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4 | [문화칼럼]
흙과 스무고개, 그 하나의 우주
글/이태영 덕천교회목사■순창농민상담소 소장
(2004-02-12 10:18:30)
어렸을 때 즐겨 하던 놀이 중에 스무고개가 있었다. 질문자가 생각하고 있는 어떤 사물을 스무 번의 질문안에 알아맞히는 놀이였다. 그런데 스무고개를 하면 질문자가 처음에 반드시 동물성, 식물성, 광물성 중에 하나를 먼저 말해주어야 했기 때문에 국민학교 이후로 뭐든지 모든 사물을 세 가지 중의 하나로 분류하는 습관이 생겼다. 연필이나 구슬은 광물성이었고, 동물원에 가면 동물성 천지였고, 아버님이 유난히도 이뻐하셨던 선인장의 꽃은 식물성이었다. 모든 사물을 세 가지로 분류해서 보던 습관은 스무고개 놀이를 하지 않으면서 점점 사라져갔다.
신학교를 졸업하고 나는 임실 오수의 농촌-도시 복합형 교회에서 교육담당 전도사로 봉사하다가 1년 후인 83년 순창에 있는 마을 단위의 작은 교회를 섬기게 되었다. 교인이라고 해봐야 고작 열 두어 명 있는 작은 교회였다. 여러 가지 불편한 점도 없지 않았다. 버스를 타려면 1시간씩 걸어다녀야 했고, 물도 펌프로 퍼 먹어야 했다. 단칸방에 때로는 지네가 나오기도하고, 갈라진 천장 틈으로 구더기가 떨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도시에서만 자랐던 나는 농촌에서의 하루하루가 고생으로생각되지 않았다.
2년 정도 지난 다음 전주에 있는 큰 교회의 지원을 받아 밭을 3백 평 샀다. 직접 농사를 지어야 농민들의 어려움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밭에 율무, 백지, 방풍, 마 등 약초도 심고 콩 같은 일반 작물도 조금씩 심었다. 오수에서 알고 친하게 지냈던 친구가 가끔 와서 기술 지도를 해주었다. 당시 그 친군즌 약초를 재배해 농가소득을 올려야 하나다고 생각하고 젊은 패기로 밀어붙이고 있었다. 호미 한 번 잡아보지 못했던 나는 농사를 통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씨에서 싹이 트는 것이 신기했다. 봄비가 초촉하게 온 다음날 밭에 가 보면 새싹들이 씨앗의 껍질을 모자처럼 쓰고올라오는데 그게 그렇게 예쁠 수가 없었다.
하루는 밭에 서 김을 매다보니 뭔가 흙 속에서 꼬물거리는 것이 있었다. 무슨 벌렌가 궁금해서 흙을 한 줌 쥐고 자세히 보았다. 이름은 모르지만 등이 딱딱하고 검은 색깔의 벌래였다. 새끼 손톱만한 크기였다. 좀 더 자세히 들여다 보는데 아 , 벌레는 그것만이 아니였다. 여기저기 흙을 파고 나오는 놈, 다시 흙 속으로 들어가는 놈, 여러 마리의 벌레들이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놀라서 더 자세히 들여다 보았다. 그랬더니 원 세상에! 눈에 잘 보이지 않을 만큼 작은 벌레들이 수 없이 많지 않은가? 고은 흙 알갱이가 미세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흙인줄 알았는데 벌레였다. 어느새 내 눈은 현미경이 되어 있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손바닥의 흙을 쳐다 봤다. 충격이었다. 나는 이때까지 흙이란 단지 광물성으로 생각했다. 스무고개의 분류법에 따르면 흙은 당연히 광물성이었다. 죽어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난 그 시간 이후부터 흙에 대한 분류를 바꾸었다. 흙은 생물성이다! 살아있는 것이다! 이러한 깨달음은 논에서 모를 심을 때도 경험할 수 있었다.
하루는 모내기를 하면서 잠간 쉬는 시간을 이용해 논물을 손으로 떠 본 적이 있다. 논에 구데기 비슷한 것이 헤엄쳐 다니면서 사람을 무는데 무척 따갑고 아파서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 벌레가 논 물에 있기에 두손으로 논물을 떠서 보는 순간 나는 다시 한 번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한 공기의 양도 안되는 그 논물에는 엄청나게 많은 생명체들이 꼬물대고 있었다. 실지렁이처럼 빨갛고 가느다란 벌레, 깨알만한 크기의 물방개 모양 벌레, 현미경으로 보아야만 생김새를알수 있을 것 같은 작은 벌레 등이 그 논물 속에서 열심히 살아가고 있었다. 그랬다! 논물은 그 자체가 하나의 우주였다! 논물에는 거머리와 올챙이, 소금장이와 물방개 정도만 살고 있다고 생각했던 나에게 논물은 또하나의 충격이었다. 이런 이야기를 마을들에게 했더니 싱겁다고 웃었다. 당연한 걸 가지고 대단한 발견이라도 한 것처럼 말하는 내가 우스웠나보다. 그러나 나에게는 상식이 바뀌는 일이었다. 흙에 대한 선입관과 가치관이 근본적으로 바뀌는 일이었다. 죽어있다고 생각한 것이 살아있는 것으로 바뀐 것이다. 단순한 물질이 살아있는 생명체로 다가온 것이다.
우리는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커다란 기계로 보는 가치관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인류역사의 가장 최근에 생긴 산업사회는 이를 이끌어가는 저변에 기계론이 있다. 이 기계론적 가치관은 이 세상을 이끌어가는 원동력을 에너지로 파악한다. 그리고 어떤 사물이든지 대체 가능한 부속품으로 본다. 사회를 이루는 기본 구성원인 개개인은 말할 나위도 없거니와 심지어 지구까지 부속품으로 여긴다. ‘지구의 수명이 다하게 될 때 인류는 어떤 혹성을찾아 나설 것인가?’라는 질문은 기계론적 가치관의 극치를 보여준다. 대인관계도 마찬가지다. 나에게 잇어 저 사람이필요한 사람인지, 아니면 쓸모 없는 사람인지를 따지는 것이 그렇다. 조직이라는 것은 더 말할 나위가없다. 이 사회와 세상은 그저 커다란 물리적, 혹 화학적 결합에 의해 움직일 뿐이다. 닩 용(用)과 불용(不用)이 잇을 뿐이다.
그러나 21세기를 맞이하는 오늘에있어 이러한 기계론적 가치관이 우리 인류의 장래를 과연 보장하고 있는지 우리는 심각하게 질문하지 않을 수없다. 강을 단지 수자원으로 생각하고, 산을 그저 광물을 얻기 위한 대상으로 바라본 결과 우리는 무엇을 얻었는가? 지구가 언젠가는 불용(不用)이 될 상태를 전제함으로써 인류 스스로가 지구에 있어 불필요한 존재하라는 것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 세상은 광물성이 아니다. 커다란 기계도 아니다. 살아있는 생명체요, 유기체이다. 이 세상은 온통 살아있는 것으로 가득차있다. 팔다리가 우리 몸에 있어 용, 불용의 관계가 아니라 몸의 한부분인 것처럼, 우리 인간도 이 세상의 한부분으로 살아가는것이다. 오늘날 지구는 무엇인가? 스무고개식 화두에 우리는 진지하게 답을 해야 한다. 인류는 무엇이며, 또 나는 무엇인가?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어떤 관계인가?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농촌에서 찾을 수 있다. 오늘날 농사가 중요한 것은 단지 식량과 환경보전을 위한 목적에서가 아니다. 인류가 살아날 수 있는 답이 감춰져 있기 때문이다.
울 인류가 21세기를 앞두고 농촌을 보며, 살아있는 흙을 보며 ‘ 이 세상을 무엇이라고 운을 떼야 하나?’라는 스무고개식 화두를 진지하게 풀어갈 때 우리 인류가 직면해 있는 숱한 과제가 비로소 풀려지리라 생각한다.
이태영 / 58년 서울엣 태어났다. 한국신학대학을졸업했으며 83년부터 순창에 뿌리내리고 살고 있다. 농민을 위한 상당소를 87년에 개설해서 운영해 오고 있고, 순창신문을 91년에 창간해서 지금까지 발행하고 있다. 사람들이 돌아오는 농촌을 만들기위해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를 늘 고민하며 살고 있다.
