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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2 | [문화와사람]
이 사람의 세상살이 명창 최승희 '죽어서라도소리는 배울라요’ 소리와 천생 연분이 있는 소리꾼
글 / 김은정 「문화저널」편집위원 (2004-02-10 15:26:17)
그이는 단척이다. 그래서인지 그는 걸음이 늘 바쁜 사람처럼 보인다. 그러면서도 그이는 늘 얼굴에 웃음을 갖고 있어 바쁜 걸음과 웃음이 이루어내는 조화가 그의 이니셜처럼 안겨있다. 올해 나이 에순의 명창 최승희. 그를 만나러가겠다고 전화 약속을 했을 때 그는 ‘집이 너무 누추하다며 한사코 밖에서 만나기’를 권했다. 짧은 겨울 낮길이를 재며 그의 아파트를 찾은 날은 유난히 바람이 찼다. 송천동 한켠에 숨어있는 그의 15평 5층짜리 아파트는 웬지 더욱 을씨년스럽다. “입구 바로 앞 동 맨 가세 1층이여. 아 소리배운다고 얘들 찾아오는디 조께 시끄러워도 좋을 디를 찾아본게 이집이 제일 좋드만” 소리가 좀 나도 별 상관없을 이 집은 찾기가 그만 쉬워서도 좋았다. 그이는 돌비국악원이 일주일 방학에 들어가 모처럼 쉬고 있다고 했다. 이즈음 돌아가는 이야기를 그만그만 하다가 불쑥 이렇게 물어보았다. ‘참 그전 세상은 삵 어려우셧지요?’ 그런데 그의 대답은 영 뜻밖이다. “어려웠지만 지내놓고 보니 그리워요. 뭐 그리 소리가 좋다고 그 어려운 일을 다 겪었는지........ 소리를 배우는 일이라면 만사 제치고 나설 수 있었던 젊은 시절은 인자 나한테는 돌아오지 못헌다고 생각허니 마음이 짠하고, 허망하기도 허고, 생각하면 참 징그란 시상이었는디 말이요.” 그는 올해 꼭 예순이 되었다. 남들보다 늦게 들어선 소릿길을 앞만보고 달리다 보니 어느새 환갑이라는 그는 이즈음 소리 공부와는 또다른 일들로 분주하다. 얼마전 자신의 오랜 소망중의 하나인 정정렬제 판소리 사설집을 발간해 국악계의 관심을 한몸에 모았던 그는 이제 그 뒤를 이어 앙ㄱ보를 정리하는 일을 시작할 욕심을 챙겨두고 있다. 마음을 다져먹었을 때 밀어 부쳐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그는 자신이 이어온 스승들의 소리를 고스란히 이 세상에 남겨 두는 것이 소리를 넘겨준 스승의 은혜를 갚을 수 있는 길이라 믿고 있다. 그랬다. 그의 소릿길도 여느 명창들처럼 별반 다르지 않게 지난했다. 마치 소설 작품과도 같은 극적인 구성으로 짜여져 있는(?) 수많은 명창들의 삶의 행적은 그이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다만 다른 것은 그가 그 시절을 부끄럽지 않게 당당하게 내놓는다는 것이다. 그는 소릿길에도 늦게 들어섯거니와 명창의 반열에 오른 것도 마흔이 넘어서였다. 오랜 무명의 시절을 거쳐 그이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던 70년대 후반과 80년대 초반, 국아가계에ㅐ서는 ‘아, 그때 그 최채선이가 최승희여? 그려 언제라도 그 소리가 나설 줄 알았어. 정정렬제 춘향가는 참말 따를 사람이 없었거든.’하며 고개를 끄덕였었다. 