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3 | [세대횡단 문화읽기]
연극을 보고
철보망 여는 ‘가난한 연극’의 희망적 비젼
극단 ‘길라잡이’의 <직녀에게>
글/정초왕 전북대 교수 독문학
(2004-02-10 16:08:59)
설날, 뒷산에 올라가니 한켠에서 꼬마녀석들이 연을 날리고 있다. 어린시절, 드높이 나는 연의 팽팽한 무게에 아찔하도록 황홀했던 추억이 새롭다. 그렇게 더 높이, 더 멀리까지 날리고 싶은 부푼 마음 없이 그 꼬마 녀석들 과연 추위를 이겨 낼 수가 있을까. 그렇다. ‘연’은 소통에의 욕구이다. 우주 삼라만상, 하늘과 땅, 전에 살았고 지금도 살고 있으며 앞으로도 살게 도리 세상사람들과 나와의 소통. 어쩌면 마음의 글을 다목 흐르는 강물 어디론가 떠내려보내는 종이배도 역시 그런 것이리라. 수신인이정해져 있지 않은, 그래서 누구나수신인이자 발신인도 될 수 있는 그런 통신수단... 인류는 이런 본연적인 욕구를 바탕으로 문명과 문화를 이루어 냈을 것이다. 그러나 매스미디어의 시대를 지나 컴퓨터 통신과 인터네트가 일상적으로 인구에 회자되는 지금도 여전히 ‘소통에의 갈증’이 문제되는 것은 왜일까?
감수해야 하는 ‘소통의 차단’
사실 우린 소식과 정보의 홍수 속에 살고 있다. 게다가 너무도 엄청난 사건들을 정신없이 겪어내다보니 ‘불감증’이 극심해져서 이제는 웬만한 것 쯤은 안중에도 없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 조금이라도 ‘감각’이 살아있는 눈과 귀라면 어쩔 수 없이 보고 들을 수 밖에 없는 소식들도 잇다. 작금의 북한 사정과 망명객들 이야기는 일부 선정적으로 부풀려지기도 하니 굳이 말할게 못되겠지만, 설날을 전후해서 ‘고향에 가지 못하는 이산가족들’에 관한 소식은 매년 다시 되풀이 되고 있기에, 그리고 세계최장기수 김선명씨의 우울한 설쇠기에 관한 소식은 그저 신문 지면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을 뿐이어서 스쳐지나가버리기 딱 좋은 그런 소식들인 것이다. 그래도 아에 관심권을 벗어난 것들(이를테면 ‘국가보안법 위반 사람들’에 관한 것들)에 비하면 보도라도 되는 소식들은 그나마 다행일지도 모른다. 대체 언제까지 이들은‘소통의차단’을 감수 해야 하는 것일까. 필자에게 궁금한 것은 분단조국의 과거와 현재에 기인하는, 부단히 연이어지는 이러한 편치못한 소식들에 대해 감각이 남아있다고 하는 자들도 과연 언제까지 ‘불감증’에 저항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불감증’이란 한편으로 우리들 각자가 손쉽게 남들에게만 전가해버릴 수 있는 그런 속편한 것일지도 모른다.