지방 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 발표
전통 예술의 맥 잇는 10명의 인간문화제
전북도는 지난달 14일 10명의 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를 새로 지정 발표했다. 이번에 새롭게 지정된 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들은 농악 부문에 2명, 판소리 부문에 4명, 춤 1명, 공예에 2명, 시조창 1명으로 각각의 분야에서 꾸준한 공연과 전수 활동으로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아온 이들이어서 지역 전통문화에 뜻깊은 일로 평가받고 있다.
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로 지정된 이들은 먼저 농악에 유지화■박판열, 판소리부문에 조소녀■민소완■강관례■주봉신, 춤부문에 최선, 공예부문에 서남규■노동식, 그리고 시조창에 임산본 씨이다.
농악부문의 유지화씨(여 53세■정읍농악)와 박판열 옹(80세■김제우도농악)은 그동안 호남우도의 전통을 이어온 명인들로 각각 정읍고 김제농악의 명맥을 지켜온 낯설지 않은 인물들이다. 유지화씨의 경우 우리나라의 몇안되는 여성상쇠로 박만풍, 김도산, 김판암, 박남식으로 이어지는 정읍농악의 가락을 보존하면서 한때는 전주 여성 농악단을 이끌며 여성농악 활성화에 힘을 썼으며, 지금은 정읍사국악원의 교수로 활동하면서 절정의 기량으로 정읍농악단의 예명성을 세우는 데 노력하고있다. 역시 이번 지정에서 가장 뜻깊은 인물로 꼽히는 박판열옹 역시 칠십 평생의 거의 전부를 설장고 가락에 실어온 풍물잽이에 대한 작은 보상이라는 의미가 새롭다. 박판열 옹은 10대 초반에 김제군 부량면의 상쇠 안재홍씨로부터 쇠가락을 익히기 시작했고, 이후 정읍의 장구잽이 이명식으로부터 장고를 배우기 시작 오늘에 이르기까지 김제 지역의 농악을 대표고 있는 인물이다.
판소리의 명성에 걸맞게 가장 많은 문화재를 배출한 판소리부문에서는 3명의 명창과 1명의 고수가 지정되었다. 조소녀씨(여■55세■전주)는 김연수-오정숙으로 이어지는 동초제 <춘향가>로 지정받았으며, 민소완 씨(본명 성준숙, 여■52세■전주)는 송흥록-송광록-송우룡-우성준-김연수-오정숙의 계보를 전해지는 <적벽가>로, 강광례씨(여■63세■전주)역시 송홍록-송광록-송우룡에게서 시작하여 송만감-김정문-박초월-최난수로 이어지는 <홍보가>로 지정을 받았다. 또한 명창 박동진의 지정고수로 활동하면서 한성준-이정업과 전계문-박창을로부터 동시에 북장단을 전수받은 고수 주봉신씨(62세■전주)도 이성근 씨에 이어 무형문화재로 지정을 받았다.
한편 이번 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 지정에서 가장 관심을 모으느느 대목은 춤의 최선씨(본명 최정철, 61■호남살풀이춤■전주)에 대한 지정이다. 최선씨의 지정은 그동안 춤분야에 대한 문화재 지정이 전무했던 상황에서 전북춤의 원형을 보존하고 있는 호남살풀이춤에 대한 공식적인 재평가로서의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번 지방문화재 심사에서는 3명이 지정신청을 한 것으로알려졌고 그 가운데 1명이 지정되는데 그쳤지만 전북춤에 대한 새로운 접근이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는 것이다 . 최선씨는 어린시절 어머니로부터 민요춤을 전수받은 것을 시작으로 16세때 전동 권번에서 김추월로부터 승무와 수건춤 등 기방민속을 사사받으면서 호남살풀이춤의 맥을 이어오고 있으며 김옥주-김추월-이매방으로 이어지는 춤사위를 간직하고 있다.
역시 이번에 처음 지정된 시조창의 임산본씨(64세■시조창 완제시조■전주)역시 하귀일-이병성-정경태로 이어지는 시조창의 명인들로붙터 소리를 전수받은 이분야의 독보적인 보유자로 알려져 있다. 어려서부터 완재시인의 토착적인 성음과 곡조를 익혔으며 전북지역의 시조창을 대표하는 명인이다.
이밖에 장고제작으로 지정박은 서남규씨(71세■장고제작■정읍)역시 정읍지역 농악기제작의 명인으로 추계동씨로부터 기능을 전수받았으며, 목기장이인 노동식씨(57세■남원목기)조부대로부터 부친일 거쳐 아들에게까지 4대째 기능을 전수하고 있는 장인이다. 노동식시는 목기에 대한 관심이 최근 부쩍 높아져 있는 상황에서 한국목기 문화의 본산인 운봉목기의 맥을 이어가고 있는 장인이다.
이번 무형문화재 심사에는 모두 16명이 기능보유자로 지정을 신청하여 이 가운데 10명이 지정되어 84년 처음 실시한 이후 모두 23명으로 지정자가 늘어났으나, 몇가지 점에서 아쉬움을 남겼다. 특히 농악분야의 경우 이번 지정이 모두 호남우도농악에 치우쳐 양순용씨아 김봉열옹의 타계 이후 호남좌도 농악이 처하고 있는 상대적 침체를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아쉬움을 남겼다. 호남좌도농악은 현재 임실필봉농악이 국가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지만, 양순용씨의 타계 이후 상쇠분야의 기능보유자가 전무한 상황이어서 안타까움을 남기고 있다.
여기에 도 지정 무형문화제 제도의 운영에 대한 우려도 제기되고 있다. 도문화재의 경우 국가지정문호재로 지정되지 않은 문화재 가운데 향토문화보존에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문화재를 지방문화재위원회의 자문을 받아 지정하게 되어 있으나, 그 제도의 운영이 그다지 탄력적이지 못하다는 것이다. 즉 편중된 지정과 보유자의 특기를 살리지 못하는 사례마저 있으며 대상 기능에 대한 객관적인조사사업이 내실있게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도 높다.
전라북도 문예진흥기금 확정
올해도 여전한 ‘고른 혜택’의 딜레마
올해 전라북도 문예진흥기금이 총 2백 45건에 3억 5백만원 지원으로 확정되었다. 전북도는 지난달 20일 문예진흥위원회를 열고 95년 문예진흥기금 정산과 96년 지원계획을 심의하여 지원신청된 331건에 대한 심사를 벌여 2백 45건에 대한 지원계획을 확정했다.
올해 지원계획을 부문별로 보면 문학분야가 가장 많은 74건에 7천 8백 60만원을 지원받은 것을 비롯, 예총이 12건에 2천 4백 50만원, 문화원 7건에 7백만원, 미술 68건에 7천 9백만원, 국악 2천 6백 80만원, 음악 21건에 1천 9백 70만원, 무용 7건에 7백 80만원, 연예 7백만원, 사진 12건에 1천 1백 50만원, 영화 1건에 2배만원 지역문화행사 1건에 1백만원 기타 1건에 2배만원 등이다.
지난해 문예진흥기금이 지난해 미술 분야에 대한 집중지원이 이루어졌던 것에 비해 올해는 역시 문학의 해를 맞아 문학분야에 대한 집중적인 지원이 이루어진 점이 두드러진다.문인 협회 전북도지회의 문학의 해 기념사업 지원금 2천만원이 최고규모의 지원사업으로 결정되었고, 지난해부터 중단되었던 개인 창작집 지원도 올해는 문학의 해임을 감안 각 50만원씩을 배정하였다
그러나 문예진흥기금 운용의 고질적인 문제들은 올해도 답습되었다는 지적이 높다. 무엇보다도 작은 돈으로 너무 많은 사업을 지원하다보니 지원규모가 극히 미미한 수준에 그치고 이러한 형식의 지원이 근본적으로는 나눠주기식의 기금운용이 되어버렸다는 점이다.
