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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12 | [세대횡단 문화읽기]
문화저널 시민문화강좌 <판소리 강좌> 전기 8명창 시대에서 해방 시대까지 최동현의 판소리사(1995년 2월 14일)
문화저널(2004-02-10 12:04:55)
기록의역사와 이면의 역사 판소리의 역사는 인가의 모든역사가 그런 것처럼 기록을 중심으로 해서 이루어집니다.그래서지금까지 판소리사는 기록 중심으로 얘기를 해 왔는데 여기에는 다소의 문제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때 기록을 했던 사람들 대부분이 서울을 중심으로 한 근방의 사람들이고 전부 벼슬을 했던 전통적인 양반들이기 때문에 서민층을 기반으로 발생한 실제 판소리의 실상을 얼마만큼 정확히 전하느냐 하는 데는 의문이 남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기럭의 이면에 숨어 있는 다른 의미들을 찾아내야 판소리사가 실상에 가깝게 되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판소리가 언제 생겼는지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판소리의 음악적 전통은 우리 민족이 생겨났을 때부터 해서 얼마든지 소급해 올라갈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신라의 화랑의 노래가 판소리의 기원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실제 근원은 그렇다 하더라도 오늘날의 판소리 형태를 가지고 나타나는 것은 언제냐하는 것입니다. 기록에 의하면 영조 무렵입니다. 이때 만화재(晩華齋)유진한이라는 사람의 문집인<만화집>가운데 한시 2백구로 된 <가사 춘향가>를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 적힌 후손의 기록을 보면 “부친께서 이때(계유년), 남쪽 지방을 두루 돌아 다니시고 가상 춘향가 2백구를 지으셨는데 이 때문에 선비들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았다”고 적혀 있습니다 1753년 무렵의 충청도 지역에는 판소리가 없었고 전라도 지역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또 몇 가지 정황들을 종합해보면 1750년경의 판소리는 양반들과는 무관했던 것 같습니다. 유진한의 글 이외에는 남도 사람의 이야기가 문집에 등장하는 일이 없습니다.양반들이 판소리를 적극적으로 즐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러던 것이 1810년경에 오면 양반들이 적극적으로 판소리를 즐기게 됩니다. 이때부터 판소리는 양반들이 좋아하는 내용으로 바뀌게 됩니다. 양반들이 관여하지 않았을 때는 서민들이 좋아하는 양식으로 되어 있었을텐데 양반들이 찾고 돈을 내면서 양반들이 좋아하는 내용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원래 남도 민요는 계면조의 슬픈 것 밖에 없습니다. 씩씩한 성질의 것은 본래 민속음악의 전통 속에서 없습니다. 그러면 어디서 왔느냐. 양반들의 음악적 전통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소위 화평한 기조라든가 평조가든가 하는 것은 남도 민요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평조,우조 등을 양반들의 음악으로부터 가져다가 판소리를 다시 만들어 냈고 이 과정에서 유명항 소리꾼이 등장하는 시대가 전기 8명창 시대라는 하는 것입니다 전기 8명창 시대 19세기 전반기의 전기 8명창 시대에 들어서면서 판소리 열두 바탕이 완성되고 많은 명창들이 등장하게 됩니다. 전기 8명창시대는 19세기 후반기의 후기 8명창 시대와는 판소리사적으로 내용이 다릅니다. 판소리사에서 얘기되는 8명창이니 5명창이니 하는 말은 꼭 여덟 명이나 다섯명의 사람의 얘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조선 팔도라는 말에서 ‘팔도’가 우리나라 전체를 대포하는 말인 것처럼 ‘우리나라 전체를 대표하는 하는 말인 것처럼 ’우리나라의 판소리를 대표하는 명창들;을 가르키는 말입니다. 전기 8명창은 권삼득,송홍록,염계달,모흥갑,고수관,신만엽,김제철.주덕기 ,황해천(혹 은 황해청)등을 말합니다. 권삼득은 지금의 전주역 북쪽인 용진면 구억리 출신이라고 합니다. 이름은 정. 호가 삼득으로 돼 있고 아버지는 이우당이라고 합니다. 양반출신 광대(비가비)로 설령 제가 유명합니다. 박동진 씨가 텔레비전선전에서 했던 “제비 몰러 나간다. 우리것이 좋은 것이여”하는 바로 그것입니다. 송홍록은 남원 사람이고 가왕(歌王)이라고 다 알고 계십니다. 송홍록의 귀곡성을 잘 낸 것으로 유명한데 귀신소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귀신한테 배웠다고도 하는데, 그가 진주 촉성루에서 소리를 하는데 귀신 우는 소리를 내니까 촛불이 꺼졌다는 얘기도 전해집니다. 