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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5 | [문화칼럼]
‘간 큰 남자’의 사회적 의미
글/최원규 전북대 교수■사회복지학과 (2004-02-12 10:57:23)
사&#46982;이 만든 사회제도 가운데 가장 훌륭한 것이 가족이라고 한다. 우리의 삶을 가족과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는 만큼 가족은 태어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우리들의 보금자리인 것이다. 가족을 통해 우리는 앞선 세대의 가치관과 문화를 이어받고 , 이를 다시 다음 세대에게 전수한다. 아울러 가족들간의 끈끈한 유대는 자녀가 출가하거나 이민을 가도 이어진다. 얼마전 텔레비전에서 본 미국 영화에서는 노인촌에 사는 아버지를 10여 년만에 찾아간 아들이 엉뚱한 사람을 아버지로 착각하는 대목이 나온다. 우리 나라 같으면 어림없는 일일 거라고 생각이 들면서도, 점차 우리도 미국처럼 되어 가는 것이 아닌가 한는 생각을 해본다. 가족 구성원간의 유대가 점차 느슨해지고 있다는 말이다. 매월 5월은 가정의 달이다. 이번달 달력에는 어린이날과 어버이날이 며칠 사이를 두고 자리잡고 있다. 언론 매체와 행정기관에서는 가정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기획물과 행사를 마련한다. 동양의 전통적인 미덕이라고하는 효(孝)를 유달리 강조하는 이들 행사를 지켜보면서, 역설적으로 효도의 미덕이 점차 사라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고나 할까? 효의 미덕만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부부사이 그리고 부모자녀 사이의 관계를 둘러싼 역할과 규범들도 변하고 있다. 얼마 전까지 유행한 바 있는 ‘간 큰 남자 시리즈’는 단순한 우스개만은 아니다. 간 큰 남자 시리즈가 유행하는 이면에는 간 큰 남자로 군림해 왔던 우리의 전통적인 남성상에 이미 변화가 초래되었다는 엄연한 사실이 자리잡고 있다. 자녀들에게 엄한 아버지, 자녀들에게 자애로운 어머니를 의미하는 엄부자친(嚴父慈親)도 옛날 이야기가 되었다. 오늘의 아버지들은 자녀들과 대화할 시간조차 갖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자녀들을 엄하게 교육할 수 없다. 반면에 자녀들의 성적과 건강과 교우관계 등을 포괄적으로 신경 쓰는 어머니는 더 이상 재애로울 수 없게 되었다. 사회의 변화에 따라 가정내에서의 역할 관계나 규범이 변화하는 것은 자연스런 현상으로 이해 할 수 있다. 문제는 사회상의 급격한 변화에 적응하지 못함으로써 종종 가정이 생활의 안식처가 아니라 벗어날 수 없는 지옥처럼 되는 경우들이다. 가정의 기능이 원활하게 발휘되지 못하는 가정을 문제 가정, 또는 건강&#54638; 못한 가정이라고 할 수 있다. 편부모 가정이나 소년소녀가장 가구와 같이 구조적으로 결함이 있는 가정을 문제 가정이라 할 수 없다. 오히려 구조적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데도 기능적으로는 문제 투성이인 가정이 적지 않다. 특히 심각한 문제 가정들을 아내를 학대하는 가정, 노부모를 학대하는 가정, 아동을 학대하는 가정 등이다. 편부모 가정이나 소년소녀가정 가구 등은 기능적으로 문제를 안고 있는 가정들로부터 연유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우리 사회에서 가정은 제 3자가 개입할 수 없는 독립된 왕국이다. 이 왕국의 절대 군주는 대개의 경우 남편이고, 왕국의 불쌍한 백성은 아내와 자녀들이다. 절대 군주는 백성들에 대한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것으로 착각한다. 그래서 ‘마누라와 북어는 삼 일에 한번씩 두들겨야 제맛이 난다’든가, ‘내자식 내가 때리는데 누가 참견이냐’하는 등의 비인간적인 사고방식이 널리 퍼져있다. 이러한 사고방식으로부터 비롯되는 비극적인 일들을 소설 속에서가 아닌 삶의 현장 속에서 종종 목격하게 된다. 동네가 떠나갈 듯이 자기 부인들을 때리는 남편들, 자식이 말을 안듣는다고 담뱃불로 지지고 체인으로 때리는 부모, 노부모의 존재가 귀찮다고 매일 아침마다 내보내는 주부들을 종종 본다. 우리 주위에서 종종 발생하는 이러한 비극적인 사건들은 심한 경우에 언론매체에 보도될 정도로 끔찍한 사건으로 비화되기도 한다. 이러한 가정 문제 양상을 지켜보면서, 이제는 건강한 가정을 만들기 위해, 또는 사회 구성원들의 안락한 가정 생활을 보장하기 위해 사회가 나서야 함을 생각하게 된다. 가정을 치외법권 지역이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찬동하지 않으실지 모르지만, 이제는 가정 내부의 문제에 대해서도 법적인 개입이 이루어져야 할 상황에 이르렀다. 아내 학대나 자녀 학대, 노부모 학대가 발생할 때, 이웃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시끄럽다고 불평이나 하는 것이 고작이고, 그 가정에 들어가 문제를 해결(또는 중재)할 엄두를 낼 수 없다. 그러면 누가 나서야 하는가? 그리고 서로 이웃하고 사는 우리들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선 시급한 것은 가정폭력방지법과 같이 가정 문제에 사법적인 개입이 가능하도록 법적인 근거를 만드는 것이다. 나아가 가정내에서 비극적인 사건이 진행될 때, 주민들이 경찰에 개입을 요청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경찰서에는 가정문제를 전담하는 경찰 사회 사업가와 같으 전문인력을 배치해야 한다. 우리 이웃들은 주위에서 일어나는 비극적인 사건들에 대해 개인적으로 마음을 졸이지 말고 과감하게 경찰에 신고하는 고발정신이 필요하다. 건강한 가정은 건강한 사회의 기초를 이룬다. 우리는 이제 까지 가정에 대해 신화를 안고 살아왔다고 할 수 있다. 대부분의 경우 가정은 포근한 보금자리이다. 그러나 가정이 보금자리이기는 고사하고 지옥과 같은 상황도 존재하고 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사회 변화에 따라 지옥 같은 가정들이 증가하고 있다는 점이다. 더 이상 가정에 대한 신화를 강조하지 말았으면 한다. 가정이 안고 있는 문제들과 진솔하게 대면하여, 힙리적인 방도를 찾아야 할 시점이 바로 지금이라 생각한다. 최완규 / 78년 서울대 사회복지학과를 졸업하고 96년 2월 서울대 대학원 사회복지학과 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90년부터 서울대 사회복지연구소 특별연구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제 16회 전국고수대회 명고수의 권위있는 등용문 전국고수대회(국악협회 전북도지회 주최)가 4월 20일부터 22일까지 전북예술회관에서 열려 명창들의 소리와 함께 북장단의 진수를 선보였다. 지난 22일 각 부문 결선과 오후의 시상식을 끝으로 막을 내린 전국고수대회는 판소리의 대중화 및 고수의 기량과 이상을 높이는 역할을 하면서, 청중에게는 우리의 전통 민속 음악에대한 이해와 감상의 훌륭한 무대를, 참가자들에게는 짧게는 몇 년 길게는 수십 년 동안 갈고 닦은 자신의 기량을 선보이는 등용문의 계기를 제공하였다. 