올해 총 지원신청액은 18억 1백만원으로 지난해보다 4억여원이 늘었으나 지원은 오히려 95년보다 1천 1백만원이 줄어든 3억 5백만원에 그쳤다. 이처럼 늘어나는 지원신청에 문에진흥기금은 오히려 액수가 줄어드는 상황에서 문예진흥기금에 대한 획기적인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올해 문예진흥기금의 건당 평균 지원금액은 1백 24만원으로 전북도의 문예진흥기금 운영이 시작된 이래 가장 작은 액수를 기록했으며, 반대로 지원 건수는 가장 많은 불균형을 보여주고 잇다. 이처럼 많은 단체에 ‘작지만 고른 혜택’이라는 취지는 한편으로 전북도의 명분있는 선택인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 ‘작은 혜택’이 전북도의 문예진흥에 얼마나 효과를 거두고 있는지는 다시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실제로 지속적인 물가상승과 문화예술활동이 비용이 점점 상승하고 있는 가운데 문예진흥기금의 ‘작은 혜택’은 문화예술인 모두에게 질적인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다.
더욱이 현재 문예진흥기금의 제도 운영에 대해서도 손질이 시급한 것으로 보인다. 올해의 심사과정은 지난해에 비해 비교적 세밀하게 진행되었지만 각 신청단체 들에 대한 실제 조사가 불가능한 현실에서 각 부문별로 지원사업의 기준을 밝히고 각 단체의 실질적인 활동을 검증할 수 있는 최소한의 제도적 보완이 필요하다는 지적은 올해도 그대로 반복되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문예진흥기금이 더 이상 생색내기가 아닌 실질적인 지원이 도리 수 있도록 기금확보의 획기적인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흔들리는 화랑가, 운영의 활로 찾기에 나섰다
95년은 정부가 정했던 ‘미술의 해’라는 방침에 따라 정부가 민간에서 주도한 여러 미술문화행사가 치러진 한 해였다. 기력의 쇠진인지, 내실없이 진행된 많은 행사뒤에 오는 허망함의 여파인지 올 상반기 전북의 화랑가는 대관에 대한 강박증을 앓으면서 저마다 고통스런 각개전투를 벌이고 있다. 당연히 관람자의 발길도 뜸해진 요즘, 여기저기서 화랑들이 몸살을 앓는 가운데 공간의 존폐 위기까지도 거론되고 있어서 전북미술계의 앞날을 우울하게 한다. 얼마전 운영난으로 한차례 홍역을 앓고난 얼화랑 역시 힘든 고비는 남아있지만 근본적인 화랑의 활성화가 이루어지지 못해 고전을 면치못하고 있고, 대부분의 화랑들도 개점휴업상태에 있거나 상설전으로 버티고 있는 추세여서 각 화랑대표들은 원인분석에 고심하고 있다.
정갤러리의 정병표 관장은 전북화단이 이념적 기반 위에서 충분한 집중화를 보이지 못하고 소모적이고 일회적이며 개인적인 양상을 보이는 것에 회의를 표하면서 근본적인 운영방식의 활로부터 찾아야 할지 아니면 공간장체의 운영을 포기할지 기로에 서있는 심정을 토로한다.
“93년 화랑을 시작할 때가 생각납니다. 영리를 떠나 이 지역 미술인들에게 발표의 장을 제공하고 많은 사람들이 예술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 애호가들에게 한층 더 깊이 예술참여를 유발시키고자 하는 의지로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올해의 상황은 최악입니다. 다른 해 같으면 일년 대관중 30%가 이미 차 있어야 하는데 아예 대관 자체가 안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렇다고 무작정 기획전만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이런 현상을 미술의 해를 발판으로 치러진 전레엇는 행사뒤에 오는 휴지기라고 분석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말은 곧 미술인들이 창작의욕을 상실했다는 의미로도 파악된다. 창작에만 전념한다는 발표의 기회를 갖기 위해 물위로 떠올라 작품을 선보여야 할 터인데 전반적으로 침체의 불황을 격고 있는 터이라 미술인들도 개인전의 시기를 늦추고 있는 것이다.
이런 좋지 못한 상황에서도 화랑들은 새로운 기획으로 미술애호가들의 시선을 붙잡으려 노력하고 있다 민촌아트타운은 서울에서 한참 이슈가 되었던 누드크로키 제작 실현 행사를 마련했었다. 그러나 이러한 민촌의 시도는 미술애호가들의 관심보다는 누드모델을 보기위해 온 호기심파에게 볼거리를 제공했을 분 이들을 미술팬으로 끌어들인다는 것은 웬지 쉽지 않아보였다. 얼화랑은 미술시장이 불황이라는 것에 착안 해 소품들을 중심으로 한 꽃그림 축제를 마련, 새로운 분위기로 전환을 시도한다.
군산 지역의 경우 미술인들이 나서서 지역의 문화를 주도해나가고 있다. 사설화랑 하나 갖추지못한 상황엣도 활기있게 전시를 기획하고 나름의 문화단체를 만들거나 미술인들 스스로 시립미술관건립 준비모임을 만드는 등 의욕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활동들은 시민들의 호응속에서 힘을 얻는 것이다.
텅 비어 있는 전시장은 마치 우리 지역의 문화풍토를 보고 있는 것 같아 씁씁하다. 화랑문화가 튼튼히 서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그 주체들인 미술인들의 활동력에 달려있다. 지역의 화랑을 바라보는 시각을 미술품거래에 잇어서 그것이 가지는 특수한 매개의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는지에 대한 회의적인 분석하기 보다는 화랑의 존재가 가져다주는 풍부한 문화적 풍토들을 어떻게 가꿔나가고 예술인구의 폭을 넓혀나갈 것인가에 대한 인식들을 새롭게 가져야 할 것이다.
창작극회 제 92회 정기공연 <부자유친>
식지 않은 열정으로 모인 선후배의 무대
3월 14일과 15일 이틀동안 창작극회는 제 82회 정기공연작품, 오태석원작의 <부자유친>을 무대에 올렸다.
이 작품은 비극적 생을 마감한 사도세자의 비 혜경궁 홍씨가 한의 눈물로 기록한 「한중록」을 바탕으로 사도세자와 아버지 영조와의 인간적인 고뇌와 부자의 정리를 현대적 감각으로 담고 있다.
창작극회의 이번 공연은 정기공연이라는 일상적인 의미 이외에 연극계를 떠나 있었던 선배와 연극계를 떠나 있었던 선배와 연극계에서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는 후배 연기자들이 한 무대에 섰다는 보다 큰 의미를 담고 있다. 이번 작품에 출연한 배우 신상만 씨는 이를 ‘화합’이라고 한 마디로 간추려 말한다.
<부자유친>에 참여한 연극인들의 면면은 바로 이번 공연의 특징을 보여준다. 연출은 박병도 씨가 맡았고, 장제혁(영조)■임형택(세자)■신상만(구선목■최종만(내관, 덕제)■류경호(송명흠)■권오춘(조신)■김현석(이석문)■김경미(빙애)■문경혜(복례)■김진옥(혜경궁홍씨)■최경성(선희궁)■이미라(조신)■이태영(정순왕후)■류환희(조신)■정진관(사관) 씨 등이 출연했다.
연출을 맡은 박병도 씨(전라북도립국악원 상임연출)는 창작 극회와는 깊은 인연이 없었던 인물이다. 그는 극단 ‘황토’의 연출과 대표로 1980년대의 전북연극계의 주역을 담당했었고 1994년 이후에는 연극 무대를 떠나 전라북도립국악원의 국악장 겸 상임연출로 창극작품에 전념해 왔다. “2년 떠나있었습니다. 하지만 삶의 예술이라는 무대 연출 작업은 계속해왔습니다. 좋은 배우들이 생활의 어려움으로 무대를 떠나는 일은 우리는 흔히 보아 왔습니다. 이번 작품은 예전에 돋보이는 역량으로 지역 연극무대에서 한가락했던 배우들이 하나의 작품을 후배들과 의기투합하여 이루어진 뜻 있는 무대입니다.” 박병도 시 자신도 지난 1994년 ‘연희단 백제의 후예’가 올렸던 <태>공연 이후 2년여 만에 순수한 연극판에 선 것이다.
맏 선배로 열연한 신상만 씨(48)는 올해로 연극에 발을 들여 놓은 지 30년을 맞는 중견 연극인이다. 어려움 속에서도 묵묵히 연극 무대를 지켜 온 그는창작극회의 대표를 맡기도 했었는데 현재도 현역 배우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앞으로도 선후배간에 유대감을 높이고 화합하는 무대를 올릴 수 있는 선례가 된 것 같다”고 이번 작품의의의를 설명한다.
