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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8 | [문화비평]
흐르는 시간, 흐르지 않는 시간
글/곽병창 (2004-02-10 09:07:42)
우리가 연극을 보고 있는 동안 흘러가는 시간은 연극 안의 이야기가 흘러가는 시간과 다르다. 한 하늘 아래 한 태양빛을 받고 보내는 시간이지만, 우리가 객석에 앉아 보내는 한두 시간 사이에 무대 위에서는 몇 십 년의 세월이 흐르기도 하고 정지하기도 하고 되돌아 가기도 한다. 그게 연극에서만 그런 줄 알았는데, 요즈음 현실세계의 시간도 그런 것 같아서 우리를 당혹스럽게 한다. 19일 만에 죽음 콘크리트 더미르 뚫고 생명을 되찾은 한 소녀는 시간이 한 닷새쯤 지난 것 같다고 했고, 검찰은 성공한 쿠데타에 대해서는 공소권이 없다며, 곧 있을 15년 만의 면죄부 발행에 길을 터 주었다. 그런가 하면 행동하는 양심, 위해한 지도자였던 한 정치인은 자신을 비난하는 사람들을 향해 ‘시간이 약’일 거라면서 두고 보라고 한다. 이렇게 놀라운 일들이 연달아 벌어지고 있다. 갖가지 이름으로 갖가지 모습을 하고 나타나는 이 놀라운 일들은 마치 우리들의 놀라는 정도를 시험이라도 하려는 듯이 갈수록 그 강도를 높인다. 이제 웬만한 일에는 놀라지도 않을 거라며 자신하던 사람들은, 또 다시 화들짝 놀라는 자신을 보고 ‘이상하다. 아직 내게 이런 감정이 남아 있다니’ 하며 더욱 놀라워 한다. 우리는 이제 정말로 충분히 단련되어 있다. 탈것 중에 아무 것도 믿지 않지만 하루도 빠짐없이 그 탈 것에 의지해 살아간다. ‘내가 타는 이 차는 아마 튼튼할 거야’하고 믿으며, 또는 ‘무슨 좋지 않을 일이 일어난대로 먹을 길이 전혀 없는 걸 애달캐달해본들 무엇해’ 하고 체념하며 살아간다. 우리가 걷고 있는 이 길의 어느 곳이 갑자기 땅으로 푹 꺼질지 버스 정류장 뒤편의 빌딩이 언제 쏟아져 덮칠지 모르지만 그저 살아있는 시간만이라도 그런 상상을 하지 않아야 그나마 살 수 있으므로 잊고 산다. 무너지는 건물과 가라앉는 배에 대한 상상이야 이처럼 떨쳐버리면 그만일 터지만, 그래서 다음 차례의 대형 참사가 찾아오기까지 잠시라도 휴식을 취하고 있으면 될 일이지만 아침 저녁으로 티브이와 신문에서 낯익은 사람들의 극적인 이야기들은 정말 너무도 형편없이 극적이어서, 하루 한시도 우리를 가만 두지 않는다. 조변석개(朝變夕改), 아무리 변하지 않고 바뀌지 않는 것은 살아남기 힘든 세상이라지만, 동지와 적을 바꾸는 일, 지지자들의 절망감과 울분, 추종세력들의 전전긍긍이나 비등하는 여론까지 아무렇게나 둬도 좋다고 여기면서 일거에 되돌아서는 일, 이처럼 너무도 뻔한 극적 테크닉을 구사하는 정치 드라마를 보는 일은 다소 견디기 힘들다. 정치적 허무주의를 이기지 않고는 이 천한 정치 쇼를 멈추게 하지 못할 것이라고들 하지만, 정말 안타깝게도 우리 나라 정치(政治), 하나도 정치(精緻)하지 못하게 얼기설기 엮어 놓은 그 엉성한 드라마를 쳐다 보고 있노라면, 가끔 아주 길고 지루한 활극을 연상하게 된다. 너무너무 심심하던 어느 일요일 오후에 몰래 숨어들어가서 보던 두 편 동시상영관의 그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칼싸움 영화, 액션의 참신함도 전혀 없고, 싸우는 이유도 끝도 없이 이어지고, 까닭도 없이 하늘을 날아다니기만 하던 그런 삼류 활극 말이다. 보는 이들의 태도 또한 가관이어서 아예 집에서 부모님 눈치 보느라고 다 못 잔 낮잠을 위해 그 어두운 곳을 택한 떠꺼머리 고등학생들이 몇 영화와는 관계없이 다만 음침한 곳이 필요했음직한 남녀들이 또 몇 쌍, 그리고 그런 풍경에서 이 어려운 인생의 진실을 취재해볼까 하고 스며들어온 문학도들이 또 몇 그렇게만 있었다. 스크린에서는 사람들이 몇 백인지 몇 천인지 모르게, 그것도 가지각색의 모습으로 죽어가건만, 이미 그런 종류의 죽음에는 싫증이 날 만큼 난 관객들은, 각자의 자신의 그 고유한 목적에 충실하였다. 