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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11 | [문화칼럼]
순수, 그 허상을 경계하라 세 사람 이야기
글/한승헌 (2004-02-10 11:18:42)
오스트리아 태생의 카라얀은 베를린 필의 상임 지휘자였고 미국 출신의 번스타인은 뉴욕 필의 상임 지휘자를 역임했다. 두 사람 모두 체계적인 명성을 누리다 간 음악의 거장(車匠)들이다. 나는 두 사람의 출생지나 교향악단의 이름을 비교하고자 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자유와 압제에 대한 현실 대응의 차이를 말하고 싶다. 10년 앞서 태어난 카라얀을 먼저 말하자. 그는 1933년 1월 히틀러가 집권한지 두 달이 좀 지났을 때 나치당에 입당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헨국립가극장의 음악 총감독이 된 그는 히틀러의 생일 축하 공연과 독일·오스트리아 합병 축하 공연을 지휘하는 등 충성을 다한 끝에 초고속으로 출세길을 치달아 마침내 나치 체제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국가지휘자’의 자리에까지 오른다. 독일 패전 후에 그는 교묘한 변명에 성공하여 음악계에 복귀, 비엔나 국립가극장의 무대감독으로 임명되는 등 ‘ 음악의 제왕’으로 군림한다. 그는 “음악활동을 하기 위해서 1935년에 부득이 나치에 입당했다가 몇 년 후에 탈당했다”고 변명했다. 그러나 그것은 거짓말이었다. 즉 그가 나치에 입당한 것은 1935년이 아니라 1933년이었다는 사실의 그의 당원(증)번호로 밝혀졌으며 패전 때까지 당원 자격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권력을 통해서 음악을 사랑한 사람이라고 매도당하기도 했다. 다음 레오나드 번스타인. 그는 1976년 10월 17일 뮌헨엣 한 연주회를 지휘했다. 온 세계의 양심수를 지원하는 국제앰테스티(Amuesty Internation)의 기금 마련을 위해서였다. 두루 아다시피 양심수는 그 대부분이 정치범이다. 번스타인은 그날 연주회의 입장료, 중계료, 음반 판매 이익 등 모든 수입을 정치법에 대한 구원 활동 기금으로 기부했던 것이다. 그날 번스타인은 이렇게 말했다. “인간의 권리를 위한 오랜 싸움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인권이 부정되고 있는 세계 도처에서 이 싸움에 참여하는 것은 과거 어느 때보다도 더욱 중요하다. 나는 이 연주회가 자유를 위한 그와 같은 행동을 고무하게 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두 사람 모두 세계적인 지휘자였건만 이처럼 다른 데가 있었다. 한 사람만 더 생각해 본다. 파블로 피카소 - 현대회화의 새로운 경향을 창출해낸 20세기 미술의 거장, 그러나 나는 그저 남다르게 희한한 추상화만 그리면서 현실에 안주(安住)한 화가는 아니었다. 1937년 4월 26일 스페인의 작은 도시 게르니카의 시가지의 독일 공군에 의해서 무차별 폭격을 당한다. 프랑코파를 지원하기 위한 그 폭격으로 수백 명의 시민들이 죽었다. 파리에서 이 참상을 들은 피카소는 분개한 나머지 스페인 정부로부터 의뢰받은 파리박람회 출품작으로 불멸의 대작 <게르니카>를 그렸다. 그때 그는 이런 말을 남겼다. “스페인의 전쟁은 인민과 자유에 대한 반동의 전쟁이다. 나의 전(全) 예술적 생에는 오직 예술의 죽음과 반동에 대한 싸움뿐이었다. 내가 제작중인 <게르니카>아 이름 붙이게 될 작품과 최근 나의 전 작품에서, 스페인을 공포와 죽음의 바다에 잠기게 한 군사력에 대한 나의 공포감을 확실하게 표현하고 있다. 1940년 독일군이 파리에 침입하자 그의 작품은 발표가 금지되었다. 그는 굴하지 않고 파리에서 지하운동을 벌이는 레지스탕스들과 유대를 맺는다. 마드리드의 쁘라도 미술관 별관에 들려 그의 걸작 <게르니카>앞에 섰을 때 미술 감상에 저능한 나도 그 그림의 내력을 생각하면서 숙연했던 기억이 새롭다. 