이번 작품에서 영조 역을 맡아 열연한 정제혁 씨(37)는 5년 만에 다시 서는 무대이면서도 최종만 씨(43)와 함께 현역 시절의 탄탄한 연기력을 유감 없이 발휘했다. 그는 극단 ‘황토’에서 연극을 시작한 배우다. “연습때에도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희열을 느끼고자 했는데 욕심만큼 해내지 못해 아쉬움이 남는다.”고 말하는 그는 5년 만에 서는 무대이면서도 완숙한 기량으로 이번 공연 무대를 한층 돋보이게 했다. 최종만 씨 또한 이번 작품은 10년 만에 다시 서는 무대이다.
중앙에 비해 배우의 무대 수명이 짧은 지역 무대의 특성상 한 배우가 한 극단에서 계속활동하기란 어려운 일이며, 이로 인해 배우의 연령층이 두텁지 못한 것은 각 극단의 공통된 문제로 지적되고 있는 주지의 사실이다. 70년대와 80년대를 거쳐 최근에이르기까지 이 지역 연극무대를 주도해 온 연그인들이 함께 참여해 올린 이번 공연은, 이점에서 또 하나의 각별한 의미를 찾을 수 있으며 선후배간의 화합의 자리에서 보여준 식지 않은 열정과 역량 또한 전북연극의 새로운 분위기를 엿볼 수 있는 것이다.
‘96 문학의 해 「전북도민 시낭송회」전북의 문맥을 찾는다.
일반일을 참가 대상으로 이 지역 작고시인들의 작품을 낭송 음미하는 뜻 있는 자리가 매월 열리고 있어 문학의 해의 빛을 더하고 있다.
문학의 해를 맞아 전북시문학회 문예대학은 「시의 즐거움을 온 도민이 함께」라는 주제를 걸고 지난 1월부터 14명의 지역 출신 시인을 매월 시낭송회를 열고 있다. 작고한 시인 가운데 선정된 14명의 시인은 석정 시인이나 가람선생, 김해강 시인처럼 이름 있는 시인과 함께 일반인에게는 잘 알려져 잇지 않은 작고 시인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전북 도민 시낭송회」는 매월 그들의 추모 시인으로 선정, 시인의 추모시 낭송으로 그달의 시낭송회를 시작한다. 전북시문학회 문예대학이 선정한 시인은 김해강■박봉우■박정만■박항식■소기섭■신석정■이광웅■이동주■이병기■이철균■정렬■조두현■최일운■최학규 시인 등 14명이다. 월례 시낭송회는 「자작시」와 「추모시인의 시」낭송으로 나뉘어 진행되는데, 등단하지 않은 사람으로 만 20세 이상이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고 청중으로는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추모시인의 시」낭송은 14명의 선정된 작고시인의 시를 자유로 선택해서 한 작가의 시 한편을 제출, 낭송할 수 있다. 또한 이 자리에서는 그달의 시인상을 수여하는데 시낭송회를 마치면서 자작시 우수상과 추모시인 우수상으로 나누어 상금과 상패를 전달한다. 자작시 수상자는 심사위원이 선정하며 추모시인의 시 낭송 수상자는 그날 참여한 청중이 직접 선정하여 모두가 행사의주체가 되는 ‘함께하는 즐거움’은 시낭송회회에 작고 시인의 유족들이 참여해 청중과 함께 대화의 자리를 마련하고 있는 데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전북시문학회 문예대학의 「전북도민 시낭송회」는, 많은 사람들에게 불리워지는 이름있는 시인을 포함해 지역 문단에서 그간 널리 알려지지않은 채 묻혀 있던 시인들의 작품들을 발굴하여 일반인들과 함께 향유할 수 있는 자리로서 그 의의를 새겨볼 수있다.
시낭송회는 매월 마지막 주 토요일 저녁 5시에 경원동에 있는 「다예」에서 열린다. 문의 전화 222-7673,88-0457
제 12회 전라북도 연극제
전북 연극 큰 축제로서의 유효성
제 12회 전북연극제가 4월 7일부터 21일까지 여섯 개의 극단이 참가해 전주를 비롯해 익산, 군산, 남원등 도내 각 지역에서 펼쳐진다.
참가 극단과 작품을 보면 전주시립극단이 <여(女)보세요!>, 창작극화가 <여자는 무엇으로 사는가>와 <부자유친>, 극단 황토가 <옵바의 총(銃)■춘(春)>, 장날 부부극회가 <신장날>, 극단 갯터가 <우린 지금 어떤 인생을 만난다>, 극단 춘향이 <종로 고양이>을 각각 무대에 올린다.
참가 형태별로 보면 전주 시립극단■창작극회■장날 부극회 등 3개 극단 4개 작품이 축하공연으로 올려지며, 극단 황토■극단 갯터■극단 춘향 등 3개 극단 3개 작품이 경선 형태로 출품된다.
4월 7일과 8일, 전북예술회관에서 공연되는 전주시립극단의 <여(女)보세요!>는 번역극으로 영국 작가 팸 젬스 원작의 페미니즘 극이다. 네 여인의 이야기는 피쉬의 아파트를 무대로 버러어진다. 각기 다른 성격의 네 여인들이 같이 생활하면서 서로의 문제들이 노출된다. 십대 소녀로 여러번의 낙태 경험이 있는 바이올릿(염정숙)은 현재 또 원하지 않는 임신으로 신체적■정신적 고통을 받고 있고, 시골출신 스타스(정경선)은 낮에는 물리치료사로 밤에는 고급 호스테스로 일하며 하와이에서 해양생물학을 공부할 계획이다. 이혼한 두자(서유정)는 전업주부였는데 경제적 자립을 해야하는 중압감과 전남편이 아이들을 데리고 해외로 도피해 신경안정제에 의존해 지내고 있는 형편이다. 중상류 출신의 피쉬(이현주)는 여성의 사회적■정치적 참여를 위해 좌익정치그룹에서 일하고 있는데 동료이자 오랜 연인이었던 알란과 서로부담이 되지 않는 평등한 생활을 유지하고자 하는 알란은 떠나고 만다. 2막에 들어서면서 이들은 새로운 상황을 맞게 된다. 전춘근(전주시립극단 상임단원) 씨가 연출을 맡았다.
4월 9일과 10일, 전북예술회관에서 공연될 창작극회의 <여자는 무엇으로 사는가>는 주찬옥 작■박구홍 각색의 창작극이다. 지난 3월 25일부터 3월 31일까지 창작소극장에서 창작극회 제 82회 정기공연으로 무대에 오른 페미니즘 극이다.
4월 12일과 13일, 전북예술회관에서 막이 오르는 극단 황토의 <옵바의 총(銃)■춘(春)>은 관심을 모으는 창작 이데올로기 극이다. 해방과 분단의 격동기를 살다간 시인 임화의 삶을 모델로 삼고 있는 작품으로, 곽병창 씨가 창작 작업을 시작해 김영수 씨(극단 황토 단원)가 맡아 작품의 틀을 완성했다. 작게는 해방과 혼란 그리고 분단으로 이어지는 상처 투성이의 남북 현실 속에서, 크게는 격동의 세계사 틈바구니에서 치열한 삶을 살다가 생을 마감하게 되는 시인의 삶이 그의 사랑과 격동의 사회상황 속에 극명하게 그려지고 있다. 이호중씨가 연출을 맡고 10여 명의 단원이 출연한다.
4월 14일과 15일, 전북예술회관에서 열리는 장날 부부극회의 <신장날>은 연출 박채규 씨의 창작극으로 부인 양현자 씨와 함께 출연하낟. 떠돌이 광대부부의 인생유전을 묘사한 니용으로 기구한 삶의 여정을 헤쳐나가는 참모습과 함께 어지러운 세태를 질타하면서 애틋한 희망을 담고 있다. 1970년대 창작극회에서 활동한 적이 있는 박채규 씨(SBS개그맨)와 양현자 씨(가수)는 전북 연극협회의 기금마련을 위해 이번 연극제에 참여하고 있다.