영화 속의 주인공들 또한 객석의 이런 움직임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 끝없는 싸움을 멈추지 않고 계속하였으며, 관객들은 가끔 아주 큰 음악소리가 들리거나 할 때면 눈을 들어 스크린을 한 번 보고는 차디찬 비웃음을 날리며 다시 본연의 일로 돌아가곤 했다. 보지 않을 수도 없고 정색을 하고 보기에는 너무나 볼품없던 그 영화관에서 우리는 너무 길고 지루한 일요일 오후의 한때를 다만 때워 넘기곤 했었다. 그랬는데, 이제 어른이 다 되어서도 여전히 그런 이상한 활극을 하루 한 때도 안 빼놓고 쳐다보고만 있으니, 세상에 참 모를 일인 것이다. 여전히 그 이상한 활극을 제대로 바라보지도 않고 안 보지 도 않으면서 그 극장을 찾는 관객들의 발길도 줄어들지 않는다. 아직도 ‘몰표’라는 이름의 입장권을 사고 그 영화관에 들어가서는 그제서야 영화의 제목을 확인하고 조금 후회하고 조금 안도하며 객석에 앉는 것이다. 여전히 활동사진의 내용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어서 새우깡 봉지나 그녀의손을 더듬는 일에 몰두하다가, 스크린 쪽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가끔 시끄러우면서 슬쩍 놀란 표정을 지어 보이고 다시 각자의 일에 몰두하다가 돌아오는 그 기이한 관람의 버릇을 우리는 아직도 벌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직도 그런 몽롱한 관객들을 위한 영화는 끊임없이 만들어져서 전국 각처의 동시상영관으로 보내지고, 그 어두운 극장 안에는 흐르지 않는 시간이 고여 떠돌고 있는 것이다. 시간이란 정말 이렇게 들쭉날쭉 흘러가는 것인가? 그렇다. 저 컴컴한 콘크리트 더미 밑의 그 어느 먹방같은 공간에 흐르던 시간과, 자신의 정치적 일정에 맞춰 벌떼 같은 보도진을 이끌고 현장을 찾는 모모 인사들의 시간은 결코 같지 않다. 잊을 수 없는 악몽의 시나리오 속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한 채, 밤이면 절망의 신음 소리를 토해내는 부상자들이 시간과, 이 최악의 위기상황에서도 교묘하게 발을 빼 나갈 궁리를 하고 있는 업주와 공무원들의 시간은 분명 다를 것이다. 땅속 어둠을 견디고 있는 매몰자에게 주어진 시간은 잠시 멈추기라도 해야 하지만, 저 지루한 정치 활극을 위한 시간은 제발 두 배, 세 배로 빨리 흘러야 한다. ‘15년이 이렇게 쉽게 흘러갈 줄이야’하면서 득의의 웃음을 흘리고 있을 저 무서운 사람들에게 시간은 더 이상 흐르지 말아야 하지만, 느닷없는 총알 맞고 죽은 그 때 그 억울한 사람들의 가족들에게는 시간은 제발 거꾸로 흘러흘러서 80년 4월 어느 봄날 쯤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지금 새로 건물을 짓고 다리를 놓는 사람들의 시간은 더 더디 흘러야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을 잊어 버리는 우리 몽롱한 유권자들에게 이 치욕의 시간은 흐르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 우리가 던진 몰표에 현혹되어 그만 총기를 잃어 버린 채, 한 편의 볼품없는 활극을 장만하면서도 시간이 약이라고 강변하는 ‘선생님’을 막을 수 있을 것 아닌가? 그래야, 쿠데타가 성공했으므로 학살자들에게 면죄부를 주는 일도, 몇백 명이 죽어 가는 사고까지 티브이 화면에서 사라지기만 하면 아차 깜빡 잊어버리는 일도 이제는 피할 수 있을 것 아닌가? 정말 그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우리가 시간을 어떻게 할 수만 있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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