대회장은 열한 명의 남녀 명창과 기량을 겨루는 백여 명의 고수 그리고 연일 객석을 가득 메운 청중들로 열기와 신명을 더했다. 사흘간의 대회기간 동안 펼쳐진 명창과 고수 그리고 관객의 열기는 전통적인 소릿고장의 구성진 멋과 흥겨운 분위기를 돋구었다. 대회를 위해 출연한 오정숙■김일구■은희진■이일주■김영자■민소완■김수연■방성춘■김소영■이난초■조영자 씨 등 11명의 명창들은 대회기간 동안 판소리 다섯 바탕의 각 대목을 고루 들려주면서 소릿마당의 축제 분위기를 더했다. 이들 명창들과 함께 무대에 오른 청년부■학생부 등 국악계의 다음 세대를 이어갈 어린 고수들에게도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81년 대회가 처음 시작한 뒤로 이번 제 16회 대회까지 명고부와 대명고부를 통해서 명고수 반열에 오른 고수는 모두 23명에 이른다. 그중 명고부 입상을 거쳐 대명고부에서 원숙한 기량을 인정받은 명고수들은 이성근■김청만■박근영■천대용■주봉신■조용안■추정남 씨 등 모두 7명. 16회의 대회를 치러오면서 전국고수대회는 판소리 무대에서 소리꾼 못지 않게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고수의 역할은 물론 명창과 함께 명고수로서의 권위와 전통성을 지켜나가는 대회로서 그 위상을 지켜가고 있다. 이틀간의 예선과 22일 본선 등 3일간의 일정으로 열린 이번 제 16회 전국고수대회에서는 7개 부문 백다섯 명의 참가자가 실력을 겨뤄 장려상과 인기상 및 장수상을 포함해 각 부문 대상■최우수상■우수상 등 모두 39명의 수상자에 대해 상금과 부상이 주어졌다. 특히 이번 대회부터는 그동안 고수 인구가 늘어남에 따라 고른 기량을 갖춘 고수의 발굴을 위해 명고부에 나이 제한을 두지 않았으며 젊은 고수들의 약진이 돋보였다. 각 부문 수상자들은 다음과 같다. ■대명고수부 : 대상 추정남(55■전남 해남), 최우수상 방기준(74■서울), 우수상 이낙훈(55■전남 보성). ■명고부 : 대상 송재영(36■전북 전주), 최우수상 전경춘(26■전북 임실), 우수상 조용수 (29■전북 전주) ■일반장년부 : 대상 홍성기(37■전북 전주), 최우수상 이원태(41■전남 진도). 우수상 권혁대(35■전북 전주) ■일반 청년부 : 대상 최만(24■전북 군산), 치우수상 박종호(18■전북 순창), 우수상 오강오(26■전북 전주). ■신인장년부 : 대상 김형태(37■전북 전주), 최우수상 이명식(37■광주광역시), 우수상 박순자(61, 전북 전주). ■신인청년부 : 대상 차지연(15■대전광역시), 최우수상 양진환(29■전북 남원), 우수상 최전화(24, 대전광역시). ■학생부 : 대상 이지연(14■전북 전주), 최우수상 정은성(14■전남 보성), 우수상 송수라(14■전북 전주), 그 외 장수상에 조인창(81■경북 구미), 김동식(79■전북 전주), 방기준(74■서울)씨 등이 수상했다. ■잠깐 인터뷰 대명고수부 대통령상 - 추정남(秋正南)씨 “이제 아이들 앞에서 떳떳하게 얼굴을 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예상하지 못했었지요■■■■.어찌실력발휘를 다할 수 있었겠습니까.” 대명고부 장원으로 대통령상을 수상한 추정남씨(55■전남 해남)는 수상 직후 환한 얼굴로 관객들을 행해 두 손을 번쩍 들어보이면서 기쁨을 감추지 않았었다. 이날 결선에서 그는 인간문화재 오정숙 명창의 수궁가 가운데서 엇중머리로 북장단 넣기가 어렵다는 「약성가」대목을 풀어보여 30여 년간 북을 다스려 온 원숙한 기량으로 보여주었다. “열두 살 때 소리를 시작했습니다. 목표에 사시던 고 김상용 선생한테서지요. 그런데 소리를 포기해야 했습니다. 얼굴 때문에 소리를 못했는데 그것이 한이 맺힙니다. 그뒤 65년(24세 때)부터 김성권 선생님 밑에서 북을 잡았습니다.” 다섯 살 때 천연두를 앓았다는 추정남 고수의 말이다. 그가 대명고부의 장원에 오른 것은 87년 제7회 전국고수대회에서 명고부 장원을 차지한 이래 9년만이며 90년(제10회)대명고부가 생긴 뒤로 7년만의 일이다. 그동안 그는 전국고수대회에서 대명고부 최우수상(문화체육부장관상) 및 장려상 등을 여러 차례 수상하면서 그 실력을 가늠하게 했었다. 그는 앞으로 자신의 오랜 세월 한으로 남아 있던 소리를 대신해 명고수로서 후진 양성과 국악 공부에 전념을 다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10여 년 전부터 전남 해남에서 추정남국악학원을 경영하면서 후진양성에 힘쓰고 있는 그의 뿌리는 전북 익산에 닿아 있었다. 고향이 익산 황등으로 그의 선대와 형제들이 살고 있다. 부인 이수자 씨와의 사이에 2남 2녀를 두고 있는데 아들은 셋째가 소리 공부를 하고 있다. 여섯 번째「판소리 다섯바탕의 멋」 소리 고장의 전통을 만난다 소리의 고장 전북에서 우리는 전통 국악 공연을 감상 할 수 있는 일은 소리의 고장 전북에서 이제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판소리 다섯바탕의 진수를 한 자리에서 고루 감상할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다. 지난 4월 8일부터 12일까지 5일 동안 서노송동 우진문화공간에서는 「판소리 다섯바탕의 멋」이 펼쳐졌다. 다섯 명의 명창이 명고수의 북장단과 함께 우리 판소리의 힘차고 때로는 굽이굽이 애잔한 구성진 가락을 풀어보이기에 충분했다. 올해로 여섯 번째가 된다. 판소리 다섯바탕을 감상할 수 있는 무대로서 이미 앳된 티를 벗고 독자적인 얼굴을갖추어 가고 있는 무대로 성장한 모습이 엿보인다. 올해 무대에서는 중요무형문화제 제 5호 보유자로 지정받고 있는 박동진 명창은 1994년(4회)「적벽가」, 1995년(제5회)「춘향가」에 이어 3년째 출연, 둘쨋날 「수궁가」를 들려주며 원로 명창의 농익은 기량을 과시했다. 앞서 첫 날 무대를 연 김일구 명창(현 국립국악원 민속단 악장)은 셋쨋날 출연한 부인 김영자 명창(현 국립창극단 재직)과 함께 각각 「적벽가」와 「춘향가」를 들려주었다. 넷쨋날에는 지난 93년 남원춘향제 전국명창대회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한 김소영 명창이 「홍보가」로 추임새를 넣는 객석의 귀명창들과 소리의 호흡을 같이 했고, 마지막날에는 92년 전주대사습놀이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한 민소완(성준숙)명창이 1993년(제3회)「적벽가」에 이어 두 번째 같은 무대에 올라 「심청가」를 들려주었다. 북채를 든 명고수들의 소릿장단과 명창과의 호흡은 판소리 무대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인데 이번 무대에는 이성근■주봉신 명고수가 소리를 맺고 푸는 북장단의 조율을 맡았다. 연일 자리를 메운 청중들은 닷새 동안 판소리 다섯바탕을 감상하면서 명창의 소리와 발림에, 고수의 북을 다스리는 기량에 추임새를 빠트리지 않았다. 소극장 우진문화공간이 매년 봄을 여는 무대로 기획, 열리고 있는 「판소리 다섯바탕의 멋」은 우리 민족 고유의 예술적 심성에서 빚어진 민속악의 정수라 할 수 있는 판소리 다섯바탕의 진수를 한 자리에서 고루 감상하고 명창■고수■청중이 함께 연희할 수 있는 소릿고장의 사랑방과 같은 역할을 해내고 있는 것이다. 이곳에서 사람들은 잃었던 우리의 정체성과 우리 민속음악만이 가지는 자부심을 만날 수 있다. 