4월 12일과 13일, 익산시민회관에서 열리는 창작극회의 <부자유친>은 오태석 원작의 역사극으로 지난 3월 14일과 15일 전북예술회관에서 막이 올랐던 작품이다.
4월 17일과 18일, 군산 문화회관에서 열리는 극단 갯터의 <우린 지금 어떤 인생을 만난다>는 장두원 작의 창작극이다. 쓰레기 하치장에서 쓰레기를 수거하며 살아가는 맹골영감과 잉ㄴ실네 두 노인의 이야기를 통해 삶과 죽음 사이에서 부질없는 인간의 작은 존재, 희망을 담고 있다. 백영기 씨(극단 갯터 대표)가 연출을 맡았다.
4월 20일과 21일, 남원 춘향문하회관에서 열리는 극단 춘향의 <종로고양이>는 조광화 원작의 세태풍자적인 창작극으로 김정환씨가 연출을 맡고 있다. 종로 토박이인 김시부는 오늘의 퇴락한 종로에 대해 과거 종로의 영화와 함께 고향의 옛 모습을 되찾고자 한다. 여기에 종로의 옛 모습으로 상징되는 낙원다방을 둘러싸고 몸을 팔려는 홍삼화와 화가 지망생 이두성, 매춘 알선을 하는 기출 등이 얽히면서, 극은 과거의 사라오가 그들의 꿈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겨울날 새벽 종로에서 동사한 삼화와 시부의 주검 앞에 모여드는 고양이떼를 클로즈업하면서 막을 내린다.
전북연극제는 지난 1985년 4월, 제1회 연극제에 창작극회와 극단 황토가 참여하면서부터 도내 연극인의 축제의 장을 꾀하면서 꾸준히 개최해오고 있다. 하지만 제 12회를 맞는 이번 「전북연극제」가 예년에 비해 새롭다거나 전북연극의 성장된 모습을 보여줄지는 다소 의문이다.
이리지역의 극단으로 지난 88년 제 4회 이후 꾸준히 참가해 오던 「솜리사람들」(대표:최솔)이 올해도 참가하지 않아 3년째 자리를 비우고 있고, 지난해 창단한 「작은 소■동」(대표:이도현)을 위한 공동의 노력이 아쉽다. 참가극단 또한 6개 극단이참여 해 지난해 4개 극단과 비교할 때 많은 수이지만 축하공연이 경선을 앞지르고 있어 겉모양에 치우친 느낌을 준다. 전북연극제는 11회를 치러오는 동안 참가 극단의 증가와 각 극단의 작품에 대한 열기로 많은 우수작들을 일궈내 전국연극제를 통해 전북연극의 위상을 높여 왔다.
이런 단계에서 전북연극제는 이제 또 하나의 발전적 기회르 닦는 시점에 놓인 것이다. 민간 연극의 발전을 이끌어 낼 수 있는 내실 있는 연극인 공동의 잔치로 자리 잡기 위한 모색이 필요하다.
‘96보도사진전
사진 저널리즘과 실천의 장
음악이나 시, 회화작품을 이해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특정한 어떤 사진의 이해도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고, 말하고자 하는가를 이해할 때 비로소 삶을 바라보는 시각이 넓고 풍부해진다.
사진매체를 통한 대중에의 접근은 이 세상을 단순히 반영하는 것 외에 목적을 가지고 대중들과 시각적으로 커뮤니케이션하려는 의도를 지니는데, 가장 적극적인 자세로 기능하는 것이 바로 보도사진이다.
지난 한 해 전북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사건, 사고, 지방자치제 등의 활동상들을한자리에서 되짚어 볼 수 있는 전시가 마련되었다. 사진 저널리즘의 올바른 이해와 실천을 꾀하고 사진과 현장이라는 공통의 언어를 통해 사진기자의 활동을 강화하기 위해 마련된<‘95 보도사진전>이 그것이다.
도내 4개의 신문사인 전북일보, 전북도민일보, 전주일보, 전라매일신문의 사진부 기자들이 모여 결성한 전북사진 기자회(회장 정지영)의 회원들이 그때 그 때의 생생한 현장을 영상으로 담은 100여점의 사진을 전시하였다. 전북예술회관에서 3월 8일부터 14일까지 열렸던 보도사진전은 도내 신문사들의 사진기자들이 해나가야 할 과제에 대해 새롭게 인식하는 자리였다.
전북사진기자회는 94년 창립했으며 10명의 회원들이 활동하고 있고, 이번이 첫 번째 회원전. 사진을 통해 전북의 바런상을 보여주는 것이 사진기자의 사명감이라는 의도에서 기획한 전시로 전북일보 정지영, 오병권, 허성철 도민일보 김한철, 전라매일 황의호, 안봉주 이준훈, 김용광, 백경배, 도민일보 신상기 씨가 참여했다.
특집
4■11 총선과 전북
DJ의 바람과 돌풍의 변수
글 /신용철 전북일보 정치부 기자
총선을 바라보는 전북 여야
전북 지역 15대 총선 결과 신한국당이나 민주당 후보가 당선되면 이는 곧 ‘이변’, ‘신화창조’라는 꼬리표가 따라붙을 것이다. 이는 전북 지역 선거의 현주소를 극명하게 예시해 주는 대목이다. 지난 13대 총선 이후 전북에서는 각종 선거 때마다 ‘황색돌풍’이 몰아쳐 선거라는 한마당 잔치가 대개 싱겁게 막을 내린 것이 사살이다.
지난해 6■27 지방 선거에서 전주시장 결과 민자당이 고심작으로 내놓은 조명금 후보가 맥없이 나가 떨어졌다. 이것을 보고 민자당의 이강년 민자위원장(전주덕진)은 선거 결과 발표 다음날인 29일 부랴부랴 짐을 챙겨 전주로 떴다. 그가 위원잘을 맡은 지 불과 6개월만의 일이다.
당시 민주당 전북위원장들이 공식적으로 자당의 이찬승 후보 교체를 요구하는 등 민주당에서는 상처투성이로 이 후보가나섰다. 당연히 민자당에서는 한 번 해 볼만하다며 의욕을 가지고 덤벼들었던 것. 그러나 선거 결과가 생각밖으로 나오자 실망감을 안고 이(李)위원장은 위원장 사퇴를 선언하고 떠버린 것이다.
총선으 전초전에서 이렇게 여지없이 깨지는 것을 보고 총선은 하나마나 하는 게임임을 다시금 확인했다고 그는 후에 밝혔다.
이후 민자당에서는 이연택(전주완산), 김종건(익산)위원장 등이 위원장을 잇따라 사퇴했다. 집권 여당에서 일찍이 없었던 희귀한 광경이 벌어진 것이다. 총선을 앞두고 입지자들이나 이들의 선거를 기획하는 인사들에게 이독서 중의 하나는 조순 후보가 당초 27%에 불과한 지지도를 극복하고 어떻게 역전시켯는가를 생생한 자료를 통해 기록하고 있다. 그렇지만 신한국당에서 이현도 위원장 (전주 덕진)보좌역으로 일하고 있는 이기언씨는 도내에서는 이책을 구할 수가 없다고 밝힌 적이 있다.
전북 지역 선거 전략이 구태를 벗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보다는 오히려 조(趙) 후보와 같은 차별화된 선거 전략이 전북에서는 별 의미가 없다는 지적이었다. 서울처럼 선거 운동 기법을 과학화하고 홍보를 효과적으로 했을 때도 지지도에 큰 변화가 오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이번 선거에서 국민회의 전북지역 현직위원을 밀어내고 새로 좆기책을 맡은 위원장의 선거 실무 책임자와 기존 지구당의 책임자가 크게 언쟁을 한다고 한다. 이 지역에 파견돼 선거를 치르고 있는 이 책임자는 선거 운동에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될 것이며 느긋하게 생각하고 있는 기존 책임자는 그렇게 하면 교체된 의원보다 득표율에서 뒤질 것이라며 다투었다는 것이다.
여야간에 이러한 저변에는 이번에도 예외없이 ‘DJ바람’이 불 것이며 이것이 최대 관건이라고 믿고 있어 자만과 패배 의식이 공존하고 있다.
