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2 | [신귀백의 영화엿보기]
영화평
신인 감독의 우울한 출발
<돈을 갖고 튀어라>와 <런 어웨이>
글/김정용 영화평론가
(2004-02-10 15:21:26)
지난 해 충무로는 신인 감독들로 차고 넘쳤다. 열 명에 가까운 신인 감독이 극장에서 관객을 맞이했고, 꼭 그만큼의 인원이 현재 데뷔를 준비중이다. 외면적으로, 다른 문화현장에 비해 세대교체가 원활하지 않은 영화계에 새 희망과 기대를 주기에 족한 풍경이지만, 실제 결과는 유쾌하지 못하다. 이민용 정도를 제외하고 대다수 신인들의 작품은 씁씁한 기억만을 안겨줬다. 정서적 항체나 미학적 환기창의 역할을 해주기는커녕 기존 한국영화의 관행과 타성을 그대로 간직한 채 관객앞에 나선 것들이 태반이다.
여기엔 몇 가지 원인이 있다. 가장 눈여겨 봐야 할 것은 대기업의 눈먼 상혼(商魂)이다. 90년대 들어 영상업에 본격 진출한 국내 굴지의 대기업들은 영화 산업에 대한 장기적 투자나 환경 조성에 관심을 보이는 대신 한결같이 짧은 기간에 ‘장사’를 하려는, 단기 이윤획득에만 골몰하고 있다. 그 근시의 결과 스타와 말장난에 의존한 중력없는 코미디가 범람하게 됐다. 신인 감독들은 그 와중에 대기업의 최적의 실험용 모르토르로 전락하고 있다. 철학없는 감독의 빈곤한 영화만들기도 이와 긴밀하게 연결된다. 그들은 당장의 ‘입봉’을 위해, 혹은 차기작 때문에, 아니면 건져야 될 제작비 때문에 소신과 세계관을 상실 당하거나 자진 반납한다. 남은 건 익숙한 관행으로 태연자약하게 영화를 주문 생간하는 태도이거나, 눈치와 주눅과 초조함으로 빚ㅇ느 남루한 영화일 분이다. 그리고 전근대적인 제작 시스템이 그 뒤를 잇는다.
연말에 선보인 김상진의 <돈을 갖고 튀어라>와 김성수의 <런어웨이>의 속사정이 어떠했는지는 이글의 관심이 아니다. 자청한 일이었든 하릴업서는 눈치였든(정말 어쩔 수 없었을까?)아무튼 그 영화들은, 허다한 장점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드러내고자 했던 비틀린 사회의 모습을 고스란히 닮은 채 개봉됐다.
김상진 감독의 발랄한 재기는 사실 놀랍다. 그의 재능에 힘입어 <돈을 갖고 튀어라>에 나오는 인물의 성격은 소박하고 친근하게 채색되었다. 실업자 천달수(박중훈)가 예비군 동원 훈련장에서 보내는 멀쩡한 시간과 귀가한 뒤의 싱숭생숭한 하루, 단란 주점 여종업원 응ㄴ지(정선경)의 대책없는 생활 반경에 킬러(명계남, 김승우)의 어수룩한 행동이 끼어드는 과정을 보라. 이야기꾼으로서, 좌충우돌하면서 꽤 시끌벅적하게 영화를 끌고 나가는 연출력을 뽐내기도 했다. ‘느닷없는 일확천금’이라는, 황당하면서도 많은 이들이 한번쯤 꿈꾸어 본 코미디 특유의 발상법으로 어느 볼품없는 백수와여급의 따라지 인생을 들쑤시는가 하면 또 어느 틈에 슬금슬금 권력이 뒷문을 뒤적이기도 한다. 그는 분명 두둑한 밑천을 갖고 코미디 장르에 올라탄 것이다.
이 정도가 어디냐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거둬들인 성과만큼 이 영화에는 심각한 근원적 결함이 dlkT다. 우선 “5분마다 웃음을 터뜨리기”위해 영화는 무모하게 현실을 짜깁기 했다. 슬랩스틱에 인질극이 포함되고, 갱스터와 무협에 신파성 멜로드라마, 자동차 추적극이 보태진다. 이게 왜 문제인가. 코미디는 오르지 하나의 장르 관습에만 충실해야 하나? 물론 그렇지 않다. 그러나 관객을 웃기기 위해 어떤 수단이라도 가리지 않다 보면, 무슨 짓이라도 하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 닳고 닳은 예비역 병장을 사회에서는 멍청하리만치 순진한 고문관으로 바꾸게 된다. 그리고 그 백수를 더 몰상식하게 만들어 더 천박해져 가는 여급을 마구 구타하게 만든다. 모든 상황은 웃음이라는 지상 최대의 당면과제, 자기가 부여해 스스로를 칭칭 옭아맨 그 과제에 의해 희생된 것이다.
