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5 | [사람과사람]
소리하는 아내와 빵 만드는 남편
동부시장 안에서 만두가게 하는 젊은 국악인 천명희■권혁대 부부
글/김은정 전북일보 문화부 기자
(2004-02-12 11:02:43)
초여름 문턱도 지나지 않았는데 그날은 몸시 더웠다. 봄바람결은 살포시 스쳐지나가곤 했지만 했빛은 그 상큼한 바람결을 비집고 들어 사람들을 막아섰다. 햇빛만 받고 있으면 어느새 여름이 와 버린 것은 아닌가 하는 그런 생각이 들게 할 정도의 이상한 날씨가 삼일째 계속됐던 한낮. 그래서인지 조그만 찻집으로부터 새나온 판소리와 그 소리를 당기고 밀어 주는 북장단은 유난히 신명이 났다 눈부시게 환한 거리로부터 갑자기 들어선 찻집의 어두움. 그리고는 가파른 계단을 올라서자 다시 환해진 찻집 자그마한 공간 한쪽에 그들 젊은 부부가 있었다. 연습에 열중하고 있는 그들의 눈에 듸지 않게 벤자민 푸른 화분을 사이에 두고 앉아 잠깐 ‘소리 도둑’이 됐다. 젊은 부부의 소리 공부는 짧지 않은 동안 계속됐다.
이 한낮. 저들 부부를 이 공간에 가두어 배를 움켜쥐고 소리를 내지르고 다스리게 하는 그 힘의 근원은 무엇인가. 저렇게 마주보고 앉아 앞서거니 뒤서거니 소리와 북을 주고 받으면서 그들이 이루어 내고자 하는 것은 또 무엇인가.
한참 소리를몰고 가던 고수가 목청을 날렸다. “얼시구야, 좋다! 그렇지.”그랬다. 아내의 소리와 남편의 장단은 그렇게 자신들만의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가고 있었다.
그 아름답고 눈부신 행복을 누구라서 감히 쉽게 들여다 볼 수 있겠는가.
소리하는 아내와 북 치는 남편. 전주동부시장 한쪽, 세 평 남짓한 만두집 주인인 천명희■권혁대 씨 부부는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서른 다섯 살 동갑내기 국악인 부부다. 결혼한 지 횃수로 6년. 어느 하루도 소리를 놓지 않고 살아온 이들 부부가 이즈음 소리 맞추는 일에 부쩍 분주해졌다. 지난달부터는 아예 가게를 도와줄 사람까지 구해놓고 오후 시간을 모두 소리 연습에 내고 있는 이들 부부는 요즈음 <흥보가>에 온통 매달려 있다. 천명희 씨가 오는 5월 11일 전북예술회관에서 흥보가 완창회를 갖기 때문이다.
“저는 아직 자신이 없는데 남편이 일을 벌려 놓았어요. 기왕 시작한 일이니 아버님 얼굴도 세워 드려야겠고 부담이 이만 저만 아닙니다.”
명희 씨는 우리 나라의 몇 안되는 명고수 중 한사람인 천대용 씨의 큰딸이다. 남편의 정성도 그렇지만 그에겐는 아버지가 평생 지켜온 국악판에 소리를 내놓는다는 일이 더욱 무거운 짐일 수 밖에 없다. 그가 이날 부를 흥보가는 국가지정 문화재인 강도근 명창의 동편제 판이다 2년 전부터 찾아다니고있는 이난초 명창으로부터 동편제 소리를 이어 받은 명희씨는 이 소리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동편제 소리의 바탕에 마음을 뺏겨 버렸다. 탁하지만 우렁차고 힘있는 자신의 소리로 부쳐내는 그 맛이 어느 소리보다도 맞아 떨어진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던 때문이다. 이제 막 소리의 참맛이 와닿기 시작할 즈음 남편인 그에게 덜컥 짐보따리를 안겨 놓았다. 흥보가 완차오히 판을 짜 놓았던 것이다. 망설이는 아내에게 남편 권 씨는 용기와 힘을 주었다.
“타고난 소리에 노력만 더해지면 안될 게 없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그 스스로 만사 제쳐 두고 아내의 연습 고수로 앉았다. 이제 시작인데 몰아세우는 남편이 한편으로는 야속하기도 했다는 명희 씨는 기왕 벌어 놓은 일, 수습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단다. 명희 씨를 소릿길에 다시 들어서게 한 남편의 열정은 날이 갈수록 뜨거워졌다.
명희 씨가 소릿길에 들어선 것은 열두 살 어린 나이였다. 햇수로 치자면 22년이란 세월이 지났지만 지금 그는 명창이 되기 위한 꿈을 안은 풋풋한 신인이다. 그의 이름은 적어도 소리판에서는 알려져 있지 않다. 아직은 ‘명고수 천대용의 큰 딸’로 그나마 길을 찾고 있을 뿐이다. 20년이 넘는 시간이 그 앞에 놓여져 있는데도 지금껏 이름을 알리지 못한 것은 너무도 힘들었던 소리 공부에 더 이상의 공력을 부치지 못하고 중간에 미련없이 길을 바꾸어 선 때문이다.
여덟 형제의 맏이로 아버지의 고생스러운 삶을 그대로 안아야 했던 그는 누구보다도 국악인의 삶이 얼마나 서럽고 가난한 것이어야 하는가를 일찌감치 알아 버렸다.
“배고픈 시절이었어요. 별로 기억하고 싶지도 않을 만큼, 가족들은 해남에서 살고 있었지만 나는 여기 저기 공연단 활동을 다니는 아버지를 따라 유랑 생활을 하기도 했지요. ” 그 시절의 고생스러움은 명희 씨의 국악에 대한 꿈을 조금씩 부숴냈다고 한다.
