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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11 | [사람과사람]
옆자리가 늘상 든든합니다. 함께 대금부는 조재수·김성자씨부부
문화저널(2004-02-10 11:22:52)
누구든 살아가다 한번쯤 인상적인 순간과 마주쳐 오랫동안 그 기억을 간직한다. 작년 이맘때쯤 회문산에 갔었다. 산자락의 기운에 잠을 이룰 수 없었던 그 새벽에 골짜기를 감아 돌던 대금 소리를 잊지 않고 있다. 사방을 분간할 수 없었던 어둠 속에서 소리 한 끄트머리에 귀를 세우며 산중턱의 정자까지 어떻게 올라갔었는지 홀렸다는 표현밖에는 달리 그날 밤을 설명할 수 없다. 두려운 반 신비감 반에 정처 없이 산중턱의 정자에 올랐을 때 애간장을 녹이는 대금 소리와 정좌를 한 채 대금을 불고 있던 사람의 형체가 뿌옇게 드러났다. 혼을 부른다는 그 대금 소리에 취해 그 뒤로 전주의 국악사를 찾아다니며 대금을 배워 보겠다고 설쳐대던 때가 있었다. 결국 호기심으로 끝나 버렸지만.... 그래서 인지 대금을 기가 막히게 부는 사람을 만나면 경외감에 빠지곤 한다. 앞의 상황이 이러하니 대금 연주자를 취재해 보라는 말에 설레임이 앞서긴 했지만 내심 걱정이 없을 수 없었다. 우선 기본 지식 없이 취재를 나서야 한다는 부담감이 그러잖아도 처음 만나는 사람 앞에선 말 한마디 못하는 주제를 더욱 주눅들게 했다. 게다가 대금 부는 부부라니 그를 만나러 도립국악원에 갔을 때 무척 분주한 모습이었다. 인터뷰를 부탁하고 인사를 나누면서 인정많게 두 사람의 인상이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 사진을 몇 장 찍은 동안 쑥스러움과 어색함을 처리하지 못해 연신 머리를 긁적이는 조재수씨와 차분히 자리한 김성자 씨는 외모와는 달리 공통 분모가 참으로 많은 부부였다. 둘다 전남이 고향이며 같은 도립국악원 연주부 단원이고 게다가 전공까지 대금으로 서로 같은 이들은 국악원 내에서도 사람 좋기로 소문이 나 있다. 두 사람은 전남 대학교 국악과 선후배 사이로 만나 서로 좋아하는 사이가 되었다. 조재수 씨는 광주 농업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 농악부 활동을 했었다. 농악을 배운지 2년쯤 되던 해에 우연히 친구 누나가 운영하는 국악원에 갔다가 조창훈 선생님을 만나게 된다. 그때 대금 정악으로 이름난 조창훈 선생의 권유로 대금을 시작하게 되었다. 김성자 씨도 조재수 씨와 비슷한 경위로 대금을 배웠다. 광주 수피아 여고를 졸업한 그는 학교 때에는 무용을 하고 싶었다는 그의 말처럼 고운 얼굴은 무용을 했을 것만 같은 인상이었다. 국악반은 있었지만 말로만 듣고 있다가 고3때 담임의 권유로 대금을 시작하여 이생강 선생으로부터 대금을 배우게 된다. 두 사람이 전주와 인연을 맺은 시기는 ‘88년 전북도립국악원이 생기면서이다. 부인 김성자 씨가 먼저 도립국악원이 창단 멤버로 입단하고 다음 해에 조재수 씨도 도립 국악 단원이 되면서 전주에 터를 잡게 된다. “이 사람이 시험을 본지도 몰랐습니다. 그런데 합격하고 나서야 얘기하더라고요 그리고 나서 ’89년 3월에 결혼과 함께 저도 이곳에 입단하게 된 거지요 이 사람 따라 오기도 했지만 사실은 그때 지휘자로 있던 심인택 교수님이 권해서 오게 됐지요” 두 사람은 국악원내에서 지켜야 할 불문율을 정해놓고 있다. “절대 국악원 일을 집으로 옮기지 않습니다. 남의 얘기하는 것이 곧 제 흉보는 꼴이 되거든요, 국악원에 왔을 때는 각자 개인의 사회 활동으로 보고 절대 부부라고 해서 집과 직장을 혼돈하는 일이 없도록 각자의 생활을 합니다. 