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2 | [문화비평]
박홍규의 문화비평
색(色)의 자유를 위하여
박홍규(2004-02-10 14:54:58)
빨■주■노■초■남■보
가장 아름답다는 자연의 색, 미래의 보랏빛 꿈을 그려보는 환상의 색 무지개는 이렇게 일곱 가지 색으로 정형화돼 인식해 왔다. 산너머 무지개를 따라 좇아갔다가 발만 아프고 실망해서 돌아왔다는 이야기.
왜 실현 부가능한 희망은 무지개나 보랏빛으로 상징될까. 유치원 어린이는 개나리와 병아리 색인 노란색으로 표현되고, 우리 조상들은 왜 하얀옷을 좋아하고 백의 민족이라 불려졌을까.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자, 급진주의자, 진보주의자는 빨강색으로 입혀지고 적색분자, 회색분자, 흑색분자와 같이 인간의 사사아과 입장에 관련해서 색을 입혀 대적관계를 대색관계로 정리해 표현할까. 기업활동에 있어 엄청난 광고자본을 들여 로고와 심볼을 바꾸고 기업 디자인 환경을 극대화하는 색으로 C.I(기업 아이덴티티)나 G.I(그룹아이덴티티)에 몰두할까.
인간의 꿈은 흑색일까. 총천연색일가. 왜 총천연색 꿈은 징후가 좋지 앟은 꿈이라고 해몽할까. 여인의화장으로 대표되는 입술 화장은 드라큐라에서나 볼수 있는 섬뜩한 블랙 립스틱까지 만들어내고 팔리는 걸까.
인간의 역사는 색의 역사라 볼 수도 있다. 태어나서 하얀색의 배냇저고리를 입고 하얀 수의를 입고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엄청난 색을 보고, 즐기고, 느끼고, 사용하고, 선택하고, 선택받게 된다. 그리고 본의 아닌 사상과 이념의 잣대에 의해 색깔이 입혀지기도 한다. 동족상잔의 비극 속에서 우리는 몸서리치는 ‘레드컴프렉스’병을 치러야했고 유신과 5.6공의 군사독재시절에도 수박형(겉은 파랗고 속은 빨간 사람)과 토마토형(겉과 속이 빨간사람)으로 서슬퍼런 공안의 잣대로 구분되기도 한다.
색에 있어 우리의 역사는 미의식의 왜곡과 굴절만이 있는 게 아니라 엄청난 희생의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선거 때만 되면 지긋지긋하게 되풀이되는 색깔논쟁이 총선을 얼마남지않은 시점에서 또 불이 붙었다. 4당이 벌이는 각 당에 대한 색깔논쟁과 정치인 개객인에 대한 무차별한 색깔시비는 정말 색맛을 떨어뜨리며 우리의 저급한 정치수준을 유감없이 드러내는 단면이다.. 색은 색대로 빛에 의해 존재하지만 사람 개개인과 상황에 따라, 정서와 느낌에 따라 그 맛과 호용이 천태만상으로 달라진다. 그러나 원색적인 비난과 마구잡이식 인신공격을 벌이는 정치판의 색깔논쟁은 서로의 뚜렷한 노선의 구분과 차이가 없어졌기에 노선 차별화 전략고 이미지 메이킹 전술차원에서 더욱 치열해지고 점입가경을 이루고 있다.
기존의 보수 - 혁신의 2색과 보수 - 진보의 3색이나 집권 여당에서사용해 온 급진 - 자유 - 온건 - 보수 - 반동의 5색으로부터 이제는 더욱 발전된 다품종 다색시대로 접어들어선 느낌이다. ‘보수’만해도 ‘건강한 보수세력’ ‘청년 보수론’ ‘합리적 보수’ ‘보수원류’등 자기 당만의 독자적인 브랜드색 만들기에 열중하고 있다. 자기 색만이 가장 멋지고 보기 좋고 대중적인 색이고 다른 색은 위장이거나 가짜라는 식이다. 뚜렷한 이념정당의 역사를 가지지 못한 우리의 정당사에서 이념과 사상과 뚜렷한 정치의식이 존재하는 정당이 존재하지 않는 한 정당끼리의 치고 받는 색깔논쟁은 더 오래 지속될 수밖에 없을 것같다.
우리 민족은 백색을 기조로 오방색이라는 독특하고 고상한 우리만의 색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풍부하면서도 절제되고 화려하면서도 겸손한 색감은 우리 민족의 자연적 미의식을 발전시켜 온 것이다. 그러나 근대에 들어오면서 우리의 훌륭한 색감과 미의식은 엄청난 변화와 위협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70년대 후반 유신정치가 마지막 발악을 하던 시기, ‘미니멀 아트’로 분류되던 하나의 조류가 현대미술판을 휘저을 때가 있었다. 이 때의 주조색은 모노크롬이었다. 별다른 느낌과 의미가 없는 무채색 계열의 색들이 침울한 시대를 바르고 지나갔다. 그리고 80년대 들어서부터 역동적인 원색과 필력이 살아난 것은 민족민주운동이 활발햊면서 민중미술이라는 새로운 장르가 창조하고 확대해 나가면서부터다. 색의 운용은 시대적 환경에 의해 조응한다. 색의 느낌도 사람의 조선과 정서와 의지에 따라 변한다. 사람과 시대가 이러할 진대 우리의 정치판이라고 변하지 말라는 법이 없건만 현 색깔논쟁은 시대와 역사의 흐름과는 무관 한가보다.
색깔론의 무게는 녹슬 줄을 모른다. 더욱 노골ㅈ거이고 거친 칼날이 더욱 예각화되는 것 같다. 이 섬뜩한 색깔 싸움으로부터 벗어나 진정으로 성숙한 정치를 기대하는 것은 보랏빛 꿈일까. 그렇다면 이러한 ‘색깔논쟁’이라는 말을 다른 말로 바꿔 ‘노선논쟁’ ‘정치이념다툼’등 정치사회적 용어로 대치해서 색맛은 색맛대로 남겨 두면 어떨까.
우리의 역사가 발전되고 사회가 진보된다는 점은 사람들의 삶의질이 보다 풍부해지고 나아진다는 의미이다. 우리의 불행한 역사 속에서 생긴 색에 대한 콤플렉스를 벗고 왜곡된 색에 대한 미의식을 되찾을때 우리의 사회와 역사는 발전될 수 있다. 우리는 단순한 모노크롬의 시대나 색깔끼리 대립되는 그러한 불행한 역사는 더 이상 반복해선 안된다. 풍부하고 다양하고 아름다운 색들을 즐기고 사용할 수 있는 자유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져있는 것이고 이에 시비를 걸지 않는 사회, 그 사회는 정말 건강한 사회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