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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8 | [문화저널]
박남준 시인의 편지 문득 허허로워져서
박남준(2004-02-10 09:29:43)
만나면 무슨 그리 큰 반가움도 무어 그리 할 이야기는 있는 것도 아니지만 문득 멀리 소식없는 벗들 이렇게 보고 싶은 것인지. 처마끝을 긋고 가는 작은 여름비 뚝뚝 낙숫물 소리, 그럴때면 나 사는 모든 주위가 왜 그렇게 낯설고 텅비어 아무도 없구나 나 혼자, 나만이 혼자 여기에 남아 있구나 하는 생각에 잠겨 허허로워진다. 멀리 있는 것이 마음에 자리 잡으면 아름다운 빛이, 그리움을 향해 꽃피어 오른 푸른 산빛처럼 맑은 영혼이 된다고 하지만 아니다 나는 그렇지 않아 멀리 있는 것이 마음에 자리 잡으면 이윽고 깊어지면, 무너져 갈 뿐 아름다운 빛이 되어 가지 않는다. 그러고 보면 아무래도 나는 나이를 헛먹은 모양이야. 사람이 나이가 들면 들수록 자신의 마음을 좀 추스르며 편안해져야 하는 것인데, 아니 무엇보다 주위 사람들을 편안하게 해줘야 하는 것이 나이 값을 것일터인데 말이지. 이런 넋두리 같은 이야기나 하는 걸보면 그렇지 한번 다녀 가시게. 손바닥만한 채소밭이지만 싱그러운 것들이 제법 먹을 만하다네. 몇 포기 되지는 않지만 고추밭에 고추들이 그럭저럭 따 먹을 만큼. 열고 자라나서 벌써 몇 번 따먹었다네. 쑥갓이며 아욱은 이제 쇠어서 꽃이 피고 씨가 맺혀서 먹을 만한 게 못되지만 상추는 좀 씁쓰레하기는 해도 제법 먹을 만하네 그리고 배추도 있다네. 배추는 몇 차례 뽑아, 나누어 주기도 하고 배추국이며 상추와 함께 곁들어 쌈을 싸먹는데 여간 고소한 것이 아니야. 오늘 아침에는 배추를 조금 뽑아 물김치를 담았지. 사십이 다된 사내가 하는 짓이 이쯤이고 보니 쓸쓸하다기보다는 유행하는 말로 썰렁하다는 표현은 어떨런지. 내일 모레쯤이면 먹을 만한게 익어 가겠지. 참 호박도 좀 심었네. 심을 만한 땅이 좀 있다면 꽤 많이 심었을터인데 해서 뒷산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모종을 좀 해놓았다네, 심어 놓고 날이 가물어서 걱정을 했었는데 마침 비도 내려주고 했으니 이제 남은 일이라고는 호박의 억센 생명력만 믿고 기다릴 작정이야. 가끔씩 가서 풀숲이 너무 우거지지 않도록만 해준다면 글쎄 올 가을에는 다른 것은 몰라도 호박장사를 하게될지도 모르겠군. 장사가 잘 될지 모르지만, 이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실없는 웃음이 나네. 잘 지내시게, 끼니 거르지 말고 뭐니 뭐니 해도 밥 잘 먹는 것이 그중 보약이라는 옛어른들의 말씀, 조금도 틀림이 없는 사실이다네. 그리고 술 말이네 나 또한 주위 사람들에게 수없이 듣는 말이라서 내입으로 이런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우습지만 너무 마시지 않도록 알았는가. 한번 오시게. 아무런 말 나누지 않아도 술잔 기울이며 함께 있다면 좋지 않는가. 올 봄에 담은 송순주가 익어가고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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