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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4 | [문화저널]
문학의 해, 문학기행 가람(嘉藍), 그 넉넉한 마음의 고향
글 / 정창영 전주교대 국어교육과 조교 (2004-02-12 10:39:43)
돌아보면 남도 땅 어느 한 구절 시(侍) 아닌데 없고, 정(情)가지 않은 곳 어디 있으랴 마는 가람 선생의 체취를 접하러 가는 감회는 남달랐다. 언제쯤부터였을까? 길을 접어서기 전부터 조금씩 설레던 마음 사이로 도타운 손길이 느껴지던 것은, 때마침 메마른 대지를 적시려 봄비가 촉촉이 내려서인지 회색빛 도시에 무디어 있던 가슴 한켠이 이제 막 물을 머금은 초록 물결이 실려 가볍게 흔들리고 있었다. 선생을 찾아 뵙기 위해 길을 나서노라니 생전 곧잘 되뇌이셨다던 ‘제자■난초■술 三福을 타고났다’며 흥겨워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게 밟혔다. 1891년 생이니 지금 살아계셨다면 이미 백수를 누리셨으리라는 생각에까지 미치니 낯선 길조차 예사롭지 않다. 선생은 제자복을 자찬하셨다지만 당신 뿐만 아니라 이땅에 평생 동안 우러러 모실 스승 한 분 가슴에 모시고 산다는 것이 제자들로서도 얼마나 큰 복이었을까. 가람을 접해 본 많은 이들이 선생 이야기를 할대면 어느새 목청에 힘이 실려 신이 나시는 것도, 그분의 제자임을 자부하는 것도 다 그런 연유이리라. 얼마나 아름다운 인연이었던가. 한 번 스치 듯 왔다가 가는 生에서 그런 나눔은 보는 이조차 흐뭇한 미소를 머금게 하는 것임에. 가람의 생가는 저눅 익산군 여산면 원수리 진사동 570번지. 전주에서 여산행 버스를 타고 1시간쯤 북상하노라면 여산면 면소재지 못미처 아늑한 동리에 이르게 된다. 어느 친절한 이의 충고에 의하면 익산에서 여산이나 강경행 좌석버스나 61, 62, 63번행 시내버스를 타서 진사마을에 내리는 편이 더 쉽게 가람 선생의 생가를 접할 수 있는 교통편이라 한다. 어감상으로 다소 오해가 일수도있는진사마을은 우리말로 ‘참실골’에 해당하며, 여산 현지에서는 ‘신막’이라는 말로 더 쉽게 통했다. 표지판을 따라 골목을 지나 生家로 향하노라니 이어 등장하는 진사교, 1970년 9월 준공된 다리이니 따져보면 선생 생전에는 놓여지지않았던 다리이다. 그 다리를 건너노라니 문득 고하(古河) 최승범 선생께서 말씀하셨던, 다리가 놓이기 전 정겨운 풍경이 스치고 지나간다. 냇가를 듬성듬성 가로지르고 있는 징검다리, 어느 한철이면 천렵도 간ㅇ했으리라는 생각끝을 비집고 흐르는 냇물을 보노라니 간밤 메말라 있던 대지를 적시고 지나간 비 몇 모금이 웬지 진하게 느껴진다. 다리를 건너니 밭길보다 먼저 시선이 달려가 맺히는 곳은 풍성한 대숲. 그 켠으로 가지런히 늘어선 것이 기십 호나 되었을까. 여기가 진사동, 선생의 유년시절 추억과 노년의 고적함, 이승에서 누렸던 세가지 복과 저승살이의 허허로움이 정겹게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동리이다. 모정 앞에 있었다던 연못은 보수공사중인지 흔적조차 찾을 길이 없고, 아름드리 백일홍만이 그 허랑한 뒤안길에 외로이 서 있어&#49919;. 인근을 지나노라면 백일홍 꽃무더기에 밀려 근처가 환한 빛깔로 밝아지곤 했다고 술회하시던 고하 선생께서는 이전의 백일홍이 자취를 감추었다며 못내 아쉬워하지 않으셨던가. 주인을 잃은 정원은 허랑했다. D전에는 화사했을 성싶던 생가의 소담스■ㅓㄴ 정취는 다 스러지고 곳곳에는 메마른 겨울 기운만이 짙게 드리우고 있었다. 삶의 껍데기가 벗겨져나간채 방채(放菜)되어 잇는 건물을 보고 있노라니 겨울의 스산함이 가시지 않은 맨얼굴을 접하는 느낌이었다. 가슴이 박차올랐던 것도 잠시, 선생의 생가는 이미 현실과 적당히 결락(缺落)되어 있었다. 생가 어디에서도 선생의 넉넉한 웃음은 찾을 길 없고 김빠진 푸근함만이 몸을 사정없이 휘젖고 지나가는 느낌이었다. 갑자기 가슴 한켠이 웽하게 저려왔다. 지난 번 영랑 생가에 들렸을 적, 그 울적함은 또 얼마나 오래갔던가. 아무려나 무심(無心)한 인사(人事)들, 무연(無緣)한 세월들■■■■. 가지런하게 한켠을 차지하고 있는 장독대며 둘레를 푸근하게 감싸고 있는 토담 사이로 맑게 비치는 햇발이 그리웠다. 