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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11 | [세대횡단 문화읽기]
부처에 대한 신앙이 탑이 역사로 천득염의 불탑과 건축의 미술사(1994년 11월 4일)
문화저널(2004-02-10 11:15:36)
탑은 부처의 진신사리를 모셔놓은 것입니다. 엄밀히 말해서 묘라고 해도 크게 틀린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의 묘가 아닌 부처의 묘이기 때문에 더 가치가 있지요. 부처는 인도에서 태어나서 29세에 출가를 하고 35세까지 고행을 하다가 약 45년 동안 많은 설법을 전하고 80세에 열반을 합니다. 열반한 부처의 시신을 ‘다비’ 즉 화장했는데 다비했을 때 부처의 진신사리 즉 화장해서 남은 재를 모셔놓은 것이 탐입니다. 부처는 그당시 인도에서 워낙 명망있었기 때문에 부처의 제자를 비롯한 인도의 고대 국가들은 서로 사리를 빼앗을려고 싸움을 하게 됩니다. 결국 인도의 고대 8개 국가에서 사리를 나누어 가집니다. 이것을 우리는 사리 팔분 또는 팔부 사리라고 부릅니다. 이렇게 여덟으로 나눈 진신사리를 가져다가 그 때 당시의 인도의 고대 국가에 나누어 탑을 세웁니다. 이것이 탑의 출발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 시간에 주의 깊에 보아야 할 것은 부처가 죽은 다음에 시신을 다비해서 건탑한 것을 불탑으로 보고 그 선에서 이야기를 하자는 것입니다. 사리를 8개로 나누어서 조탑했던 것이 불탑의 출발인 것이죠 이렇게 부처가 돌아가고 나서 약 백년 후에 인도의 고대 왕조인 마우리아 왕조가 있습니다. 이 왕조의 왕 중에 아쇼카 왕이 있었는데 이 왕은 인도의 넓은 왕국을 통일 합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살육전쟁을 일으키게 되고 그 악업을 씻기 위해 결국 말년에 불교에 귀의해 불교도가 되는데 불교도가 되면서 선행을 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8개였던 탑을 8만 4천개로 나누어서 인도의 전역에 탑을 세웁니다. 우리나라 삼국유사에 보아도 팔만사천의 탑을 세웠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이런 탑중에 현존하는 탑들이 있는데 잘 알 듯이 인도의 산치란 지역에 있는 거대한 탑들이 대표적인 것들입니다. 밑지름이 40~50미터가 되는 동그란사발 같은 것을 엎어논 형태가 인도탑의 기본적인 형태입니다. 이런 탑들이 시기가 지나면서 여러 가지 모습으로 변화합니다. 사발을 엎어논 것과 같은 반구형의 탑이 나중에 기단이 중첩되고 그 모습이 방형으로 네모지게 변합니다. 간다라 지방으로 불교가 전파되고 희랍의 영향을 받아서 불상과 조가품들이 많이 들어오면서 그 모습이 변화하기 시작하는데 하여튼 초기의 인도탑은 복발형 탑이었습니다. 인도는 아주더운 나라이기 때문에 우산이 귀족이나 성스러움의 상징이 됩니다. 탑의 꼭대기를 보면 부처의 가장 성스러운 사리를 모셔놓은 곳에 장엄을 더하기 위해서 우산을 얹어놓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중국 사람들은 초기에 불교를 받아들일 때 자기 나라의 종교와 비슷하게 생각합니다. 즉 노자의 도교하고 불교하고 같은 것으로 생각하고 노자가 다시 살아나서 다시 온 것으로 여깁니다. 그렇게 되면서 도교 사원에다가 부처를 모시게 된 것입니다. 그 도교 사원이 현재 우리의 탑처럼 생겼습니다. 여러층으로 중첩되어 있는 목조 건물이사당의 주를 이룹니다. 중국의 탑파의 유형은 기존의 목조 건축이 위에다가 탑 윗부분을 올린 것이죠, 목조 건축이 갖고 있는 절의 내부적인 아닌 면 즉 이내부성 때문에 중국에 있어서도 전탑이 생기게 됩니다. 중국에는 석탑이 많이 생기지 않고 대부분 전탑이 많이 생깁니다. 흔히 중국을 전탑의 나라, 우리나라를 석탑의 나라, 일본을 목탑의 나라라고 합니다. 중국에는 산을 중심으로 하는 사찰의 탑 형태가 존재하다가 나중에 우리나라로 옮겨지게 된 것이죠, 초기의 중국의 사찰은 사(寺)자를 쓰지 않았습니다. 중국의 사(寺)는 중앙에서 오는 객들을 또는 큰 선비들을 모셔놓은 일종의 숙소가 사(寺)였습니다. 그러다가 후한대에 가서 바뀌게 됩니다. 흔히 우리가 사찰을 가람이라고 이야기 하죠, 가람은 스님들이 많이 모이는 곳을 가람이라고 합니다. 왜 이런 이야기를 하냐면 중국의 사찰과 우리나라의 사찰에 대해 이야기해야 탑파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4세기 말쯤 우리나라에 불교가 중국을 통해서 들어옵니다. 