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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11 | [문화저널]
개판 같은 세상의 <개같은 날의 오후>
문화저널(2004-02-10 11:30:09)
한때 페미니즘이라는 수식어만 붙이면 소설이건 영화건 간에 문제작으로 화제를 불러일으키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그 많은 영화, 소설들이 갖는 여성 의식의 한계성이 관심을 갖고 지켜보던 많은 이들을 실망시켜 왔던 것도 부인할 수 없다. 그래서 차츰 페미니즘을 표방한 작품들에 식상해져 가는 이즈음 이민용이라는 낯선 감독이 <개같은 날의 오후>라는 코믹한 제목으로 본격 페미니즘 영화를 만들었다기에 ‘그게 그거겠지, 그래도……’하는 심정으로 극장을 찾았다. 하유미, 정선경, 손숙, 김보연, 송옥숙, 정보석에 가수 임희숙까지 참여한 초호화 배역진으로 이루어진 <개같은 날의 오후>는 대부분의 한 국 영화에서 보여지던 예쁜 여자들의 패션 경연장이 아니다. 화려하고 예쁜 모습의 배우들은 배역에 꼭 맞는 소박한 모습으로 주연이든 조연이든, 혹은 엑스트라에 불과할지라도 주어진 역할에 몰입하고 있다. 잠깐 최근 개봉된 오병철 감독의<무소의 뿔처럼혼자서 가라>와 비교해 본다면, <무소의 뿔처럼……>에 출연한 한국 최고의 배우라고 일컬어지는 강수연, 심혜진, 이미연등이 너무도 세련되고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 영화 전체의 이미지를, 먹고 살만한 여자들의 사랑 타령으로 흐르게 했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탄탄한 구성에, 걸직한 욕설이 가미되고, 영화에서는 얼핏 사족처럼 느껴지는 좀도둑인 이경영과 김민종의 익살스러운 연기와 가끔씩 보여지는 기동타격대의 대장으로 여인들과 대치하고 있는 정보석의 아내에 대한 권위 의식은 주제 의식을 흐리지 않고도 관객에게 재미를 주는 탁월한 영화적 장치로 평가하고 싶다. 불볕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어느 여름날 아파트의 광장에는 많은 사람들이 더위를 식히기 위해서 몰려나와 있다. 언뜻 한가로이 보이는 아파트 광장이 갑작스런 여자의 비명으로 소동이 일어난다. 고시를 준비하는 남편을 정성껏 뒷바라지하는 젊은 새댁이 의처증에 도박을 일삼는 남편의 폭력을 피하기 위해 아파트 광장으로 도망을 나온 것이다. 뒤따라 나온 남편의 무자비한매질(그는 아파트 광장에서 아내를 끌고다니며 가죽 벨트로 때린다) 앞에서 아파트 주민의 반응은 각양 각색이다. 아내들은 자신의 남편들에게 도움을 요청하지만 남편들은 남의 부부 싸움이라며 관망만 한다. 결국 분노한 여자들이 나서서 싸움을 말리는 과정에서 폭력 남편은 몰매를 맞아 죽게 되고, 그녀들은 경찰을 피해 아파트 옥상으로 도피하게 된다. 아파트 옥상에 올라간 그녀들은 ‘죽어도 싼 개같은 자식’을 죽인 데 대해 정당 방위를 주장하며 ‘불알달린 것들’에 도전을 한다. 그 과정에서 옥상에 미리 올라와 있던 아들과 며느리에게 구박받던 할머니가 투신 자살을 하게 되고 그들의 투쟁은 사회문제로 대두되어 많은 여성의 지지를 받게 된다. 왜냐하면 가정내 폭력의 문제, 권위적 가장에 의해 억압받는 문제는 계급의 차이를 막론하고 이 땅의 모든 여성들이 겪어야 하는 공동의 굴레였기 때문이다. 아내가 아닌 자식의 위치에 있는 이들은 말한다. ‘나는 어머니처럼은 살지 않아’ ‘그런 자식하고는 이혼이다’, ‘매 맞는 여자는 자존심도 없고 비굴하므로 맞아도 싸다’라고, 그러나 ‘다른 세상’에서 살아보고자 하는 많은 아내들은 아이 때문에, 남들이 어떻게 볼지 두려워서, 그리고 경제적 불안감 등의 이유로 이혼을 망설이게 되고, 결국은 팔자려니 하고 체념하면서 살아왔다. 그리고 아들이 부순 재봉틀을 붙잡고 투신 자살한 할머니의 모습은 어쩌면 우리 어머니들의 한 많은 모습일지도 모를 일이다. 사흘 낮, 이틀 밤을 함께 보내게 된 그녀들은 서로의 처지를 이야기하며 정을 나누게 된다. 그녀들은 꿈꾼다. 부부가 함께 일해도 아내 앞으로 등록된 재산이 한 푼도 없는 그런 사회가 변하기를, 아무리 공부를 잘해도 키가 작고 뚱뚱하다는 이유로 취직을 할 수 없는 사회가 변하기를, 바람을 피우고도 그것이 마치 자신의 정당한 권리인 양하는 뻔뻔한 남편이 없는 사회가 되기를, 혼자 사는 여자라고 색안경을 기고 막 대하는 사회가 변하기를, 그리고 남녀 평등의 차원에서 많은 여성의 사회 진출이 이루어지는 사회가 되기를 꿈꾼다. 그러나 남자들의 눈에 비친 그녀들은 단지 ‘미친년들의 지랄’일 뿐이다. 영화는 시종일관 남녀의 대립 구도로 짜여져 있다. 바쁜 아내와 한가한 남편, 매맞는 아내와 때리는 남편, 폭력 남편에게 몰매를 주는 아내들과 싸우는 ‘가재는 게편’인 남편들, 옥상에 올라간 여자들과 대치중인 남자들, 결국 폭력으로 매듭을 지으려던 남자들에게 그녀들은 사랑과 용기라는 무기로 평화적인 화해의 의지를 보여준다. <개같은 날의 오후>는 개판같은 세상에서 ‘여자들은 늘 행복을 꿈꾼다. 그러나 결혼에 실패하면 자신에게도 실패하게 된다. 왜 우리 여자들은 자신을 포기해야만 행복해 질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을 던진다. 물론 이러한 문제 제기는 이 영화가 처음은 아닐 것이다. 비슷한 시기에 개봉되었기에 어쩔 수 없이 비교의 대상이 되어버린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에 서도 여성들의 행복 찾기의 문제가 제기된다. 남편과 자식을 위해서 자신의 재능을 포기할 수 없었던 세 여인은 자살과 이혼을 해결책으로 제시한다. 누군가와 더불어 행복해지고 싶다면 자신이 먼저 행복해 질 준비가 되어 있어야만 한다고. 그렇다면 재능을 살리지 못한 평범한 대다수의 불행한 아내들은 어쩌란 말인가? <개같은 날의 오후>는 우리에게 단호하게 말한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되는 것’ 이라고. 오랜 가부장제의 억압 속에서 여성들이 자유롭기 위해서는 여성 전체가 하나가 되어 여성의 문제에 공동으로 대처하는 단결된 힘을 형성해야 한다고 그러기 위해서 여성이 가진 사랑과 용기, 포용력은 가장 큰 무기가 될 수 있다고. <무소의 뿔처럼……>이 지식층여성들에 국한된 행복 찾기의 여정이라면, <개같은 날의 오후>는 계급을 초월한 모든 여성들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많은 지지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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