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9 | [문화와사람]
작품과 나
막막함 속에서 길 찾기
글/복효근 시인 안월고등학교 교사
(2004-02-10 10:31:37)
시 쓰는 놈에게 시 쓰는 것 말고 이와 관련된 잡설을 늘어놓으라니 막막하다.
그렇다. 막막하다 막막했고 막막할 것이다.
궁벽한 시골 먼지 풀풀 날리는 신작로는 있었으나 아무도 신작로 저 끝 어떤 세상이 있는지 알려주는 사람은 없었다. 형제들은 다 집을 떠나고 늙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싸워가며 살았다.
집 뒤에 키 큰 감나무가 한 그루 있었고... 몸이 약한 나는 늘 동무들의 놀이 뒷전에 있었다. 나는 어려수부터 눈물이 참 많았다. 지금 생각해도 막막하다. 시렁위에는 오래 전에 집 떠난 큰형이 쓰던 화구가 얹혀 있었다. 형은 혼자서 그림을 공부했다고 한다. 나는 감나무 아래 장독대에서 그림을 그렸다.
내가 고등학교를 가면서부터 아버지는 농사를 놓으셨고 어머니는 더러 품을 팔았다. 나는 그림을 그리지 않았고. 그리지 못했다. 독서실 친척집으로 전전하는 나는 그 막막함 속에 ‘시라는 것’을 썼다. 학교 독서실에서 사서 선생님을 도우면서 참 많은 시를 읽기도 했다. 막막하고 외로울 때면 그 ‘시라는 것’을 썼다.
대학에 들어서서 다시 화실을 다녔다. 데생을 했다. 몇 달 가지는 못했지만...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그 무렵 한 사건을 기억한다. 고은이 쓴 이중섭 평전을 읽고 때마침 서울 호암 아트홀에서 열리는 이중섭전을 보러 갔다. 그 때 밖에는 장대비가 내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웬 청년 하나가 옷을 발가벗고 비가 오는 거리를 뛰기 시작했다. 그는 거리의 차를 이리 저리 피하여 중앙일보 사옥을 힘겹게 한 바뀌 돌더니 계단 아래 털썩 주저 앉는 것이었다. 소위 스트리킹이라는 것이다. 아직도 설명할 수 없지만 그 때 그 사내의 막막함과 처절함, 기쁨과 슬픔과 절망이 내 온몸으로 전해왔고 나는 오래오래 전율을 느겼다.
최루탄에 뒤덮인 80년대 초 대학시절은 막막함 그 자체였다. 이전에 접해보지 못한 전위적인 시들을 접하게 되었다. 이른바 80년대를 ‘시의 시대’라 부를 만큼 위대한 시의 시대였다. 상명서도 시가 되었고 구호에도 싯귀가 인용되고 대자보도 시처럼 보였다. 술을 마시고 문학을 이야기했다. 지금 생각하면 치졸하기 그지없지만 우리는 당시 사회가 강요하는 고압적인 이분법을 그대로 답습했지 않나 싶다. 모더니즘과 리얼리즘을 , 그리고 민중성 혹은 사회 역사성 서정성 예술들을 서로의 대척점으로만 파악하는 것 말이다.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그런 가운데 내 시는 감상적이고 모더니티하다는 지적을 자주 받았다. 많은 친구들이 잡혀가고 수배당하고 학교를 떠났다. 나도 알게 모르게 80년대의 세례를 받았다. 그래도 내 시의 한 켠에 역사와 사회에 대한 책무감이 배어있다면 80년대의 막막함 덕분에 아니었을까 한다.
한번 빠지면 좀체로 헤어나올 수 없는 것이 나의 큰 흠이다. 안개속 같은 연애감정, 그리고 누가 안겨주어서가 아닌 스스로 맞이한 실연... 헤어날 수 없는 상실감 저쪽에 군대라는 것이 있었다. 그러나 다시 맞은 그막막함이란... 남해 조그만 섬에 해안 초병이 되어 나는 일생의 반을 살아버린 느낌이다.그때도 시라고 이름 붙이기에 너무도 감상적인 낙서를 끊임없이 해왔다. 복학 후, 비로소 시를 쓰리라 마음먹었다. 그러나 시로써 내 삶의 한 부분을 열어간다는 것도 결코 자유로운 작업은 아니었다. 내 발목 싸이즈에 맞는 족쇄를 골라 찬 것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가끔 한다. 내 삶의 변혁 운동의 중심에 있지 못했다. 따라서 김승희의 말대로 ‘민중시의 시대에 민중시를 쓰지’못했다. 아니, 쓸 수 없었다. 천부적인 내 부끄럼 탓이기도 했지만 ‘민중적’이지 못한 나의 시를 두고 누구에게도 나는 시를 쓰고 있노라고, 시를 공부한다고 말할 수 없었던 시절이기도 했다. 시 쓰기 자체가 막막함이었던 것이다.
