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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5 | [문화저널]
월척의 꿈
글/최정주 소설가 (2004-02-12 10:59:41)
가던 날이 장날이라더니, 낚시 가방을메고 대문을 나서는데, 제법 매서운 바람끝이 콧등을 훑고 지나갔다. 순간 오늘 낚시도 황이구나, 하는 방정맞은생각이 뇌리를 스쳐갔다. 날씨가 갑자기 추워지면 붕어란 놈들이 입을 꾹 다물고 꿈쩍을 않기 때문이었다. “흐, 월척은 무슨, 오늘은 아마 붕어들도 선거하러 가고 물지 않을거에요.” 대문을 닫기 위하여 따라 노온 아내가 하품을 씹으며 박계장의 출조에 찬물을 끼얹었다. ‘빌어먹을 여편네 같으니라고.’ 박 계방이 입속으로만 투덜거렸다. 박 계장이 선거를 포기하고 과감히 낚시를 떠나는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있었다. 그것은 ‘한 표 줍쇼’하고 입후보한 후보자들의 면면이 하나같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주유소를 경영하는 이 후보는 몇 년 전엔가 가짜 휘발유를 팔아먹다가 몇 개월 감옥살이를 한 전과자 출신이었고, 시의원 선거에도 나왔다가 떨어졌던 정 후보는 간통 사건으로 읍내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자였으며, 재력이 제일 낫다는 박후보는 삼십년 남 짓 세무 공무원 생활을 한 자였는데, 땡전 한푼없었던 그가 읍내는 물론 도청 소재지에 십오층 빌딩까지 소유하게 된 것이 다 무슨 까닭이겠느냐고 사람들 사이에 말이많은 자였다. 그리고 아내가 가장 깨끗하고 똑똑하다고 적극적으로 밀고 있는 검사 출신의 전 후보는 백정의 아들이었다. 그는 못 볼 꼴을 본 일이있었다. 그것은 소를 잡기 전에 무게를 늘리기 위하여 소에게 물을 먹이는 장면이었는데, 고등학생이던 전 후보는 뭉둥이로 소의 등짝이며 배때기를 죽어라고 두들기고 있었고, 그의 아버지는 호스를 소의 목구멍 깊숙이 꽂아놓고 물을 먹이고 있는 중이었다. 나중에 어찌어찌 법대에 진학을 하고 고시에 합격을 하여 검사 노릇까지 하다가 변호사를 개업하여 먹고 살만큼 돈을 벌고 난 전 후보가 정치에 눈을 뜨고 이번 선거에 입후보하겠다고 동창들 앞에서 선언하고 나왔을때 박 계장의 뇌리를 제일 먼저 스치고 지나간 것은 사각의 틀에 네 다리를 꽁꽁 묶은 소를 몽둥이로 두둘기면서 물을 먹이던 장면이었다. 그리고 겉으로 드러난 흠이있는 다른 후보들보다 전 후보의 인기가 올라가고 심지어는 아내까지도 전 후보의운동원이 되어 설치고 다니는 모습을 볼때에 이번 선거에는 기권을 해야겠다고 작정을 해버린 것이었다. “당신이나 잘해. 난 찍어 줄 놈이 없어서 못 하겠으니까. 대신 월척이나 한 마리 잡아와야겠어.” 어젯밤에 낚시 가방을 챙기는 남편을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아내에게 ‘당신이 미는 전 후보는 한때 소에게 물을 먹여 잡아서 팔덙 백정의아들이었어’하는 말대신 그렇게 말하는 걸로 자신의 뜻을 전달했다. 설마 공무원이 선거를 하지 않겠다고 불이익을 당하는 일은 없겠지? 차에 올라 시동을 걸면서 박 계장은 하늘을 흘끔 바라보았다. 몇 개의 남아있는 별이 ‘한심한 놈아’하고 반짝이고 있었다. 월척은 이런 날 될 수도 있으니까. 박계장은 소금을 뿌린 아내의 말도, 잡다가 놓친 잠 속에서의 월척도, 갑자기 내려간 기온도 모두 훌훌 털고 힘차게 엑셀레이터를 밟았다. 비로소 어쩌면 월척을 할 수있을지도 모른다는 설렘이 가슴에서 피어났다. 그러나 박 계장의 이런 꿈은목적지인 저수지에도착하자 다시 한 번 여지없이 깨어지는 것을 느꼈다. 저수지의 가장자리에 제법 두꺼운 살얼음이 얼어 있었던 것이었다. 호참 어젯밤 날씨가 그렇게 추웠던가? 낚시 가방을 내려놓고 담배부터 한개비 꺼내어 물었다. 지금 그가 자리를 잡고 앉은 곳은 벌써 사년전이던가, 오 계장이 꿈에 그리던 월척을 했던 포인트였다. 오 계장은 같은 동사무소에서 근무했던 동료 직원이었는데 사람이 좀 멍청하기는 해도 비교적 성실하다고 인정을 받는 사람이었고, 서로 취미가 낚시인 것을 알고부터는 매주 일요일이면 함께 낚시를 다닐 만큼 가까워진 사이였다. 나중에 근무하는 직장이 달라져도 두 사람은 토요일이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전화를 하여 낚시 약속을 하였고, 일요일 새벽이면 나란히 아내들의 눈총을 받으면서 함께 출조를 했다. 