제 26 주년 지구의 날 기념 자전거 대힝진 이 땅, 이 하늘, 그리고 우리를 살리기 4월 22일은 지구 환경파괴의 심각성을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마련한 26번째 ‘지구의 날’이었다. 전북환경운동연합에서는 지구의 날 하루 전인 4월 21일 일요일 오후에 학생들을 비롯한 전주시민 약 600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제 26회 지구의 날 기념식을 실시하고, 곧바로 시청앞 광장에서 기린로, 백제로, 천변도로, 관통로, 기린로, 시청 앞 광장에 이르는 약 10km의 도로를 차량이 통제된 가운데 자전거 대행진을 실시하였다. 이번에 실시된 자전거 대행진은 전국적으로 20여 개의 도시에서 동시에 실시된 행사로 친환경적인 교통수단으로서 자전거를 부각시키고 대도시에서 대기오염물질의 70%이상을 차지하는 자동차 공해의 심각성에 대한사회적 차원의 문제를 제기하고자 마련되었다. 또한 행사 진행자는, 이번 행사가 작년 7월 ‘자전거 이용 활성화에 관한 법률’이 제정된 것을 계기로 도시 교통난을 완화하고 환경오염을 방지하며, 국민건강 증진에 기여할 자전거 교통 생활화의 조기 정착을 가져 올 것으로 기대하였다. 특히 시민들의 자전거 이용 활성화를 위한 홍보, 캠패인을 통해 자전거 도로 등 시설 정비의 필요성을 시민들이 직접 체험하고 이 땅, 하늘, 우리 모두를 살리기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하고 실천의지를 다지는 계기가 되었으며 행정당국에게 자전거 도로의 확보와 자전거 이용자를 위한 안전대책 등 시민의 자전거 타기 활성화를 위한 교통정책을 촉구하는 자리가 되기도 했다. 북민주화교수협의회■사단법인 호남사회연구회 제 5회 연합공개토론회 4■11 총선 후 정세와 한국사회의 변화 4■11 총선에 나타난 선거결과는 지역주의의 반영인가, 아니면 또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이른바 문민정부를 구가하고있는 오늘 한국의 정치문화는 어느 수준에 이르러 있는가. 전북민주화교수협의회와 호남사회연구회는 5월 2일 오후 전북대학교 합동강당에서 「4■11총선 후 정세와 한국사회의 변화」라는 주제토론회를 열고, 이번 총선겨로가 드러난 선거■정치문화의 문제점을 논의했다. 이날 토론회에는 전주대 윤찬영 교수(사회복지학)의 사회로 계명대 이종오 교수(사회학)가 발제를 하고 전북대 강준만(신문방송학)■전남대 지병문(정치학)교수와 CBS전북방송 허미숙 편성국장이 토론자로 참여했다. 발제에 나선 이 교수는 이번 선거를통해 나타난 유권자의 기권율■기권율■정책정당의 부재■지역주의 구도 등에 초점을 두고 4■11 총선을 분석, 한국사회의 과제를 ‘보편적 가치관의 내부화’에 있다고 강조하며 이번 총선이 한국 정치와 사회에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르 생각해 보자고 발제에 부쳤다. 선거 결과 드러난 현재의 지역구도는 민주 대 반민주, 민중 대 반민중, 분단과 통일 등의 타협적 논의가 있을 수 없는 대립구도마저도 부차적인 문제로 생각할 수 있는 쟁점을 낳게 되며, 지역구도에 따른 정책대결이나 정책 쟁점이 부재한 이번 선거를 정책정당의 발전이라는 측면에서 볼대 또 하나의 실패한 선거라고 평가하고 있다. 지역주의 타파와 관련해 한국은 현재 세계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인종, 민족, 종교 분쟁을 가지고 있지 않은 비교적 단순한 사회구조에 익숙해 있기 때문에 지역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된다고도 할 수 있으며 한국사회 전체의 끊임없는 계몽과 아울러 합리적인 정치, 사회적 제도와 장치를 도입하는 지역주의 구도의 단계적 해결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그 구채적 방안으로 정당명부제와 비례대표제의 도입, 강력한 시민운동조직을 바탕으로 현행 지구당제에 대한 과감한 개혁을 들고 있다. 이 교수는 이런 문제점들로 한국은 아직도 불철저한 정치사회의 민주화와 미성숙한 시민사회라는 당면 과제를 안고 있닥 지적하고 정치사회의 개혁, 특히 지역주의와 지역문제의 극복은 보편적 가치관을 형성하는 첫 번째 관문이라고 역설하고 있다. 이어서 토론에 나선 강교수는 이종오 교수의 문제제기에 동의하면서, 김영삼 대통령의 개혁정책을 지역 분할 구도에 바탕을 둔 ‘정략적 개혁’이며 적어도 지역분할을 방치하는 도구적 개혁이라고 평가했다. 강교수는 또한 선거 전 10대 일간지상에 보도된 정치칼럼 내용의 분석을 들어 한국 정치사회 발전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언론과 지식인들의 김영삼 개혁정책에 대한 진지한 비판이 없는 성역화 성향을 그릇된 자세라고 지적했다. 지 교수는 지역주의와 관련해 지역주의에 입각한 권력의 분할, 즉 야당을 정치동반자로 인정한다면 정치발전에 긍정적 결과를 낳을 것이라는 방안을 제시했다. 허미숙 국장은 3김 청산론과 관련해 3김청산론은 정책적 대안일 수 없는 지역주의의 일환이라고 지적하면서 결국 지역문제 해결에 관한 자기 논리를 지니고 있지 못하다고 말했다. 이날 토론회는 청중토론을 거치면서 토론회에서 초점이 되었던 지역주의 극복과 4■11총선 이후의 한국 사회의 변화에 관련해, 지역 구도를 벗어난 적극적인 시민사회의 논의와 제안이 활성화되고 이를 통한 강력한 시민운동의 전개될 때 정치 사회 개혁의 근본적 동력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대안을 제시, 열띤 토론장의 분위기를 정리해갔다. 전북청년문학회 기획시대를 여는 문학강좌 문학, 버릴 수 없는 내꿈 전북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젊은 문학인들의 모임인 ‘전북청년문학회’;는 92년 6월 창립한 이래 격월간 「청년문학」을 발행해 왔다. 96년 4월로 통권 21호에 이른「청년문학」지가 지역 문화를 받침하는 하나의 든든한 기둥으로 쌓여 가고 , 회원들이 40명 가까이 이르기까지 청년문학회는 동안 전북민족문학인협의화와 힘을 합쳐 ‘여름시인학교’등을 진행해 왔다. 전북지역 문학 대중의 저변확대에 단단히 한몫을 하고있는 이들 젊은이들이 기획한 첫 번재 문학강좌가 5월 한달(매주 목요일)전주시 풍남동에 있는 동학혁명 기념관 1층 강당에서 진행된다. ‘시대를 여는 문학강좌’「문학, 버릴 수 없는 내 꿈」이라는 주제로 고은, 도종환, 송기원, 은희경 씨를 초대해 그들의문학세계와 작가정신을 듣는다. 5월 2일 시인 고은의 「허무에서 실천, 실천에서 존재로」를 주제로 첫 번째 강좌가 문을 열었다. 허무에서 실천으로 실천에서 존재로, 실천과 존재 사이를 자유로이 오가는 시인 고은은 전북 군산 출신으로 시, 수필, 소설, 평론집 등 100여 권의 책을 저술했으며 더 이상의 수식이 필요없는 시인이다. 이날 강연에는 문학에 관심을 가진 130여명이 찾아와 고은의 문학 세계에 귀를 기울였다. 두 번째 강좌는 5월 9일에 있으며「슬픔의 서정, 그 잔잔한 힘」을 주제로 도종환 시인이 찾아온다. 고두미 마을에서 접시꽃 당신으로, 다시 살마의 마을에 지는 꽃잎으로 우리들 가슴을 데워주는 시인 도종환에게 시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세 번째 강좌는 5월 23일에 있으며「새의 선물」로 문학동네 신인상을 수상한 신인 소설가 은희경 씨가 「지난 풍경을 그리는 생에 대한」이란 주제로 이야기를 풀어낸다. 