무작정 웃겨야 하니까 뒤돌아 볼 틈도 없고 훗날을 생각할 필요도 없어진다. 중요한 것은 웃음의 대상이나 성격이 아니라 웃어제끼는 순간이 되며 그 잛은 맹목적 순간을 위해 김상진은 패러디도 아니고 하이브리드 장르 현상도 아닌, 개연성없는 장광설을 늘어놓았다. 비자금 문제는 그 장광설 끝에 끌어다 쓴소재주의에 불과하다. 서민들의 꿈을 운운하는 대목도 마찬가지다. 폭력적인 ‘광기와 코미디’로 얼룩진 권력의 현실과 현실의 권력, 그 냄새나는 이면을 빗대리라는 기대는 1천억원을 둘러싼 모험담 앞에서 황망히 사라졌다. 진정한 코미디 정신도 따라 사라졌다. 대신 돈을 갖고 종횡무진 튀기에 바쁜 어릿 광대들의 허둥대는 제스추어만 그 자리에 남아 있다.
헌데 묘하게도 이 모든 제스추어는 우리 눈에 퍽 익수하게 비친다. 박중훈은 데뷔작 <깜보>를 비롯해 <총잡이>, <마누라 죽이기>, <게임의 법칙>의 캐릭터와 흡사하며 정선경도 <너에게 나를 보낸다>, <개같은 날의 오후>의 캐릭터랄지 오연수의 이미지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들이 벌써 ‘스크린 패르소나’가 되었나? 다양한 장르 영화에 출연할지라도 자신만의 일관된 캐릭터를 작품 안에 심어놓는 그런 배우들이 괸 것인가 ? 아니다. 한국 영화계가 오방떡을 찍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웃겨야 하니까. 그래야 ‘손님’이 드니까, 이는 영화에 투자(?)하는 모든 대기업들이 신봉해 마지 않는 신하의결론이다. 이 신화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신인 감독들은 똑같은 이야기를 똑같이 되풀이하는 오방떡주형 신세일 것이다.
김성수 감독은 독립영화계의 기대주였다. 동경영화제 단편부문 본선에 진출한 그의 단편 <비명도시>는 영상과 맞붙어 뜨겁게 분투하는 젊은 감독의 자세를 보여준 작품이었다. 최소한 스타일에 관한 그의 고민은 영화의 비교적 모호한 주제마저 가릴만큼 의미있었다. 그런 그가 <런어웨이>에서 흥행을 위해 허둥지둥 쫓겨 가는 모양을 연출했다.
유사란 성과의 한계가 있다. 액션과 카메라에 대한 김성수의 집착은 여기서도 빛나게 발휘됐다. 영화 전반부를 차지하는 이병헌과 장세진의 추적 시퀸스는 내용과 형식 양면에서 폭력 미학의 극치로 불릴만하다. 집과 병원과 경찰서를 차례로 습격해 들어오는 이 추적-도피 장면은, 지하 조직과 경찰의 폭력을 통한 연계구조가 어떻게 산업사회의 한 개인을 짓누르며 그의 일상을 파고드는지, 마침내 그의 심장을 겨누는지를 단박에 보여준다. 감독은 화면구도와 배우의 움직임, 피사체의 크기, 색채, 속도를 정치하게 통제하여 숨가쁜 게임의 형도를 스크린 위에 펼쳤다.
하지만 동일한 게임의 규칙이 여기에도 적용됐다. ‘안전하게 가기위해’영화는 차갑고 음모적인데서 갈수록 비현실적인 액션쪽으로 치우치며, 스릴러, 추리 구조의 진검승부를 회피한채 총격과 폭력의 수사학으로 달아난다. 도시는 몇겹의 차단구조를 지닌 카오스 공간이길 그만두고 협작의 아수라장으로 만족한다. <레옹>, <게임의 법칙>, <나쁜 녀석들>, <페어게임>의 장르적 관습을 그대로 좇으면서 말이다.
어떤 형태로든 이 악순환을 끊어야 한다. 자본의 속성을 바꿀 수 없다면 그걸 활용할 지혜라도 가져야한다. 말이 쉽긴 하나, 그래도 여기서 시작하자. 개혁은 의지만 갖고서도 안되지만, 의지없이도 될 수 없다.
김정용 / 64년 생. 동국대 연극영화과를 마치고 곧바로 영화평론에 뛰어들었다. 지금은 부산, 광주 등지의 대학에서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지난해 문화저널의 영화사 강좌에 강사로 참여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