통일을 위해 무엇을 준비하고 있는가
분단과 통일 문제를 다룬 극단 ‘길라잡이’의 연극 “직녀에게”를 알게 된 것이 본디 우리나라의 통일문제에 대한 관심 그 자체에서 온 것은 아니었다. 필자가 독일의 재통일 이후의 삶이 최근 독일의 문학과 연극에 어떻게 투영되고 있는지에 관심을 갖다 보니 부차적으로 주어지게 된 것이다. 문제가 많기 도 하지만 관심을 끌었던 것은 특히 거의 일방적으로 서독에 병합되다시피한 구 동독 주민들의 정서적, 심리적 박탈감과 정체성 상실이 의외로 그 상처의 골이 깊어서 아마도 거의 한세기나 지나야 흔적이 지워질거라고들 한다는 점이었다. 이제 막 관심을 갖기 시작한 필자로서 자세한속사정은 아직 잘 알 수 없지만, 차차 좀더 많은 것을 알게 될 것이고, 또 남의 집안일이기도 하니 서두를 것도 초조해 할 것도 없다. 그러나 문득 우리 집안 사정을 돌아보니 오히려 궁금증이 싹튼 것이다. 그네들보다 더 어려움이 많을 것으로 생각되는 우리는 순탄한 통일과정을 위해 무엇을 준비하고 있는가. 아니 ‘분단과 통일’자체에 대한 문제의식이 과연 아직도 절절하기나 한 것인가. 우리의 문학과 연극은 또 어떻게 이러한 문제들을 형상화하고 있는가. 몇몇 작품이 떠오르기는 했다. “광장”과 “통일밥”, 그리고 연우소극장에서 가슴이 찡해질 정도로 감동했던 “한씨연대기”에 이르기까지..... 그러나 물론 내가 가진 지식의한계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작년 12월, 그해의전국연극제에 출품한 창작극회 “꽃신”이 일종의 통일을 주제로 한 연극이라는데 생각이 미쳐서“꽃신”의 작가이자 국문학 연구자이기도 한 곽병창 선생에게 우리 사정을 물어 보았더니 “직녀에게”라는 작품이 지금 서울에서 공연되고 있을 거라고 알려준 것이다.
“진심”으로 바뀐 ‘외교적 인사’
연극잡지를 통해 그 사실을 확인하고, ‘문화저널’의 도움으로 극단 관계자들과 미리 연락을 취한 뒤 12월 15일 연극을 보러 서울로 행했다. 충분히 여유를 갖고 출발한다고 했는데도 고속버스는 복잡한 서울 시내를 제시간에 헤쳐나가지 못했고, 헐레벌떡 극장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공연이 시작된지 30분 후. 공연을 본다는 것은 무의미해져버렸다. 대신 연출자인 임진택 선생과 극단대표 양정순씨와 차마시며 이야기 나눈 것이 행운이라면 행운이랄까.
‘가난한 연극’ 한편을 만들었는데도 재정상 어려움이 많다 했다. 그럴 것이다. 어디건 한결같겠지만, 돈이 넘쳐나는, 어느것에나 돈이 너무 많이 드는 서울땅에서 연극한편 올리기 어디 말처럼 쉽겠는가. 더구나 나같은 사람까지도 이렇게 저렇게 공짜 손님으로 극장을 들락거리니 말이다. 그때 지방 순회공연 계획 이야기가 나왔던 듯 싶다. 나로서는 외교적(?) 언사는 막상 다음날 공연을 보고나서는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진심으로 바뀌고 말았다.
막다른 지경에 이른 분단의 질곡
작년 12월 16일 토요일 오후 3시 공연. 대학로 ‘오늘소극장’내부, 객석과 무대는 그리 넓지 않았고, 어쩌면 좁은 느낌 마저 주었지만, 작품 자체의 폭과 넓이와 무게는 넓고 무거웠다. 전쟁 중 음악가인 아버지 품에 안겨 남하하던 쌍둥이 자매는 불의의 사고로 각자 남북으로 헤어져 양부모 밑에서 성장하게 된다. 이름하여 현(絃)과 율(律). 갈라져서 살 수 없는 운명임을 이름이 대변해준다. 그들을 키우면서 양부모들은 피할 수 있었던 고통마저도 떠안는 셈이지만, 음악가인친아버지의 피를 받아서일까, 변전하는 삶의 우여곡절에도 그들은 각자 유능한 음악가로 커나간다. 자신들의 과거내력을 알게 되고 또 서로의 소식을 듣게 된 그들은 ‘타는 목마름으로’ 만나보고자 애를 쓰지만 결국 그 만남은 이런 저런 이유로 성사되지 않고, 안타까움과 아쉬움과 야속함만 깊어질 뿐이다. 각자가 나눠가진 아버지의 악보와 바이얼린이 함께 어우러져 통일의 노래를 연주할 수 있기 위해서는 얼마나 더한 세월을 기다려야 할 것인가. 분단의 질곡은 이제 거의 막다른 지경인데, ‘연극’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울려퍼지는 노래 “직녀에게”, 그리고 철조망을 여는 연극적 비젼... 그래, 그이상은 다른 곳에서 해야 하고, 또 그럴 수 있을거야
분단된 조국은 서로 진지하게 만나지 못한다.
