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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10 | [세대횡단 문화읽기]
담담하게 들려주는 중년의 묵직함
글/문윤걸 (2004-02-10 10:57:36)
인생, 사색, 산책, 황혼, 그리고 고독, 고뇌.... 이런 낱말들을 하나로 아우를 수 있는 단어는 무엇보다도 ‘가을’ 일 것이다. 추석이 지나는가 싶더니 벌써 가을의 전초병이라는 풀벌레 소리가 귓가를 간질이는 듯하다. 가을이 되면 누구나 한 번쯤 삶의 지나 온 길을 되살피며 그 흔적을 어루만지곤 한다. 이처럼 인생의 길을 역으로 거슬러 올라갈 때 길동무를 자처하며 충실한 벗이 되어 주는 것이 바로 음악이다. 가을은 우리에게 곡식의 풍요로움 뿐만 아니라 마음의 풍요로움까지 선사하고 있는 것이다. 가을에는 많은 사람들이 보다 진지한 음악을 선호한다. 그래서 여느 때보다도 서양 고전음악의 음반 판매량이 늘어난다고 한다. 그러나 필자는 대중음악 쪽에서 소개할 만한 음반 하나를 찾기로 했다. 가급적이면 최근에 발매된 음반 하나를 골라 보려 이것 저것 기웃거려 보았으나 필자가 과문한 탓인지 아니면 요즘 세태가 그런지 4년 전에 출반된 음반을 들고 나올 수 밖에 없었다. 우리에게 ‘양희은’은 보통의 가수와는 다른 의미를 준다. 알지 못할 신뢰감같은 것 말이다. 최근에 그녀는 <내 나이 마흔 살에는>이라는 타이틀곡으로 새로운 음반을 출반하였다. 그러나 오늘 필자가 소개 하려는 음반은 이 음반이 아닌 1991년에 출반한 ‘양희은1991’이다. 두 음반 다 나름대로의 가치가 있긴 하지만 필자가 보이게는 후자 쪽이 훨씬 더 완성도가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 이 음반에서 양희은은 세월을 뛰어 넘는다. 영원한 청춘의 상징에서 중년의 묵직함과 진지함으로 돌변한 것이다. 이 음반에서 양희은은 이미 자신의 중년의 나이에 들어섰음을 깨닫고 인생과 자연을 다분히 철학적 사색으로 반추하고 있다. 그러나 노래를 통해 철학적 주제를 다룸에 있어서 시종 공격적 자세로 일관하는 신해철과는 달리 시종 차분하고 담담한 어조로 절제된 감정의 깊이를 느끼게 해준다. 이러한 자세를 더욱 충실하게 뒷받침해주는 것은 바로 수록곡의 대부분을 작곡한 이병우의 뛰어난 기타 반주 덕분이다. 마치 독일 가곡에서 반주와 노래가 똑같은 비중을 갖고 하나의 작품에서 유기적으로 결합하듯 이병우의 기타 반주는 그야말로 훌륭하다. 단지 인간의 목소리와 기타 하나로 그들은 오케스트라의 웅변을 대신하고 있는 것이다. 이병우는 비인에서 클래식 기타를 전공하고 있는 음악 학도로 방학을 이용하여 틈틈이 국내에서 음반을 출반하고 있다. 성악가 박인수의 시도에서 보듯 전문 클래식 연주자들이 대중음악과 유기적으로 결합함으로써 더욱 풍부해진 음악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모두에게 큰 축복이다. 대중가요가 표피적 사랑만을 탐닉하거나 무분별한 사운드 경쟁으로 치닫는 요즘 세태 속에서 이런 음반 하나는 매우 소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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