그나마 나무 밑둥 언저리에 파르하니 싹을 내밀고 있는 반가운 몸짓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그중 소박한 기쁨이었다. 사람이 들지 않는 생가란 그런 것이었던가. 인적조차 고즈넉하게 담겨있기에 쑥스러울 정도로. 일찍이 정지용은 「가람시조집」(1939)발문에서 다음과 같이 밝힌바 있다. 시조 제작에 있어서 양과 질로써 가람의 오른편에 앉을 이가 아직 없다. 천성의 시인으로서 넘치는 정공(情功)을 타고난 것이 더욱이 가람과 맞서기 어려운 점인가 하노니 한창 드날리던 시조인들의 행방조차 알 길이 아득한 이즈음 가람의 걸음은 바야흘 밀림을 헤쳐나온 코끼리의 보법(步法)이 아닐 수없다. 예전 이름을 들어 비교할 것을 홀한 노릇일지 모르겠으나 송강 이후에 가람이 솟아오른 것이 아닐까 한다. 송강의 패기는 당할 이 고금에없겠으나 가람의 치밀섬세한 점이 아직 어떤 이가 그만한지를 모를 일이다. 어찌 지나친 과찬이었을까. 가람의 숨결 서린 시조 한 수 읊조리다보면 시인 정지용이 찬한 것처럼 송강 이후의 반열에 가람을 놓는다는 것이 전혀 낯설지 않음을 새삼스레 느끼게 된다. 조부에게 한학을 사숙하면서 고전의 길을 섭렵하였던 가람은 만학으로 신학문을 접하는 한편 시조 창작을 통하여 거칠어진 우리의 숨결을 다스리는 데 치중하게 된다. 가람 시조의 특성은 주변생활의 이야기를 조탁한 언어로 형상화함으로써 공감을 일으켰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그의 시조에는 정감적이고 운치가 깃들어 있지만 자세히 뜯어 보면 언어에 기울인 섬세한 노력을 발견하게 된다. 「가람시조집」은 가람의 시세계를 파악하는데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그런 점에서 보면 가람이 노산과 함께 1920년대 시조 부흥에 앞장서 우리 문학사에 주옥같은 시조 1천여 편을 남기고 고전문학에 일가를 이룰 수 있었던 것도 이미 예견된 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일제하의 창씨개명에 반대하여 “끝까지 지조를 지키며 단 한 편의 친일(親日)문장도 남긴 일이 없는 영광된 작가”(임종국,「친일문학론」)였던 가람 이병기. 한때 전북대 문리대 초대 학장을 역임하셨던 노학자에게 중앙대 문리대 교수가 되면서 시작된 서울행은 그나마 간간히 유지되던 심약한 건강을 무너뜨리고 말았다. 학술원회원이 되던 1957년 한글날 기념식에 참석하고 귀가하다 뇌일혈로 기나긴 아병생활에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 다음해 요양을 위해 향리로 낙향한 가람은 병세가 호전되어 간간이 주변과 교통을 하기도 하였으나, 결국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그가 사랑하던 제자와 술, 난초를 뒤로 하고 이땅을 떠나갔다. 때는 겨울, 바야흐로 1968년이 마지막 거친 숨을 몰아쉬던 어느날이었다. 이제 선생은 뒷산 야트막한 동산한 자락을 베고 누워계신다. 조촐하게 자리잡은 단아함으로 소나무 드리운 향을 맡고 아랫길 대숲에 이는 소리를 아로새기며 어디에선가 농익고 있을 술향기, 새 촉을 부지런히 키우고 있을 난초와제자들의 선한 눈매를 가슴에 담고. 그대로 괴로운 숨지고 이어가랴하니 좁은 가슴 안에 나날이 돋는 시름 회도는 실꾸리같이 감기기만 하여라 -<시름> 난세의 시대일수록 한 줄기의 고고한 향기가 그리워지듯이 저녁 노을 등지고 오른 다가공원에는 ‘가람시비’만이 나그네를 담담하게 반겨주고 있었다. 마치 실꾸리 같이 감기는 우리 생이 그러하듯이 아름다운 인연 한 바람 다라게 기다리며 고즈넉하게 살아가라고 ■ ■ ■ ■ ■. 가람의 고향에 대한 언급은 수시로 등장하는 것으로, 고향은 선생의 정신적 기반을 형성하는 중요한 곳이기도 하다. 장창영/ 68년생, 전북대 국어교육과를 졸업하고 현재 같은 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다니고 있다. 현대시를 전공하는 그는 재학시절 전북대 학술문학상에 시와 평론으로 수상한 바 있다. 전주교대 국어교육과 조교로 있으며 틈틈이 시를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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