그 때 고구려의 사찰 양식은 대개 금당이 목탑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래에 중문이 있죠, 현재 평양세서 발굴되는 사찰지가 네댓 개 되는데 다 이렇게 생겼습니다. 전각들이 세 개가 동서북쪽에 있고 중앙에 팔각형의 목탑이 있고 그 아래쪽에 문이 있었습니다. 이것을 일탑 삼금당식이라고 하는데 이 형태가 고구려의 고대 사찰의 배치형입니다. 백제는 맨 뒤에 강당이 있고 그 다음에 금당이 있고 탑이있고 중문이 있고 남북 좌우선상에 축을 형성한 다음에 이 축선상에 맞춰서 건물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중국의 건물처럼 희랑을 벌렸습니다. 우리 나라에 불교가 들어온 건 고구려 372년 백제 384년입니다. 이런 시대에는 우리 나라의 탑들도 나무로 만든 목탑이었습니다. 신라도 초기에는 이런 목탑 형식이었는데 통일신라가 되면서 탑이 두 개로 갈라집니다. 초기의 탑은 탑 자체가 굉장한 의미를 갖고 있는 예배의 대상이었는데 나중에는 금당에 부처님을 모시게 되고 불상이 생기게 되자 예배의 대상이 옮겨지게 됩니다 따라서 탑이 컸던 것이 작아지고 두 개로 나뉘어 집니다. 하여튼 초기에 불교가 우리 나라에 들어왔던 시기에는 목탑이었는데 불에 타버리고 쉽게 변질되어 썩고 하니까 약 600년대 초쯤에는 석탑이 등장합니다. 석탑의 가장 대표적인 예가 익산의 미륵사지 석탑이 만들어집니다. 약 200년 동안, 4세기 후반에서 600년전까지 7세기 초까지입니다. 그러나 7세기 초에 돌로 만들어진 탑이 만들어 집니다. 목탑이 안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점에 때문에 석탑을 출현시킨 것이다. 미륵사지 석탑은 돌로 만들었으며 마치 나무로 만든 것처럼 되어있습니다. 부분적으로 보면 나무로 만든 것처럼 흉내낼려고 애쓴 흔적이 있습니다. 목조건축은 당연히 맨 밑에 기단이 있습니다. 지금 미륵사지 탑도 기단이 있습니다. 그리고 기단 아래에 숨어있는 초석이 있습니다. 지금 미륵사지를 보면 초석이 보입니다. 기단이 있고 기둥이 있습니다. 목조건축에서 얘기하는 창방 평방하는 것들이 돌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이런 것들로 봐서 미륵사지 석탑은 백제 무왕의 시대에 만들어진 우리 나라 석탑의 시원점인 것입니다. 그 이전의 예가 없기 때문에 그리고 탑 자체가 제일 크고 목탑을 흉내냈습니다. 이런 여러 가지 의미로 봐서 우리 나라에서 가장 오래되었다고 봅니다. 탑이 크다는 것은 탑의 의미가 깊다는 것이죠, 현재 우리 나라에 있는 탑이 약 첨 300여 개가 됩니다. 이중 석탑이 대부분이고 전탑이 있습니다. 그 다음에 모전탑이 있습니다. 그리고 목탑이 있습니다. 전탑은 벽돌로 만든 것이고 모전탑은 돌을 벽돌처럼 깎아서 만든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분황사 모전탑이 있습니다. 아까 미륵사지 탑이 무왕때 만들어졌다고 했죠 진평왕이 무왕의 미륵사 불사를 돕기 위하여 많은 신라 사람들을 보냈습니다. 그영향으로 638년에 분황사 모전석탑이 전탑의 모습으로 신라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백제 탑의 출발 시기, 신라 탑의 출발 시기를 보면 백제 탑은 목탑으로 시작해서 전탑으로 발전하죠 그러다가 그 다음으로 나타나는 것이 경북 의성의 탑니가 있습니다. 탑니 석탑을 보면 벽돌이나 조그만 돌을 쌓은 것이 아니고 큰 돌덩어리 하나를 깎아가지고 부분부분 쌓아서 계단처럼 만들었습니다. 몸뚱이인 탑신에도 기둥을 세우고 미륵사지 탑에서처럼 들어가는 문을 만들고 기둥의 윗부분에 공포 형식이 그대로 만들어 집니다. 분황사지 탑에서 위성 탑니 탑으로 그 다음에 감은사 탑으로 고선사지 탑 이런 탑들이 차츰 변하면서 통일신라로 넘어갑니다. 가장 대표적인 탑이 불구사의 석가탑입니다. 그 것이 신라의 전형적인 탑이 됩니다. 그리고 그 탑과 유사한 탑이 전북이나 전남, 충청도 지방에도 지어집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통일신라가 되면서 백제 탑이 단 한 점도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통일신라 시대는 문화적 정치적인 면에서 굉장히 억압을 했다는 것이죠, 백제의 고토에서 백제탑과 비슷한 것이 나타나는 것이 당연한데 단 한 점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경주 지방에서 중심되는 불국사의 탑이 전라도 지방에 여러 군데에 만들어지게 됩니다. 