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3 | [세대횡단 문화읽기]
새로 찾는 전북미술사 28
자유분방함과 진취적인 기상, 끊임없는 모색의 세계
묵로 이용우
글/ 이철량 전북대 교수 미술교육과
(2004-02-10 16:04:32)
우리의 근 현대 회화에서 이용우만큼 자유자재한 필치를 보인 작가는 드물다. 특히 그의 문인화를 보고 있노라면 마치 방향을 알 수 없는 이른 봄바람의 맵고 그러면서도 부드러운 촉감의 운필을 느낀다. 거침없이 휘둘러대는 붓끝은 방향이 없다. 그러면서도 그 표현에 있어서만은 엄격하고 정확하다. 조선 말기의 장승업을 연상시키는 능란한 필치는 근 현대 회화의 독보적 존재라 할 만하다. 이러한 이용우가 전주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순전히 전쟁때문이라고만 할 수도 없을 것이다. 어떻든 이용우는 1950년 6.25전란으로 인해 전주에 내려와 많은 지우들과 어울려 그림을 그리다 1952년 음력 9월 24일 전주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러니가 불과 2년여에 걸친 짧은 기간동안 머물렀지만 그의 지역화단에 끼친 영향은 작은 것이 아니었다.
이용우가 태어난 곳은 서울 종로였다. 1902년에 서울에서 태어나 그가 그림에 보편적으로 입문하게 된 것은 1911년 경성서화미술원에 입학해서부터이다. 그는 초기에 호를 춘전(春田)이라 했는데 이는 당대 제일의 화가였던 안중식이 지어준 것이다. 안중식은 그의 호 심전에서 비롯된 춘전이란 호를 내렸던 것을 보면 이용우가 일찍부터 당시 노대가들의 눈에 들었을 만큼 재질을 보였다고 볼 수 잇다. 그리고 그 후 1927년을 전후해서부터 묵로(墨鷺)로 고쳐 사용하고 있다.
그가 제 1기생으로 입학한 서화미술원은 이왕가의 재정적 후원으로 설립된 한국 최초의 근대적 미술 교육기관이었다. 여기의 대표적 교수는 조석진과 안중식 등 당대 최고의 작가들이 망라되었다. 그 중에서 특히 안중식이 호를 주었던 것으로 보면 그의 총애가 남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이용우는 3년 과정의 수업을 마치면서 전통적인 화법의 기초과정을 충실히 전수받았다. 그리고 이렇게 시작한 그의 활동은 활발하게 시작된다. 1914년에 경성 서화미술원을 졸업하면서 시작된 화력은 다채롭고 화려했다. 1918년엔 조선서화협회가 발족되면서 이용우도 입회화게 된다. 이 무렵 그는 가장 젊은 세대로서 참여하게 된다. 그리고 1923년에는 당시 신진세대의 선두그룹이었던 이상범, 변관식, 노수현과 함께 동연사(同硏社)를 조직하여 청년세대로서의 본격적인 활동을 전개한다. 이 무렵 이용우는 이미 가장 주목받는 신예로서 지목받고 있었다. 그러한 예를 1920년 창덕궁 벽화제작을 맡게되거나 또는 1922년 1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4등상으로 입상하는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1회에서부터 출품하기 시작한 선전엔 18회까지 참여하여 수차례 입특선을 하게 된다. 또한 1941년에는함흥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함흥 개이넞ㄴ 이래 이듬해는 서울에서 가졌던 개인전 이래 이듬해는 서울엣 가졌던 개인전 이후 강릉과 서울에서 한 차례씩 전람회를 개최하였다. 1949년 제 1회 국전에서 심사위원을 역임하면서 그의 화단 활동은 안정기에 들어간다. 그러나 이듬해 전쟁이 발발하고 그의 생을 마감하게 되는 전주 피난 생활이 시작된다. 그가 어떻게하여 피난처를 전주로 삼았는 지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그는 전주에 적지않은 지기(知己)들을 갖고 있었던 듯이 보이며 이들은 대부분 서화를 다루었던 인물들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정황으로 보아 당대에 전주의 미술계 상황은 상당히 활발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정황으로 보아 당대에 전주의 미술계 상황은 상당히 활발했었던 것으로 믿어진다. 이러한 활동이 지역에서 뿐만 아니라 서울과의교류가 빈번히 이루어지고 상호간의 교류가 깊게 이루어졌음을 이해할 수 있다. 이용우가 특히 가깝게 어울렷던 인물은 효산 이광열이었다. 이광열은 당대 이 지역을 대표했던 서화와 한문의 대가로서이용우에겐 적절한 피난처가 되었다. 천성이 자유자재하고 분방했던 기질과 두주를 불사했던 방만한 성품을 가진 천재화가를 이광열은 따뜻하게 보호해 주었다. 전통적으로 서화를 사랑하고 서화인들을 깊게 이해하고 있었던 지역의 정서가 서울에서 피난 온 당대 한국 제일의 화가를 따뜻하게 보호해 주었다. 전통적으로 서화를 사랑하고 서화인들을 깊게 이해하고 있었던 지역의 정서가 서울에서 피난 온 당대 한국 제일의 화가를 따뜻하게 감싸주었다. 이용우는 이렇게 하여 마음놓고 필묵을 즐길수 있었고 또한 후진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그의 유품이 전주에 많이 남아있고 또한 현존 원로 작가인 나상목 선생이 이용우의 문하에서 그림 수업을 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그의 생애의 마지막 불꽃을 전주에서 피워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참혹한 전쟁중에도 작품제작에 남다른 열정을 보였다. 생활은 극도로 어려웠으나 그의 활동은 쉬지 않았다. 전쟁중에도 그는 부산에서 개인전을 갖기 위해 몸을 쉬지 않았고 결국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다. 이렇게 제작된 39점의 작품들은 이듬해 그의 희망대로 부산 국제구락부에서 전시하게 된다. 이용우가 전주에서 얼마나 왕성한 창작욕을 불태웠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의 이러한 제작활동이 지역화단에 적잖은 영향을 끼쳤음은 쉬벡 이해할 수 있다.