은희경 씨는 전북 고창 출신으로 숙명여대 국문과와 연세대 대학원을 졸업했으며 현재 동아일보에 장편을 연재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마지막 강좌는 5월 30일에 있으며「내 맘 속의 동산, 내 맘속의 인도」를 이야기 할 작가 송기원 씨를 만날 수 있다. 송기원 씨는 중앙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소설「경외성서」가,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회복기의 노래」가 함께 당선되면서 문단에 등단했으며 제 2회 신동엽창작기금과 제 24회 동인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월문리에서 다시 월문리를 떠도는 소설가. 언 살이 터져 빛나는 생살로 시대의 아픔을 노래하던 시인, 위선을 거부하는 송기원의 작가 정신을 만날 수 있다. 특집 / 오월문화 소리없는 희망과 통일에 대한 간절한 염원 글 / 원도연 문화저널 편집장 ‘80년 광주는 이제 한국 현대사에 새로운 상징으로 자리 잡고 있다. 작년 여름 한총련 의장이 ’전두환, 노태우를 기필코 감옥으로 보내겠다‘고 호기있게 말했을 때 우리는 아무도 그 말을 믿지 않았지만 ’역사‘는 이제 그들을 준엄하게 심판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놀라운 치부가 매일매일 드러날 때마다 우리는 다시 광주를 , 그리고 역사를 생각했다. 그러나 ’세기의 재판‘이 연일 세간의 관심을 모으고 그 자리에서 속시원한 진상들이 쏟아져 나올 것으로 기대했던 많은 사람들은 다시 그 기대를 거두어들이고 있다. 그들은 여전히 강하고 견고한 자신들의 성을 구축하고 있었으며, 무어솝다도 역사화 진실을 대하는 태도가 본질적으로는 다르다는 사실만 거듭 확인될 뿐이었다. 우리가 그들로부터 얻고 싶어하는 것은 무엇인가. 항쟁 16주년을 맞으면서 ‘그들의진실’은 상당한 정도로 밝혀져 있지만 또 많은 부분들은 여전히 미궁에 빠져있다. 그 역사적 사실과 오늘 우리가 알고 느끼고 있는 진실과는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두고 있는가. 광주는 이제 하나의 거대한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지만 그것은 하나의 독자적인 사건으로서가 아니라 현대사의 맥락 속에 위치하고있다. 문화가 한 시대와 사회를 반영하면서 일상의 언어와는 다른 고유한 문법을 지니고 있다면 80년 광주의 비극적 체험은 한 시대의 문화를 그대로 규정했다. 80년 광주는 우리의 현대사 속에서 한국전쟁 이후 가장 극적인 체험을 가져다 주었다. 그속에는 무자비한 살육과 극단적인 저항, 참담한 죽음 그리고 해방과 대동세상의 경험까지 녹아들었고, 그 짧았던 한달여의 시간은 마치 우리가 살았던 근대 백여 년의 역사를 압축한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고통은 죽은 자에게 뿐만 아니라 살아 남은 자들의 삶을 ‘살아 남았다’는 생존의 질서속에 규정했다. 80년 광주를 기억하라 80년 광주항쟁 직후 한국사회는 굴욕적인 침묵과 굴종속에 빠져들었다. 군사독재의 공포 속에서 ‘오월 광주’는 은밀한 구호가 되었지만 그것은 단지 정치적인 영역만을 지배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곧 집단적인 심리적 무력감과 강렬한 패배의식을 불러왔다. 그러나 그 극한적인 절망 속에서 오월은 다시 어김없이 찾아오고 있었다. 아직 많은 사람들이 감옥에 있었지만 ‘그날의 광주’는 독재자들과 제도 언론의 바램처럼 어둠 속에 묻혀 있지만은 않았다. 80년 오월의 사건은 대학가와 전국의 양심세력들에 의해서 서서히 그 참혹한 진상들이 밝혀지기 시자했다. 82년 부산 미문화원방화사건은 80년 ‘5월 광주’에 대한 인식을 민족사적으로 전환시키는 극적인 사건이었다.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이 일어난 이후 오월 광주에 대한 소리 없는 침묵은 서서히 활화산처럼 폭발했다. 83년 대학에서 경찰이 철수하기까지 간헐적으로 기습적인 공세를 펼쳐왔던 민족민주운동은 83년 이후 본격적으로 반격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렇게 열려진 판은 언제나 오월 광주로부터 시작했다. 여전히 80년 광주의 진실이 은폐되고 있을때 전국적으로 불어닥친 민민운동의 거대한 흐름은 광주의 진실을 먼저 물었다. 광주에서 어떤 일이있었는가,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는가, 그리고 그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정부의 발표는 모두 거꾸로 읽혀져서 그대로 진실이 되었지만 진상은 아직도 요원했다. 광주항쟁의 가해자들은 여전히 권력의 중심에 서서 진실을 억압했다. 거의전국적으로 본격적인 공세가 시작되었고 전실을 향해서 장강의 물줄기는 흐르고 있다. 민족민중문화의 실험 - 대중 속으로 광주의 진실에 가장 먼저 접근했던 것은 문화운동의 선두주자들이었다. 70년대 중반에 태동하기 시작했던 민족문화운동은 80년대 초반에 이르러 적극적으로 ‘오월 광주’를 화두로 삼아가기 시작했다. 대학가의 집회문화가 상시적으로 자리잡으면서 문화일꾼들은 그들의 언어와 몸짓으로 광주의 진실을 보여주었다. 제한된 정보 속에서도 그들의 문화적 감성은 광주를 살아있는 역사로 되돌려 놓았다. 서투른 예술이었지만 진실을 말해주고 보여주는 천철살인의 마당극과 비장한 노래 그리고 아직도 피흘리는 듯한 시인의 절규는 사람들을 울렸고 그 눈물은 투쟁의 에너지로 전환되었다. 70년대에 이르러 태동했던 민족문화운동은 여전히 독자적인 무대로 존재하지 못했지만, 한국문화운동사에 가장 빛나는 시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이들이 무기로 삼았던 것은 진실이었고, 그 진실은 곧 강력한 투쟁의 무기가 되었다. 이 시기의 민족민중문화는 독특한 역사적 체험을 겪고 있었다. 그것은 이 시기의 문화운동이 내용적으로는 그 어느때보다도 밀도 있게 민족적 민중적 감서의 기반에 서있었다는 점이었고, 형식적으로는 자의든 타의든 기존 제도문화의 틀을 깨트리지 않고서는 진실을 말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는 사실에 근거한 것이었다. 춤과 노래, 연희의 장르가 복합된 집체극이 대량으로 생산되었고, 그것은 대중들의 수동적인 피사체로서가 아니라 대중 속에서 보호받고 인정받았으며 대중들의 참여 속에서 완성되었다. 미술운동 역시 개인적 작업을 넘어서 집단적인 창작의 분위기가 대세를 이루었다. 작가들은 각기 강력한 하나의 선전일꾼이었다. 미술운동에서 작가들은 대량복제와 속도전에서 장점을 발휘하는 판화형식에 주목했고, 대형 걸개그림이 밤새워 집단적으로 제작되었다. 이렇게 생산된 집체극과 걸개 그림 그리고 노래들은 기존 문화 상품들의 유통구조를 철저하게 무시하고 있었지만 강인한 생명력으로 전파되었다. 그들은 무엇보다도 작가적인 문법이 아닌 대중적인 어법으로 알기쉽고 사실적으로 문화운동에 접근했으며, 그것은 곧 리얼리즘 문화의 전범으로 평가될 만한 것이었다. ‘대중과함께’라는 새로운 문화적 실험은 80년대 민족민중문화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었지만 그러한 접근은 그 아마추어리즘과 곰삭지 못한 계급적 편향, 그리고 그로부터 파생하는 관념성과 도식성으로 인해 80년대 후반에 이르면서 발전적으로 계승되지 못하는 아쉬움을 남겼다. 