알게 모르게 이런 규칙이 섰습니다.” 서로의 일에 대한 이해의 폭이 남들보다 높다 보니 장점이 많다. 관현악단에서 연주할 곡이 오면 서로 악보를 보면서 분석하고 음악적으로 토론해서 작곡자가 원하는 바에 최대한 가깝게 서로를 교정해 준다고 한다. 특히 김성자 씨는 신곡이나 산조를 좋아하는데 신곡 악보를 받으면 조재수 씨가 감성자 씨에게 배우다시피하고 반면 곡의 음악적 해석은 조재수 씨가 강해서 서로를 도와줄 수 있다는 점이 남하고 틀린 장점이다. 반면 대금하는 사람끼리 만나서 어려운 점도 있다. 특히 부인의 입장에서 보면 조재수 씨의 뒤에 가려져서 예술적인 불만이 있을 것 같았다. “처음 창단 멤버로 도립 국악원에 왔을 때는 이 사람이 없었으니까 기량 면에서도 인정받고 그런대로 괜찮았었어요. 만약에 이 사람이 대금이 아니라 다른 악기였더라면 레슨도 원하는 대로 받을 수 있었을 텐데 옆에 있으니까 직접 배우게 되요. 어떻게 보면 장점이기도 하지만 안 좋은 면이 되기도 해요. 남편 믿고 다른 데서 레슨을 안 받게 되고.... 조재수 씨 대금 부는 모습을 보면 너무 혼신의 힘을 다해 부는 거예요. 일분을 불더라도 푹빠져서 부는 모습을 보면 굉장히 부럽습니다. 물론 그 모습에 반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인간적인 면면들에 반했습니다. 조재수 씨는 조창훈 선생으로부터 정악을 배웠고 산조는 서용석, 김광복 선생에세 사사 받았다. 김성자 씨 역시 정악은 조창훈 선생에게 배웠고 산조는 처음에는 이생강 선생에게 대학에 들어가서는 김광복 선생에게 배웠다고 한다. 두 사람은 특히 조창훈 선생을 생각하는 마음이 남달랐다. “조창훈 선생님께 배울 때 한 가지 못 잊는 것이 있습니다. 제가 대회를 나가려고 독주곡을 레슨 받는데 5분 짜리 곡을 선생님과 일초도 안 틀리고 똑같이 불었어요. 그랬더니 선생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이제는 음악을 달리하라고 하시더라고요 ‘네가 나하고 똑같이 불면 그게 무슨 예술이냐, 네 나름대로 음악을 만들어서 불어야 그것이 예술이다’고 하셨습니다. 제가 선생님을 자랑하자면 항상 군사부일체의 표본이라고 생각합니다. 조창훈 선생님은 아버지와 같고 선생님의 명은 임금의 명이나 같습니다. 그러허게 선생님이 저희 제자들을 가르치실 때 몸으로 보여주십니다. 자기 모든 것을 가르치는 분이셨습니다. 거의 잠만 달리했지 같이 생활하다시피 팔년을 보냈습니다. 나중에는 아침에 선생님을 만나 인상이 안 좋으면 무엇 때문에 고민하는지까지 알 정도가 됐지요” 김성자 씨도 대학교 들어가기 전부터 조창훈 선생에게 배웠다. 지금도 항상 아버지처럼 생각하고 모신다고 한다. 해마다 여름 방학이며 꼭 같이 모시고 김성자 씨의 고향인 완도에 간다고 한다. 자칫 잘못하면 사회 생활이 바빠 선생님께 소홀해지기 쉽기 때문에 휴가 때가 되면 무슨 일이든 제쳐 두고 시간을 보낸다고 한다. 전혀 힘든 시기가 없었을 것만 같은 조재수 씨에게 시련기는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 문제가 걸렸을 때라고 한다. “영장을 네 번이나 연기하면서 대회에 나갔습니다. 국립국악원 주최 전국국악경연대회에서 ‘88년에 3등을 했었죠 애초에 입상을 못했다면 미련없이 군대에 갔을 텐데 그 다음해에 2등하고 또 다음해에도 2등을 했지요 일등만 하면 군대를 면제받을 수 있는데 ’90년도엔 입상도 못하고 말았죠 그때 참말로 암담했습니다. 여기서 주저앉는 구나 생각했죠 ‘92년도에 마지막으로 영장을 들고 대회에 나갔습니다. 