위대한 예술가는 위대한 자유운동가요. 평화운동가이기도 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그들을 산 예증으로 해서 알 수 있다. 흔히 문화·예술은 탈정치적이라야 순수하고 고상하다는 통념이 있다. 현실과의 거리가 멀수록, 아니 역사 인식과 등을 질수록 예술의 순도가 높은 듯이 착각을 하기도 한다. 불의와 억압에 대하여 초연한척 외면하는 것을 ‘순수’라고 우기는 사람도 있다. 그 침묵이 때로는 불의와 억압에 대한 동조(同調)와 협력이 된다는 점을 애써 부정하려 한다. 문화도 예술도 인간의 삶의 현장에 대한 무관심, 압제와 불의에 대한 무관심을 자랑할 특권은 없다. 정신유희적 마스터베이션을 무슨 고답적인 문화·예술인양 가장해서도 안된다. 위대한 문화·예술은 투철한 현실 인식에 뿌리를 두고 피어난다. 초월이 곧 도피나 외면이 아님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불의에 눈감은 것까지는 그야말로 자유라고 치더라도 불의에 추종하는 자들이 도리어 그것에 항거하는 자들을 ‘순수하지 못한 정치적 목적’을 가졌다고 비난하는 것은 희극의 압권이다. 국내에서도 그런 희극 공연은 드물지 않았다. 국내에서는 매카시즘 풍조로 그 중의 하나였다. 몇 해 전 국제PEN총회에 참가했던 한국 여류 문인들이 한국 정부의 인권탄압에 항의하고 구속 문인의 석방을 요구하는 결의안 채택을 저지하기 위하여 밤에 ‘아름다운 한복’을 차려 입고 파티에 나가 외국 대표들을 접대한 일이 있었다. 그들은 나라의 체면을 살리기 위해 그처럼 미인계까지 썼노라고 수치스러움도 모르고 ‘자화자찬’을 글로 써 남겼다. 훗날 투옥 문인들이 석방되자 그들은 일변하여, 자기네의 노력으로 풀려나게 되었노라고 묻지도 않는 말을 하고 다녔다. 작가정신이란 것은 작품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작가의 삶 전체를 통해서 검증되어야 할 문제이다. 굳이 카라얀이나 번스타인 또는 피카소 같은 서양사람 이야기를 할 것까지도 없다. 바로 이 땅의 문화·예술인 중에도 서양의 그들을 훨씬 능가하는 추종의 표본이나 저항의 귀감이 적지 않았다. 일제하의 친일파, 유신·군부독재 치하의 어용인물이 문화·예술계에서도 얼마나 설쳤는가 그런 사람들일수록 분별 없이 ‘순수’라는 관형사를 남용한다. 순수문학, 순수예술, 순수한 학문연구.... 따위 실인즉 그런 말 속에서 비순수(非純粹)의 위선이 배어있고 세인과 역사를 속이는 기만이 도사리고 있음을 우리는 안다. 지금도 그런 사람들에 의해 꾸며지는 ‘위조상품’이 우리 주변에 널려 있다. 다시 말하거니와 불의와 압제에 눈감거나 현실에서 눈을 돌리는 것을 ‘순수’로 오해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그렇다고 해묵은 현실 참여론을 재탕하거나 이데올로기 지상을 편드는 것은 아니다. 작가정신의 모태라든가 문화활동의 지표(指標) 예술행위의 모티브가 역사와 인간 존재의 근본에 맞닿아 있어야 하며 일체의 허위와 가식(假飾)을 거부하는 데서 문화·예술의 진면목이 피어난다는 점을 상기시키고자 한다. 그래서 인간의 존엄을 수호하는 좀더 치열한 문화·예술(인)을 대망한다. 치열함이 없고서야 ‘도락(道樂)’ 이상의 것이 될 수 없다. 내가 이처럼 설익은 설법으로나마 지면을 채운 것은 창간 8주년을 맞는 <문화저널>에 대한 내 나름의 애정과 기대를 표시하고자 함이다. <문화저널>이 여러 가지 어려움을 무릅쓰고 참된 문화·예술을 복돋우고 사이비를 감시·비판하며 문화·예술의 창작자와 수용자의 안목을 올바르게 높여주기를 바라면서, 지난 8년 동안의 남다른 성과에 경의를 표한다. 지방의 매체로서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전국적이고 보편적인 시각을 견지해 온 점에 대해서도 박수를 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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