DJ바람의 허와 실
결국 이번 선거의 가장 현실적인 물음은 과연 DJ바람이 전북에서 ‘어느 정도’불 것이냐 하는 점이다. DJ바람의 실체를 부정하는 것은 ‘눈감고 아웅’하는 격이다. 그러나 이를 접근하고 바라보는 시각에는 여야별로 뚜렷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신한국당의 양창식 선대위원장은 “DJ바람이 일 것은 인정하지만 예전같지 않을 것이라는 점도 분명하다”고 밝혔다. 신한국당에서 내세우는 이유는 DJ의 정치행태와 총선을 앞두고 전북과 관련한 실책을 집중 거론한다.
양(梁) 전북 선대위원장은 “DJ가 정치 재개를한 것부터가 잘못”이라고 지적한다. 전북인들 사이에서도 알만한 인사들은 이제 DJ가 대권에 욕심을 두기보다는 호남정도를 적당히 주무르면서 정치 생애를마감하려고 하는 것으로 알고있다는 것이다.
대권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믿기에전북인들이 그에 대한 기대치도 적어졌고 구심력도 떨어졌다는 것.
양(梁) 선대위원장은 특히 국민회의가 총선을 앞두고 2대 실책을 범했다고 밝혔다. 먼저 공천이 잘못됐다고 말한다. 양(梁) 도 선대위원장은 예컨대 전주에 오탄 의원을 탈락시키면서 군산에 모의원을 공천해 준 것은 백번 양보해도 도민들이 이해 못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 다른 실책은 전국구 공천 과정에서 전북의원을 냉대했다는 점이다. 당선권이라 할 수 있는 14번 내에는 전북인들은 한명도 없으면서 같은 호남이지만 전남은 무려 5명이나 포진시킨 것은 어떤 설명으로도 도민들을 설득시킬 수 없을 것이라고 역설했다.
그러나 국민회의는 여전히 DJ바람을 기대하며 막판에 DJ가 전북을 방문하면 분위기가 일순간에 돌변할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러면서 무엇보다 현정권의 실정을 문제삼는다. 김영삼 정권이 들어선 후 인사정책 등에서 전북이 소외감을 더욱 갖게 됐다는 것이다. 또한 김 정권이 감정에 치우쳐 정책을 폈기에 전북인들에게는 개혁정책이 별로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고 평가 절하한다.
게다가 김 대통령과 김 총재가 영원한 맞수이기에 김 대통령이 있는 한 김 총재에 대한 지지는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무소속의 약진 여부
지난 14대 총선에서 마지막 순간까지 숨막히는 드라마를 펼친 지역이 남원이었다. 이는 무소속의 이병배 후보가 야당표를 분산시켯기에 이같은 연출이 가능했던 것이다. 사실, 여야를 막론하고 전북에서 구민회의와 신한국당이 1대 1 전선을 형성하면 국민회의가 승리할 것이라는 관측에 토를 다는 사람은 별로 없다. 다만 무소속이 표를 분산시키는 등 3■4파전이 되었을 때는 선거가 의외로 흐를 수있다고 본다.
전북에서 일단 이러한 관심을 불러 일으킬 만한 지역으로 먼저 손꼽히는 곳이 김제,정읍, 군산 갑등이다. 김제는 유권자가 9만 2천여 명으로 대략 80%정도의 투표율을 감안하면 7만 3천여명이 투표할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지역에서는 지난 80년 이후 줄곧 여당에서 어떤 후보가 나서더라도 2만 5천표 내외를 득표율을 보여 왔다. 다시 말해 여당 고정표가 이정도 되지만 야당표는 분산이 불가피해 초미의 관심 지역으로 급부상하고 있어 신한국당에서도 가장 주목하는 곳이다.
유권자 중 여권 성향 2만 5천여 표를 제외한 나머지 표를 가지고 국민회의 장성원 위원장, 3선으로 이번 국민 회의 공천에서 탈락한 사무총장 출신 최락도 의원, 이곳에서 3번 도전해 최소 1만표 이상을 매번 획득한 이창열 전 도의회 의장이 나누어 먹어 불꽃 튀는 접전이 예상된다.
이를 모를리 없는 김대중 총재가 지난 16일 최락도 의원의 중도 하차를 위해 그를 서울 여의도 맨하탄 호텔로 불러 1시간 20분 동안 설득했으나 무위로 끝났다. 때론 당부투로 달래기도 하고 때론 협박조로 불출마를 종용했으나 별무소득이었다. 김 총재는 최 의원에게 이번 전북지역 선거를 책임지고 치를 것과 총선후 당부총재 등 파격적 제의를 했으나 거절당했다. 민주당 김원기 대표도 그를 두 번이나 만나 민주당에 동참할 것을 권했다. 당초 김대표와 최 의원은 그렇게 사이가 좋은 처지가 아니다. 지난해 도지사 후보 선거 때 김 대표가 최 의원을 지지하지 않은 것에 대해 최 의원이 좋은 감정을 가질리 만무하다. 또 최 의원이 횡령혐의로 구속된 것을 두고 두 의원간에 오해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최 의원 구속에 김 대표가 작용했다는, 다소 터무니없는 얘기가 돌아다녔던 것이다. 최 의원과 김 대표는 서울과 김제에서 만나 흉금 없이 터놓고 얘기를 주고 받았다. 어쩌면 공동의 적인 김 총재를 앞에 두고 둘은 비슷한 처지이기에 마음이 통했을 지도 모른다. 최의원은 그러나 여전히 무속으로 출마 결심을 굳히고 국민회의를 탈당한 상태다
김원기의 도전
김원기 대표(정읍)는 지난 2월 관훈클럽 토론회에서 패널리스트가 이번 정읍 선거에 대한 전망을 묻자 다소 의외의 답변을 들고 나와 민주당 참관자들을 당황케 했다. 김대표는 “주위에서는 대표이기에 선거에 대해 물으면 자신있다고 답변하라고 권했지만 사실 이번 선거에 자신없다”고 솔직히 밝혔다. 선거에 임하면서 “자신 없다”는 표현을 쓰는 출마자는 아마도 없을 것이다. 입지자들은 어떤 이유를 들어서라도 해 볼 만한 싸움이라고 우긴다. 그렇게 해야 씀씀이에 여유도 생기고 분위기도 자신의 페이스로 몰고 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당의 책임자가 “자신없다”고 공개석상에서 밝혀 상당한 논란이 일었던 것이다. 그러나 정작 김 대표는 토론 후 오히려 “그보다 더 강한 표현을 하려고 하다가 톤을 낮춘 것”이라 고 말했다. 그로서는 솔직한 고백이자 계산된 발언이었던 것이다. 김대표는 최악의 경우를 상정하고이번 선거에 임했다고 종종밝힌다. 그가 전북에서 민주당을 하는 것은 “독립운동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말한 것은 이를 여실히 보여주는 부분이다.
그렇다면 과연 이번 선거에서 김언기 대표는 생존이 가능할 것이다.
일단 도내에서 민주당의 약진을 위해 여러 커드를 마련됐으나 이것이 결실을 맺지 못해 초반 선거전에 임하면서 터덕거리고 있는게 사실이다. 도지부 인선 등 상층부는 그런대로 구색을 맞추었으나 지구당 위원장 인선은 크게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게 가장 아픈 지적이다. 김 대표는 전주 출신 정치 원로인 유청 전의원을 영입해 모양새를 갖추었으며 도 선거 대책 고문으로 손주항 전 의원, 선거 대책위원장으로 이형배 전의원, 선거 대책 본부장으로 임광정 전 국민당위원장을 끌어오는데 성공했다. 그런데 지구당 위원장은 몇 군데를 제외하곤 참신성이나 혹은 지지도가 높은 인사들이 아니다는 예기다. 당초 김 대표는 전주에 김수곤 전 전북대 총장, 군산 갑에 강근호 전의원, 군산을 김철규 전 도의회의장, 부안 김종국 부안 터미널 대표 등을 포진시켜 정읍 김원기와 함께 전북 서해안을 중심으로 ‘OK(김원기 별칭)벨트’를 형성한다는 전략이었다.
