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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4 | [특집]
특별기고 일본땅에 버려진 농민군 지도자의 유골
글 / 박맹수 영산대학 교수■사학과 (2004-02-12 10:47:31)
왜 동학농민군 지도자의 유골이 북해도 대학에 있는가 1995년 7월 25일 북해도 대학 연구실에서 발견된 종이박스 안에 6개의 유골은 1978년 발행된 신문지에 싸여 있었다. 3구에는 ‘오타스궆, 풍장 오롯고’, 2구에는 각각 ‘일본남자 20세’, ‘기증유골 출토지 불명’이라고 씌여 있었으며, 나머지 1구에는 ‘한국동학당 수괴의 수급’이라고 한다. “좌등정차랑씨로부터”라는 붓글씨가 씌여져 있고, 두 골속에 ‘촉루(해골)’라고 제목이 붙은 문서가 들어 있었다. 문서에는 “우는 명치 27년 한국 동학당 궐기가 있었다. 문서에는 ”우는 명치 27년 한국 동학당 궐기가 있었다. 전라남도 진도는 그들이 가장 극심하게 창궐한 곳이었다. 그들을 평정하고 돌아올 때, 그 수창자 수백명이 살해되어 시체가 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수창자의 머리는 효수되었으며 우는 그 중의 하나이다. 해도를 시찰할 때 채집한 것이다 -좌등정차랑-“ 이라고 씌여 있었다. 문서에 의하면 좌등정차랑이라는 인물이 1906년 9월 20일 전라남도 진도를시찰하던 도중 ‘채집’하여 가져온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북해도 대학측이 지난 6개월 동안 조사한 결과에 의하면 조선에서 유골을 가져간 것으로 추정되는 좌등정차랑이라는 인물은 1906년 목포 일본인 거류지 안에 있던 영사관통거리에 살았던 인물로 목포의 임시 면화재비소에 기사로 근무하다가 1910년 퇴직하고 1911년에는 진주 실업학교 교장을 지냈으며, 1945년 해방과 함께 한국에서 철수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렇다면 왜 동학농민군 지도자 유골이 방치된 채로 이곳에서 발견디었을까? 1995년 8월 4일자 조일신문의 기사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북대에서는 소화(韶和)초기부터 아이누 민족의 인골을 발굴 수집하여 의학부가 자료로 1,000구 이상을 보관하고 있었다. 이 문제에 대해 1982년 북해도 우타리협회가 항의 , 위령제와 함께 희망자에 한하여 반환해줄 것을 요청하였으나■■■■■5년반이나 걸렸으며, 북대측의 대응이 미비하여 문제가 되어왔다.”여기서 소화 초기는 적어도 1926년 이후로서 그렇다면 북해도 대학은 적어도 70년 전부터 아이누족의 인골 등을 수집하여 연구용으로 사용해 왔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1906년 좌등정차랑에 의해 조선으로부터 일본으로 불법 유출된 동학농민군 지도자 두골은 어떤 특정한 시기에 북해도 대학측의 인골수집 전문가의 손에 들어가 보관되어 왔던 것으로 생각된다. 유골은 지금 어떤 상태인가 북해도 대학 농학부가 확인한 결과 유골은 처형 직후 일본으로 건너온 것이 아니라 일정기간 동안 땅속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또한 해부학 교수의 조사에 의하면 대개골의 구성상 나아가 젊은 30~40대일 가능성이 높으며, DNA추출에는 실패했지만 이의 크기로 보아 남자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인다. 즉 유골은 일정 기간 땅속에 묻혀 있다가 ‘채집’되었으며, 두개골의크기와 특징, 이마의 크기, 이의 크기 등을 종합한 결과 30~40대 남성으로 키는 약 150센티미터 정도의 인물로 추정되었다. 유골의 주인은 누구인가 이 유골이 누구의 두골인가를 밝히기 위해서는 1894년 동학농민 혁명기 진도의 상황을 알아볼 필요가 있다. 즉 진도 농민군의 활동과 지도자, 진도 농민군을 진압한 군대와 규모 그리고 지휘자는 누구인가 등이 밝혀져야 한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진도 동학농민군의 활동상을 기록하고 있는 자료는 매우 제한되어 있다. 우선 국내 자료에서 확인되는 내용과 일본측 자료를종합해보면 진도에서는 첫째, 적어도 수십 명 이상이 처형되었음이 확실하다. 즉, 두골이 들어있는 문서에는 수백 명, 천도교측 자료는 70~80명, 일본측 자료에는 2백명 이상이 처형되었다고 하여 진도 동학농민군의 항쟁이 강렬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둘째, 위의 자료에서 확인되는 진도 출신 농민군 지도자는 박중신, 손행권, 김수종, 이방현, 김윤선, 주영백, 김영(대)욱, 서기택, 나치현 등이다. 이 중에서 나치현은 나주에서 처형되었으므로 유골의 주인일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북해도 대학측 조사위원이 진도 현지를 방문하여 현지 주민들의증언을 청취한 결과 박중신의 키가 매우 컸다고 증언하였다고 한다. 이같은 증언은 유골의감정결과 키가 150센티미터 정도라는 추정과는 거리가 멀다. 만일 박중신의 키가 컸다는 증언이 사실이라면 이 유골이 박중신의 것일 가능성은 적어질 수밖에 없다. 또한 현지 답사에 의하면 박중신의 친척들이 현재도 조도면(鳥島面)에 살고 있으며 박중신이 학문도 어느 정도 있었던 인물이라고 증언하는 것으로 미루어 그의 사회적 영향력을 짐작할 수 있다. 이점은 박중신이 1894년말 처형되었다 할 지라도 1906년경까지 그의 시신이 방치되었을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점을 시사해주는 것이다. 또한 1894년 12월 15일 장흥석대전투에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어 처형된 이방언, 김학삼 등 농민군 지도자의 가족들은 몰래 시신을 수습하여 은밀한 곳에 안장하였다. 즉 출신지역에서 어느 정도 영향력이있던 농민군 지도자들의 시신은 대부분 그 갖고들에 의해 관군 또는 일본군 몰래 수습되어 은밀한 장소에 안장되었다. 그러므로 유골의 주인공은 당시 군중과 대질시켜 처리한 손행권, 김윤선, 김영(대)욱, 서기택 4인중의 한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 남은 과제는 무엇인가 앞으로 이 유골문제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먼저 유골의 신원을 정확하게 규명하는 문제이다. 이점은 유골문제를 풀어가는 첫 번째 절차가 될 것이다. 둘째로는 유골을 오래도록 방치해온 일본측의 책임규명과 사죄 문제 및 유출 경위에 대한 정확한 해명이 필요하다. 그리고 국내 유골봉환 추진기구가 구성되어 단일한 협상통로를 통해 유골봉환사업을 진행해야 하며, 국내 봉환 후 안치문제에 대한 입장도 정리되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일본내에서 농민군 유골이 더 있을 가능성에 대한 조사도 동시에 진행되어야 한다. 박맹수/ 원광대학교 원불교학과와 정신문화연구원에서 한국근대사를 전공하고, 올해 2월에 한양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전국적으로도 보기드문 동학농민혁명 전문가로서 93년부터 각종 기념사업에 자문역으로 활동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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