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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1 | [문화비평]
박홍규의 문화비평 이발소 그림에 대하여
글/여성문학연구모임 (2004-02-10 12:41:35)
한 해가 밝아 온다. 새해는 나이를 한 살씩 더 먹는 단순한 의미도 있지만 새로운 기대와 희망을 기리고 각오를 새롭게 하는 뭔가 잔잔한 엄숙함이 있다. 지난해 미처 하지 못했던 일들을 기어이 해내고야 말겠다는 의지들을 다지기도 한다. 차분한 분위기 속에 자신과 주변을 돌아보고 1년 계획을 짜기도 한다. 이때면 가끔 나에게 귀찮은 부탁이 들어오곤 한다. 내가 화가인 줄알고 ‘호랭이 그림 좀 그려달라’는 분들이다. 특히 혼자 계시는 나이 먹ㅇ느 친척 분이나 아는 분들이 얼굴을 보거나 연락이 되면 으레껏 막무가내로 고집하신다. 민화 치는 법을 조금 배워 둬서 그 동안 몇 점 쳐 드렸다. 까치 호랑이 그림이다. 창작이 아닌 옛날 우리 조상님들이 즐겨 했던 민화에서 베낀 것이다. 두루마리 배접까지 해서 드리면 그렇게 기뻐하신다. 방문 옆에 붙여 놓았더니 무섬증도 사라지고 잠도 잘 오고 마음이 든든하단다. 어떤 분은 왜 그렇게 우스꽝스런 호랑이를 그렸냐고 웃으시며 “더 싸난 호랑이가 잡귀잡신을 잘 쫒는다”고 한 마디 하신다. 그러면 나는 “까치호랑이가 가장 영험이 있대요.”하고 만다. 우리네 생활 속에서 나타나는 전통적 미의식에는 이런 식의믿음과 소원이 깊이 깔려 있나 보다. 작년 12월, 나는 농민들의 단체인 한 생산영농조합의 부탁으로조합에서 사용할 달력을 구하러 을지로 3가 인쇄 골목을 찾은 적이 있다. 그 많이 쏟아져 나온 달력을 뒤지며 참으로 흥미로운 점을 발견했다. 시대가 변해도 어쩌면 그리도 어렸을 적부터 죽 보아 왔던 달력의 양식이 이 시대에도 그리 많이 통용되는지 깜짝 놀랐다. 물론 상업적 목적이 다분한 달력들이다. 자연 산수화, 이제는 신토불이라는이름을 단 풍경사진들, 길거리 그림, 화려한 가구를 배경으로 찍ㅇ느 한복 차림의 여자 탤런트, 연인이란 타이틀 아래 서양 피리를 든 최수종과 하희라의 다정한 포즈 등 어색하게 연출된 그 치기어림에 그만 킥킥거리고 말았다. 물론 최근데 새로운 소재로 등장한 것들도 있다. 백두산 정경, 야생화 달력 등이 그것이다. 이발소에서 붙어 있으면 딱 어울릴 이 달력들이 나를 어떤 혼란에 빠뜨린다. 이런 키치류의 달력을 아직도 이렇게 많이 찾다니....... 내 하나의 삶으로 대중들의 모든 삶을 이해할 수 없듯이 내 하나의 미의식으로 여러 각각의 대중의미의식을 가늠할 수 없음은 당연하다. 우리 삶의 현실로부터 동떨어진 가공된 현실이라는 인식과 함께 이 키치적인 요소가 내 미의식에도 별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이발소 그림, 길거리 그림이라 칭해왔던 이 ‘키치’들은 창작의세계로부터 멸시와 조롱으 FQKE으면서도 대중들의 삶의 한 켠을 꾸준히 지키고 있다. 달력뿐이 아니다. 선물용 액자, 각종 선물고 장식품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키치’는 우리의 생활 속에 계속 애용되고 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동서고금을 떠나 계급과 계층에 따라 또는 각각의 그 쓰임에 따라 ‘키치’는 존재해왔다. 조선새대에도 사군자 치는 선비나 도화서 화원들은 눈썰미 하나로 민화들을 유사하게 복제해 주며 밥술이나 얻어먹던 떠돌이 화가들의작품들을 얼마나 천한 그림으로 치부하겠는가? 그분들이 그렸던 까치호랑이 그림이나 화조도 등 수 DJQAT이 널려있던 그 그림들이 이제는 조선시대 미술의중요한 한 부문으로 당당히 자리 매김을 하고 있다. 그러나 민화는 오랜 우리역사의전통적 미학 속에서 영정조시대에 꽃을 피운 시대적 배경이 있다지만 지금의 이 치기 어린 현대의 ‘키치’들은 태생에 문제가 있다. 이발소 그림이나 길거리 그림으로 칭하는 이 그림들은 해방 이후,양키 문화의 유입과 함께 그 기법이 도입되었다. 서양식 정장으로 연출되는 사진 포즈는동두천에서나 보았음직한 미군병사와 양공주가 함께 찍은 포즈가 연상됨은 너무 지나친 비약일까? 그러나 그 역사적 배경과는 별도로 시대에 따라 변하며 향유되어지는 ‘키치’들은 항상 여타의다른 부문의 미술과 함께 공존되어 왔다. 나의 어릴 적 기억이라는 것들 또한 나의 미의식 속에서 강제로 추방시킬 수는 없으리라. 아직도 기억이 생생한 설산과 물레방앗간과 호수에 떠 있는 조야한 돛단배 그림이 있는이발소, 시멘트나 흙으로 바른 벽면을 가는 막대로 죽죽 그어 그린 사군자 그림, 예쁜 한복 차림의 엄앵란, 벽에 풀칠해 발라 놓고 일년 내내 볼 수밖에 없는 국회의원 사진이 박힌 농사정보달력, 집집마다 상점마다 걸려 있는 가화만사성과 돼지 그림등등. 이 ‘키치’들은 어쩌면 가장 보편적이고 일상적인 상식으로 대중적 삶의 애호품으로 사랑받아 왔는지도모른다. 올 새해 또한 예측 못할 격동과 커다란 변화의한 해가 될 것 같은 불안한 예감 속에서도 이 ‘키치’들을 이리저리 뜯어보는 것은 어릴 적 포마드 냄새가 가득하고연탄난로 훈김으로따뜻한 이발소 의자에 앉아 사각사각 가위질 소리에 참을 수 없는 졸음속으로 빠져들어 가는 맛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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