그만큼 귀곡성을 잘했다는 것이죠. 춘향이가 옥중에서 죽음과 대면하고 있는 대목에 귀신소리가 나옵니다. 그는 또한 진양조 장단을 김성옥과 함께 만들었다가고 하는데 진양조 중에는 우조와는 약간다른 소위 가곡성 우조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대개 슬픈 일을 당해서 막 뛰고 몸부림 치는 대목이 그런 것입니다. 가량 심청가중에 곽씨부인이 죽어서 심봉사가 슬프게 뛰고 뒹굴고 그런다면 진양조로 할 수 없습니다. 진양조는 느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시조를 노래하는 두 가지 방법인 시조창과 가곡창 가운데 가곡창처럼 부르는 우조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히 양반들의 음악적 전통에 영향을 받았습니다. 염계달은 판소리에 경기민요의 선율을 포함시켰고, 말년을 전주에서 보냈다는 모흥갑은 강산제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이밖에 고수관이나 석화제를 개발한 신만엽, 적벽가를 잘 불러 조선 창극사에 첫 번째로 등장하는 주덕기, 진양조 사랑가를 했다는 송광록 등이 전기 8명창 시대의 인물들입니다. 이런 전기 8명창들은 판소리에 양반들의 음악적 선율을 도입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높습니다. 남도 민요로만 되었을 때는 설움일변도였을 것인데 양반들의 평조나 우조를 받아들이게 되면서 씩씩한 것, 화평한 것 등이 더해져 음악적인 면이 풍부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경드름이나 추천목, 메나리조 등이 그 예입니다. 이것은 판소리가 우리 나라 각 지역에 퍼져 있던 민요의 음악적 유산을 판소리각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판소리가 음악적으로 풍부해진 것이고, 달리 생각하면 전라도 이외의 사람들에게 판소리가 침투 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그런 시기가 바로 전기 8명창 시대입니다. 후기8명창시대 양반들과의 본격적인 접촉은 다음 세대인 후기 8명창 시대에 이루어지게 됩니다. 가장 대표적인 사람이 박유전이고 박만순, 이날치, 김세종, 송우룡, 정창업, 정춘풍, 김창록, 장자백, 김찬업, 이창윤 등이 있습니다. 이사람들은 어떤 특별한 선율 형태를 개발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들은 선배들에 의해 개발된 선율형을 가지고 판소리를 좋게 만들었습니다 그런 대목을 더늠이라고 하는데 그 아름답운 더늠들을 다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고 지금도 그대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박유전은 전라북도 순창 사람으로 춘향가 중에서 이별가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고부 사람 박만순은 춘향 옥중가, 사랑가를 했고 장기는 적벽가를 잘했다고 합니다. 김세정은 순창 사람이고 신재효 사랑방에서 소리 선생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 김세종의 수재자가 뒤에 나오는 장자백입니다. 이 사람의 춘향가는 보성소리 춘향가로 이어지고 있는데 지금도 그대로 부르고 있다고 합니다. 이날치는 담양 출신으로 머슴 살다가 줄타기하다가 고수를 하고 그러다가 판소리를 했습니다. 춘향가, 심청가를 잘 했고 특히 새타령은 박유전에게 배운 새타령입니다. 정춘풍이는 춘향가 단가인데 적벽가를 잘 했다고 하고 정춘풍 적벽가는 박동진씨가 지금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송우룡은 수궁가 중에 토끼 배가르는 대목으로 유명합니다. 이밖에 이 시기에 속하는 사람들이 정창업, 김창록 변강쇠 타령의 장자백 등입니다. 이렇게 후기 8명창들은 선배들이 이미 만들어 놓은 것을 가지고 음악적으로 멋지고 훌륭하게 만들었습니다. 이 때 판소리는 궁중에까지 퍼졌고, 양반 귀족들이 판소리를 듣는 것이 이제는 일상화되었습니다. 따라서 본래 판소리가 처음 서민적 바탕 속에서 생겨났을 때는 조선을 지탱하고 있는 봉건적 요소에 대한 비판 혹은 대안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는데 후기에 와서 양반들과 많이 접촉하다보니까 그런 요소들이 많이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남아잇는 판소리는 19세기 후반애 완성된 형태로 유지된 것입니다. 판소리 주인공도 이 무렵에 와서 많이 바뀌었다고 합니다. 심청가에 나오는 심청이도 본래는 아주 가난한 걸인으로 나온다고 합니다. 그런데 나중에 자꾸 신분이 고귀해져서 양반 딸이 되고 또 행동도 매우 양반스럽게 하게 되고 장승상댁 마님과의 각별한 친분관계까지도 맺고 있습니다. 춘향가도 마찬가지입니다. 