계속되는 탄압 속에서 단련되다 80년대 중반에 이르면서 전두환 정권은 더욱 강력하고 폭넓은 민민운동의 저항에 직면했고, 그것은 곧 정권의 위기를 가져왔다. 민민운동의 거듭되는 공세와 한층 강화된 힘은 문화운동에서도 새로운 형식과 내용을 필요로 했다. 오월 문화는 이제 더욱 폭넓은 문제의식과 세련된 양식으로 새로운 무대를 찾아 나섰다. 85년 민족민중미술을 꿈꾸는 일단의 작가들은 서울에서 ‘1985년, 한국미술 20대의 「힘」전’을 열었다. 20대 신예작가들은 ‘80년 광주로부터 자양분을 얻어 근대민족사의 흐름을 그들만의 고유한 문법으로 그려냈다. 그러나 「힘」전은 예상대로 정권의 대대적인 탄압을 불러왔고 그 과정에서 미술운동은 거듭 단련되었다. 「힘」전은 ’광주‘의 문제의식을 근대 민족운동사에까지 확장시켰다는 의미를 갖는 것이었지만, 그러한 탄압과 단련은 미술운동 뿐이 아니었다. 거의 모든 문화영역들이 이른바 무대라는 제도화된 공간 속으로 진입해 들어가면서 갖은 탄압과 단련을 거듭하고 있었다. 87년, ‘오월 문화’의 개막 87년 전두환 정권이 막바지에 달하면서 일어난 6월 항쟁은 민족사의 화려한 부활을 예고했다. 짧게 보아 80년 이후, 그릭 길게는 50년대 이후 단절된 민족운동의 전통이 복원되고 변혁운동의 열정이 한 시대를 뒤덮었다. 노동운동이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곳곳에서 진보운동의 전선이 형성되었다. 87년을 기점으로 민족문화운동은 아연 활기를 띠게 되고 각 장르별로 전국적인 민족문화운동체들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민족문학을 표방하는 자유실&#52381; 문인협의회, 민족문학작가회의, 민족문학인협의회 등이 각기 이름을 달리하면서 지역별로 결성되기 시작했고, 미술분야에서는 민족민중미술운동연합 등의 엄격하게 말하면 문화예술단체라기 보다는 문화운동체들이 속속 등장하기 시작했다. 다른 한편에서는 현장에서의 문화운동을 중시하는 움직임들도 활발하게 전개되기 시작했으며, 각 장르별로 특화된 문화예술단체들도 속속 등장하기 시작했다. ‘오월 문화’는 비로소 본격적으로 무대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오월 문화의 진원지는 광주였다. 광주의 민족극단 ‘토박이’는 88년 <금희의 오월>(박효선 작■연출)을 무대에 올렸다. <금희의 오월>은 80년 그 10일 동안의 이야기를 요약적이면서 정공법으로 그려냈다. 이 작품은 대학생 이정현을 주인공으로 삼아 시민군을 중심으로 한 항쟁의 주도층을, 이정연의 가족을 그림으로써 가족들의 고통과 갈등을 이정연의 부모가 일하는 시장을 무대로하여 일반 광주시민들의 이야기를 그려내고, 이 세 가닥을 엮음으로써 그 항쟁 속의 인간들의 움직임을 총체적으로 형상화한 것이었다. 연극평론가 이영미는 이 작품을 “기록과 증언에 의존한 작품에서는 느낄 수 없는 생생한 인물행동과 심리묘사는, 이제 뻔하다고 느낄 수 있는 그 사건의 실감을 다시 한번 일깨운다.”고 평가했다. <금희와 오월>과 함께 광주의 놀이패 ‘신명’은 88년 서울에서 열린 제 1회 민족극한마당에서 <일어서는 사람들>(김정희 작■연출)을 초연했다. 이작품은 광주항쟁의 사실주의적 묘사에 얽매이지 않으면서도 또 다른 의미에서 광주의 질감을 표현하고 있었다. <일어서는 사람들>은 그래서 다분히 상징적이면서도 편하고 쉽게 사람들에게 광주를 이해시켰다. 절제된 대사와 춤을 통한 치밀한 압축, 특히 긴 천을 이용해서 그날 광주를 뒤덮었던 현수막과 시체를 덮는 천, 죽음에 대한 흔적과 멍에, 민주시민의 머리띠로까지 싱징화했던 표현은 완성도 높은 예술성을 보여주는 것이었다.89년에 들어서면서 ‘이제는 뻔하다고 느껴졌던’ 광주의 오월은 본격적으로 무대에 진입하면서 예술적 완성도를 높였다. 88년 광주 청문회와 오월문화 6공 정권이 출범하면서 본격적으로 광주문제는 정치쟁점화되었다. 여기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이 뒤따르지만 역사는 진보하고 있었다. 88년 6월, 국회에서 ‘5■18 광주민주화운동 진상조사특위’가 구성되고 12■12 군사쿠데타와 군사항쟁이 국회 청문회의 테이블에 오르면서 오월 문화는 밀도있게 그날의 사건을 재현하기 시작했다. 특히 89년 문화방송과 한국방송공사가 광주항쟁 특집으로 각각 내보낸 <어머니의노래>와 <광주는 말한다>는 광주항쟁이 최초로 TV라는 공공의 대중매체에 등장한 것이었다. 문화방송의 <어머니의 노래>는 외국 방송사들의 자료 필름을 통해서 생생하게 그날의 현장을 구성하면서 광주항쟁의 비극과 참상을 고발했으며, 무엇보다도 광주가 아직 끝나지 않은 역사라는 사실을 환기시켰다. 광주는 비로소 완전하지는 않으나마 ‘폭도의 도시’라는 오명에서 공식적으로 벗어났고 한국 민주화운동의 메카로서 그 위치를 다지고 있었다. 그와 때를 같이해서 오월문화는 보다 폭넓게 광주문제에 천착했다. 민족미술의 선두주자들은 88년 7월 <오월 미술전>을 계기로 민미련을 결성했고, 광주에서는 광주미술인공동체가 89년부터 거리미술제를열기 시작했다. 민족춤의 선두주자였던 청주의 강혜숙 춤패는 88년 5월 광주에서 <하나됨을 위하여>라는 통일춤 한마당을 펼치면서서 한국의 근현대사와 통일된 조국의 미래를 주제로 그속에서 5월 광주를 사실적으로 그려냈다. 민족춤의 선두주자로 꼽히는 그는 88년 광주의 공연을 다녀와서 “처음에는 현대사에서 광주가 의미하는 것, 그리고 중요한 진상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공연과정에서 광주시민들과 만나면서 그들이 진정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80년 5월 열흘간의 자치기간동안 자신들의 쟁취했던 민주화된 세상, 사랑의 공동체, 그런 것들이었다. 그리고 그 대동세상의 가치는 인류의 이상이 실현되는 단초가 도리 수 있는 것이었다.”라고 말했다. 이 문제는 그때로부터 지금까지 오월 문화의 가장 중요한 관건이자 광주의 바램이 되고 있다. 90년대에 접어들면서 오월문화는 화려하게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소리꾼이자 마당극 연출가인 임진택은 90년 5월 <오월 광주>라는 창작판소리를 내놓으면서 전통 판소리의 형식 속에 광주항쟁을 사실적으로 담아냈다. 임진택의 <오월 광주>를 기점으로 오월 문화는 거의모든 장르에서 폭넓게 다루어지기 시작했다. 90년 문화방송은 <어머니의 노래>에 뒤이어 PD수첩 3부작으로 <90년 5월, 광주>를 제작 반영했고, 91년에는 광주항쟁을 다룬 최초의 극장영화였던 <부활의노래>(이정국 감독)가 영화관에 걸렸다. 그러나 이때까지의 오월문화는 여전히 많은 제약과 교묘한 탄압을 받고 있었다. 임진택의 창작판소리는 90년의 초연 이후 계속 해서 비합법 공연무대에만 설 수 있었고, 음반은 지하 유통 구조를 통해서만 전파되었다. 이정국 감독의 <부활의 노래>는 90년 공륜의 1차 심의에서 무려 25분여의 분량이 삭제당했고 전투장면과 도청집회장면, 옥중 단식장면 등이 잘려나갔다. 