결국 경주를 중심으로 하는 문화권의영향이 전라도까지 완전히 잠식해서 백제 것을 부흥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실상사탑, 화엄사탑, 모림사탑이랄지 그런 탑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고려에 접어들면서 왕건이 지방에 있는 호족들을 풀어주고 문화적으로 즐기게 하고 자유롭게 하면서 정치적인 안전을 꾀합니다. 이런 영향으로 고려시대에 백제의 고토였던 지방에 백제 양식의 탑이 몇백년만에 다시 지어집니다. 맨 처음 불사의 중심이 되었던 것은 불상을 모셔놓은 전각이 아닌 탑이었습니다. 탑은 결국 시리 아닙니까 사리가 경배의 최고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다가 그 다음 단계로 사라와 불상을 합한 것입니다. 세 번째 단계는 불상이 경배의 대상이 됩니다. 이렇게 해서 사리가 가장 경배의 대상일 때는 전각이 없었습니다. 탑만 있는 것이죠 이런 예들이 중국과 인도에서 나타납니다. 불교가 4세기까지 중국에서 널리 퍼졌고 불교의 전형적인 모습이 갖춰진 다음에 우리 나라에 들어오기 때문에 고구려, 백제, 신라의 가람 배치 형식으로 우리 나라에서 시작 합니다. 우리 나라는 사리 신앙이 주된 것이 아니라 사리와 불상이 섞인 시기로 이해해야 합니다. 부처가 돌아가고 나서 약 500여 년간은 무불상 시대로 부처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을 금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발이 모습, 집기, 손톱 머리카락 같은 것을 경배했습니다. 부처가 살아있을 때 부처의 모습을 뵙기원하는 제자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인도가 워낙 넓어서 부처의 손톱, 머리카락 같은 것을 모셔놓고 모시게 됩니다. 하여튼 사리의 신앙이 점차 줄어들면서 탑에서 금당으로 점차 의미가 변하니까 탑이 점차적으로 규모가 적어지고 하나였던 일탑이 이탑으로 변하고 나중에는 무탑 형식의 가람이 나타납니다. 이러한 여러 가지 변화 양상을 봤을 때 우리가 탑의 의미를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럼 이탑이 오래된 탑이냐 근대에 지어진 탑이나 어떻게 보고 아느냐 아무래도 오래된 탑은 큽니다. 이렇게 옥개석이 있으면 이런 체크 받침이 개수가 많습니다. 그리고 오래된 탑일수록 탑신을 이루는 돌들이 하나의 돌덩어리가 아니라 다 다릅니다. 후대에 갈수록 이런 큰 돌덩어리로 기둥을 만들어버립니다. 오래된 탑일수록 돌덩어리가 따로 되어있습니다. 옥개석같은 경우도 발전자 모습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정림사지 탑같은 경우는 8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 다음에 아래 기단부가 있는데 기단부도 탱주 개수가 많습니다. 아까 백제 탑과 신라 탑을 얘기했습니다. 우리 나라 석탑의 출발은 석탑입니다. 신라는 전탑에서 석탑으로 변합니다. 물론 이전에는 목탑이 있었죠 왜 하필이면 638년의 탑이 전탑이었느냐? 아직 확실히 규명되지는 않았지만 중국의 영향이다. 나중에 통일신라 시대 이후에 고려 시대에 접어들면서 부여나 경주를 중심으로한 백제의 고토에서 백제탑을 흉내낸 탑이 다시 나타납니다. 이런 탑의 전형적인 모습이 부여 읍내에 있는 정림사에 5층탑을 흉내낸 탑이 10개 가량 현존하고 있습니다. 탑을 이야기할 때 아까 종류별로 말씀드렸죠, 재료에 따라서 그다음에 전형적인 탑하고 이형적인 탑하고 나눠서 이야기합니다. 이형적인 탑이라는 것은 우리 나라 불국사의 다보탑하고 화엄사에 있는 사사자 삼층석탑 또 실상사 백장암에 있는 재미있는 탑들이죠 전형적인 탑들은 부여 정림사탑이나 석가탑을 말하죠 부처의 사리가 한정되어 있는데 모든 탑에 사리가 들어 있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죠, 그래서 인도에 가서 부처의 사대 성지 주변의 흙을 가져옵니다. 또 인도에 있는 불탑 주변의 흙을 가져옵니다. 이것이 안되면 불법승 하듯이 부처의 말씀을 기록한 경전을 집어 넣습니다. 경전을 종이에 써서 넣기도 하고 금에다 타자해서 집어넣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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