보성소리 춘향가 등을 보면 방자가 이도령을 놀리는 대목이라든가 하는 것들이 거의 없습니다. 이별하는 것을 보면 오리정 이별 대목은 없습니다.남부끄럽고 우세스런 일인데 어떻게 그럴수 있느냐는 것이지요. 두 사람이 만나서 인연을 맺는 것도 부모님 허락 하에 맺었었습니다. 반면 정정렬이 고쳐서 만든 것만이 몰래 남납니다. 그리고 그 이튿날 제 엄마한테 들키죠. 박봉술 씨가 부르던 송만갑판 춘향이라든가 보성소리 춘향가, 이런 것들은 다 중간에 춘향이 엄마를 먼저 만나서 춘향모의 허락을 얻어서 하는 것으로 돼 있습니다. 처음에 서민적인 분위기 속에서 판소리가 생생되었을 때는 절대로 그렇게 되어 있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런데 판소리가 양반 사회와 접촉하다 보니까 춘향이가 좀 점잖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춘향이가 점잖고 고상해야지 않겠습니까.그래야 양반들이 듣지 난잡하게 부모 몰래 지내고 하면 “그 쓰것냐!” 이렇게 되지 않겠어요. 그래서 지금의 춘향가는 바뀐 형태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판소리의 봉건적 질서 내용도 많이 바뀌어서 봉건적 의식이 판소리에 침투 되었습니다. 요즘 판소리하는 사람들이 또 그런 것들을 많이 따지는데 내용을 고상하게 바꾸려고 합니다. 김소희 씨나 송창룡 씨 같은 사람이 가장 대표적입니다. 요즘 소리하는 사람들의 의식이 춘향이를 점잖게 요조숙녀로 바꾸고 있습니다. 심청이도 마찬가지입니다. 보성소리 하는 사람들은 오죽하면 홍보가는 안 부릅니다. 너무 비속한 데가 많고 천하다는 것입니다. 심청이가 물에 빠져 죽는 대목에서도 보성소리에서는 심청이가 아무 고통 없이 기도하고 그냥 풍덩 빠지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예컨대 한혜숙이 부른ㄴ 소리에서는 심청이가 무서워서 벌벌 떨다가 죽는 것으로 나옵니다. 보성소리의 기본적인 생각은 효녀가 아버지를 위해서 죽는데 무슨소리냐, 그냥 기꺼이 죽음을 맞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바뀌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신재효입니다. 신재효는 소위 양반들의 미의식을 매개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양반들의 미의식 혹은 윤리의식을 매개해서 판소리 사설을 바꿨다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끝가지 신재효 사설대로 부는 판소리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부분부분 같은 데는 많습니다. 신재효 영향이 대단한 것입니다. 그리고 판소리를 한다고 하는 사람이 글을 좀 알고 어찌고 하면 모법을 항상 어디에 두느냐 하면 신재효에게 듭니다. 신재효는 판소리 사설을 정리는데 잘못된 사설을 자신의 한문 지식을 통해서 정확히 고치기도 했겠지요, 가령 소리꾼들에게만 맡겨 놓으면 사설을 고칠 만한 능력이 없어서 고치지 못합니다. 소리꾼들은 사설을 손질할 만한 재주가 없었던 것이죠. 그런데 신재효가 그들 옆에서 양반들의 미의식을 매개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판소리사설을 기록으로 남겨다는 것은 굉장한 역할을 한 것이지만 반면 부정적인 역할도 많다는 것입니다. 한편으로 판소리는 제멋대로 변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민속음악의 본질입니다. 그런데 사설집이 있음으로 해서 변해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변했다가도 다시 되 돌아오게 됩니다. 신재효를 ‘모범’ 으로 여기는 때문입니다. 그래서 판소리가 발전을 해 갈 수가 없는 것이죠. 신재효가 만들어 놓은 것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면이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서편제 소리가 나옵니다. 서편제 소리라는 것은 여러 가지 특증으로 봤을 때, 서민 지향의 소리입니다. 그리고 이 서편제 소리가 나오면서부터 전라남도 소리꾼들이 등장을 하게 됩니다. 남도 지역의 소리는 서민지향적 소리였습니다. 세월이 흐르다 보니까 서민지향의 소리가 다시 등장하게 된 것입니다. 5명창시대 이시대는 일제시대를 말합니다. 이동백은 1950년까지 살았습니다. 이동백 이외에는 38~40년 사이에 다 죽었습니다. 그리고 ‘40년 이후에는 판소리가 거의 사라져갑니다. 그래서 5명창 시대는 1940년까지로 보면 됩니다. 박기홍, 김창완, 김채만, 송만갑, 이동백, 김창용, 유성중, 정도성, 정정열 등이고 이 사람들의 소리는 대부분 음반으로 들어볼 수 있습니다. 박기홍, 김채만, 정도성 등은 음반이 없습니다. 이때는 나라가 망한 때이고 서구문물이 들어 온 때입니다. 공연예술과 관련해서는 극장이 들어왔습니다. 극장이 들어오면서부터 폐쇄된 공간에서 하게 되고 무대와 객석의 구분이 있게 됩니다. 