그런 가운데서도 오월문화는 이제 그 항쟁의 중심과 주변에서 살아왔던 사람들의 이야기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93년 광주의 극단 ‘토박이’는 오월 심리극 <모란꽃>(박효신작■연출)을 올렸다. ‘광주는 계속되고 있다’거나 ‘끝나지 않았다’는 역사적 당위 속에서 이해되었던 광주는 이제 사람들의 문제로 제기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오월에서 통일로 93년 이른바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오월문화는 더욱 활기를 띠었다. 94년부터는 광주에서 광주항쟁을 기념하는 문화제가 열리기 시작했다. 이때 광주 무대에는 임진택의 <오월 광주>와 극단 ‘토박이’의 <모란꽃>이 올라갔다. 이어서 95년 5월에는 여기에 윤이상의 교향시 <광주여 영원하라>가 연주되었고, 학살자 35인의 얼굴을 풍자한 얼굴전을 비롯해 거리굿■영화제■재판극■연희극■사진전 등 다양한 예술 마당이 펼쳐졌다. 95년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던 방송드라마 <모래시계>는 광주항쟁을 드라마 속에 삽입하면서 80년 광주의 거리를 드라마 속에서 재현해 냈고, 때를 같이하여 문화방송의 드라마 <제 4공화구>과 SBS의 <코리아게이트> 역시 역사 드라마에서 오월 광주를 그려냈다. 광주의 오월이 역사적으로복권되면서 오월 문화는 암울한 기억 속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광주를 새로운 시각에서 해석하고 조명하는 작품들도 쏟아져 나왔다. 80년 당시 가해자의 입장에 있었던 사람들의 고백전인 작품들이 등장하고 80년 광주항쟁으로 인해 인생이 뒤바뀐 사람들의 삶이 제각기 조명되기 시작했다. 보다 인간주의적인 접근들이 사람들의 공감을 얻어갔다. 80년 광주를 직접적으로 다루고있는 많은 문화예술작품들은 초기의 진상규명에서 역사적 현실이라는 관점으로 그리고 다시 인간주의적인 방식으로 그 접근방법들을 조금씩 달리해왔다. 그 가운데서도 광주의 정신은 하나의 일관된 역사성과 지향성을 갖고 전개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곧 통일의 문제였다. 95년 광주에서 열린 ‘광주비엔날레’는 그 정치적 저의에도 불구하고 역으로 광주의 오월문화를 새롭게 관철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안티 비엔날레’라는 이름으로 불려진 ‘95광주통일미술제’는 광주의 오월 묘역입구에 ‘천하 민족통일 대장군’과 ‘지하 오월정신여장군’을 같이 세우고 1천 2백개이 만장으로 가을 하늘을 뒤덮었다. 그리고 그 위로는 수도 없이 쓰러져간 민주원혼들의 천도와 통일열마의 축원을 띄워 올린 꽃상여가 길 위에 묵직하게 매달려 있었다. ‘민주’와 ‘통일’이라는 간절한 염원은 광주의 오월을 통해서 하나가 되면서 민족문화의 지향을 담아냈다. 특집/오월문화 사실의 기록에서 광주의 정신까지 오월 문화의 작품들 정리/편집부 광주의 명예회복, TV프로그램 <어머니의 눈물>과 <모래시계> 오월문화에 가장 인색했던 한국의 방송사들은 88년 국회에서 광주특위가 구성ㄷ되고 청문회가 여리면서 조금씩 역사의 진실에다가서기 시작했다. 89년 5월 문화방송의 특별 다큐멘터리로 제작된 <어머니의 눈물>은 80년 광주를 정면으로 다룬 최초의 TV프로그램이라는 의미를 갖는 것이다. <어머니의 눈물>은 80년 광주항쟁의 진상을 당시 외국 방송사들의 자료필름과 89년 현지의 광주를 교차시키면서 진실에 한발 다가서는 노력을 보여주었다. ‘당신은 천서였오....’로 시작되는 광주의 한 묘비와 그 죽음과 삶에 얽힌 사연들은 애절했고, 그 속에서 일순간에 무너져버린 한 평범한 삶은 전국의 시청자들에게 어떤 말보다도 강렬하게 광주를 증언해 주는 것이었다. <어머니의 눈물>과 함께 한국방송공사는 <광주는말한다>를 특집 다큐멘터리로 제작해 방영했고, 90년에는 문화방송의 PD수첩이 이어졌다. 그러나 이후 양 방송사는 “역사적 평가는 일정한 시간이 지나야 정확하게 평가 될 수 있으며, 아직도 진상이 밝혀지지 않은 광주문제에 대해서 객관적인 접근이 어렵다”는 이유로 5월 광주에대해서 침묵했다. 그러나 95년 서울방송의 <모래시계>는 방송드라마 사상 최대의 화제를 불러오면서 광주는 아직 끝나지 않은 시대적 과제임을 다시 확인시켰다. 드라마 <모래시계>속의 ‘광주’는 전체 24부중 2부에 불과한 것이었지만 PC통신에 무려 1천여 건의 감상소감이 쇄도하고 때를 같이하여 시청율이 수직상승하면서 ‘80년 광주’가 여전히 국민적인 관심사로 남아 있음을 보여주었다. 오월의 상처를 어루만진 극단 ‘토박이’의 <모란꽃> ‘광주항쟁에 직접 참여했던 주부 이현옥은 항쟁이후 계속되는 악몽과 주위의 압력에 시달리다 정신과 전문의의 소개로 심리학 교수를 찾는다. 교수는 이현옥이 항쟁의 충격으로 심한 정신질환을 앓고 있음을 발견하고 사이코드라마를 통해 당시의 참혹한 진압광경과 그를 남파간첩 모란꽃으로 조작하려는 고문과정 등을 재현하낟. 그 과정에서 그녀는 스스로아픔을 치유하고 기쁨과 희망을 찾아간다.’ 광주항쟁을 다룬 연극 가운데 단연 대표작으로 꼽힐만한 연극 <모란꽃>의 줄거리이다. 광주의 민족극단 ‘토박이’의 <모란꽃>은 광주항쟁의 충격과 상처를 직접 드러내지 않고 심리극 기법을 사용 예술적으로 승화시켰다는 평가를 받고있다. <모란꽃>은 작가이자 연출가이면서 광주항쟁을 시민군 홍보부장으로서 직접 겪었던 박효선 씨의 작품으로 <금회의 오월>과 함께 그와 극단 ‘토박이’가 80년 이후 지속적으로 만들어온 오월극의 대표작이다. <모란꽃>은 93년 10월 광주 민들레소극장에서 초연된 이후 94년 민예총이 선정한 제 4회 민족예술상을 수상했고 95년 5월까지 전남지역, 부산 대전, 청주, 등지와 캐나다. 미주 등을 순회하면서 연인원 20만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박효선 씨(42)는 광주항쟁 당시 소극장을 꾸미면서 <한씨 연대기>를 준비하던 중 “사람이 죽어가는데....”라며 하던일을 작파하고 단원들과 함께 도청으로 달려갔다. 80년 이후 그는 오월 광주에 대한 일련의 연극 작업들을 통해서 ‘오월 광주의 전도사’가 되었다. 그러나 그가 해온 작업들은 상처받은 사람들에 대한 치료와 대동세상으로 표현되는 항쟁기간 동안 광주의 공동체 정신을 계승하는 일에 집중되어 있다. “광주항쟁을 바라보면서 너무 역사성을 우위에 두고 사회사적이고 역사적 사건으로만 간주하는 경향 속에서 개인의 아픔과 고통은 간과되고 있다.”고 그는 말한다. ‘토박이’는 올해 2월초부터 3월까지 지방극단으로서는 거의 처음으로 서울 대학로에 입성, 서울문화에 도전하면서 뜻깊은 성과를 거두었다. 광주항쟁과 관련해 13년간 미국에서 도피생활을 했던 윤한봉 씨는 서울공연을 보고 나서 “오랜 시간동안 나를 괴롭힌 ‘도망자’라는 생각에서 벗어나게 해주는연극”이었다고 평가했고 그만큼 이 작품은 광주의 상처를 인간적으로 접근한 수작으로 남았다. 광주항쟁의 사실기록, 임진택의 창작판소리 <오월광주> (엇중모리)“광주시민 여러분 나는 대통령 최규하요. 이번 사태로 인해 얼마나 슬프시오, 원인이야 어쨋건 이대로 오래가단 국가안보가 위태롭소, 북한공산집단에서 악용하면 어쩔테요 야만적 대결보다는 대화로써 해결하여 문화국민이 됩시다.....” 광주항쟁 14년만인 94년 5월 광주에서는 이를 공식적으로 기념하는 첫 번째 문화제가 열렸다. 문예회관 대극장에서 열린 인잘 행사에는 오월 심리극 <모란꽃>과 함께 임진택의 창작판소리 <오월광주>가 초청되었다. 880년대 민족문화운동의 실천가이자 민족극의 선두주자였던 임진택의 창작판소리 <오월광주>는 79년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에서 시작해 전남도청 함락으로 이어지는 광주항쟁의 10일간을 걸쭉한 재담과 신랄한 풍자로 엮은 일종의 역사적 기록이다. 