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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10 | [세대횡단 문화읽기]
근대적 화풍을 소화해 낸 새세대
글/이철량 (2004-02-10 10:51:22)
전북의 그림이 1900년대로 들어오면서 새로운 변화의 기류가 흐르기 시작했음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감지되고 잇다. 이러한 변화를 주도하고 있는 작가들은 이상길(李相吉), 조중태(趙重泰), 정복연(鄭復然), 임 신(林 愼)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의 작품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새로운 경향은 이전의 선배들하고는 다소 다른 양상으로 드러난다. 1900년대 이전의 전북의 그림은 채용신과 같은 인물을 제외하면 거의가 서화를 여기로 삼았던 문인화가들이 주도했다고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주로 사군자를 비롯한 문인화와 산수가 주종을 이룬다. 물론 우리의 전통 회화가 소재의 다양성에 있어서는 별다른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소재적인 측면에서는 큰 변화라고 보기에는 어렵겠다. 그러나 적어도 전북의 그림에서 1900년대 들어서면 인물화가 나타나기 시작하고 또한 전에 없던 여러 가지 동물들이 그림에 등장한다. 그리고 이러한 소재들이 과거와는 좀 더 다른 모습으로 표현된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표현수단으로 등장하는 색채 사용에 있어서도 훨씬 달라진 감각을 느낄 수 있다. 이를테면 색채 사용이 훨씬 더 적극적으로 사용되면서 좀더 장식성이 두드러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의 기류는 물론 시대적 상황의 변화에서 기인된다고 보아야겠다. 조선조의 전통 가치관이 무너지기 시작하고 더불어 일제를 통해 새로운 그림의 경향이 한반도에 유입되면서 자연스럽게 변화의 추세를 보인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새로운 세대의 새로운 교육과 체험의 작가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일제를 통해 신교육을 받게되고, 이들 젊은 세대들의 관심의 폭이 확대되기 시작했다. 그들은 과거처럼 스승의 생각의 틀 안에서 이해하고 그림을 습득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여러 가지 정보를 소화하기 시작하고 스스로 새로운 환경에 적극적으로 도전하는 세대들이다. 이러한 신세대들 중의 한 사람이 조중태이다. 조중태는 1902년에 나서 1975년까지 활동했던 작가이며 연령으로만 본다면 현대 작가로 지목하기에 어려움이 없을 정도이다. 그러나 현재까지 확인된 자료로는 그의 유품이 별로 없다. 필자의 한정된 자료로만 이해한다면 조중태는 조선조 양식을 벗어나 초창기의 근대적 화풍을 보여주는 작가로 생각된다. 그러나 조중태가 예사롭지 않은 감각과 뛰어난 표현 기량으로 보아 좀더 많은 자료가 발굴되어 새로운 평가가 이루어지길 기대한다. 조중태는 부안에서 출생하고 정읍 농업 고등학교를 졸업했다고 전한다. 그리고 추당 박호병에게 그림을 배웠다 한다. 그러나 박호병의 유품이 전무하고 그에 관한 기록이 없어 어떠한 관계로 사승이 이루어졌는지, 또는 어떠한 그림을 공부했는지 전혀 밝혀져 있지 않다. 그러나 조중태는 산수화ㆍ사군자ㆍ해서 등을 잘 했다고 전하는 것을 보면 그가 전통적인 교육방법으로 서화에 접근하기 시작했을 것으로 보인다. 조중태에게서 이렇게 전통적인 조선조적 서화에 대한 감상을 떠 올릴 수 있는 것은 거의 유품이 그만큼 다양성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달필은 아니지만 그림에 들어있는 글씨는 그가 상당한 정도로 숙련을 쌓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어떤 그림에서는 전형적인 조선조 말기적 화풍을 보여주는 산수와 인물들의 묘사를 볼 수 있다. 이러한 정황으로 보아 조중태는 정읍 농림학교를 졸업하고 전주에 나와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하기 이전에 이미 글씨와 함께 화보를 통한 산수와 인물 등에 대해 공부하고 있었을 것으로 믿어진다. 조중태의 전통적인 필치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언급하기로 하고 여기에서는 세 여인을 소재로 한 인물화에 대해 언급하기로 한다. 이 「여인도」는 비단에 그려진 그리 크지 않은 편액이다. 작품의 제작 연대를 확인할 수 없으나 대단히 흥미를 끄는 명품이라 할 만하다. 