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4 | [문화저널]
새로 찾는 전북미술사 29
시대를 앞서 간 진취적인 정신의 향기 박래현
글/ 이철량 전북대 교수 미술교육과
(2004-02-12 10:29:56)
전북이라는 수려한 토양이 가꾸어 낸 큰 인물들 중에서 우향(雨鄕) 박래현이 있다. 박래현은 어쩌면 한국 역사상 가장 뛰어난 여류 화가로 꼽힐 수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 기록으로 조선 시대의 신사임당이나 혹은 최초의 여류 서양화가였던 나혜석 정도를 기억하고 있는 형편에서 박래현의 위치는 너무도 뚜렷한 것이리라. 이것은 그가 단지 여류라는 평가의 한계를 초월하고 있다는 역사적 의미에서 더욱 빛이 난다. 그는 그러한 평가에 걸맞는 화가로서의 일생과 작업 과정을 남기고 갔다.
박래현이 살았던 시대는 우리 역사상 가장 암울했던 시기였으며 한편으로는 급변하는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던져져 있었다. 그의 삶은 일제의 손아귀에 맡겨져 있었고, 그 자신은 튼실한 개척 정신이 없으면 버텨내기 어려웠다고 볼 수 있다. 박래현이 태어났던 1920년은 일제의 통치가 자리잡아 가고 있었던 무렵이었다. 1922년에는 조선미술전람회가 시작되었기 때문에 사실상 모든 의식 활동이 보이지 않는 제약 속에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일제 통치 속에서 성장기를 보내고 한편으로는 해방 이후 서양이라는 급류에 쓸리지 않고 시대를 개척해 갔던 인물이었다. 그의 이러한 개척 정신과 예술가로서의 천부적 소양이 어쩌면 전북이라는 독특한 산천이 길러낸 것들이 아니었을까.
박래현이 그의 출생지였던 평안남도 진남포를 뒤로하고 6살 때 군산으로 이주했던 것은 그의 예술가로서의 생애를 약속받았던 것이리라. 이 무렵 군산은 이미 대단히 활발한 경제활동을 펼치고 있던 항구도시로서, 문화활동도 여느 지역보다 다양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던곳이었다. 일본으로 나르던 미곡 수출항이었던 연유로 일본인 거리가 형성되고, 일본의 신문화도 가장 쉽게 접할 수 있었다. 그래서 박래현은 어린 시절 남보다 먼저 연극이나 영화 등도 쉽게 접하게 되고 여러 문화 활동에 남다른 경험을 쌓게 된다.
박래현은 군산 공립 보통 학교와 전주 공립 여자 고등 보통 학교를 졸업했다. 그리고 나서 경성 관립 여자 사법 학교에 입학한 때가 그의 나이 17세였다. 여기를 졸업하고 곧바로 순창 공립 보통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이렇게 순탄한 소녀 시절을 보냈던 그가 어떤 연유로 화가가 될 결심을 하고 일본에 건너가 동경 여자 미술 전문 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는지는 깊게 알려져 있지 않다. 더구나 당시 얻기 어려운 교사로서의 안정된 직업을 팽개치고낯선 이국에서 그것도 생소한 그림 공부를 시작했는지는 실로 궁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는 대단히 활달하고 적극적인 성격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그림에 눈을 뜨기 시작하면서 당시 제일 명성을 높이고 있던 젊은 화가 김기창을 직접찾아가 그림을 배우고 구애를 했던 일화가 알려져있다. 그리고이렇게 진취적인성격과 재능을 높이샀던 경성여자사범학교의 은사이었던 미술 교사 강구의 권유가 결정적으로 유학 길에 들어섰던 이유였다.
그는 일본에 건너가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의 일본화과에 입학했다. 그의 나이 스물한 살이었다. 여기서 그는 전통 일본화뿐만 아니라 지■필■묵으로 대변되는 동양화 전반에 대해 폭넓게 공부했다. 그리고 그의 일본유학은 단순히 동양화의 방법이나 기술을 습득하는 것으로만 끝나지 않았다. 후일 그의 작품들 속에서 면면히 흐르는 실험과 표현의 다양성 등에서 확인되는 회화의 본성에 대해 깊은 성찰이있었던 것을 볼 수있다. 그는 아마도 당시 일본에 흐르고 있었던 동■서미술의 다양한 기류를 깊게 체험하고 소화했던 것이었다.
박래현의 작품 활동은 매우 다양하다. 수업기의 전통 일본 화풍의 제작에서부터 서구의 조형성이 깊게 배어난 구상과 추상, 혹은 판화와 타피스트리 등을 남겼다. 그의 제작 활동은 잠싣 쉬지 않았으며 새로운 표현 욕구를 충족하기위해 세계를 여행하였다.