결혼한지 얼마 되지 않아 더 이상 왜소한 그이 몸집으로는 소리를 가누기 힘들다는 판단을 한 남편의 강권으로 소리판을 떠나 있던 그가 10년 만에 다시 돌아왔을 때 그는 마치 10년 동안 숨어 독공으로 득음을 한 사람처럼 소리를 풀어냈다. 그때의 소리를 듣고 문화재전문위원인 이보형 씨는 ‘교묘한 시김새로 매화등걸처럼 용트림하는 그 소리 가락은 그가 아니면 능히 감당할 수 없는 것’이라고 극찬했다. “10년 가까운 세월을 소리판으로부터 떠나있었지만 단 한순간도 소리를 잊어 본적이 없었어요. 어릴 적 아버지가 자식 인연을 끊겠다고 반대하셨을 때도 죽어서라도 소리는 할란다고 했던 난디 어찌 소리를 머릿속에만 넣고 살 수 있었겄소.” 그는 그 시절을 그야말로 자신에게 소리의 참맛을, 그리고 자산과 소리와의 뗄 수 없는 인연을 깨우쳐 준 정말 중요한 시간이었다고 말한다. 그가 소리에 마음을 뺏겨 아예 소리를 배우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열여덟 살 때였다. 이리 북일면 출신인 그는 그런대로 먹고 살만은 했던 집안의 5남매 중 셋째로 태어나 그시절에 중학교(원광여중)까지 다녔다. 그의 본 이름은 채선이다. 그의 아버지는 3대 독자였는데 책상물림으로 꽤 높은 학식을 갖추었지만 그이의 말에 의하면 ‘말글을 되글로도 못써먹은 촌 서생’이었다. 그 대신 그이의 어머니는 생활력이 강해 농삿일도 거의 혼자의 힘으로 해냈으며 자삭들을 가르치는 일에도 적극적이었다. “어머니는 비교적 자유로운 생각을 갖고 있었지만 아버지는 워낙 완고하셔서 제대로 나다니지도 못하고 하셨어요. 집에서 일만 거들고 있다가 군산 고모집에 가시는 어머니를 따라 나설 기회가 있었지요. 처음 집을 떠난다는 설레임으로 밤잠을 설친 기억이 새롭네요.” 그때 그길이 ‘채선’이를 ‘승희’로 바꾸어놓게 될 줄은 아무도 몰랐었다. 고모집에서 지내던 그는 어머니가 집으로 가고난 후에도 잠시 더 머물렀다. 하루는 그의 고모가 친구들과 계를 하러 간다며 함께 갈 것을 권했다. 그곳에서 그는 북장단에 맞추어 가슴을 울려대는 소리를 만났다. ‘군산성악회’란 간판이 걸린 집에서 넘어오는 소리였다. “소리에 이끌려 그 집 마당에 들어섰는디 마루에서 노란 호박단 반호장 저고리에 뉴똥치마를 입고 머리를 곱게 쪽진 여자가 다소곳이 앉아 꾀꼬리 같은 소리를 하고있습니다. 아매 지금생각허먼 단가 한 대목이었던 것 같은디. 어디 그뿐이었나. 이 여자가 살그머니 일어서더니 북채를 들고 승무를 추는디 그때 내눈으로는 그렇게 이쁜 여자는 시상에 없다고 생각 됐어요.” 소리를 배우게 해 달라고 고모를 뱀새 졸랐다. 처음에는 입밖으로 꺼내놓지도못하고 했던 고모도 하는 수 없이 그의 어머니를 설득시켜 집식구들 몰래 소리를 배우기 시작했다. 어머니 생각으로는 어쩌면 딸과 소리의 인연이 예사롭지 앟다는 판단에서 였는지모른다. 그도 그럴 것이 어릴 때부터 그이는 동네에서 알아주는 소리꾼이었다. 목소리가 곱고곡조를 익히는 데도 빼어나 당시 유행가란 유행가는 모두 불렀던 그를 두고 동네사람들은 그집에 마실가는 것을 ‘유성기 들으러 가자’고 했을 정도로 꼬마 채선이의 노래 실력은 소문나 있었던 까닭이었다. 그때 군산성악회에서 처음 만난 스승이 홍정택 씨였다. 그는 자신의 첫 소리 선생이 홍정택 선생이었던 것을 큰 행운으로 여기고 있다. ‘말씀은 많이 안하셨지만 가르침이 많은 선생님’덕분에 최승희 씨는 소리실로 얼마나 어려운 길인지 스스로 깨우칠 수 있었다고 말한다. 