연극적 표현양식을 돌이켜볼때 “직녀에게”는 연출가가 말하듯 ‘가난한 연극’ 냄새가 물씬 풍기는 일종의 ‘서사극’적 양식의 작품이다. 간단한 장치와 조명효과 및 기능적인 대, 소도구 등을 이용한 장면처리와 연기술도 그렇고, 극의 전반적인 구조도 서사극적이고 개방적이다. 연출자는 ‘마당극’ 운동을 돌이켜 보며, 변화된 문화지형에 대한 적극적인 대응방식의 하나로서 이러한 서사극 양식의 차용을 말하고 있지만, 필자가 보기에 물론 전형적인 브레히트식 서사극은 아니다. 오히려 작품이 정서적 호소력을 전혀 배설하지 않으며, 어떤 점에서는 의도적으로 시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볼때, 서사극 양식의 우리식 활용이라거나, 혹은 마당극과 서사극의 (변증법적) 결합이라고까지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공연이 끝난 후, 극단측과 몇가지 이야기들을 나누어 보았다. 공연은 실화를 토대로 한 장편소설 “노래”(유화량 작)를 각색한 것이라 한다. 그리고 실제로는 자매의 만남이 한차례 이루어지며, 소설작품에서도 그렇게 처리되었다 한다. 연극 공연이 그점을 반영하지 않은 이유는 사실 명백하다. 연극 속에서 두 자매는 더 이상 개인적 차원이 아니라, 상징적으로 분단된 조국을 대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아직 분단된, 통일되지 못한 조국은 서로 진지하게 만나지 못한채 해결되지 못한 연극 속의 문제점들을 고스란히 그대로 내보이고 있는 것이다. 소설의 작가 말이 맞을 것이다. “만남과 헤어짐이 개인적인 문제로 환원되는 세상으로 바뀌면” 연극도 달라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통일의 물꼬도 보이지 않는데” “통일이 되면 골치 아플 일이 더 많을 거라고” “엄살을 피우는 사람들”, 그들은 아마도 함께 살면 골치 아플 일이 많을 거라면서 죽도록 사랑하는 연인과의 결혼을 애써 회피하는 사람처럼 바보같을 것이다.
“직녀”를 통해 띄어올린 잘 만들어진 공연
‘분단’이 초래하는 이런한 문제들을 떠올리며 이 지점에서 필자는 약간 초조해진다. 너무 늦으면 안되는 것 아닌가. 너무 달라져 버리면, 생각과 살아가는 방식이 다를 뿐 아니라 쓰는 말까지도 달라져 버리면 다시 합쳐 살기가 너무 어렵지 않겠는가.
요즘 민족극 계열 작품들에 관객이 든다고는 하지만 젊은 층이 대다수인 관객들 틈에 이산가족인 듯 보이는 노인네들이 말없이 관람하고 돌아간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연극도 소통의 욕구이다. 연극을 한다는 것은 ‘연’을 띄어올리는 것과 같으리라. ‘직녀’를 향하여 띄어올린, 검소하지만 수공작업으로 정성을 들여서 보기 드물게 잘 만들어진 ‘연’, 작품 “직녀에게”가 하늘 높이 오래도록 떠올라 많은 사람들이 ‘불감증’을 깨뜨리고, 우리 서로 서로 소식을 주고 받을 수 있는 마음의 매체가 되어주길 바라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