1941년 박래현이 일본에 건너가 공부했던 주된 표현법은 일본 채색화였던 것 같다. 남아있는 몇몇 작품들이 그것을 잘 보여준다. 이 무렵의 작품들은 주로 모델을 보는 것 같은 여성 인물화로서 전형적인 일본인물화 형식이다. 그리고 바탕에 두껍게 바른 호분(흰색)과 그 위에 배어 들게 발라 올려진 몽롱한 색채는 신일본 채식화의 전형이었다. 그리고 수업기에 해당하는 1940년의 작품들이 일본 여인들의 의상이나 일상의 낭만적 정서가 드러나는 포즈의 여인상들이 많다. 특히 3학년 재학중에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하여 특헌을 수상했다는 “장(粧)”이란는 작품은 일본 여인이 거울 앞에 앉아 화장을 마무리하고 있는 모습이다. 박래현의 초기 작품은 이렇듯 그의 일본에서의 수업기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그가 50년대에 보여주는 작품은 40년대의 경향과는 대단히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박래현의 본격적인 화단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는 시점과 때를 맞춘 연작들이라고 볼 수 있다. 이의 작품 특성은 입체적 구성주의와 평면화법을 구사하고있다. 이것은 이전의 모습과는 대단히 달라진 것인데, 색채 사용에서도 일본 화풍에서 나타나던 선명하면서도 감각적인 모습이 청회색조의 우울하고 어두운 특징으로 나타난다. 50년대의 새로운 미술의 유입에 영향을 받은 바가 적지 않았을것이다.
“한국의 현대미술은 미군의 군화와 함께 들어왔다”라는 지적이 없지 않은데 사실 6■25전쟁은 미술의 변혁을 가죠오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러니까 지금까지의 경향과는 전혀 다른 현대미술의 양식이 미국으로부터 직수입되었다는 것이다. 이때 각종 군수물자와 함께 들어온 미국미술이 다름아닌 추상주의와 극단적 실험주의의 앵포르멜 회화였다. 그러나 박래현은 전적으로 서양 미술의 표현 형식을 수용하지는 않았다. 다만 그가 공부했던 전통 회화의 표현방식 속에 서양 회화의 방법을 일부 원용했다고 본다. 이를테면 박래현은 전통적인 회화 수법을 충실히 지키고 있는데 지■필■묵을 고수하고 있는 점이라든지 또한 소재의 선택이나 해석의 범주가 우리 생활의 정서를 벗어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40년대의 작품에 비해 먹을 많이 쓰고 있으며 강한 필선이 화면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점이 두드러진다. 박래현이 일본에서 공부한 채색화법을 뒤로 하고 수묵 위주로 돌아선 배경이 궁금하다. 아마도 부군이었던 김기창의 영향과 함께 우리 고유의 회화 정서에 깊이 다가가기 위한 노력이아니었을까 생각된다.
50년대에 이렇듯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화풍을 이룩하고 또한 그의 화단의 위치를 굳건히 한다. 56년에 작품 “로점”으로 국전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하고, 또한 “이른 아침”이라는 작품에 대한 미협전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한다. 청년시절의 그의 전성기는 이렇듯 구성주의에 바탕을 둔 반추상형식의 평면화풍이었다. 이렇듯 그의 위치가 확고해지자 그는 홀연히 또 다른 탐색을위해 세계여행에 빠져든다. 그의 여행지는 미국과 유럽 등과 함께 중남미, 아프리카등과 이집트 등의 원시미술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이루어진다. 이러한 세계 미술의 탐닉이 그의 풍부한 창작 세계를 이루는원동력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박래현의 창작 열기는 끝없이 새로운 관심으로이어지는데 60년대에는완전 추상 세계로의몰입, 그리고 70년대의 오브제 활용과 티파스트리 제작, 또한 판화제작 등으로 이어진다. 당시 한국화가로서는 남다른 개척 정신의 소유자였다고 할 수 있다.
60년대 그의 추상은 발묵을 활용한 독특한 표현기법이었다. 먹과 화선지에서 이루어지는 특출한 기법을 창안하여 미치 볏집으로 만든 우리 멧방석을 연상시키는 이미지르 구축하고 있다. 추상적 양식이 비록 서구적 표현에서 비롯되었다고는 하나 한국적 정서를 훌륭히 일개우는 우리 그림으로 승화시키고있다.
박래현의 섬유 예술은 직조물을 직접 뜨개질하고 또한 짜깁기를 하며 독특한 조형을 실현시켜 나가는 기법이다. 날실과 씨실을 직접 구성하며 색과 질감을 조절하고 또 거기에 단추나 철제물 등을 일정한 형식 속에 투입하므로써 자신의 작품 의도를 일구어 낸다. 이러한 작업은 당시로서는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았던 미술품이었으며 더욱이 동양화를 공부했던 전통화가로서는 파격적인 것이었다. 또한 70년대는 판화에 대해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우리의 역사와 민속 등에서 얻어낸 이미지와 형상들이 판화 작품으로 승화된다. 색채의 화려함과 새로운 형상화에 대해 얼마나 고심하고 있었던가를 이해할 수있게 한다.
박래현은 동■서양식을 넘나들면서 우리 고유의 정신세계를 구축하려 노력했던 근대 화단의 큰 인물이었다. 그가 이렇게 그의 작품 세계의 탐닉에 몰두하는 동안 그의 몸은 암을 얻어 76년 57세의 아까운 나이를 마감했다. 그가 짧은 생애 동안 이룩한 업적은 한국 현대미술의 장을 활짝 넓힌 것이었는데 이러한 그의 삶의 바탕은 전북의 흙과 바람과 햇볕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