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2 | [세대횡단 문화읽기]
새로찾는 전북 미술사 27
현대미술사의 공백기를 살았던 화가
황종하 형제들
글 / 이철량 전북대 교수 미술학과
(2004-02-10 14:56:19)
전북 미술의 역사에 있어서 그 실체가 많은 부분이 산실 되어 버렸지만 해방 이후 한동안도 그 흔적을 찾아내가기 어렵다. 해방 이후 50년대와 60년대가 이 무렵에 해당된다고 QF 수 있는데 이를테면 일제시대에 활발하게 활동했었을 것으로 보이는 많은 작가들이 해방 이후 그 거취조차 확인되지 않고 있는 경우가 많다.
황종하(黃宗河),황룡하(黃庸河), 황성하(黃成河) 형제가 이에 속한다. 이 시기는 물론 미술에 있어서만이 아닐 것이다. 우리 역사의 각 부분에서 이와 같은 현실을 느낄 수 있다. 이 시기는 물론 대단히 어렵고 복잡한 시대였다. 1945년 해방과 함께 좌■우익의 정치적 헤게모니 싸움으로 사회과 혼돈 상태였고 가까스로 수립된 우익 정부도 불안정한 상태에서 전쟁을 맞게 되었으니 경제적 빈궁은 말할 것도 없고 사회적으로 혼돈의 시대였다. 많은 지식인들에게는 남북을 선택해야 하는 고뇌의 시간이었고 미술활동은 뿌리째 날아가 버린 꼴이 되었다. 말하자면 미술을 한다는 것은 조롱의 대상이었고 더불어 그만큼 처절한 자기 확인이 필요했던 시대였다.
이 시대이 미술이 공동화현상으로 나타난 배경은 대체로 이렇게 분류할 수 있을 것 같다. 첫째는 해방 이후 좌익 성향을 갖고 있었던 작가들의 월북이나 납북을 들 수 있다. 이들은 설령 전쟁 이전에 많은 작품을 남겼다 하더라도 그 작품은 햇볕을 볼 수 없었다. 따라서 어느 시기에 작가와 작품이 온전히 묻혀 버린 경우가 이에 해당된다고 보여진다. 이들은 특히 전쟁 이후의 유품을 전혀 발견할 수 없는 경우이다. 둘째는 해방 이후 절필하고, 현실의 삶 속에 자신을 묻어 버린 경우이다. 이들이 붓을 던져 버린 배경은 여러 가지로 상상할 수 있으나 삶의 질곡에서 찾아진다. 예를 들면 전쟁을 통한 가세의 몰락과 심적 갈등을 이겨내지 못한 경우이다. 가족과 이웃이 쓰러져가는 참혹한 현실에 대한 허무와 공포의 텆널을 빠져나오지 못한 사람들이 이에 속한다. 이들에게는 삶 자체가 허망이며 그림을 한다는 것은 지나친 환상일 뿐이었을 것이다. 다음으로는 사회현실의 변천에 따른 적응이 그림을 포기하게 한 경우를 들 수 있다. 전쟁은 끝났다 하더라도 실상 우리의 50년대와 60년대는 현실과의 고독한 싸움을 이겨내야 했다. 어떤 경우에는 배척되어야 할 친일 세력으로 취급되어 절필을 강요당했고 어떤 인물들은 현실을 엮어 가기에도 벅차 붓을 놓고 말았던 예가 흔히 발견된다.
황종하 형제들이 지역 미술계에서 상당한 W고적을 남겼음에도 해방 이후의 활동이 전혀 발견되지 않은 점에서 우리 현대사의 커다란 구멍을 확인한다. 황 씨 형제들은 개성있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들이 언제 어떤 모습으로 이 지역에 내려와 군산에 정착하고 화업을 열게 되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이 무렵이 1920년대쯤으로 추정되어질 뿐이다. 그것인 일본황족회관(日本皇族會館)에서 1923년 초청 전람회를 가졌었다고 전해지는 데서 연유한다. 그러니까 황 씨 형제들은 한일합방이후에 개성에서 내려와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고 생각되어진다. 그리고 이러한 추정을 더욱 가능하게 하는 것은 그들 형제의 작품에서 찾아진다. 물론 이들의 작품이 많이 손실되어 그 내용을 정확히 확인할 길은 없으나 지금까지 확인되고 있는 유품을 보면 그 동안의 이 지역 미술과는 상당한 거리를 갖고 있기 때문에 황 씨들이 이 지역에서 그림을 시작했다고 보기 어렵다. 아마도 그들은 어떤 연유로 군산에 이주되어져 화업을 이끌어 갔으며 그리고 이 지역에 깊은 연고를 갖고 있지 않았던 그들의 환경이 결국은 해방 이후 자취를 감추게 되었던 원인이 되지 않았나 생각된다.