날마다 소리 배우는 일로 ‘재미지던’ 그는 한 달이 지나도돌아오지 않는 딸을 찾아온 아버지에게 이끌려 집으로갔다. “집안 팔아먹을 년”이라며 죽지 않을 만큼 두드려 맞으면서도 그는 끝내 소리를 그만두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이의 아버지는 대칼을 꺼내놓고 “이래도 기생이 되겠느냐”고 했단다. 일제시대 예기조합으로 이름 붙혀진 ‘권번’은 해방이후 ‘성악원’이나 ‘국악원’으로 이름을 바꾸고 역할도 많이 달라진 후였지만 여전히 ‘예기조합’으로 이해하고 있는 상황이어서 가뜩이나 환고한 그이의 아버지로서는 ‘사생결단’의 명분이 충분히 있었을 터였다. 권번에 보내느니 차라리 딸을 하나 잃고 말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지만 그의 딸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들려준다. “저는 죽어서라도 소리를 할거예요.” 40년여가 지난 지금 이 이야기를 들려주며 그는 끝내 눈물을 흘렸다. “그렇게 반대했던 아버지는 돌아가셔서 내 소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는지, 얼마나 좋은 제자들이 나를 따르는지 모르시지요” 그의 어머니는 집에서 쫓겨난 딸의 소리 공부를 위해 아버지 몰래 쌀을 대주었다. 군산 국악원에서 공부한지 3개월 만에 조교가 됐던 그는 전주의 전동국악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홍정택 선생도 군산국악원을 떠나 전동국악원에서 소리를 가르치고 있었고 김동준 씨도 당시 이곳에서 소리 선생을 하고 있어 그는 소리 폭을 넓힐 수 있었다. 그의 탁월한 소리에 귀를 앗긴 동호인들이 그가 소리를 계속할 수 있도록 후원을 자처하고 나섰다. 당시 전동국악원의 운명에 깊이 관여하고 있던 강욱희 씨는 그가 더 이상 수업료를 내지 못하고 김연수 창극단을 따라 나설 뜻을 비차자 동호인들과 상의해 국악원 방을 내주고 수강료도 면제해주며 소리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게 해주었다. 국극단을 따라 나서지 않고 소리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국극단을 따라 나서지 않고 소리공부에 전념할 수 있었던 그 시절이 그에게는 가장 중요한 시기였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때에 최승희 씨는 정웅민 선생을 찾아가 소리를 배우기도 했지만 그이 소리 바탕을 고스란히 받지는 못했다. 워낙 타고난 목이 좋고 공력도 남다른 그를 보고 시조를 하던 이용복 씨가 김여란 선생을 추천했다. 그의 나이 스무 살, 스승을 찾아 서울로 갔다. 그때 그 추운날 서울 정신여고 앞 2층 건물에 수도국악예술원을 열고 있던 김여란 선생을 찾아가던 기억을 그는 평생 가슴에 안고 있다. 그리고 30년, 83년 9월 14일 김여란 씨가 작고할 때까지 소리뿐 아니라 곁에서 병수발을 들며 스승을 모셨다. 그를 처음 본 김여란 씨는 탄탄하게 다져진 소리 속을 들여다보는 듯 최승희 씨를 수제자로 키우는 데 인색하지 않았다. 