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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7 | [문화저널]
지역연극의 '어라하' 김길수 교수님께 -전주시립극단 '어라하'공연의 비평서한에 올리는 답신-
안상철 전주시립극단 상임연출 (2004-02-05 16:40:24)
존경하는 김 교수님! 아파트 베란다에 놓인 군자란의 탐스럽던 꽃송이들이 허망하게 시들어 떨어지고, 앙증스럽던 응방울 꽃이 제 모양 제 빛으로 말라서 방울처럼 구르는 것을 발견하고 잠시 망연함에 젖어 '꽃이 지니 봄이 가는 걸 안다'는 시어를 실감하였습니다. 지난번 '어라하' 공연에 매번 그러셨던 것처럼 먼 길 달려오셔서 공연을 살펴주시고, 차한잔 함께 나눌 여유도 없이 순천으로 되돌아가시는 교수님의 지극하신 관심과 기대를 어줍잖은 공연으로 실망만 드린 것같아 내내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어라하'의 재구성과 재공연 계획이 배려하셔서 급히 적어보내신 편지를 받고 그 배려가 너무나 감사했습니다.즉시 답장을 올리고 싶었습니다만 그즈음 공연에 대한 자책감으로 정돈되지 못한 심정이라 하루하루 미루다가 이제야 답신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김 교수님! 스물 일곱이라는 결코 빠르지 않은 나이에 신병(神病)을 앓듯 연극에 다시 뛰어든 지도 벌써 열두 해째입니다. 돌이켜보면 막무가내로 치달아온 시간들 속에서 사십여공연을 연출하였으니 그 적지않은 숫자가 한때는 뿌듯하기도 했습니다만 이제는 오히려 부끄러운 흔적으로 여겨져 후회가 되기도 합니다. 그많은 작품들 하나하나에 과연 최선을 다했었던가? 어쩌면 극단 운영계획에 의한 부족한 연습시간,재정적 한계,부족한 배우, 비전문적인 스텝, 열악한 공연장 등을 핑계로 적당히 버무린 쑥범벅같은 공연으로 관객을 우롱했는지 모른다는 자책감을 항상 떨쳐버릴 수가 없습니다. 특히 이번에 무대에 올린 '어라하'는 그 어느 공연보다도 애착을 가지고 준비했습니다만 그 어느 공연보다도 많은 부분의 아쉬움을 남긴 공연이 되었습니다. 한편으로는 다시 재구성하고 더욱 치밀하게 준비하여 좋은 공연으로 보상 할 수 있다는 자위도 해봅니다만, 근본적으로 안고 있는 역사의 진실성 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 암담하기만 합니다. 1995년에 들어서며 '광복 50주년'을 경축하는 아마도 정부의 정책적인 분위기 조성이 주도했겠지만 많은 문화예술행사들이 계획되고 있는 가운데 제 나름대로 광복과 독립에 대한 의미를 되짚어보았습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 천황 히로히토의 항복선언 이후 과연 이땅에 진정한 해방과 독립이 이루어졌는가 라는 점은 이미 많은 사람들의 회의적인 의문이겠지만, 반백년이나 지난 오늘에 와서도 막연한 표피적 상황의 축제적 분위기만을 강조할 뿐이니 안타깝기만 합니다. 비록 당시에는 사리사욕과 당리당락에 의해 역사의 진실이 왜곡되고 멸살되었다할지라도, 미래의 방향타가 될 지난 역사의 진실을 끝내 외면한다면 결국 우리 민족의 자긍심이란 그저 허울뿐일거라는 조바심 때문입니다. 이러한 생각으로 과욕을 부렸던 공연이 바로 '어라하'였습니다. 봄 정기공연 작품을 선정할 무렵 세가지 희곡에 관심을 두고 검토하고 있었습니다. 백제부흥항쟁과 운주사천불천탑을 소재로 한 진동규 작 시극 '일어서는 돌'과 역시 백제부흥항쟁을 배경으로 범민족적 화합과 반외세를 주제로 한 김승규 작 '왕국의 놀' 그리고 백제 건국이 소재로한 박환용 작 '어라하 대신이야'가 그것이었습니다. 마침 오곡되고 절멸된 역사의 진실을 발굴해서, 일제식민사관에 의해 와해되고 현제에 이르기까지도 정립되지 못하고 있는 민족사관을 재인식함으로써 자주자강의 민족정기를 되찾을 수 있는 연극적 작업에 관심을 갖고 있던 터였습니다. 