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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9 | [문화비평]
곽병창의 문화비평 8.15와 고스톱
글/곽병창 연극연출가 전북대 강사 (2004-02-10 09:58:02)
해방된 지 만 오십 년이 지났다. 이를 기념하면서, 또 다시 다가올 새로운 오십 년을 통일 민족으로서의 번영을 다지는 기간으로 삼아야 한다는 다짐이 한창이다. 때맞춰 일제 식민통치를 상징하는 구총독부 건물을 헐어 내는 대역사가 진행되고 있고, 그일자체를 기념하는 대규모 공연도 펼쳐진다. 그런가 하면 새로 발굴된 자료들을 대거 앞세워서 저들의 잔인한 만행을 되새기자는 캠페인도 한창이다. 친일파와 독립운동가들의 대조적인 생애를 조명하는 문예물들도 여러 곳에서 만들어 선보이고 있으며, 다소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이번 오십 주년을 계기로 해서 북한과의 관계를 새롭게 모색하고 통일의 기운을 더욱 복돋우자는 움직임도 분명히 있다. 겉으로 보기에 이번 오십주년 행사는 매우 다채롭고도 풍성하게 전국 각처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같다. 방송은 방송대로 신문은 또 나름대로 기획물들을 통해 그 의의를 다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해방 오십 주년은 진정으로 민족 전체가 기뻐하는 온 민족의 경축일인가? 길놀이를 위해 채감온도 사십 도를 오르내리는 도심의 아스팥트 위에서 뛰고 구르는 이들에겐 진정 그럴 것이다. 정신대 할머니나 태평양전쟁 희생자 ,만주로 사할린으로 중아아시아로 유랑해 간 동포들의 잃어버린 망국의 역사를 되새기려 애쓰는 이들에겐 분명히 진정 그럴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이런 노력을 비웃거나 외면하면서, 이들보다 훨씬 기름진 삶을 잘도 산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해방절 연휴를 전국 각처의 피서지에서 마음껏 구가하고 있는가? 그뿐인가? 마치, 해방오십년 동안 우리 나라가 얼마나 풍요롭게 되었는지를 과시라도 하려는 듯이, 우리들의 발길은 이 혹서의 계절을 맞아, 사이판으로 괌으로 그밖의 동남아와 진주만까지도 마음껏 누비고 있다. 참혹한 전쟁의 수탈의 기억이 서린 땅들을 오가며 즐기고, 우리는 오십 년 동안의 가난과 억압의 세월들을 잊는다. 누군가가 이런 현상을 두고 우리 식의 한풀이라고 했던가? 못 먹고 억눌려 살았던 젊은 시절이 너무도 억울해서,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미칠 것 같아서 우리는 이런시간에도 그 기묘한 한을 풀고 있는 셈이라는 것이다. 한번 그렇게 하기로 마음먹은 김에 아예남들보다 조금이라도 더 튀게 놀고 싶어서, 곳곳에서 경쟁적으로 먹고 마시며 흔들어대는 것일까? 그러고는 서늘한 나무 그늘에 앉아, 일본 사람들이 남기고 간 가장 막강한 유산인 화투로 여름밤을 잊는다. 그 중 가장 높은 점수를 딴 순간, 계곡이 울리도록, ‘났다 고도리’를 외치면서 말이다. 이 역시, 비운의 친일 지식인 춘원의 고뇌 그대로 ‘개조되어야 할 민족성’ 탓인가? 아니다. 우리 국민들이 국민적 경축일을 기념하는 일이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은 이유나, 아직껏 식민지 시절의 문화적 찌꺼기를 다 버리지 못하는 이유, 또이제는 내놓고 일본 대중문화가 청소년들의 의식부터 잠식해 오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민족성이 잘못된 탓이 아닐 것이다. 제대로라면, 모든 국민들의 가슴속에 해방의 자랑스러운 역사가 되어서 누구나 내 아내, 내 자식과 함께 그 경축의 마당에 다 나아가 함께 하고 싶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묘하게도 우리들 대부분은 민족과 조국을 사랑하는 일이 낯설다. 그리고 마음 한 구석에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독립 민주투사나 거짓말 잘하는 정치가들 거야’하며 냉소를 보내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생각은 세월이 갈수록, 나이가 들수록 더 굳어져서 그게 다 ‘젊은 애들이나 할 짓’으로 쉽게 정리되어 버리는 것이 다. 식민통치 삼십육년을 받은 민족 치고 이건 너무 하다 싶지만, 사실인 걸 어쩌겠는가? 이게 다, 조국과 민족을 사랑한 사람들이, 조국과 민족을 배반한 사람들에 비해 훨씬 남루한 삶을 살 수 밖에 없던, 그 일그러진 역사 탓인 건 아닐까? 일제의 잔재의 청산을 몇십년째 외치고 있지만, 반민족 행위자를 처벌하자고 외치던 사람의 후손은 여전히 날품팔이와 행상으로 연명하고 있다. 여전히 단죄의 대상이었던 사람들은 권세와 부를 뽐내며 살아오는 것이다. 하기야 불과 십오년 전의 일도 역사에 묻어버리자고 말하는 이들에게, 오십 년 전의 일을 바로잡자는 주장이 얼마나 퀘퀘하게 느껴질 것인가? 또한 민족적인 것을 애지중지 존중하는 것보다, 하루라도 빨리 세계시민이 되어 사는 것이 미래의 갈 길이라고 외치는 개방적 선각(?)들의 입담은 갈수록 더 우랑차다.이런 이런 일이 횡행하는 한, 역사와 민족에 대한 국민들의 무관심은 돌이킬수 없을 것이다. 그와 동시에, 일본식이고 서구식인 그 잡탕 향락문화에 대한 탐닉은 점점 더 깊어질 것이다. 거룩한 마음으로 태극기를 내어 걸고 기념식 생중계를 보면서, 마일스 세분의 알싸한 연기에 잠기는 우리들의 일상도 바뀔리 없다. 일본 각료들의 몰역사적인 망언에 눈을 부라리면서도, ‘나가리’가 되어 버린 전직 대통력의 비자금 사건을 한 판 웃음거리로 잊어 주는 우리들의 건망증도 여전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새로 다가올 오십 년은 고스톱과 마일드 쎄븐의 사슬에서 해방되는 일로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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