스승은 스물 일곱 살 늦은 나이로 자신의 소리에 매료된 남자를 만나 결혼하고 소리를 중단한다는 제자의 말을 듣고 크게 실망하며 아쉬워했다. 그리고 그 스승은 끝내 제자를 소리판에 다시 들여오는 일을 포기하지 않았다. 79년 10월 오랫동안 국악판에서 잊혀졌던 최승희씨가 모습을 드러낸 것은 한국국악협회가 주최한 전국판소리경창대회에서였다. 그는 이 대회에서 정정렬 - 김여란으로 이어져 온 정정렬제 춘향가를 불렀다. 30년 정독으로 익혀온 스승의 소리는 그의 목으로 더욱 빛을 냈다. 그날 ‘오리정 이별 대목’을 비통한 중머리 장단으로 열창한 그를 두고 심사위원들은 ‘귀를 번쩍 트이게 하는 재목’이다고 입을 모았다. 스승인 김여란 씨도 기량은 알고 있었지만 워낙 오래쉰 탓에 걱정했었는데 역시 소리를 타고났다며 기쁨을 감추지 않았다고 한다. 80년 다시 남원 춘향제 전국판소리대회에서 1등을 수상한 그는 이듬해 전주대사습놀이에 출전, 명창부 장원을 차지하면서 명창의 반열에 들어섰다. 소리판에 들어선지 25년 만의 보람이었다. 그의 명성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고 공연활동도 뒤를 이었다. 84년에는 서울 국립극장에서 「춘향가」완창회를 가졌다. 그때 소리로 그는 ‘정정렬제 춘향가로 그를 당할 사람은 없다.’는 극찬을 들었다. 그 여세를 몰아 이듬해에도 동아일보 초청으로 춘향가 완창회를 다시 한번 가졌고 88년에는 김명환 씨를 통해받은 정응민제 심청가를, 92년에는 국립극장에서 흥보가 환창회를 가졌다. 그는 전주대사습 장원의 기쁨을 안았을 때나 84년 첫 완창회를 가졌을 때나 맨 먼저 떠오른 사람은 그의 스승 김여란 씨였다고 들려준다. 대사습 장원으로 명창의 반열에 들어선 제자에게 박수를 아끼지 않았던 그의 스승은 그 빼어난 소리로 다양한 음악적 기교를 구사하며 청중들을 울리고 웃기는 제자의 완창회는 보지 못했다. 완창회가 끝난 뒤 웬지 모를 서러움이 복받쳐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는 최승희 씨는 그날 가슴에 묻고 살아온 지나간 세월에의 서러움을 모두 쏟아버렸었노라고 말했다. 명창 최승희는 서편제의 시조 박유전으로부터 시작돼 박기홍으로 이어지고 다시 정정렬과 김여란으로 내려진 춘향가를 잇고 있는, 뿌리가 굵은 명창이다. 어느 누구도 자신의 소리에 자긍심을 갖고 있기 마련이지만 최승희 씨만큼 스승의 다져놓은 소리에 경의를 보내며 소리를 익혀온 소리꾼은 별반 없을 듯 싶다. 그의 스승의 스승인 정정렬은 ‘절세의 명창’, ‘당대의 진정한 명창’으로 칭송받았던 의식 있는 예술가였다. 그는 당대에 놓여 있던 기왕의 소리르 ㄹ그져 그대로 이어받아 전수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더늠은 쓰고 그밖의 더늠은 자신의 독자적인 예술세계를 담은 사설과 곡으로 새롭게 구성해 아름답고 감동적인 소리로 창출해냈다. 이를테면 그는 소리르 ㄹ새롭게 창출해낸 판소리를 혁신시킨 의식있는 진정한 예술인이었던 셈이다. 그의 소리 중에서도 최승희씨가 받은 「춘향가」는 정정렬판소리의 백미로 꼽히는 아름다운 곡이다. 