황 씨 형제들은 앚기까지 생존 시기도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그들의 활동은 상당히 활발했던 것으로 드러난다. 그들 중 맏형에 해당되는 우석 황종하는 군산에 서화연구소를 개설하고 후배들을 가르쳤다. 여기서 배출된 대표적 화가가 이상길과 정복연이다.
이상길과 정복연의 화풍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점은 모두 화조영모에 뛰어난 점이고 근대적이며 왜새화풍이 짙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무론 이들이 어렸을 적에는 글씨와 사군자류의 문인화 등을 공부했을 것으로 믿어지나 적어도 본격적으로 그림 공부를 시작하면서 황 씨 문하에 들어가게 되었다면 이들의 화풍은 곧 황종하 등의 화풍으로 이해되기에 부족함이 없다. 더욱이 세간에 알려져 있기로 황종하는 특히 호랑이 그림을 잘 그렸다고 전해진다. 이는 황종하 일가의 화풍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시가 된다. 그리고 황종하는 영모화에만 뛰어났던 것이 아니라 서예 사군자 등에도 일가를 이루었던 것으로 보인다. 제2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는 서예로 입선했던 경력이 그런 사실을 뒷받침해 준다. 어떻든 황종하는 신화풍에 깊은 관심을 가지■ㅗㄱ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리고 이러한 신화풍이 당시 일본으로부터 유입된 일본화풍이나 일본화풍에서 자극을 받아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이는 묘사적 사실화풍의 영모화에서 그가 새로운 감각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던 화가로 짐작딘다. 그래서 이러한 화풍은 당시 일본인들이 많이 살았던 군산지역에서 깊이있게 수용되어졌던 것으로 보아진다. 이상길이나 정복연이 화풍이 그간의 조선화풍이나 지역의 전통외화하고는 판이한 화풍을 보여주고 있는 점은 대단히 이채롭다. 그리고 이들의 작품은 수준이 대단히 높고 기량이 돋보인다. 그러나 그들이 이러한 기량을 엮어 낸것은황종하의 지도에 따른 것으로 보아야 할 것같다. 그들이 공부할 수 있었던 강의록 등을 통해서만으로는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결국 스승 황종하의 영향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황종하는 군산에 내려오기 이전부터 이러한 화풍에 깊이있는 연구가 있었을 것이다. 그는 개성출신이었지만 경성에서 활동했다고 전하고 있다. 경성에 밂루듯이 밀려들어온 신문화에 남달리 깊은 관심을 가졌고 일본화풍의 사실화에 대한 공부를 했었던 것으로 보인다. 황종하와 그의 형제들의 화풍이 지역에서 이어져 오던 화풍하고 다르다는 점은 동생 미산 황룡하의 사군자 그림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황룡하의 사군자가 형인 황종하의 화풍과 얼마나 다른 면을 보이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그러나 황룡하의 그림이 그 동안 그려져오던 지역의 사군자 화풍과는 한 결 달른 면을 보인다. 황룡하의 그림은 훨씬 거칠며 분방한 필치를 보이고 있다. 특별히 대담성을 갖고 있거나 어떤 특출한 화풍이 발견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활달하고 거침없는 운필이 확연히 눈에 들어온다. 이 지역의사군자화의 선두주자였던 이정직과 조주승을 이어 많은 화가들이 그려냈던 사군자는 나름대로 맥을 함께하는 화풍을 유지했다. 그리고 그 저변에는 사대부들의 깊은 문기를 바탕으로 한 정갈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황룡하의 사군자에서는 문자향(文字香 )의 깊은 격조는 베어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날카롭고 빠른 운필에서 거칠게 내두르는 숨가뿐 선이 훨씬 두드러지는 그림이다. 말하자면 형식미가 정신보다 강조되어 있는 경우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어떻든 황룡하의 사군자 그림에서 느껴지는 것은 그가 전통적인 표현법칙에서 일탈하려고 노력했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한 노력이 보다 적극적으로 살아나 있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 황룡하의 이러한 생각은 어쩌면 그의 형 황종하에게서 비롯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황종하의 이러한 발길이 아수비게도 당시에 새롭게 보이던 왜색화풍으로 이어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종하는 이 지역에 묘사적인 사실 화풍을 전개시킨 인물로서 평가되지 않을까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