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7 | [문화저널]
문화저널 시민강좌 세계영화사
나운규에서 서편제까지
이효인의 한국영화 70년
편집부
(2004-02-05 16:32:58)
지금 대학생쯤 되는 20대들은 말로도 잘 못들어 봤거나 말로만 들어본 영화들을 나름대로 가지고 있는 맛 때무에 굳이 보시도록 했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는 한국영화와 관련된 영화 일반 또는 영화운동 등에 대하여 얘기하고자 합니다.
영화 <서편제>를 보셨습니까? 대부분 다 보셨죠. <서편제> 맨 끝 장면에 가면 버스가 나오는데 그게 어느 시기의 버스던가요? 최근 것이었지요. 그버스엔 '자동문'이라고 쓰여있고 자동문 버스가 나온 것은 암만 일찍 잡아도 80년대에나 나왔을 것입니다. 저도 처음 영화 볼때는 그걸 못봤는데 누가 그걸보고 지적하더군요. 자기는 그영화를 충분히 감동도 하고 좋게 보다가 마지막 그 장면 때문에 김이 팍 새버렸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저는 그 말을 들으면서 '야,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좋게 보다가 그거 하나 나왔다고 그렇게 완전히 재미나 감동이 없어질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해봤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사실 그럴만도 하지요 저같은 경우도 국민학교 때 단체로 <난중일기>인지 <영웅 이순신>인지를 보러 갔는데 김진규(이순신 역)가 "돌격!"뭐 그런쯤이었어요. 손을 치켜 드는 팔에 금시계가 쫙 나오고, 어린 마음에도 모두 와-웃었죠. 이순신 장군에 대한 흠모라든지 하는 것을 깨버리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런 경우는 너무 결정적인 실수이지만. 저 어릴 때야 뭐 삼류극장에 나녔겠지만 당시 10년된 영화도 했었고 한꺼번에 두세 편 했기 때문에 한국영화를 본의 아니게 많이 봤는데 어릴 때 보면서도 계속 그런 악몽들이 남아있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사극같은 것인데 장면 뒤에 플라스틱 물통 등이 보이고 어린 나이로서도 도저히 이해가 안 가는 그런 것들이차곡차곡 쌓여가지고 한국영화에 관해서는 요만한 실수라도 특히 고증이라든지 시대적 상황에 안맞는 것이 조금이라도 보여지는 경우에는 완전히 악몽이 되살아나가지고 한국영화 전체에 대해서 싫어하고 그런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물론 우리 한국영화를 좋게 봐주자는 식의 변명이 되어서는 안되겠지만 이와같은 경우들은 외국 영화의 경우에도 분명히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한국에 온 외국 영화들이라는 것은 그 나라에서는 선수들이죠. 영화 100편이 만들어졌다면 그 가운데 재미있거나 소위 명작이라 인정받는 상위급 영화들만 한국에 오는 것이죠.
우리는 알게 모르게 한국영화와 외국영화를 비교하는 데 있어 항상 한국영화 전체 그러니까 아주 싸구려 한국 영화하고 외국영화의 뛰어난 명작하고 비교하는 습관이 알게 모르게 배여있다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얘기한다면, 한 영화를 볼 때 영화에 대해서 공부를 많이 한사람들은 배우의 연기도 보지만배우의 동선등을 많이 보게됩니다. 그것은 자연히 영화공부를 하다보면 봐야되기 때문에 자꾸 봐지게 되는데, 일반적인 관객들은 배우들의 표정이나 연기,대사 이런 것들을 집중적으로 보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영화를 보고나면 대부분의 평가를 다 하지요, '쟤는 저 역이 안 어울린다', '쟤는 연기가 엉망이다.' 등 나름대로 거의 평론가처럼 탁탁 가지를 쳐냅니다. 실제 외국영화의 경우에는 제가 영어나 불어 등 외국어를 한다고 해도 정작 볼 때는 자막을 보는 것이지 그 억양과 감정이 실린 대사를 정확이 알기는 어렵지요. 그리고 소품이라든지 혹은 '자동문'이라고 쓰여진 버스라든지 이런 것들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넘어가기 십상이지요. 말하자면 외국영화에 대해서는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던간에 많은 것들을 덮어주고 보게 되는것이고, 한국영화에 관해서는 너무 잘 아니까 또 중간중간 쌓여왔던 악몽들 때문에 생각 이상으로 실체를 낮추어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조금만 더 범위를넓게 보면, 우리가 일제시대에는 일본이라는 문을 통해 들어오던 일본화한 서구문물 이런 것들이 최고의 가치였고 해방 이후에는 주로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성야문화가 최고라는 생각하면서 한국문화는 항상 낮추거 봤던 게 사실이지요.