그가 사설을 쓰고 곡을 붙이고 소리를 한 이 작품은 황석영의 광주항쟁기록「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와 홍희담의 「광주민중항쟁비망록」을 저본으로 삼은 사실 그대로의 기록에 충실한 것이었다. 그러나 90년 서울의 마당극장 ‘한마당’에서 초연된 이 작품은 90년에 이르기까지도 여전히 비공식적인 작품활동으로 이어졌다. 그에게 이 작품은 ‘벗을 위한 진혼곡’이었다. 79년 12월말 광주에서 우연히 만난 문화패대표 윤상원 씨는 임씨가 불렀던 ‘소리내력’을 멋들어지게 불러제껴 임 씨와 가까워졌으나 그로부터 몇 달 후 도청을 사수할 때 최후의 지도자로 나서 항쟁하다 &#44561;내 목훔을 잃고 말았다. 임진택 씨는 ‘가슴이 복받치게 통곡하는 장면을 연습하며 실제로 많이 통고했다’며 죽은 벗에 대한 그리움을 이야기했고 그래서 <오월 광주>의 끝은 윤상원 씨의 영혼결혼식 때 불려졌던 <님을 위한 행진곡>으로 마무리 되었다. 이 작품은 전통 판소리 다섯바탕의 견고함에 대한 과감한 시도로 평가되었으며 소리 대목대목마다 관중들과 함게 부르는 노래 함께 외치는 구호 등이 삽입되어 마당극적 요소까지 가미된 문화적 실험으로서의 의미도 동시에 지니고 있었다. 재독음악가 윤이상의 사모곡 <광주여 영원하라> 94년 8월 국내 언론은 일제히 재독음악가 윤이상 씨의 25년여만의 귀국을 보도했다. 그러나 윤이상 씨는 끝내 서울행 비행기에 오르지 못하고 그 다음해인 95년 11월 3일 독일땅에서 타계했다. 윤이상 씨는 1967년 ‘동백림 사건’때 간첩으로 몰려 독일에서 한국으로 납치되어 갖은 고문과 악형 끝에 2년 동안 옥살이를 하고 독일로 돌아간 뒤 다시는 고향땅을 밟지 못한 비운의 천재 음악가였다. 그는 분단의 현실을 몸으로혹독하게 체험했고 그만큼의 고통으로 통일을 염원했다. 그는 독일에서 80년 광주항쟁의 침상을 목도하고 81년 독일 WDR방송의 위촉을 받아 <광주여 영원히>를 작곡했고, 이 작품은 그해 5월 와카스기가 지휘한 쾰른 방송교향악단에 의해서 초연되었다. 과거 현재 미래의 3부로 구성된 이 곡의 1부는 봉기와 학살, 2부는 경악과 비탄과 통곡, 3부는 한국의 민주주의와 정의회복을 호소하는 내용을 담았다. 이 곡은 탐파니■실로폰을 통해 분노의 함성과 격동적인 상황을 표현하였으며, 이어 금관악기와 팀파니로 호소하는 듯한 외침소리를 사실적으로 형상화해 결정에 이른 뒤 트럼펫과 트럼본으로 민주주의에 대한 염원을 나타냈다. 윤이상의 <광주여 영원히>는 그의 ‘참여음악’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분류되었으며, 94년 9월 서울, 광주, 부산 등에서 열린 ‘윤이상 음악제’를 통해서 국내에서는 처음으로연주되었다. 이 음악제를 통해서 ‘불온한 반체제인사’ 윤이상은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음악가로 추인되었고, 그의 음악이 갖는 정교한 고난도 테크닉은 사회적 메시지와 예술적 완성도를 잘 결합시킨 높은 예술성을 보여주었다. 특히 서울시립교향악단(지휘 임원식)의 연주로 진행된 광주공연에서는 광주문예회관을 가득 메운 1천 7백여 명의 시민■학생들의 열렬한 박수를 받았다. 현대무용의 제도권으로 진입, 현대무용단 ‘사포’의 <그해 오월> 전북에서 활동하고 있는 현대 무용단 ‘시포’(예술감독 김화숙)는 95년 5월 광주문예회관에서 <그해 오월>을 올렸다. 이 공연이 남다른 의미를 가졌던 것은 ‘사포’가 그동안 끊임없는 창작 활동과 실험적인 무대를 꾸며왔지만 주로 추상적인 현대춤의 영역을 개척해왔던 흐름에서 80년 광주를 직접적으로 형상화했다는 점 때문이었다. 그동안 민족춤 지향적인 춤꾼들에 의해서 형상화되어왔던 오월이 이른바 제도권 춤의 영역에서도과감하게 다루어지기 시작했다는 점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사포는 이 공연의 목적에서 “그 해 오월은 우리 모두가 증인이었던 역사 속의 사실을 오래도록 마음에 남을 수 있는 예술작품으로승화시키고 객관적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는데 창작과 공연의 목적이 있다.”고 밝혔다. 이 공연은 모두 4개의 장면과 7개의 이미지로 구성되었다. 첫 번째 장면은「어머니, 이제 그만 울어요」라는 주제 속에 ‘낮은 신음소리’, ‘볼 수 없는 얼굴들’이라는 두개의 이미지가 춤으로 표현되었으며, 두 번째 장면은「젊은 무등」이라는 주제속에 ‘참지 못할 분노’, ‘고독한 거리’가 이미지화되어 그날의 치열한 현장을 생생하게 재현해냈다. 세 번째 장면은 항쟁이 끝난 황량한 거리의 사람들이 「숨길 수 없는 노래」라는 주제로 그려졌다. ‘질퍽이는 눈동자’, ‘지워야 할 기억’이 세 번째 장면의 주요 이미지로 구성되었다. 마지막 네 번째 장면은 광주항쟁의 정신과 관련된 주제로 구성되었다.「참 좋은 세상」이라는 주제 속에 남은 하나의 이미지는 ‘우리가 그리던 세상’이었다. ■인터뷰 치열한 작가정신의 80년대 송만규(화가■전 민미련 공동의장) 카톨릭 센터에서의 집회, 전북대 학생회관에서 숨어서 며칠 동안 잠못자고 그려대던 걸개그림, 수없이 찍어댔던 판화, 밤새워 계속되는 수많은 회의와 토론들... 80년대 초의 모습이다. “83년 이리에서 열었던「땅」전을 기억합니다. 아마도 전북지역에서는 가장 처음으로 한국 근대사와 80년 오월을 매개한 죽품들이 출현했던 전시회였습니다.” 80년대 중반 이후 차츰 조직화되고 단련되기 시작한 미술운동은 ‘민족미술협의회’를 거쳐 88년 ‘민족민중미술운동전국연합’이 창립되면서 미술운동의 새 장을 열었다. 이때 송만규 씨는 홍성담 씨와 함께 공동의장을 맡아 미술운동의 주축에 섰다. “80년대 초 오월문화에 있어서 예술인들의 개인적인 작업이란 엄두도 낼 수 없었습니다. 모두가 선진일꾼이었습니다” 80년대 오월문화의 한 축을 받들고 있었던 미술인들은 작가라기보다는 각기 개별적인 활동가들이었다. 그러나 그 시기 문화운동들은 장르를 통합하는 집체적인 성격을 지니고있었고, 미술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당시 문화운동을 이끌던 송만규 씨는 “이제는 그 당시를 기억해내고 정리해야할 필요가 느껴진다.”고 말한다. 광주의 깊은 상처의 영화 <꽃잎> ‘오월, 그날이 다시오면.’이라는 노래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꽃잎’의 의미를 어렵지 않게 바로 알아낸다. 장선우 감독의 영화 <꽃잎>은 80년 5월 광주에서 꽃잎처럼 스러져갔던 사람들에 대한 기록이다. 비제도권 영화<오 꿈의 나라>, 최초의 극장영화로 제작되었지만 검열과정에서 무차별적으로 삭제당하는 규제와 내적 역량의 한계를 동시에 보여주었던 <부활의 노래>이후 거의 처음으로 광주의 진실을 한구영화가 담아냈다. 운동권 오빠를 잃고 80년 5월 엄마마저 계엄군의 총에 잃은 채 천지를 떠도는 한 소녀의 회상과, 그 소녀와 운명적으로만나 서로의아픈 상처를 치유해가는 공사판 인부 장의 이야기가 전체적인 줄거리를 이룬다. 영화는 소녀의 회상을 빌어 80년 광주 금남로의 거리를 완전하게 재현해냈고 광주의 한과 상처를 극적으로 보여주었다. <꽃잎>에 주연으로 출연한 여고생 이정현은 귀기 서린 표정으로 배역을 소화해내면서 스타점에 올랐고 영화는 칸 영화제에 출품되었다. 이 영화는 80년 광주의 한과 아픔을 정면에서 다루면서도 시점을 현재 진행형으로 돌려놓는 영화예술의 장점을 최대한으로 살려냈으며 광주문제의 달라진 위상을 다시금 확인시켜 주었다. 