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8 | [문화와사람]
“호랑이를 꿈 꾸었지만 고양이를 그려낸 재주없는 그림꾼”
전주 MBC 창사특집 “쌀” 2부작
문화저널(2004-02-10 09:46:18)
제작에 들어가기 전
지난 겨울「사내 프로그램 및 행사 아이디어 공모」에서 순전히 아이디어 차원에서 제출한 ‘쌀’이 덜컥 금년도 창사특집으로 결정되는 바람에 곤혹스럽게(?) 시작한 프로그램이 창사 30주년 기념 기획특집 ‘쌀’이다. 곤혹스러웠던 까닭은 소재의 광범함과 무한량의 접근통로 그리고 무엇보다 소재가 안고있는 무게에 비추어 아이디어 차원이 아닌 제작을 위한 준비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작을 위해 정규 프로그램으로부터 빠져나온 시간은 시간은 50분물 2부작 방송 석달 전. 이때부터 자료 찾고 읽기, 도움될한 전문가 찾아 얘기듣기, 기획안 및 구성안 틀잡기, 연이어 촬영 일정 조정 및 섭외, 국내외 출장 준비, 그리고 촬영을 위한 출장과 편집, 제작으로 이어지는 시간은 참으로 빨리도 흘러줬다.
각설하고 폭발적인 인화력으로 전국민적인 관심의 대상이었던 쌀을 어떻게 살피어 나가는 것이 TV프로그램으로서 적절한 가치와 타당성을 지닐지 자료를 더듬어 나갈수록 미로에 빠져드는 곤혹감을 지울 수 없었다. ‘쌀의 고장 전라도’, ‘김제만경 너른 들’, ‘일제하 수탈의 상징’, ‘UR과 쌀 개방압력’, ‘농민들의 시위와 쌀 개방 반대 천만인 서명’, ‘쌀! 우리 민족의 삶’, ‘피폐한 농촌과 농민’, 등등 어지럽게 떠오르는 낱말들이 어디를 두드려야 될지, 어떤 길을 타고 넘나들어야할지 갈피를 잡기 어렵게 만들었다.
거기에 하나의 주문이 들어왔다. 금년이 광복 50주년임을 유념하여 일제의 쌀 수탈을 집중적으로 조명하였다면 한다는 당시 국장님의 제안이었다. 어지럽던 머리가 오히려 일정한 부분으로 갈피를 잡아가면서 이번 프로그램 제작에 결정적 도움을 준 농촌진흥청 호남농업시험장의 김종호 박사를 만난 것은 지난 3월 말 70년대 우리나라 식량 자급달성의 신기원을 이룬 통일벼를 개발한 주역의 한 분인 김 박사는 호남농업시험장장을 지내고 공로연수증으로 비교적 여유롭게 활용할 수 있는데다가 이번에 취재 대상이 되었던 일본의 쓰꾸바 농업연구센터와 필리핀의 국제미작연구소에서 직접 연구한 적이 있어 취재기간 내내 최량의 도움을 안겨주었다. 아무려나 대체적인 프로그램의 방향은 우리나라 쌀 생간의 본거지인 전라도에서 추적해보는 도작문화의 원류, 미작이 형태와 발전, 일제하 수탈의 상징이었던 쌀이 수난과 그 표본으로써 구마모또 농장주, 개방 파고를 맞는 오늘의 쌀, 우리와 비슷한 처지의 일본이 끌어안고 있는 쌀농사의 모습, 쌀 품종 개발을 위한 일본 연구진의 모습 21세기 식량위기를 대비하는 필리핀 국제미작연구소의 활동 등을 담기로 하였다. 그리고 우리나라 육종분야의 발전과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자세로 우리 농촌을 지키는 토박이 우리 농부들의 전형을 보여 주는 것을 큰 축으로 삼아 50분물 2부작을 꾸려나가기로 하였다.
제작에 들어가서
세상에 대부분이 그렇지만 ‘쌀’을 바라보는 시각도 서 있는 입장에 따라 참으로 다양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우선 대다수의 우리 국민이 드러내는 끈끈한 애정과 관심은 ‘쌀을 포기해서는 안된다’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이미 진행되고 있는 것은 ‘그거 아니지요’라는 되물음이다. 비교적 구체적이기보다는 정서적 반응이 대부분이지만 가장 분명한 메시지를 함축하고 있다. 구체적이지 못한 것은 사실이 명료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재편되는 세계 무역질서 속에 적당히 발을 빼는 당국의 현실적 정책 탓임을 많은 사람들이 눈치채고 있다.
그러나 프로그램에서는 어떤 분명한 메시지를 상징하기보다는 제작중에 만나는 각기 다른 사람, 조지들의 쌀에 대한 인식을 고스란히 보여주며 우리가 향후 취해 나갈 바를 감지해내고 싶었다.
