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9 | [문화저널]
여성과 문화
어머니 역할 없는 세상?!
이혜경의 <길위의 집>
글/여성문학연구모임
(2004-02-10 10:23:00)
오늘날 현실에서의 자립의 단위는 개인이 아니라 가족이다. 그렇다면 ‘가족’이란 무엇인가? 혹자는 이 질문이 너무나도 쉽고 어쩌면 우매하다고까지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 울타리 안에서 우리들이 살아가고 또한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내면화 되어버린 가족, 교육체게, 대중매체, 광고, 각종 오락물 전역에 가족주의 이데올로기가 너무 깊게 침윤되어 있어 ‘평균적 가족’이라고 하는 개념이 팽배한 사회에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혹자의 비웃음은 당연한 결과라 할수 있을 것이다.
가족이 가족 성원들에 주는 정서적 안정감과 애정, 깊은 유대감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가족문제를 굳이 짚고 넘어가야 하는 이유는 먼저 역사적으로 가족을 통해서 계급의 위치와 부, 성의불평등이 시대적으로 계속해서 상속된다고 하는 사실과 사생활권 보호라는 명분 아래 벌어지고 있는 가족 내부의 여러 가지 갈등들이 은폐되고 있다는 지금의 현실 때문이다.
‘가족’이라는 용어는 라틴어 기원은 파밀리아(familia)즉, 한 사람에게 종속되는 노예의 총체를 뜻한다고 한다. 또 주지할 점은 18세기 이후의 역사적분석을 통해서 볼 때 가족은 생물학적으로 자연스럽게 형성된 제도가 아닌 사회와의 유기적 상호작용을 통해서 만들어진 사회적, 경제적 제도라는 점이다 더군다나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사회 영역은 가족을 시장경제 외부로 밀어내 버렸다. 다시 말해서 시장에서 원하는 노동력은 건강한 성인 남성이었고 그 외의 가족 구성원을 돌보는 역할을 맡은 여성은 주변인 즉 시장밖의 영역으로 방치되어 버린 것이다. 이런 식으로 시장은 주부들로 하여금 가사노동을 무급, 부불노동으로 만들어 값싼 임금으로 득을 본 것이다.
이같은 상황 속에서 규범과 권위를 성과 세대에 따라 불균등하게 배분하는 권력 관계인 가부장제 속에서 여성 특히 우리의 어머니들이 가족 최대의 희생자가 되는 것은당연한 귀결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최근 우리나라에서의 남성 중심 가부장제의 페해를 잘 꼬집어낸 작품이 바로 이혜경의 <길위의 집>이다. 4남1녀를 둔 권위적이고 가부장적인 중산층의아버지 길중 씨, 순종적이고 자기희생적이며 술취한 남편의 폭력을 용인해 버리는 어머니 윤 씨, 견디기 힘든 삶으로 마치낸 치매현상을 보이는 어머니와 늙어 힘없는 아버지를 모시는 혼기 놓친 딸 은용, 거부하고 싶지만 묵묵히 아버지의 권위에 복종하는 큰아들 효기, 아버지의 폭력에 저항하며 보편적인 관습과 규범에 순응하기를 거부하는 윤기 등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한 집안의 가족이야기를 그려낸 소설이다. 사랑하는 사람 현희와 아버지 때문에 헤어지게 되자 윤기는 중매로 결혼을 하게 되고 아무런 애정없이 권태롭게 살아간다. 그러던 어는날 현희의 출현으로 인해 부인과 싸움이 벌어지고 이 장면을 목격한 어머니 윤 씨가 충격으로 가출을하게된다. 어머니의 치매 현상과 가출로 인해 아버지 길중 씨는 지난날의 자신을 후회하게 되고 윤기 또한 자신을 그렇게 만들어 버리고 어머니를 그 지경으로까지 만들어 버린 아버지의 권력주의를 맹렬히 비판하게 된다. 하지만 우리가 길중 씨만을 비판할 수 없는 이유가 있다. 길중 씨 또한 교육보다는 돈을 더욱 중히 여겨 배우고 싶어도 배울 수 있는 기회조차 주지 않았던 아버지가 지배하고 있던 가부장제의 피해자이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여기서 우리는 가부장제의 가장 큰 희생자가 어머니라는 사실과 그 피해가 한 세대만으로 그치지지 않고 세대를 통해 거듭된다고 하는 사실을 알 수 있으며, 또한 그 원인을 한 개인의 특수성에서 찾을 수 없음을 알게 된다. 자식을 개별 인격체로 보지 않고 소유하려고 하는 데서 빚어지는 비극, 어려서부터 부모와의 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뿌리박힌 자식들의 성역활의 차이(gender)까지도 가부장제가 빚어내는 또다른 폐단임을 알 수 있다.
요즈음 매체를 통해 페미니즘이라는 용어가 우리들에게 익숙해져 있다. 그러나 이것으로 여성들의 상황이 아주 호전되었다고 섣불리 판단하지 말자. 왜냐하면 여성들의 상황 개선보다는 소비자들의 소비심리를 자극하여 이윤을 추구하는 데만 급급한 자본의 논리로 인해 그진정한 의미가 사상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따라서 좀더 평등한 세상을 만들어 가기 위해서는 더 이상 부인과 아이들이 남편 혹은 아이의 종속하에 존재하는 타자로 그칠 것이 아니라 자기 정체성을 회복하고 나아가 새로운 여성성을 재창조해 나가야 할 것이다. 또한 가족에게 전적으로 맡겨진 양육, 노약자보호 등의 일을 국가가 제도적 정책적 차원에서 전담해 준다면 여성 특히 우리 어머니들의 상황은 나아지게 될 것이다.
어머니 혼자 자식에 대한 책임을 짊어지는 고착화된 성역할 분할이 사라져 가지는 세상, 자연스럽게 역할 교환을 하는 부모를 보며 자녀들이 안정감을 느낄 수 있는 세상, 이데올로기화 된어머니 역할이 없는 세상을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