그의 춘향가는 기왕이 춘향가들과는 달리 사설이 일관성을 갖고 있고 새로 지은 사설 또한 음악적으로나 문학적으로나 그 아름다움이 빼어나며 음악적 기교도 매우 다양하다는 평가를 받고 이싿. 정정렬의 판소리 창작 작업은 어느 시대에서나 그렇듯이 진보적인 예술인들이 받아야 했던 질시와 찬사를 동시에 받아야 했음은 물론이다. 그의 소리는 소리를 배워 부르는 사람에게는 더없이 어려웠지만 듣는 사람들에게는 알아듣기 쉽고 사설 또한 쉬비게 전달돼 청중들에게는 매우 인기 있는 소리였다. 그러나 정정렬은 제자 가르치는 일에만 전념하지 않고 스스로 소리를 창작하는 일에 시간을 투자했던 까닭에그의 「춘향가」를 고스란히 전수한 사람은 김여란과 이기권뿐인 데다 이기권은 일찍 작고해 김여란으로 이어지는 춘향가만이 정정렬의 전통을 잇고 있다. 최승희는 정정렬 - 김여란으로 이어지는 춘향가의 적자인 셈인데 다른 소리보다 유난히 어려운 정정렬제 춘행가르 익히느라 많은 어려움을 감내했야 했던 그는 지금껏 ‘스승의 소리’에 비견되는 깊은 소리속과 맛을 가진 소리를 만나지 못했다고 할 정도로 이 소리의 예술적 세계에 심취해있다. 그는 지난 80년대 말 쯤에 자신의 소리를 알아주는 부안의 동호인들의요청을 못이겨 부안 국악원 강사로 자리잡아 아예 서울로부터 터전을 옮겼다. 그리고 얼마되지 않아 전북도립국악원 판소리 교수로 부임해 오늘에 이르렀다. 87년에 중요무형문화제 제5호인 춘향가 조교로 인정받은 그는 현재 지방 무형문화재이기도 하다. 그는 이즈음 찾아오는 제자들을 가르치며 더없이 보람을 느낀다고 한다. 한동안 목을 아끼지 않고 무대에도 많이 나가고 가르치는 일에도 온힘을 쏟아 목청이 주저 앉아버린 안타까움만 아니라면 그는 이제 남부러울게 없다. 지난해 봄, 딸들과 제자들의 성화로 목수술을 한 이후 그는 가만가만 제자들을 가르칠 때만 소리를 한다. “아마 이제는 드러내놓고 소리를 할 수 있는 무대는 영영 만날 수 없을 것 같은 조바심이 생긴다”고 말하는 그는 그러나 이내 “소리꾼은 죽는 날까지 소리를 포기하고 살수는 없는 모양이다”며 웃었다. 그가 목을 다시 찾아 그 ‘매화 등걸처런 용트림하는 교묘한 시김새의 소리’를 들려주는 일이 그를 아끼는 사람들의 가장 큰 바램이라면 그의 소망은 두말할 것 없이 좋은 제자들이 쑥쑥 커가는 일이다. 10여 년 넘게 인연을 맺어 수제자가 된 가야금 명인인 지성자 씨나 이제는 소리 무대에서 굵직한 역할로 든든한 이종달, 소주호 씨 가타은 이들은 그가 자랑스러워하는 제자들이다. “선생을 뛰어넘은 제자이기를 바래지요. 나는 배움이 많지 않아 어려움이 많지만 내 제자들은 배움도 있으니 좋은 소리꾼이 될 것으로 확신합니다” 그의 소리를 잇겠다고 나선 둘째딸 보경, 가야금을 전공한 막내딸 소영이도 든든한 재산이라는 그는 사람좋기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른 일은 그냥 넘기지 못하는 성격 때문에 같은 국악계에서도 그는 어려운 사람으로 통한다. 최승희 씨는 날씨 풀리는 봄이면 25평짜리 아파트로 이사한다. 제자들에게 이제 넉넉한 자리를 줄 수 있어 마음이 편할 것 같다며 웃는 그는 천상 소리꾼이다. 그는 소리와 참말 연분이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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