교직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전교조에 관련되어 해직의 협박 앞에서 나는 무릎을 꿇어야 했다. 그때의 자괴감, 미안함은 지금도 말로 할 수 없다. 이쪽 저쪽을 갈라놓고 정해진 어느 한 쪽을 택하기를 가요했다 참으로 막막한 시절이었다. 그렇게 80년대가 갔다.
90년대에 들어섰다. 물론 세월이 10년 단위로 가는 것은 아니지만 80년대는 어떤 형식으로든 극복되어야 했다. 모더니즘과 리얼리즘을, 그리고 민중성 혹은 사회 역사성과 서정성 예술성들을 서로의 대척점으로만 보는 논의 속에서 우리가 얻고 잃은 것이 무엇인가를 어느 것도 아니다. 나는 곽재구나 고재종, 안도현 등등의 글들이 균형감각을 잃지 않고 880년대를 헤쳐온 것을 보아왔다. 나 또한 건강하고 예술성 높은 글을 쓰고 싶었다. 그것이 80년대가 나에게 안겨준 교훈이기도 했다. 그래, 그게 맘대로 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렇게 하고자 노력해왔다. 노력할 것이다.
위에서 나는 짧고 보잘 것 없는, 지극히 시적이지 않은 나의 지난 삶을 돌아보았다. 나의 어느 한 작품, 또는 작품 전체를 설명할 길이 없어서였다.
시집을 묶어냈다. <당신이 슬플 때 나는 사랑한다>는 나의 첫 시집의 제목이다. 용담이라는 꽃에 붙여진 꽃말이라고 한다. ‘사랑에 무슨 조건이 붙느냐, 슬픈사람만 사랑하는 놈은 좀 어디 이상한 놈 아니냐?“하고 시비를 걸어오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지만 여기서 ’당신이 슬플 때‘는 어떤 조건(if)을 뜻하지 않는다. ’당신이 슬플 때‘는 ’당신이 막막할때‘와 같은 말로 생각하면 크게 틀리지 않는다. 외롭고 괴롭고 막막하고 슬프고 모자르고 버림받음에 사랑은 그 본질적 가치를 발휘하는 것이 아닐까? 어쨌든 나의 이 첫 시집은 막막한 지난 삶과 80년대에 대한 나 나름의 답인 것이다.
요약하자면 그렇다. 어린 시절 그림이 그랬다면 시쓰기는 살므이 막막함 속에서 길을 찾는 작업이었다. 아직도 나는 시 쓰는 내 자신을 돌아보면, 그 때 빗속에서 발가벗고 스트리킹 하던 그 사내의 모습이 더오른다. 설명할 수 없다. 시를 쓰는 나의 모습이 어쩐지 그 사내와 같다는 생각뿐이다.
산문적인 진술에 익숙치 못하다 보니 자꾸 빗나가려한다. 시를 쓰는 나의 자세르 f한 편의 시르 통하여 보여주면서 서둘러 이 글을 닫고 자 한다.
언강생심 햇빛이기를/꿈꾸지 않는다 다만/달빛이었으면 좋겠다/아직도 밤으로/밤으로 먼 길 가는 사람 있어/잠 못 이뤄 만져보는/달빛.../두만강과 압록강 섬진/강만이 아리라/아직도 사람 사는/두메마을 깊숙이/말라비틀어진 냇가를 비추거나/천지며 백록담뿐만 아니라/사람떠나 빗물만 고인/산골마을 두레샘도 비추고/그 마을 할머니 말라버린/눈물샘도 비추어서/큰 것만을 노래하다가 너무/밝고 뜨거운 것만을 노래하다가/시인들이 두고간 마지막 것들을/가만히 가만히 비춰주고 싶다/ 내 시가 달빛이라면... (졸작 ‘내 시가 달빛이라면’ 전문)
시는 상처받은 자의 몫이다.
막막하고 막막했고 막막할 것이다. 시를 썼고 시를 쓰고 시를 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