그렇게 십 년 남짓이나 지났을까. 한 번은 출조길에 오 계장이 느닷없는 소리를 했다. 그날의 낚시에서 대물을 잡은 사람에게 무조건 고기를 몰아주자는 것이었다. 아, 좋지, 어쩌면 월척을 낚을 지도 모른다는 꿈에 부풀어 있던 그가 서슴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약속은 쉽게 이루어졌다. 그러나 결과부터 말하자면 그날 박 계장은 빈 바구니로 돌아와야 했다. 마리수로나 무게로만 따진다면 두 사람이 비슷하게 붕어를 낚았는데, 그놈의 대물이 오 계장의 낚시를 선택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대물도 그냥 대물이 아니라, 사십 센티나 되는 누런 월척 붕어였다. 그는 말없이 자신의 붕어를 모두 오 계장으 바구니에 부어 주었다. 그 이후에도 두 사람은 종종 함께 낚시를 다녔으나, 예전처럼 좋은 사이일 수는 없었다. 그것은 오 계장의 낚시하는 태도가 갑자기 여유가 있어졌기 때문이었다. 낚시터에 도착해서도 그는 결코 서두르지 않았다. 느긋하게 앉아 담배부터 한 개비 피우면서 ‘월척이라는 것은 욕심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지. 운이 있어야 한다니까, 운이’하고 한가한 소리를 몇 마디 쯤 지껄인 다음에 자리를 찾아 어슬렁 거리기 마련이었다. 오 계장의 그런 여유가 낚시꾼의 평생 소원이라는 월척의 꿈을 이미 달성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아는 박 계장은 그저 입맛이 쓰기만했다. 어제 낮에도 낚시나 가자는 박 계장의 전화에 오 계장은 ‘아, 선거를 해야지, 낚시는 무슨.’하고 한마디로 거절을 해 버렸다. 월척을 하기 전에는 그까짓 선거 같은 것은 다른 사람한테 맡기고 낚시나 가자고 조르던 것에 비하면 너무 많은 변화였다. 흐, 그 친구한테 물린 월척이 나한테는 물리지 말라는 법은 없으니까. 박 계장은 담배를 비벼 끄고 세칸대부터 차례대로 낚싯대를 폈다. 그리고 하염없이 앉아서 기다렸다. 그러나 예상대로 찌는 꿈쩍을 안했다. 해가 중천에 오고 가장자리에 얼었던 살얼음이 다 녹았는데도 찌는 여전히 똑바로 서서 잠을 자고 있었다. 내 복에 월척은, 무슨. 박계장이 막 담배를 한 개비 꺼내여 불을 붙일 때였다. 세칸 반대의 찌가 쑥 솟궁쳐올라왔다. 왔구나. 손에 든 라이터를 내팽개치고 얼른 낚싯대를 잡아챘다. 순간 줄에서 핑핑 소리가 났다. 대물이구나 .대물. 그는 몸을 일으켜 활처럼 흰 낚시대를 탈력에 맞추어 천천히 당겼다. 그러나 shas은 쉽게 얼굴을 보여주지않았다. 한사코 안으로 들어가려고 요동을 쳤다. 자칫 무리하게 뜰어내다 보면 놈을 놓치기 십상이었다. 박 계장은 땀을 뻘뻘 흘리면서 붕어와의 실갱이를 계속했다. 그렇게 십여 분이 지났을까. 뒤에서 느닷없이 흐흐, 박계장, 드디어 월척을 하는 모양이군.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로 보아 오 계장이 분명했다. 선거를 끝내고 느지막히 나온 모양이었다. 왔어? 박 계장이 흘끔 돌아보며 그렇게 대꾸를 할 때였다. 손에 잡은 낚시대에서 허망한 느낌이왔다. 뒤를 돌아보느라 잠깐 줄을 늦춘 사이에 붕어가 떨어져 나간 것이었다. 박 계장이 털썩 주정 낮았고, 뒤에서 오 계장이 ‘월척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라니까. 운이 있어야 돼, 운이’하고 빈정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빈 바구니로 귀가하던 차안에서 박 계장은 백정의 아들 전 후보가 당선 예상자라는 방송사 합동 여론조사 결과 발표를 들었다. 그 순간 박 계장의 뇌리를 소에게 물을 먹이던 전씨 부자의 모습에 스쳐 갔다. 이래저래 그에게는 허망한 하루였다. 최정주 / 1950년 전북 남원에서 태어났다. 원광대를 졸업했으며, 7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희극이, 82년 한국 문학의 중편소설이 당선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다. 작품집으로 「그늘과 사슬」외 20여 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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