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10 | [저널초점]
케이블 TV가 고전하는 까닭은?
글/원도연
(2004-02-10 11:01:06)
‘꿈의 미디어’, ‘황금알을 낳는 거위’ 등으로 불리던 케이블 TV가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다가올 정보화 사회에 뉴미디어의 첨병으로 꼽히며 차세대 문화 상품의 총아가 될 것으로 기대되었던 케이블 TV가 실질적으로 사업을 시작한 지 1년이 다되도록 여전히 지지부진한 행보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케이블 TV 관계자들은 고전하고 있다는 사실을 굳이 부인하지는 않지만, 꼭 그렇다고 볼 수 만은 없다고 말한다. 요컨대 애초 일반적인 기대치가 상상밖으로 높았다는 것이다. 예컨대 지금은 완전히 대중화 된 전화기의 경우 10여년 전만 해도 가입자가 신청을 한 이후 심하게는 2년 여까지 기다렸었다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케이블 TV의 경우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거품의 논리'가 케이블 TV의경우에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는 것인데, 나름대로는 착실하게 기반을 닦아나가고 있는 과정이고 오히려 미국이나 일본의 경우에 비추어서 앞서 나가는 부분들도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케이블 TV의 부진은 많은 사람들에게 뜻밖으로 받아들여지지만 속사정을 알고보면 어쩌면 예정된 결과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런저런 속사정들을 수용자들이 전부 이해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들도 많다. 가입자들은 전송망 설치에서 쿠터 컨버터의 문제, 프로그램이 볼 것이 없다는 것까지 갖가지 불만을 터뜨리고 있다. 심하게 말해서 문민정부가 만들어 놓은 또 하나의 부실 공사라는 지적도 매섭다. 이쯤되면 그동안 공중파 방송의 위세에 눌려 극히 피동적인 방송 환경 속에 살던 소비자들이 기대했던 방송 혁명도 요원한 것처럼 들린다. 도대체 왜 이런 문제들이 한꺼번에 발생하는가.
우선 가장 결정적인 문제는 기술상의 문제들이다. 공중파 방송과는 달리 지역 방송국(OS)과 각 가정을 연결하는 방식 자체가 유선 케이블이라는 점이 뜻밖의 난관을 불러왔다는 것이다. 물론 이점은 케이블 TV가 본 방송을 시작하기 전부터 심상찮은 조짐을 보여온 것이지만 대책없이 방송을 시작해놓고 나니 문제의 파장은 의외로 컸다. 케이블 TV에 매력을 느낀 가입자들에게 신청 후 곧바로 방송을 보낼 수 없다는 것이 결정적인 문제였다. 지역 방송국부터 각 가정까지 일일이 땅을 파헤치고 케이블을 연결한다는 것이 간단한 일일 수 없지만 요즘 소비자들이 어디 그런 저런 사정을 다 이해하고 참고 기다릴 수 있겠는가. 전주 케이블방송(CNC)의 경우만 해도 현재 가입 신청자가 만여 명에 육박하고 있지만 실제로 전송망이 완비한 경우는 전체의 약 30%에 불과한 실정이다(이 경우도 전국적으로는 훌륭한 실적이다) 여기에 실제로 전송망이 완비된 경우에도 질좋은 화면을 받아보기까지는 안심할 수 없다. 갖가지 기술적인 함정이 케이블 TV사업자들을 답답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케이블 TV의 특징이 무선 TV와 달리 그림과 소리를 깨끗하고 안전하게 전달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갖는다면 안정된 그림과 소리를 전달할 수 있느냐의 문제는 케이블 TV의 핵심적인 기술인셈인데 바로 이 기술이 아직까지도 안정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방송 초기 컨버터는 케이블 TV 사업자들을 가장 애태웠던 문제의 부품이다. 컨버터는 공중파로 방송을 전송받는 일반 가정 TV에서 케이블 TV를 볼 수 있게 해주는 필수 부품인데 정작 이 기계가 말썽을 피운 것이다. 방송 초기 컨버터의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것은 물론 공급된 컨버터마저 고장이 잦고 제기능을 다 하지 못해 말 그대로 ‘핵심 애물’이 되어 버린 것이다. 물론 컨버터는 지금 개량에 개량을 거듭하면서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지만 초기 케이블 TV의 신뢰에 심각한 타격글 안긴 것은 좀처럼 만회할 길이 없다는 것이다.