이럴 경우 민주당 대표가 전북 인사기에 “민주당은 전북당이다.”며 전북에서 활기를 찾아간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지지 기반이나 지명도에서 상대당과 견줄 수 있는 이들이 한사코 현지 분위기를 들어 김 대표 입장에는 동의하지만 “정치는 현실이다”며 동참을 거부해 뜻을 이루지 못했다. 현재 그러기에 타지역에서 김 대표 지역으로 바람을 몰아 줄 수 있는 곳이 없다는 아쉬움이 있다고 민주당 관계자는 밝혔다. 때문에 전북에서 김 대표 홀로 DJ바람을 이겨내야 하는, 초반 선거 전략에 차질을 빚어 생각 이상의 버거운 싸움을 해야 할 판이다.
지난 21일 중앙의 모 일간지에 정읍선거에 대한 여론조사 결과 10%가까이 타당후보를 앞서는 것으로 나왔다. 그러나 김 대표는 이를 놓고 장담하기에 아직 이르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김 총재가 다녀간 뒤 어떤 변화가 올 것인지를 주시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그러면서 김 대표는 선거 결과에 연연하지 않겠다고 말한다. 망국적인 지역 할거 주의에 경종을 울리고, ‘실리’보다 ‘명분과 원칙’을 중시하는 정치인이었다는 사실만으로 만족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의 말투에는평소 그 답지 않게 비장함까지 내 비친다.
신용철/ 전북대 사회학과와 같은 대학원을 마치고 89년 전라일보 창간멤버로 기자생활을 시작해 지금은 전북일보 정치부 기자로 활동하고 있다. 전라일보 시절부터 국회를 출입하면서 현실 정치에 대한 뛰어난 감각과 취재능력을 보여주고 있다.
이재규/ 62년에 태어났다. 전북대 법학과를 졸업했으며 「시와 소설로 읽는 한국 현대사」를 썼다. 80년대 후반부터 90년 전반기에 재야사회단체의 정책실무를 주로 맡아 했고 현재 자유기고가로 지낸다
특집3
4■11 총선과 전북
‘정치’가 ‘문화’위에 군림할 수 있는가
문화에 대한 고민에서 문화적 개성으로
글/ 김수돈 CBS 전북방송 기자
우리 나라에서 정치인들은, 문화부문에도 시혜를 베풀고 여러 가지 문화시설으 유치해 주거나 문화 행사의 사업들을 지원해 주는 권력자로 군림해 왔다. 이 얘기를 듣는 당사자들로서는 기분 나쁘시겠지만, 좀 더 나은 역할을 해 주기를 바라고 비판하는 관점에서 하는 말이라는 점을 양해해 줬으면 한다.
선거 때에도 그렇고, 인물에 따라서는 평상시에도 ‘내가 이런 시설을 유치했소, 이런 사업의 국가예산을 따냈소’하고 자랑을 하고 다니는가 하면, 버젓하니 보도 자료를 만들어서 지역 자치단체 청사의 기자실에 돌리기도 한다. 그런데 솔직히 말해서 나도 그런 보도 자료를 손에 받아 들어 본 기자 중의 한사람이지만, 이런 정치인은 반갑지 않다. 더 솔직히 말하면 싫다.
지방자치 시대를 뛰는 국회 위원의 위상을 간단히 말해 본다면, 시의원, 도의원은 물론 자치 단체장과도, 어느 정도는 하는 일을 구분해야 하지 않을까? 지역 대표로 국회에 나갔으면, 지역 주민이 국정에 반영해 주기 바라는 일을 하기 위해 애쓰는 게 도리일 것이다. 국정의 방향을 바르게 잡아가고, 정부 정책과 정부 사업을 바르게 입안하는 데에 노력하는 것이 우선이지 않을까? 마찬가지로, 문화 부문에 있어서는 정치인 한사람 한사람이 우리 사회의 문화 전반과 지역 문화의 토양, 또 좀 더 구체적으로는 문화예술활동의 실정까지를 좀 더 폭 넓게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은, 입법부가 문화정책을 입안하는 데에 중요한 기초이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정치인들이 문화 부문에 대해서도 군림하고 있고,(그렇지 않은 몇몇 분들에게는 죄송한표현이지만)또 스스로 군림하려고 하면서도, 문화에 대한 이해도를 보여 주지 못하는 건 물론, 큰 관심조차 없다는 것이 이번 선거판에서도 그대로 드러나 있다.
이번 15대 총선을 앞두고 우리 지방의 여러 후보들이 내놓은 문화 부문 관련 공약을 보자. 예를 들어 전주 지역에서는 여러 후보들이 문화 부문에 관해 몇 가지 공약들을 내세우고 있다. 어떤 이는 전주권과 충청권을 잇는 마백문화권 연계 연구 체계를 외치는 가하면 조선 문화 복원과 세계화를 말하고 있다.
또 어떤 이는 간단하게 문화예술 산업의 국제 경쟁력을 말하고 있다. 시민 휴식 공원과 문화공간을 마련하고 전주천을 덮어버리겠다고 말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 전주 자연사 박물관 건립과전주의 소리 문화를 국제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리겠다느 넋이 후보들이 내건 공약으로 요약된다. 선거 가 진행중인 상황에서 얘기가 선거에 악용될 수 도 있으니까. 하나 하나 끄집어 내 까발려 볼 수는 없겠다. 그렇지만, 물론 얼핏보면 그럴듯한 공약들은 문화 부문에 대한 깊은 관심보다는 선거에서 자신을 부각시키는 데에 더 주안점을 두고 내놓은 공약인 듯 하다. 어떤 공약에 대해서는 격렬한 반론을 펴고 싶은 점도 있지만, 때가 선거전이니만큼 일단 참기로 하자.
국회의원 후보들이 시장이 내놓을 만한 공약을 국회의원 후보의 공약으로 내놓는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문화부문 공약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입장에서는 못마땅한 느낌이다. 후보 공약의 허구성을 지적하는 시각과도 연결 지어 본다면, 몇몇 문화 시서을 유치하거나, 또는 전주를 이런 도시로 만듭시다, 하는 정도는 공약 차원에서 나올 말씀들이 아니라고 보여지기에 하는 말이다. 공약이라고 하면, 지역의 유권자 앞에감히 약속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하고, 그 실행 가능성을 전제로 한다. 그게 아니고, 공공의 약속보다는 후보의 정책 전망을 제시하는차원에서 본다면, 지역 문화에대한 자신의 고민과 느낌, 그리고 그 결과물로 나오는 발언들이, 해당 후보가 지역 문화를 어떤 방향에서 도울 것인지를 유권자들로 하여금 판단할 수 있는 자료를 담아 내야 하지 않을까?
이번 선거에서 뽑을 국회의원들은, 지역 문화를 활성화시켜 내는 데에 도움을 줄 협조자의 한사람으로서 필요하다. 적어도자신의 문화적 소양과 이해도를 솔직히 드러내 주고, 자신이 지역의 문화 활성화를 얼마나 주체적이고 적극적으로 도와 갈 수 있을것인가를 평가받을 자료를 내놓았어야 하지 않을까?
물론 여러 후보들이 적어도 자기를 부각시켜 내는 측면에서는 조금이나마 문화 부문의 방향을 정하기 위해 고민한 흔적을 보여주고는 있다. 그래서전주 지역 후보들의 문화 부문 공약은, 익산지역이 후보들이 내놓고 있는 문화 관련 공약에 비해서는 다양하기는 하다. 불행히도 익산 지역 후보들의 문화 부문 공약은 단순하기 짝이 없다. 익산 지역은 거의 모든 후보들이 백제문화권 내지는 금마관공단지에 문화부문 공약의 전부를 할애하고 있다.
백제 문화권 개발과 문화 유적 발굴, 미륵사지 복원, 역사촌 개발, 금마지역 국민관광단지까지가 익산지역 후보들이내놓고 있는 문화부문 공약의 전부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딱 한 사람만이 “문화시설의확충”이라는표현을 추가하고 있다.
물론 마한백제문화유적의 발굴과 마백문화권을 문화 자원으로 개발하는 것은 이 지역의 절실한 과제다. 그렇긴 하지만 익산에서 마백문화권 개발은 너무도 당연한 일 아닌가?
정부 사업으로 이미 수년 전부터 해 오고 있는 일이며, 그 사업비 투자와 진척도가 너무 기대에 못 미치고, 부여권에 대한 투자에비해서도 상대적으로 뒤쳐지고 있다는 사실, 워낙 관심이 없는 사람아니면 다 아는 일이다.