그의 작품세계는 그의 분방한 성격만큼이나 다양하고 진취적이다. 산수를 비롯하여 인물, 화조 등 다루지 않은 소재가 드물고 또한 전통적인 기법에서부터 그의 독창성을 발휘해 낸 독자적 양식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두를 소화해 내었다. 이용우의 초기 작품은 스승인 조석진과 안중식 등의 화풍에서 머무른다. 그는 두 스승으로부터 문인화풍의 화조, 기명절지, 산수 기리고 세밀한 채색화 등을 익혔다. 그가 수업기에 얼마나 충실히 사실기법을 익혔는지는 1920년에 그린 창덕궁 대조전 벽화에서 잘 나타나낟. 뿐만 아니라 기명절지와 화조 등에서는 스승을 대필할 정도의 기량을 보였다. 그리고 이용우가 전통적화풍을 충실히 공부했음은 장승업에서 안중식으로 이어지는 화조그림 등에서 그 실례를 찾아 낼 수 있다.
이용우의 실험성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대략 1920년대 이후가 된다. 조석진과 안중식 등의 두 스승이 세상을 드고 또한 일본을 통해 새로운 화풍이 들어오면서 이용우는 합리적 사실주의에 눈을 뜨게 된다. 특히 이 시기의 작품들은 현실에 바탕을 둔 사실적 자연주의에 의한 풍경화들을 많이 보여준다. 필묵에서 독창적인 기법을 찾아내려는 적극적인 노력과 도전적 자세들이 나타난다. 풍경의 전개가 원근을 이용한 서양화풍을 대담하게 받아들인 것이라든지 명제를 예전에 볼 수 없었던 새로운 표현을 쓰고 있다. 예를 들면 ‘실제(失題)’ ‘제7작품’ ‘흙의 향기’ 등 당시 전통화단에서는 파격적인 용어를 쓰고 있는 점이 이채로운 것이었다. 이러한 것은 혈기가 넘쳤던 20대의이용우의 작품활동의 세계를 이해하는 단서가 되기에 충분하다. 이용우가 조선조말의 복구적 화풍을 벗어나려고 몸부림쳤던 최초이 신세대였음을 보여준 것이었다.
그러나 이용우의 작가적 역량은 단순히 새로운 것을 위한 도전적 실험으로만 머무르지 않는다. 그가 전통과 실험의 조화에 눈을 뜨면서 그의 작품세계를 한단계 끌어 올리는 것은 30대에 들어오면서 나타난다. 그는 이시기에 오면 동화회화의 독특한 정신세계를 이해하게 되며, 그의 화면은 좀더 유연하고 부드러운 화면을 이루어낸다. 타고난 천부적 재주가 한결 격조높은 세계를 일구어 내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40대에 들어서면 이제 원숙한 개성미를 발휘하게 된다. 필묵에서 파격적인 운용은 그의 분방한 기질과 잘 어울려 독자적 세계를 구축한다. 이 시기의 가장 독보적 작품은 ‘시골풍경’이라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그동안 이용우의 작품 행적을 모두 보여주는 모습을 하고 있다. 향토의 정감어린 서정성을 보여주는 것은 그가 30년대에 얻어낸 사실적 자연주의에서 소화해낸 정감일 것이다. 한 중앙에 언덕과 숲을 놓고 화면을 좌우로 분할하는 대담한 구성과 파격적인 준법을 사용하고 있는 운필은 이용우의 기질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러면서도 부감법(하늘에서 비스듬히 내려다보는 방식)을 사용하거나 부분부분 산수형식을 이어내려는 노력으로 받아 들여 진다.
이용우의 작품세계는 끊임없이 새로운 모색의 전개로 이어진다. 만일 이용우가 참혹한 전쟁의 시기를 유연하게 넘겨 작품활동이 좀더 계속되었더라면 어떤 작품을 남겼을까하는 아쉬움을 갖게한다. 그와 동세대였고 같은 스승, 아래서 공부했던 청전 이상범이나 소정 변관식이 60년대 이후 자기 모델을 이루어 냈던 점에 비추어 이용우의 죽음을 근 현대 화단의 큰 손실이 아닐 수 없었다.
어린시절 나는 참새를 보고 즉시 그 광경을 그려내 부친을 놀라게 했던 연유로 9살 때 서화미술원 1기생에 입학했던 천재화가 이용우는 그 마지막 씨앗을 전주화단에 심고 떠났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