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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9 | [서평]
서평 희망을 잃지 않은 이들의 꿈 <필부를 꿈꾼 적 없다>
글/이수라 전북대학교 국문학과 박사과정 (2004-02-10 10:14:40)
언젠가 <청년문학> 회지에 글을 실은 적이 있다. 아마도 창립1주년 기념호였던 것 같은데 1년 동안 당신들의 활동을 보면서 내 느낌이 이러저러 했다는 내용의 그저 그런 글이었다. 그리고 2년이 흐른 지금 그들의 모든 활동이 총화라고 할 수 있는 창립 3주년 기념 선집<필부를 꿈꾼 적 없다>에 대해서 이러쿵 저러쿵 하려니 일단 부담부터 앞선다. 어쩌다 보니 소설가와 시인으로 등록된 사람들이 주위에 몇 있다. 그들의 작품을 읽을 때마다 난감함을 느낀다. 비교적 객관적인 자세(철저하게 객관적인 시각이란 있을 수 없는 것 아닌가)를 취할 수 없는 탓이다. ‘청년문학회’ 사람들의 작품을 읽을 때도 역시 얼굴 마주친 사람이 많고 함께 술잔을 기울인 적이 있는 사람도 여럿 되다 보니 자연히 한 통속이라는 생각부터 앞선다. 명색이 대학원에서 문학을 공부하는 사람인데, 그런 이유로 해서 객관적인 자세를 유지하지 못한다는 것은 아직 공부가 부족한 탓이 크지만, 니 편 내 편 가리기에는 너무나 가깝게 느껴지는 사람들이라. 먼저 알아챈 팔이 안으로 굽어들 준비부터 하게 된다. 같은 편이라면 무지막지하게 깎아내리기보다는 잘한 것은 어깨가 들썩일 만큼 칭찬해 주고, 잘못한 것은 기죽지 않을 만큼에서 절제하여 힘낼 수 있게 배려하는 애정을 보이는 것이 현명한게 아닐까. 그들은 선언하고 나섰다. ‘필부를 꿈꾼 적 없다’ 고 과연 그들이 생각하는 필부는 어떤 것이길래 한사코 필부이기를 거부하는 것인지 솔곳이 궁금하기도 하다. 여러사람들의 글을 모아놓은 터라 조리있고 체계적인 어떤 것을 찾기는 쉽지 않을 것이지만. 최소한 그들은 모두 ‘청년 문학회’란 이름 아래 모여 있으니, 최소한 서로 비슷한 소리는 내고 있으리라. 이러한 생각을 뒷받침하는 것이 그들 스스로 올해를 ‘창작의 해’로 정하고 실시한 자체 설문조사 결과이다. 그들은 문학의 대사회적 기능의 가능성 혹은 당위성을 대부분 긍정하고 있었다. 또 현문단 풍토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견지하면서 꼭 등단할 것을 목표로 하는 것도 아니고, 대체로 문학을 자신들의 삶 그 자체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는 참으로 칭찬받을 만한 태도일 것이다. 굳이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늘어놓아서라도 세상에 이름을 내려 하지도 않고, 상업주의에 편승하여 화려한 생활을 누리려 하지도 않는다. 다만 문학 행위 자체에 의미를 두고 자신의 목소리를 당당히 지켜간다. 하지만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닐지. 그들은 주로 역사를 노래한다. 역사라는 말이 부담스럽다면 그저 고향과 가족이라고 해두자. 또 그들이 경험한 80년대와 90년대라고 해두자. 어쨌든 그들이 주로 노래하는 대상은 자신들의 의지나 노력과는 상관없이 피폐해져 가는 농촌과 어렵지만 성실하게 지나온 시간과 현재의 삶의 무게를 힘겹게 지탱하는 부모들이다. 혹은 그들자신의 청년기를 지배했던 80년대와 그 80년대를 깡그리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어버리려는 현재의 세계이다. 그들은 모두 이 모든 것들에 대해 연민과 안타까움을 표현한다. 하지만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80년대를 거쳐온 사람들이 모두들 일상으로, 평범한 필부필녀로 돌아갔다고 생각했다. 너나없이 90년대 중반이란 시간 속으로 안락한 자리를 찾아 스며들어 버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이와, 보기만 해도 오진 그 자식새끼와 장난질을 치면서도 끝내 ‘필부를 꿈꾼적없다“고 속앓보다 더 붉게 외쳐대는 사람, 사람들이 있었다. 아니 어쩌면 외침보다 그들의 속앓이는 d더 깊고 붉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서 어쨌단 말인가. 이 시대에 모두가 제자리를 떠나버린 이 시대에 아직도 자리를 견고하게 지키고 앉아서 필부를 꿈꾼 적 없다고 외치다니, 그 용기 참 가상하다고, 더 높이 사서 참 용감하다고 애기하는 것은 서로에게 그리 도움이 될 성싶지 않다. 술잔을 기울이며 주질러 앉아있다면 저들과 다를 게 무언가. 광장스런 몸짓으로 절망을 애기하며 90년대에 투항해 버린 저들과 저들의 과장에는 언제나 80년대를, 역사를 온 몸으로 버팅겨 왔다는, 그러니 이제는 절망해도 되지 않겠느냐는 그런 강력하고도 낯간지러운 항의가 내포되어 있지 않던가. 외침으로 그치는 것은 허허롭다. 차라리 ‘저 좆겉은 하늘 푹 쑤셔 뿔’자고 <저 좆 겉은 하늘 좀 보소> ‘쇠스랑으로 그름치듯기/니공갈이랑 협박이랑 논밭에 다 뿌리려 버린다고(그냐 앙그냐)팔걷고 나서는 더 용감한 것은 아닐지, 그렇다고 꼭 이러한 방식만이 올바른 것이라고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문학의 대사회적 기능의 가능성 혹은 당위성을 인정하는 사람들이 가져야 할 문학에 대한 태도에 대해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들이 생각하면 늘 떠오르는 기억이 하나 있다. 대학교 1학년때 처음 보았던 소위 데모라는 것인데.그것은 고등학교 때 구경해도 잡아간다던 은밀한 소문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였다. 데모는 사람들은 보이지도 않고 진들만이 새까많게 거대한 그물을 펼쳐들고 학교 안까지 몰려들어와 있었다. 간간히 그물에 걸리던 구호 소리 왜 그때 그 풍경이 떠오르는지 모를 일이다. 지금은 90년대하고도 중반이다 한 켠을 점령한 시위대를 호위(?)하는 전경이 입술을 달싹여기며 시위대의 노래르 따라부르는 그런 시대이다. 이제 이 시대는 필요하면서도 어울리는 목소리로 노래를 해야 하는 것은 아닌지. 그래야만 ‘화려한 피는 꽃, 불의 꽃이 진 자리에서 새롭게 탄생하는 과실의 핵, 씨앗(선집을 내면서)이 될 수 있는 것 아닌지. 그래야만 진정한 희망을 얘기하는 것이며 그것이 곧 필부를 꿈꾸지 않은 사람들의 삶의 자세는 아닐지. 얘기하는 김에 한 가지만 더 하자. 소설가인 어떤 선배가 시인이 되기를 꿈꾸는 한 후배에게 농담처럼 그런 말을 했다. 우리 시대에 시인은 길가에 구르는 돌멩이만큼이나 많다고. 창립 1주년 기념호에 글을 쓰면서도 소설이 거의 없음에 불만을 표했던 기억이 있다. 창립 3주년 기념 선집인 이 책에 실린 소설은 그 때 읽었던 한 편뿐이다. 올해는 그들의 각오가 매우 진지하고 열성적이므로 기대를 가져보아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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