지역구 국회의원으로서는 정부의 사업계획이 적극적으로 입안되도록 하고, 사업비 투자에 소흘함이 없도록 잘 지켜보고, 쓸데없이 일이 늦어지는일이없도록 주의를 기울이면 되지않는가? 물론 누구라도 해야 하는 당연한 일을 한결같이 소리높여 외치는 일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렇게 다 아는 일을 15대 국회의원 선거에 나서는 후보가 특별히 마련한 공약이랍시고 버젓하게 내놓고 있는 정치인들의 문화적 관심은 정말이지 점수를 주기가 어려운 일이다. 어디 지역 문화에 관해서 진지하게 고민한 흔적이나 문화 전반에 대해 자신이 갖추고있는 개성이 보이지를 않으니 말이다.
하다못해 익산 시내권에는 시민들이 이용한 문화 공간이 너무 모자라서 이따금씩 “회색도시”라는 말들이 튀어나오고있다는데, 이런 점과 관련해서 국가적으로 마련해 나갈 정책 방향을 제시하는 공약이라도 있단 말인가? 지역 주민들이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점을 국가 정책적인 차원에서 보완해 주고 기본을 마련해 주는 일에는 소흘하지 않나 싶다. 어떻게 보면‘익산 지역 후보들의 문화 부문 정책 공약은 아에 없는 건가?’하는 막말도 하고 싶어진다. 전주와 익산 지역의 국회의원 후보들이 내놓은 공약들을 놓고 뒤적거리면서 나름대로 몇 마디 되씹어 봤지만, 어째 께름칙하다. 이 글을 쓴 나 자신 또한 문화적 소양이나 지역 문화 전반에 대한 이해도, 문화 예술에 대한 식견들이 매우 유치한 수준이기 때문이다.
유치한 사람으로나마 다가오는 4■11 총선을 지역 문화의 활성화 차원으로 끌어내 본다면, 다음의 세가지 만큼은 교정하고 보완하자고 말하고 싶다.
가장 먼저, 국회의원 후보들이 내놓은 문화 관련 공약을 통해, 해당 인물들의 문화에대한 고민가 수준을 읽어보자. 가능하면 더 나아가 그 인물의 문화적 성향까지도 파악해 보자.
또 하나는, 후보들이 이슈처럼 내놓는 문화 관련 공약들은 지역의 가장 절실한 요구인 것처럼 비쳐질 수 있다. 이 사람 저 사람이 “이걸 세웁시다.”, “저걸 만듭시다.”하고 내세운 공약들이 자칫 우리 지역의 절실한 문화적 요구의 전부인 것처럼 잘못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는 얘기다.
다음으로, 후보들로서는 문화 부문 공약에 자신의 문화적 개성을 담자. 공약이 자신이 실천할 약속이고, 그 하나 하나가 유권자로 하여금 자신을 판단하게 하는 자료가 제공되는 만큼, 개성을 담지 않는 공약은 결코 문화인으로서 자신을 보여 줄 수가 없을 것이다.
정치인은 문화 위에 군림할 수 없다. 오히려 지역 문화 속에서 적극적 수용자여야 한다. 왜냐 하면 정치인은 우리 사회 문화에 민감해야 하고 문화전반의 흐름 속에서 자신의 입지를 세우는 데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김수돈/ 63년에 태어났다. 87년에 전북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2년동안 EYC(기독청년협의회)에서 활동한 바 있다. CBS에는 88년 입사한 뒤 8년째 일하고 있다. 한창 총선 방송을 위해 총력을 다하고 있다.
새로 찾는 전북미술사 29
시대를 앞서 간 진취적인 정신의 향기
박래현
글/ 이철량 전북대 교수 미술교육과
전북이라는 수려한 토양이 가꾸어 낸 큰 인물들 중에서 우향(雨鄕) 박래현이 있다. 박래현은 어쩌면 한국 역사상 가장 뛰어난 여류 화가로 꼽힐 수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 기록으로 조선 시대의 신사임당이나 혹은 최초의 여류 서양화가였던 나혜석 정도를 기억하고 있는 형편에서 박래현의 위치는 너무도 뚜렷한 것이리라. 이것은 그가 단지 여류라는 평가의 한계를 초월하고 있다는 역사적 의미에서 더욱 빛이 난다. 그는 그러한 평가에 걸맞는 화가로서의 일생과 작업 과정을 남기고 갔다.
박래현이 살았던 시대는 우리 역사상 가장 암울했던 시기였으며 한편으로는 급변하는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던져져 있었다. 그의 삶은 일제의 손아귀에 맡겨져 있었고, 그 자신은 튼실한 개척 정신이 없으면 버텨내기 어려웠다고 볼 수 있다. 박래현이 태어났던 1920년은 일제의 통치가 자리잡아 가고 있었던 무렵이었다. 1922년에는 조선미술전람회가 시작되었기 때문에 사실상 모든 의식 활동이 보이지 않는 제약 속에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일제 통치 속에서 성장기를 보내고 한편으로는 해방 이후 서양이라는 급류에 쓸리지 않고 시대를 개척해 갔던 인물이었다. 그의 이러한 개척 정신과 예술가로서의 천부적 소양이 어쩌면 전북이라는 독특한 산천이 길러낸 것들이 아니었을까.
박래현이 그의 출생지였던 평안남도 진남포를 뒤로하고 6살 때 군산으로 이주했던 것은 그의 예술가로서의 생애를 약속받았던 것이리라. 이 무렵 군산은 이미 대단히 활발한 경제활동을 펼치고 있던 항구도시로서, 문화활동도 여느 지역보다 다양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던곳이었다. 일본으로 나르던 미곡 수출항이었던 연유로 일본인 거리가 형성되고, 일본의 신문화도 가장 쉽게 접할 수 있었다. 그래서 박래현은 어린 시절 남보다 먼저 연극이나 영화 등도 쉽게 접하게 되고 여러 문화 활동에 남다른 경험을 쌓게 된다.
박래현은 군산 공립 보통 학교와 전주 공립 여자 고등 보통 학교를 졸업했다. 그리고 나서 경성 관립 여자 사법 학교에 입학한 때가 그의 나이 17세였다. 여기를 졸업하고 곧바로 순창 공립 보통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이렇게 순탄한 소녀 시절을 보냈던 그가 어떤 연유로 화가가 될 결심을 하고 일본에 건너가 동경 여자 미술 전문 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는지는 깊게 알려져 있지 않다. 더구나 당시 얻기 어려운 교사로서의 안정된 직업을 팽개치고낯선 이국에서 그것도 생소한 그림 공부를 시작했는지는 실로 궁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는 대단히 활달하고 적극적인 성격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그림에 눈을 뜨기 시작하면서 당시 제일 명성을 높이고 있던 젊은 화가 김기창을 직접찾아가 그림을 배우고 구애를 했던 일화가 알려져있다. 그리고이렇게 진취적인성격과 재능을 높이샀던 경성여자사범학교의 은사이었던 미술 교사 강구의 권유가 결정적으로 유학 길에 들어섰던 이유였다.
그는 일본에 건너가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의 일본화과에 입학했다. 그의 나이 스물한 살이었다. 여기서 그는 전통 일본화뿐만 아니라 지■필■묵으로 대변되는 동양화 전반에 대해 폭넓게 공부했다. 그리고 그의 일본유학은 단순히 동양화의 방법이나 기술을 습득하는 것으로만 끝나지 않았다. 후일 그의 작품들 속에서 면면히 흐르는 실험과 표현의 다양성 등에서 확인되는 회화의 본성에 대해 깊은 성찰이있었던 것을 볼 수있다. 그는 아마도 당시 일본에 흐르고 있었던 동■서미술의 다양한 기류를 깊게 체험하고 소화했던 것이었다.
박래현의 작품 활동은 매우 다양하다. 수업기의 전통 일본 화풍의 제작에서부터 서구의 조형성이 깊게 배어난 구상과 추상, 혹은 판화와 타피스트리 등을 남겼다. 그의 제작 활동은 잠싣 쉬지 않았으며 새로운 표현 욕구를 충족하기위해 세계를 여행하였다.
1941년 박래현이 일본에 건너가 공부했던 주된 표현법은 일본 채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