그 때 일등을 했지요 본선에 진출해서 발표를 기다리는 두어 시간 동안 이 사람은 전주에서 나는 서울에서 안절부절 거의 초죽음 상태였었지요” 조재수 씨는 국악원에 지휘자로 있는 최상화 씨와 음악적 지향점이 맞는다고 한다. 과거의 음악은 음악대로 보존하지만, 시대에 맞는 음악도 새로 개발하자는 것이다. 그는 국악하는 연주자들은 대중에 맞는 음악을 들려줘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에 그들의 취향에 따라 갈 수밖에 없고 연주자들도 시대에 따라 변해야 한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국악기라고 해서 거문고나 대금만으로 한정짓는 것이 아니라 서양 악기도 국악에서 사용하면 국악기라는 말이다. 국악을 폭넓게 생각해서 서양음악을 국악에 수용하자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그런 그의 견해를 구체적으로 표방한 것이 얼마 전 우진문화공간에서 처음 연주회를 가졌던 국악 실내악단 ‘새롬’ 의 결성이었다. 대중에게 다가가는 방법을 찾은 것이다. 그러나 쉬운 것만은 아니다. 우선 국악원 내부적인 제약에 맞서는 문제가 최우선이겠지만 이 지면에서 그런 문제를 차지하기로 하자. 많은 어려움으로 활동을 미약하지만 새롬이 추구하는 방향은 새로운 음악적인 시도이다. 몇십 명이 되는 관혁안단이 연주해야 하는 장소나 음악도 있지만 사실상 실내악 규모가 해야 될 공연이 많다. 이런 부분들이 실내악단이 할 일이고 그 속에서 생활 속으로 국악이 한발 다가설 수 있는 것이다. “지금TV에서 하는 <시미 기픈물> 보신 적 있죠 제가 추구하는 음악의 방향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국악이란 것은 고리타분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는 젊은 사람들을 끌어 내 함께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젊은 사람들이 외면해 버리면 인제 누가 듣겠습니까? 국악은 노인들만 듣는 것으로 치부되어선 안되죠” 그는 젊은 사람들이 모여 있고 우리 음악을 듣고 싶다고 원한다면 언제든 달려가 연주할 마음이 있다고 한다. 인터뷰 하는 동안 그를 보면서 ‘참 음악 욕심이 많은 사람이구나’하는 생각과 함께 관에 속해 있어서 이런저런 제약이 때문에 힘들어하는 것을 보며 아쉬움을 금할 수 없었다. 경직된 사고나 행정이 물꼬를 막고 터 주지를 않으니 참으로 답답할 일이다. 욕심 같아선 일주일에 한 번씩 공연을 하고 국악원에서 제도적인 받침만 해준다면 일주일에 한번씩이라도 실내악단 연주를 하고 싶다는 그의 시도는 욕심으로만 그칠 것인지. 김성자 씨는 조재수 씨가 독주회를 한번 크게 가져 줬으며 하는 바램이 있다. 마음 속으로만 생각하고 아직 얘기를 못했지만 부부 발표회도 한번 해보는 것이 소망이라고 한다. 발표회를 하긴 해야 하는데 겁도 나고 자꾸 미루다 보니 늦어져 버렸다고 한다. 이제 안으로 갇혀 그의 음악 세계를 밖으로 마음껏 표출할 때가 아닌가 싶다. 국악원의 생활은 마음먹기에 따라 그 속에서 만족하고 안주해 버리기가 쉽지만 문제의식을 가지고 끊임없이 음악의 나아갈 방향을 찾는 이들 두 사람 동료이기도 하고 선생과 제자이기도 하고 예술적으로는 경쟁자이기도 한 이들의 음악 세계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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