어쨌든 우리는 알게 모르게 우리 문화에 관해서는 광장히 낮춰 본다는 것입니다. 물론 한국영화같은 경우는 낮춰 볼 요소가 굉장히 많죠. 사실 한 90% 이상이 쓰레기들이죠. 근데 90%가 쓰레기라는 거하고 전체가 쓰레기라고 하는 것은 얘기가 다르거든요. 우리 문화에 관해서 특히 한국영화에 관해서 여러분들이 보셨겠지만 맨 마지막으로 본 <미워도 다시 한 번>그 부분이 지금보면 굉장히 유치하기도 하고 나름대로 일면 감정이 실리는 것도 있지만저걸 외국영화 일반명작, 아주 깔끔한 멜로드라마하고 비교를 해버리게 되면 저영화는 완전히 죽으라 소리지요. 그런데 문제는 또 있습니다.작품의 질이라든지 그런 것과는 별개로 그 시대 사람들이 왜 그 영화를 손수건 세 장을 호주머니에 넣고 가서 그렇게 울면서 봤느냐 이런 것에 관해서도 사실은 문화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이 이 영화<미워도 다시 한 번>을 명작이라든지 괜찮은 영화라든지 하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본래 예술작품 속에서 뭐 명작이다 , 높다, 고귀하다 하는 기준이라는 것은 너무나 다양하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얘기를 조금난 더 드리면, 우리나라 이쪽 사는 데를 실지로 극동이라 그러잖습니까. 또 서유나는 데는 중동이라 그러고 또 근동이란말을 쓰잖아요. 이것은 어디를 기준으로 하는 것입니까? 유럽이 기준이 되고 우리는 모든 것을 그쪽의 기준에서 평가를 하고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그 기준으로 보는 것 자체 속에서 분명히 합리적인 게 있습니다. 영화의 질을 평가하는 데 있어서 나름대로 합리적인 게 분명히 있기 마련이지요.그런데 그것만이 문화를 평가할 수 있는 게 아니고 이거 외에 다른 것도 여러 가지들이 평가할 수 있는 것들이 분명히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분명히 할 수 있는 것들조차도애초에 처음부터 옆 발로 쭉 밀어놓고 시작을합니다. 그래서 영화공부를 한다 그러면 전부 다<시민 케인>부터 시작합니다. <국가의 탄생>,<시민케인>,<전함 포템킨>으로 시작하여 60년대 쯤 이렇게 오면 고다르, 거기에 조금 더 가면 구로자와 아키라 등등. 이렇게 공부해서 밥먹고 사는 사람들이 지금 제또래들인 30대들인데 이 세대드른 60년대 영화에 관해서도 어릴 때 본기억 외에는 사실 본 기억이 별로 없습니다. 그리고 아주 예민할 때 사춘기때 라든지 혹은 자기가 실제로 영화를 공부할때 영화를 한편의 교재로 삼아서 공부할 때에는 한국영화는 언제나 열외였기 때문에 한국영화의 장점조차도 자꾸만 언급이않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까 실제로 영화로 밥먹고 사는 사람들이 언급을 안하게 되면일반 대중들은 한국여화를 더 더욱 안보게 되지요. 심지어 어떻게 본다고 해도 지금 영화 기준으로 보면 하프밖에 안 나오죠. 몇일 전에 TV에서 <빨간 마후라>를 보여주었지요.그런데 <빨간 마후라>하고 다른 채널에서 외국영화 한다고 그러면<빨간 마후라>쪽으로는 절대 채널이 안가지요. 또 작년에<돌아오지 않는 해병> 또 지난 설에는<로맨스 빠빠>를 했습니다. 그런데 안봐지는 것이지요. 리모콘이 항상 딴 데로 간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것에 대해서 한번도 얘기가 제대로 안되고 그렇습니다.