광주항쟁의 승고한 상징, TV다큐드라마 <시민군 윤상원> 80년 광주항쟁 당시 마지막까지 전남도청을 사수하다 80년 5월 27일 새벽 산화해간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의 일대기가 광주문화방송의 5■18 16돌 기념 다큐드라마로 제작되었다. 전체 2부로 제작된 이 프로는 항쟁 장면과 그에 관한 기억을 떠올리는 동지들의 증언으로 구성되었다. 1부 ‘투사회보’는 윤상원의 출생부터 항쟁 초기까지의행적을 보여준다. 전남대 78학번으로 정외과를 마친 그는 주택은행 서울 봉천동지점의 평범한 은행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하지만 어느날 그는 돌연 낙향해 위장취업자로 그리고 노동야학교사로 달려져 간다. 그러던 그에게 80년 5월이 다가오고 그는 야학생들과 함께 투사회보를 발간하면서 선전일꾼으로서 광주항쟁의 소용돌이 속에 들어선다. 2부 ‘마짐막 장면’은 80년 5월 25일 진압군의 최후통첩 이후 27일 새벽 도청에서 산화하기까지 사흘간의 항전 기록이다. 시민군 내부의 혼란을 수습하면서 결사항전의 새로운 대오를 꾸리던 그의 곤뇌와 결단의 시간이 2부의 주요한 내용들이다. <시민군 윤상원>은 광주 항쟁 당시 광주를 취재했던 외신 기자들과 그의 최후를 끝까지 지켜보았던 동료들의 인터뷰를 미국, 일본 등에서 현지 취재했으며, 제작기간 1년, 총 출연자 100여 명이 참가한 대작으로 오는 14일과 15일 광주지역에서 방영예정이다. 이 프로그램의 작가 박효선 씨는 주인공 대역을 맡았고 광주의 극단 ‘토박이’ 단원들이 출연했다. <시민군 윤상원>은 광주항쟁의기록들이 광주의 진상과 살아남은 자들과 희생자들의삶에 대한 애절한 추모의 내용으로부터 시민군의 주체들을 구체적으로 조명하고 그들의 신념을 기록하는 단계로까지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새로찾는 전북미술사30 신미술의 몰이해 속에 사라져 간 시대의 희생자 이순재(李&#29321;宰) 글/이철량 전북대 교수■미술교육과 전북미술에 유화라고 하는 새로운 그림을 보여준 최초의 화가는 이순재였다. 그러니까 이순재는 이 지역에서 서양화를 공부한 최초의 인물이었던 셈이다. 이순재가 언제 어떤 경로를 거쳐 서양화를 공부하기 시작했고 그 과정은 어떠했었는지 구체적으로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1904년에 전주 명문가의 아들로 태어나 당시로서는 생소하기 짝이없는 서양화를 공부하기 위해 일본에까지 건너갔던 것으로 보인다. 1920년대는 전주 지방의 미술계가 새로운 변화의 전기르 맞고 있었다. 그것은 1925년에 전주고등보통학교가 창설되면서 근대적 교육이 시작되고 여기에 일본인 미술교사였던 삼린평(森麟平)이 부임하게 된다. 그리고 그 뒤이어 1927년에는 전주여자고등보통학교에 대진일차(大津逸次)가 역시 미술교사로 내려오면서 지역미술에 새로운 변화를 예고한다. 이처럼 1920년대는 전북미술에 새로운 자극이 형성되었으나 이순재가 이들에게서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는 흔적은 보잊 않는다. 그러나 이순재를 뒤이어 서양화를 공부했던 김영창이 삼린평에게서 서양화를공부했던 점으로미루어보면 이들 일본인 교사들의 부임으로 지역에 서양화를 이식시키는 주된 역할을 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순재는 이들보다 다소 먼저 서양화라는새로운 그림에 눈을 떴고 그것을 실행한 개척자였다 이렇게 본다면 우리 나라 최초의 서양화가였던 춘곡 고회동이 일본에 건너간 것이 1910년이었으므로 이순재는 그보다 한 십 수년의 차이르 보였다고 할 수 있다.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우리 나라에서도 많지는 않지만 상당수가 일본에건너가 서양화를 고웁하게 되는데 앞서 언급한 고회동을 필두로하여 김관호, 나혜석, 김찬영, 이종우 등이 그들이다. 그러나 몇 몇 선각자들의 새로운 경향에의 관심과 활동에도 불구하고 당시 일반인들의 서양화에 대한인식은 대단히 비참한 것이었다. 나라가 망한 암울한 시기에 그림을 그린다는 것만으로도 냉대의 대상이었던 형편에 더욱이 일본에까지 건너가 이상한 그림을 공부했다는 것은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었다. 그 좋은 예로 고회동은 다시 동양화로 돌아섰고 초기 대부분의 서양화가들은 고통스럽게 살아갔다.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일제는 한민족의 문화말살 정책에 더욱 힘을 쏟았다. 전주고보와 전주여고보에 미술교사로 일본인들을 내세웠고 더욱이 서양화를 했던 사람들을 부임시킨 배경도 역시 우리의 전통회화와 그 민족정신을 개조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이러한 상황을 이해했던 고희동은 민족화가들의 모임체를 형성하고 전시할동을 벌었다. 그것이 서화협회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일제는 서화협회에 대응하기 위해 1921년에 조선미술전람회를 만들고 신인들을 공모하며 심사는 일본에서 데려온 일본인 작가들이 맡게된다. 어떻든 이 시대의 미술계 상황은 대단히 긴장되어 있었다. 따라서 초창기 서양화를 공부했다는 것은 그만큼 심각한 질타의 대상이었고 따라서 한 작가가 새로운 회화에 도전하는 용기는 실로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이순재도 이러한 시대적 희생자였음에 틀림없었다. 청람(靑嵐)이순재가 전주 신흥고등학교에서 공부를 하다 어떤 연유로 일본에 건너가 새롭게 미술공부를 하게 되었는지는 깊이 알려져 있지 않다. 그리고 일본미술학교를 졸업했다고 전하여지나 이 또한 구체적인 사료는 정확하지 않다. 그러나 당시의 시대상황으로 보아 이순재가 일본에까지 건너가 낯설기만 했던 서양화를 공부했다는 것은 대단히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그는 일본에 건너가기 전에 이미 서양화에 대해 상당한 정도의 이해를 갖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이미 1922년에 제 1회 조선미술전람회가 열렸고 여기에 유화를 출품하는 다수의 일본인과 한국인 화가들이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순재가 일본에서 유화를 공부하고 돌아와 본격적으로 세상에 얼굴을 드러낸 것은 제 7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한 것이 계기가 된다. 이때가 1928년의 일로 전북화단에서는 획기적 사건이었다. 이 무렵 이순재의 그림에 대해서는 깊이있게 확인할 만한 자료가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일부 도판에 의하면 당시 가장 많이 그리고있던 화풍이었던 인상파 계열의 작품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경향은 한국화가들이 일본에 건너가공부했던 초창기의 작가들에게서 볼 수 있는 대체적인 경향이다. 당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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