이 작품은 지금까지 보아왔던 이 지역의 그림들과는 사뭇 다른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단순히 인물을 그렸다는 소재적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표현방법이 조선조를 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화면 중앙 상단에서 내려오는 버드나무가지를 중심으로 해서 좌우가 거의 대칭적인 구성법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구성은 우리 그림에서는 거의 나타나지 않은 방법적 특징이라 볼 수 있다. 인물에서 보이는 세 여인의 맵시로 보아 특별한 인물은 아니나 정숙하고 아름다운 한국 여인을 그려내 보이려는 노력이 담겨져 있다. 앞 가르마가 머리 한가운데서 선명하게 살아나 있고 곱게 빗어내린 단정한 머리칼과 옷매무새가 아름답고 미려한 눈썹과 오똑한 코, 앵두처럼 곱게 다문 입술 등에서 고아한 품위를 느끼게 한다. 저고리 섶을 거머쥔 손과 다소곳이 고개숙인 자태, 그리고 부끄러운 듯 두 손을 모으고 있는 모양 등은 한국여인의 전형적인 아름다움이 아닐 수 없다. 옥색 치마저고리에 붉은 옷고름은 품격을 한층 높이고 있다. 조중태가 평범한 한국 여인들의 아름다움을 형상화하기 위해 세심한 관찰을 기울이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이러한 배려가 배경으로 등장하고 있는 화사한 복사꽃과 유려한 버드나무 가지에서 피어오르는 봄 기운이 여인들을 감싸고 있어 한층 돋보인다. 정갈하게 올려진 색채가 아름답고 버드나무 등의 초목에서 쓰여진 담채도 봄기운을 더한다. 먹을 쓰지않고 직접 담채로 그려나간 방식에서도 신선한 기분을 자아낸다. 섬세한 색감과 윤곽선의 부드러운 표현에서 평면적 공간감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인물의 아래 부분이 보이지 않게끔 앞으로 끌어당긴 표현도 전통적인 방식에서 벗어나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듯 인물을 클로즈업 시키고 자연 경물을 배경으로 처리하는 방식은 일본화에서 온 것임이 틀림없다. 우리의 전통적인 인물화는 얼굴만을 섬세하게 다루고 의복은 간단한 선으로 처리하는 방식이었다. 또한 전신을 함께 처리하더라도 인물이 자연과 함께 일치하는 점경인물로 등장하는 것이 상례였다. 이러한 예에 비추어 조중태의 「여인도」는 인물의 전신을 균질(均質)적으로 다루고 있고 인물의 배경으로 등장하는 초목이나 바위 등이 마치 무대의 배경처럼 처리되고 있다. 이러한 인물 표현법은 우리에게 있어서 근대적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것은 일본의 인물화에서 영향을 받은 덧이며 일본화는 서양의 고전주의 시대의 인물화를 받아들인 것으로 파악될 수 있다. 일제시대를 통해서 받아들인 이러한 화풍을 조중태는 어떻게 소화해내고 있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이 시기에 있어서 이러한 표현의 인물화는 이당 김은호가 제징 잘하였다. 김은호는 1892년생으로 당대 제일가는 명성을 누렸던 화가이다. 그리고 그의 인물화법은 많은 제자들에게 이어졌다. 조중태의 인물이 김은호의 인물화법과 매우 유사성을 보이고 있다. 얼굴 표정이 별로 변화를 보이지 않은 정형화된 미인형의 얼굴과 선묘 그리고 설채의 모습이 정형화된 김은호의 미인도와 유사한 것이다. 그러나 김은호와 조중태의 관계도 지금으로서는 확인할 수 없다. 그리고 조중태는 김은호와 직접적인 사승관계를 유지했을 것으로 보여지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김은호의 제자들은 후일 ‘후소회’ 라는 그룹을 조직하여 활동했다. 그러나 조중태의 이름이 올라있지 않고 만을 그가 김은호의 제자였다면 기량으로 보아 이 그룹에서 제외되었을 까닭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조중태의 이러한 화풍의 성립은 더욱 많은 자료와 확인이 필요한 것이다. 다만 지금까지의 추정으로 보아 당시 화단에 널리 알려지고 있었던 김은호의 인물화와 그 이류를 통해 스스로 습득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또 한편으로는 어떤 연유로 해서 일본 인물화를 보고 한국 여인상을 창출해 내었는지도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조중태가 이렇듯 순수하게 주변의 자료를 통해 스스로 도달한 경우라면 조중태의 화가로서의 기량은 놀라운 것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어떻든 조중태는 당시로서는 근대적이라고 볼 수 있었던 신 일본 화풍을 소화해낸 이 지역의 대표적 인물이었음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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