우연의 일치로 세 작품 모두 백제사를 다루고 있었으며, 백제 멸망 이전 일본 전역과 많은 영역의 중국 대륙을 통치하고 있었던 삼국시대 우리 민족의 진취적기상, 특히 일본의 천황이 되었거나 일본 문화형성에 지대한 영향력을 끼친 백제의 역사는 더욱 애착이 가는 대상이었습니다. 결국 세 작품 모두를 무대화시키기로 결심하고, 앞으로도 백제 역사 찾기의 지속적인 작업을 다짐하며 감히 '백제 얼찾기'라는 명칭의 시리즈 공연을 계획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고심 끝에 백제정신의 근원부터 더듬고자 하여 백제 건국을 소재로한 '어라하 대신이야'를 첫 번째 작품으로 선정하고 독회와 분석토론을 하였지만 대다수 단원들의 공통된 의견이 고구려 건국과 백제 건국 역사의 전환점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숨겨진 인물인 '소서노'를 소재로 선택하는 것은 흥미로우나 너무 인물사 중심으로만 구성되어 있어서 공연의 목표에 걸맞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리고 작가인 박환용 선생께 개작의 가능성을 타진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미 계획된 다른 일정으로 개작이 불가능하다는 대답을 듣고서 무리스럽지만 공동창작으로 재구성하자는 통합된 의견으로 작업을 진행하게 된 것입니다. 불과 두 달여밖에 남지 않은 촉박한 공연 일정과 턱없이 부족한 문헌사료, 역사의 왜곡과 삭제 속에서 그진실을 확인할 수 없는 데서 오는 혼란감, 참가자 개개인의 각각 다른 역사관들하며, 그 모든 난관들로 인해 너무 쉽게 덤벼들었다는 절망감과 두려움에 공연 포기까지도 고려했던 게 사실이지만 한번 더 무릎이 깨지면서라도 몸을 던져 부딪혀볼 가치가 있다는 결심으로 작업을 강행하였습니다. 다행스러운 것은 전 단원이 한 마디 불평도 없이 그힘든 강행군에 열정을 다해준 것입니다. 오전을 풍물과 춤 연습으로, 오후에는 본 연습, 사이사이 쉬는 시간과 밤에는 소품과 무대와 의상 준비로 숨가쁘게 움직이다보니 어느새 공연까지 끝나 있었습니다. 공연후 단원들과의 품형회를 갖기도 했고, 주위의 순수관객들이나 연극동지들의 공연 촌평을 참고하여 정리해 본 이번 공연의 오류는 김 교수님께서 지적해주신 점들과 대동소이 했습니다. 결국 변명할 수 엇는 가장 큰 실책은 역시 철저한 검증과 충분한 준비가 결여된 상태에서 공연을 올렸다는 점입니다. 더욱이 역사의 숨겨진 진실을 통해 백제의 얼 아니 민족의 얼을 되살려 보자는 취지를 앞세우고 종국에는 용두사미처럼 흐려버렸으니, 이제 단 한가지 남은 뻔뻔한 변명은 다음 공연에는 더욱 신중하게 준비해서 관객들에게 보상해 드리겠다는 말 뿐입니다. 돌이켜보면 십여 년간 올렸던 사십여 편의 공연 중 이번 '어라하'만큼 공연 후평이 다양한 경우도 드물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최상의 격찬에서부터 최하의 비난까지 혼돈감에 휩싸일 정도로 천양지차였지만, 분명한 것은 그런 극과 극을 치닫는 비평의 한 마디 한 마디가 제 가슴에는 큰 용기와 교훈을 깊이 새겨주었다는 점입니다.특히 지역 연극을 무한한 사랑으로 지켜보시는 김 교수님의 정성어린 충고와 격려로 가득한 친필 서한을 받고는 가슴 짓누르는 죄스러움과 아울러 더욱 매진하리라는 결심을 강하게 하였습니다. 김 교수님! 짐심으로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지역연극의 당찬 내일을 위해, 시류에 오염되지 않는 건강한 연극 얼을 지켜갈 수 있도록 언제까지나 '지역연극의 어라하'로 함께해주시길 소망합니다. 비록 너무 부족하여 끊임없이 비틀거리는 걸음이지만 사랑으로 지켜봐 주시고 준엄한 꾸짖음으로 선도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다가오는 우기에 건강하시고, 사랑과 행복이 가득한 하루하루가 되시길 기원합니다. 안녕히 계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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