쌀의 수난사
오늘이 쌀이 처한 현실이 위기요, 수난이라면 그 수난은 오랜 세월 계속돼온 바이다. 우리 역사가 수난의 역사라고 한다면 쌀은 그 대표적 상징인 것이다.
일제하 혹독한 수탈의 흔적은 호남들녘 곳곳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전라도 지역에서 가장 큰 일본인 대지주였던 구마모또 농장의 기억을 더듬으며 광복 50년의 의미, 쌀을 매개로 정리되지 않은 한국과 일본이의 의식이 편차를 확인하였다. 우리에게 아픈 수탈의 상징 구마모또는 일본에서 농업의 대선배, 일본과 한국의 농업을 선진화시키는 데 커다란 기여를 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다.
쌀을 향한 지속적인 연구와 노력
우리으 경우도 크게 다르지는 않지만 일본의 쓰꾸바 농업연구소에서 기울이는 신품종 쌀의 개발을 위한 육종연구는 결코 농업이 후진산업이 아님을 분명하게 인식시켜 주며 다가오는 시대를 대비하고 있었다. 또한 가누마시 농업공사에서 실시하는 집단영농의 성공적 사례는 열악해져만 가는 농촌현실과 부족한 노동력 해결을 위한 실마리를 제공해 주고 있다.
도쿄 시내 한 복판에서 운여되는「쌀 긴자갤러리」는 자꾸만 엷어지는 쌀에 대한 관심을 도시민에게 환기시키려는 일본인들의 노력 가운데 하나다. 쌀과 관계된 모든 것을 알기 쉽게 홍보하기 위한 노력은 매장 전부를 쌀로 만든 제품만으로 채워놓았다. 필리핀에 있는 국제미작연구소는 쌀이라는 단일 작물만을 대상으로 연구하는 세계 최대규모의 연구소이다. 우리나라를 비롯 세계 각국에서 출현한 기금으로 운영되는 이 연구소의 성과와 실적은 이미 널리 알려진 대로였다.
오늘날 쌀 수출국과 수입국의 치열한 대립에서 한 발 건너 다가오는 21세기 폭발적 인구 증가에 따른 식량위기를 예견하며 새로운 품종 개발을 위한 노력이 지속적으로 계속되고 있다. 획기적인 초다수확성 수퍼라이스가 이미 상당한 수준으로 개발되어 시험재배중이며 지구온난화 등 환경변화에 대비한 적응품종 개발을 위한 연구도 계속되고 있다. 그들의 관심은 오늘 우리가 안고있는 쌀수출입의 문제가 아니었다. 다가오는 21세기에는 우리가 쌀농사를 지금처럼 홀대하고 포기해 나갈 때 과연 우리가 필요한 쌀을 결코 수입할 곳이 여의치 않을 것이라는 냉엄한 현실의 인식을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다.
쌀은 결코 오늘의 문제라기 보다 다가오는 미래의 문제로 인식 전환을 하지 않는 한 엄청난 고통을 우리이게 강요할지 모른다는 사실이 마음을 조급하게 만든다. 결코 세계수준에 뒤지지 않는 우리의 육종 기술과 노력도 지난 개발시대만큼 각광받지는 못할지언정 멈추지 않는 열차처럼 꾸준히 계속되고 있음의 확인도 뿌듯한 일이다.
주체적이고 능동적으로 살아가는 우리 농부들, ‘농촌이 어렵다’라는 말은 차디 차고 명백한 현실이지만 대부분 진부한 언어로 치부하며 피하고 싶어한다. 직파농에 승부를 거는 김제 부량의 안태홍씨, 독특한 흑향미 생산으로 재미를 보는 전남 영안의 장주의씨, 고집스레 유기농을 실천하는 정읍 입암의 박문기씨, 그들은 좌고우면하는 전통적 모습을 오늘에 재현해 내는 뼈대있는 농투사니들로 우리 농촌의 미래를 밝혀주고 있다.
제작을 마치고
창사 30특집 ‘쌀’ 2부작을 제작하면서 지금 어렵다고 쌀을 포기해서는 결코 안된다는 명제의 확인과 21세기 쌀의 역할은 우리 안에서보다 바깥에서 분명히 인식하고 준비되고 있음을 프로그램에 담아내고 싶었으나 느낀만큼 드러내지는 못하고 말았다. 그런만큼 프로그램을 만들고 난 뒤 빠져드는 공허감이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다.
시대를 관통하는 변화의 격류 속에 새롭게 새겨봐야될 ‘쌀’의 존재와 가치, 의미를 우리 삶과의 본래적 관계 속의 정립해보고 싶다고 기획서에 밝여있는 걸 바라보면서 호랑이를 꿈꾸며 고양이를 그려낸 재주없는 그림꾼을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