진다. 1931년경의 일로 전해지는 것으로 보아 이 무렵이 이순재에게는 상당한 생활의 변화를 겪고 있던 시기로 보여진다. 생활고를 견뎌내야 했던 그는 여러 가지 그림과 무관하지 않았던 일들을 닥치는대로 해나갔다. 그리고 이 동광신문은 당시 많은 화가들의 정신적 요람으로 작용했던 것 같다.이는 1945년 해방을 전후하여 설립된 최초의 미술연구소가 동광미술연구소였고 그해에 열렸던 그룹전으로 도왕미술전람회가 열렸는데 그 명칭의 사용에서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겠다. 또한 동광미술연구소는 이순재와 김영창 그리고임실출신으로 이순재의 뒤를 이어 일본유학을 했던 박병수가 주동이 되었다. 박병수(朴柄洙)는 임실에서 부유하게 자라 일본 와세다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했으나 다시 영목(鈴木)천구마(千久馬)미술연구소에서 서양화를 공부했다 동광미술연구소는 고사동에 있었던 박병수의 화실에 설립하게 되었다. 그러나 박병수는 후일 월북하게 되고 기록은 남지 않았다. 동광미술연구소는 이 지역에서 설립된 최초의 사설교육기관이었던 셈이 된다. 여기에서 공부했던 사람들로는 이의주, 천칠봉, 배형식, 이준성, 이경훈, 하반영, 소병호, 추교영, 권영술 등의 초창기 전북미술을 주도했던 인물들이었다. 그리고 제 1회 동광미술전람회는 같은 해 10월에 성심여중에서 열렸었다. 이때는 이순재의 작품을 볼 수 없었다. 다만 그는 후배들의 활동에 기름을 치는 역할로서 만족하고 있었다. 그는 이미 그림의 현장에서 멀리 있었다. 1945년에는 이순재가 평화동 고아원장을 맡고 있었다. 이순재는 1958년 54세를 마지막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그림으로 시작한 인생의 태반을 그림에서 떨어져 살았다. 그래서 변변한 그의 작품이 남아있지 않고 화가로서 그를 기억하는 사람도 드물다. 그러나 이순재는 그의 일생의 많은 시간을 그림과 함께했다. 그의 선각자적인 개척정신은 끝내 꽃피우지 못했다. 당시 신미술의 몰이해와 냉대 속에서 곤궁한 생활을 견뎌내지 못했던 자학과 그림에의 열정은 붓을 꺾은 후에도 후배 화가들을 통해 이어졌다. 청람 이순재는 이 지역에 서양화를 심고 가꾸어낸 최초의 인물로 기억될만한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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