어린 시절 그의 타고난 재질을 알아 본 것은 작고한 박봉술 명창이었다. 소리를 처음 틔운 것도 바로 박봉술 명창이었지만 그의 기억에 남아 있지는 않다. 우연히 명희 씨의 소리를 들어본 박봉술 명창이 아버지 천대용 씨에게 소리를 가르쳐 보라고 일렀단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지금껏 단 한번도 명희 씨에게 소리를 해볼 것을 권유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자신의 특기인 아쟁을 가르쳐 주지도 않았다. 명희 씨는 많은 사람들이 알아주는 아버지의 빼어난 아쟁 솜씨를 받고 싶었지만 감히 입밖에 꺼내지도 못했다고 했다.
천 씨는 국민학교 시절, 목포에서 이름 날리고있던 김상요 씨로부터 소리를 배웠다. 이후 강도근, 박초월 명창의 문하에도 들어가 소리를 익혔다. 그러다가 고등학교를졸압하고는 아예 서울로 올라갔다. 그 기회에 소리는 중단했다. 도무지 힘이 들어 이 길을 계속 갈 용기가 없어서였다. 그리고는 박귀희 선생의 문하에 들어가 가야금을 배웠다. 워낙 타고난 기질이 몸에 베어 있던 그는 얼마 되지 않아 “쓸만한 재목”으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그 즈음 아버지와 친분이있는 이윤호 씨가 운영하고 있던 국악원에 가야금 선생으로 나다니게 되었다. 그곳에서 남편 권 씨를 만났다. 그의 소리에 반한 남편은 천 씨에게 소리를 다시 시작할 것을 권했다. 고집있는 명희 씨의 마음을 열기까지 꼭 삼년이 걸렸다.
소리를 배우고 싶어 국악원에 다니기 시작했던 그는 아내를 위해 괜찮은(?) 직장까지 버렸다.
“아무래도 저보다는 이 사람이 빠르겠다는 판단을 한 것이지요. 이 사람의 소리를 듣고 장인의 기질을 그대로 이어받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왕 시작한 길이라면 제대로 해보아야 한다는 뜻을 세운 겁니다.”
소리를 접어 둔 아내를 위해 나선 그는 우선 경제적인 자립을 위해 벌이를 찾았다.
“전주에서 만두가게를 하는 친구가 기술만 익히면 벌이가 괜찮다고 소개해 주더군요. 곧장 빵 만드는 방법을 배워 익산으로 내려왔습니다. 저도 집사람도 여기 사람은 아니지만 소리의 고향에서 소리를 다시 찾게 해주고 싶었습니다.” 그는 이리 중앙시장 안에 노점을 차렸다. 아내의 소리를 위해서는 못할 것이 없었다. 노점상이면 어떻고 빵장사면 어떤가. 새벽 4시 반에 일어나 밀가루 반죽하고 빵을 만들어 포장마차에 실어 장사를 나다녔던 2년 동안 이들 부부는 “정말 행복했었다”고 말했다.
그때 이리에 살고 있던 김소영 명창으로 붕터 본격적인 소리를 공부를 시작했다. 소리 잔치가 열리는 곳이면 시간을 가리지 않고 함께 갈 수 있다는 것이 그들에게는 큰 축복이었다. 김소영 명창으로부터 「심청가」한바탕을 받은 후 명희 씨는 남원의 이난초 명창 문하에 다시 들어갔다. 이난초 명창은 어린 시절 해남에서 소리를 시작했을 때 같이 소리를 배웠던 인연이 있었다.
생각보다 벌이도 괜찮아서 학채를 댈 수있게 되었을 때 권 씨는 남원까지 소리 공부하러 다니는 아내의 고단함을 덜어 주기 위해 전주로 이사를했다. 그곳이 지금 동부시장 안 만두집이다.
남편은 아내가 정말 괜찮은 명창이 도리 수 있을 것이로 믿고 있다. 아내 먼저 명창이 되고 난 후에는자신도 소리 길에 나설 참이다. 그 오랜 꿈은 남편 권씨의 가장 큰 소망이기도 하다. 부부가 함께 명창의 반열에 오르는 것. 그는 이 꿈을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단다.
지난 4월 21일 전주에서 열린 전국고수대회에서 권 씨는 일반 장년부 우수상을 탔다. 수준급 북장단 실력을 갖추었지만 그는 이날 자신의 실력을 제대로 발휘해내지 못했다. 완창회를 앞두고 있는 아내에게 신경 쓰느라 연습을 못한 탓이라고 했다. 권 씨는 지금 장인으로부터 북을 배우고 있다. 명고수로서의 길도 크지만 그래도 그의 소망은 역시 명창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인가, 자기 대신 소리를 풀어내는 아내의 소리에 북장단을 맞추어 내는 그는 아내 명희 씨보다도 더 신이 나 있다.
“떳다 보아라. 저 제비가---”
“아 그렇지 얼씨구야.”
감기로 목이 좀처럼 풀리지 않는 아내에게 기력을 붙여 주려는 남편은 북장단에 힘을 실어 낸다
오는 5월 11일에 갖는 천명희 씨의 완창회 소리 북은 아버지 천대용 씨와 역시 명고인 주봉신 씨가 맡는다. 아버지와 딸이 함께 호흡을 맞추어내는 판소리 무대로도 귀한 자리인 셈이다.
빵 만드는 남편은 이날 아내의 소리에 자신의 소망을 더욱 다독여 낼 것임에 틀림없다.
동부시장 안 만두가게를 찾는 단골 사람들은 이즈음 늘상 웃음을 갖고 살아가는 주인 부부의 안부를 빠트리지 않고 이렇게 묻는다.
“우리도 명창부부가 만드는 만두를 먹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