그래서 공연 공간의 변화가 오게 됩니다. 이것은 판소리에서 창극이라는 장로가 생겨나는 변화를 가져왔고 국가에서 이들 광대들을 협률사라는 기구를 설치해서 관장했습니다. 그러다가 1906년에 재정이궁핍하다는 이유로 원각사를 폐쇄되고 사람들은 이제 지방으로 전부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1910년 한일 합방 이후인 1912년경에는 여기 저기서 협률사가 생겨납니다. 본래 원각사에서의 공연을 관장하는 기구를 협률사라고 했는데 여러 사람이 모여서 포장치고 소리를 하고 돌아다니는 단체를 다 협률사라고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맨먼저 1912년 김채만의 협률사였고 이후에 송만갑의 협률사, 김창원의 협률사, 1930년대에 와서는 이화중선의 협률사 등 많은 단체가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판소리의 세속화 이렇게 되니까 어떤 변화가 일어났습니까? 예전에는 초청한 양반이 돈을 내고 따라서 공연이 돈을 낸 양반의 비위가 맞추게 되었는데 무대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수적으로 당연히 서민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 서민들이 판소리를 깊이 있게 아느냐하면 사실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러니까 판소리가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돈 대는 사람들의 숫자가 서민들이 월등히 많으니까 그 대중들의 기호에 영합해 가는 것입니다. 이런 변화를 판소리의 속화, 세속화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애초애 판소리의 고향은 세속이었습니다. 이것이 중간에 양반들에게 올라갔다가 이제 다시 세속화해 가는 것입니다. 그 세속화의 바람을 타고 유명해진 사람이 바로 이화중선과 임방울입니다 그러면 세속화의 소리는 무어냐. 그것은 과도한 계면조의 슬픈 소리입니다. 판소리를 좋아하는 대중이 라는 게 남도 사람이 대부분이고 또 남도민요가 대부분 슬픈 것처럼 슬픈 소리를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중요한 변화는 SP의 등장입니다. 기록과 재생이 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소리를 잘하느냐 못하느냐가 음반이 얼마나 팔리느냐로 결정되게 되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시기에 이르러 여자 창자들이 등장합니다. 맨 처음 나오는 사람이 진채선, 강소준, 허금파 등입니다 이들이 초기의 트로이카라고 할 만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1920년대에 배선양, 김초향, 이화중선 등의 시대를 이어 다음 트로이카가 박초월, 박녹주, 김소희로 이어집니다. 국극의 시대로 해방 이후의 판소리 시대는 국극의 시대입니다. 창극은 주로 판소리 열두 바탕의 레퍼토리에서 벗어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일제시대까지는 대개 그렇습니다. 그런데 해방 이후에는 만날 춘향이만 할 수 없게 되고 점점 소재가 확대되어 야담, 야사 등에서 소재를 따오게 되는데, 이것을 창극이라고 하지 않고 국극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다가 1948년 해방 직후에는 소위 여성국악동우회라는 것이 생겼습니다. 여기에는 여자들만 등장합니다. <햇님 달님>이라든가 <단종과 사육신>,<만리장성>,<왕자 호동>등이 그것입니다. 연기가 주심이 되고 소리는 부차적인 것이 됩니다. 사실 판소리는 듣는 예술입니다. 듣는 예술이 창극으로 변했다는 것은 보여주기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연기가 발달하면서 소리는 오히려 떨어지는 경향을 보입니다. 판소리로부터 점점 벗어나는 셈입니다. 정통 열두 마당에서 벗어나 여성 국극으로 변화해간 판소리는 1961년에 국립창극단이 만들어지면서 새로운 변화의 계기를 맞게 됩니다. 그리고 1964년에는 무형문화재 제도가 생겨나고 제일 먼저 된 사람이 김소희 씨, 김연수, 정광수, 김혜란 등 네사람입니다. 쇠퇴 일로에 있던판소리에 새로운 전기가 마련된 것이 1964년 박동진의 흥보가 완창 발표였습니다. 국립극장에서 열린 이날 판소리 완창 발표회 이후 완창 발표는 소리꾼이 자신의 기량이 대중앞에 검증받는 통로가 되었습니다. 또 하나 현대 판소리사의 획기적인 사건이 한국 브리테니커사의 판소리 감사외입니다. 100회를 채운 이 감상회는 판소리 중흥의 전기가 되었고. 그분위기와 함께 1970년대의 민족주의에 대한 새로운 각성이 오늘 판소리의 기초가 된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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