사실 이런 점에서 보다면 케이블 TV의기술적인 문제에 대한 책임은 전송망 사업을 맡은 한국통신과 정부에게도 있는 셈이다. 당연히 예상되는 기술적 문제를 너무 쉽게 판단했고 또 정부는 사전에 면밀한 검토 없이 무작정 허가를 내준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가입자들의 수준 높은 요구를 충족시켜주기는 넘어야 할 난관이 한둘이 아니고 일부에서는 케이블 TV가 너무 서둘러서 시작된 것이 아니냐는 지적도 제기되고 있다. 특히 내년이면 위성방송이 본격화되고 일반 시청자들이 볼 수 있는 채널의 수도 더욱 많아지면서, 이같은 방송 환경이 과연 지금 한국적 상황에 적합한 것이냐는 문제도 제기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케이블 TV의 문제는 전송망이나 기술적인 문제가 아니라 프로그램의 문제일 수 있다. 결국 기술적인 문제가 시간과의 싸움이라고 한다면 프로그램의 문제는 질적인 승부가 되는 것이다. 공중파 방송의 위력에 위성방송까지 가세한 상황에서 케이블 TV가 살아남는 유일무이한 길은 채널의 특성화와 전문화에 달려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아직도 특성화와 전문화의길은 멀고도 험난하다. 프로그램 공급자와 지역 방송국이 인력과 자본의 질량면에서 아직은 힘겨운 여정을 거듭나고 있다. 예컨대 여성 전문 채널이 방송 시간의 대부분을 패션쇼나 요리 강습으로 시간을 때우고, 드라마나 오락 채널은 지나친 재방으로 시청자들의 눈길을 잡아두지 못하고 있다. 뭔가 최고의 히트 상품이 나와야 수용자들의 구매 욕구를 충동할 수 있는데 아직은 그런 상품들이 개발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역 방송국의 경우도 애초의 의욕을 그대로 지탱하고 끌고 나가기에는 너무 힘겨워 인다. 이른바 지역성(locality)에 충실한 아이템의 개발과 제작은 당분간 기대하기가 힘들다는 것이 안팎의 중론이다. 더군다나 케이블 TV 지역 방송국이 아직은 법적으로 보도 기능을 갖지 못하고 있다는 점도 문제가 된다. 실질적으로 지역 방송이 내놓은 정보의 개념과 뉴스가 보기에 따라서 구분하기 어려운 것이기는 하지만 명실상부하게 보도기능을 갖게 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많은 차이가 있기 마련이다.
전주 케이블 TV의 경우 내년에는 보도국과 광고국을 신설하고 본격적인 지역 방송을 시도할 것으로 전해 지지만 그렇게 되기까지는 대대적으로 인력이 보강되고 재원이 마련되어야 한다는 문제가 뒤따른다.
케이블 TV의 주주들이 물론 단기적인 이윤 획득을 내다보고 이 사업에 뛰어든 것은 아니겠지만 예상 밖의 부진에 적지않은 당혹함을 보이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케이블 TV 초기에 몇몇 l역 방송국이 개국을 하자마자 매각설에 시달렸던 것은 취약한 자본력 때문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초기 케이블 TV와 광고 계약을 맺었던 몇몇 기업들이 전송망 사업의 부진을 이유로 광고계약을 해약하는 사태가 벌어지고, 정상적인 광고 시장에 진입하지 못하고 있는 것도 고전하는 이유 중의 하나이다. 비교적 선전하고 있다고 하는 전주 케이블 의 경우도 실질적인 시청 가구가 6천 가구 이상이 확보되면 광고시장에 나설 수 있다는 것인데, 그 시점은 빨라도 연말이나 내년 초쯤이 될 것이고 광고를 통해 수익이 떨어지는 시점은 그보다도 한참을더 잡아야 한다. 전주 케이블 TV의 주주들은 어느 정도의 전략과 인내심을 가지고 있을까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그렇다면 케이블 TV의 손익이 분기되는 시점은 언제쯤일까. 전주 지역의 경우 약 3만 가구가 되어야 이익이 남는 포인트가 된다고 보고 그 시기는 약 3년 후 쯤으로 일단 목표가 잡혀 있다. 애초 케이블 TV를 놓고 이루어진 분석들 대부분도 이와 비슷한 것이었는데 지금에 와서는 그 시기가 더 늦어질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이다.
그렇다면 케이블 TV 주주들의 지속적인 투자가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인데, 이 점에서 아직까지는 주주들이 의욕을 잃지 않은 것으로 보이지만 기꺼운 투자가 이루어지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 역시 쉽게 예상할 수 있다. 전주 케이블 TV의 경우 개국 후 증자에 증자를 거듭하면서 아직까지는 투자의 의지를 꺾고 있지 않지만 파장을 작지 않다. 최근 기구 개편을 통해 제작 부서가 대폭 축소되고 영업 활동에 집중하는 상황이 나타난 것은 장기적으로 볼 때 자체 제작에 중요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 의욕에 넘치고 뛰어난 자질을 가진 제작 전문가들의 성장이 둔화되고 그런 조건 속에서 젊은 일꾼들이 갖게될 무력감은 결국 케이블 TV의 미래를 어둡게 하는 가장 결정적인 요소들이다.
이같은 모든 문제들에도 불구하고 케이블 TV가 점차 제자리를 잡아 나갈 것이라는 점은 아직까지는 공통된 의견이다. ‘아직은’이라는 단서가 붙긴 하지만 케이블 TV가 갖는 무궁무진한 가능성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다만 시간이 문제가 되고 그 힘겨운 ‘버티기’ 국면에서 누가 최후까지 살아 남느냐는 것이 관건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