그래서 제게 오늘 맡겨진 주제속에서 우리가 착안할 수 있는 것, 나름대로 한구영화속에서 포착할 수 있는 것들, 그리고 한국영화에 대한 평가의 기준 이런 문제들을 간략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한국에서 최초로 영화가 만들어진 것은 1919년 3.1운동 때 쯤입니다. 1903년쯤 혹은 1890년 때쯤에도 외국에서 들어온 영화가 있기는 했다고 전해집니다. 대게 일본에서 들어온 영화들이었는데, 당시 영화 속에 등장하는흰 드레스 입은 여자 무용단원들이나 합창단원들이 절을 하면 당시 갓 쓰고 도포 입은 조선 관객들은 절 받으려고 의자에서 일어나곤 하는 그런 시대였지요.
당시 전해지는 기록들을 보면 아무튼 이 시대는 그런 영화들을 봤습니다.영화가 들어오는 방식들은 근본적으로 지금이나 그때나 별 차이가 없습니다. 처음에는 공짜영화로 시작해서 갈수록 돈을 붙이지요. 그렇게 외국영화로 벌어들인 돈의 일부를 갖고 한국영화가 만들어 집니다. 지금도 서울에 있는 크다는 극장들 모두 외국영화로 실컷 장사하고 남은 수익금으로 한국영화를 만드는 셈입니다. 당시 영화의 시작이이러다 보니 한국영화를라는 것은 결구 외국영화의 자본에 의존하게 되고 수입면에서도 보잘 것 없는 것이 되곤 했지요.
이 시기의 영화는 동시에 계몽적인 성격을 강할 수 밖에 없었는데, 그것은 결국 신민주의 문화정책의 역할을 수행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모든 문화가 그러하듯이 영화 역시 내재적으로는 윤리적 가치를 갖느 것입니다.
어쨌든 1919년부터 1926년까지 한국영화가 시작하는 시기였는데 이때 만들어진 영화들은 일단 하나는 서양식 공연을 그대로 찍어서 보여주는 종류가 있었고 다른 하나는 신파였습니다. 신파는 원래 본류는 일본에서 건너왔느데, 1870년대의 일본은 일찌감치 서구 문물을 받아들였고, 그때부터 개화파 청년들이 자유민권사상을 대중들에게 설득을 하려고 했지요 그런데 글을 모르는 대중들에게 연극이라는 형식을 가지고 개화사상을 설명 해내는 방식으로 채택한 것이 바로 신파였다는 것입니다. 신파의 특성은 대개 엽기적인 구조 속에서 상당히 복잡한 치청관계를 갖기 마련이고 결국 그 드라마 속에서는 슬픔은 계속 강조되면서 반복적인 감동을 만들어내지요.
아마 여러분 대부분 보셨을<미워도 다시한번>의 경우 관객들도 무척 좋아했지요. 왜냐면 관객들은 울려고 왔으니까요. 세상이 재미없었지요. 매일 아침에 남편 있을 때 밥먹고 점심때 수제비 비슷한 것을 먹고나면 남편이 돌아오는 그런 세월이었지요.털레비전도 없고 낙이 없죠. 영화관이나 가서야 세월을 잊을수 있었지요.
이런한 신파적인 영화들은 한 시대를 반영했습니다. 예컨대 서울의 대학생들이 방학 때 제주도에 여행을 갔다가 한라산에서 길을 잃어버렸습니다.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대학생들은 마침내 극적으로 나무꾼에게 구출되었는데 그 집에 눈을 떠보니까 그집 역시 뭐가 있습니까?딸이 있지요. 그딸과 사랑을 나누다가 서울에서 찾으러 오니까 목걸이를 주면서 언약을 맺지요. 그리고 20년쯤 후 이쪽 제주도에는 아이가 하나 자라고 있고. 이쪽의 서울에서는 또 결혼을 해서 애를 하나 낳고, 이 아이가 자라서 제주도에 또다시 놀러가서 그 아이와 사랑을 하다가 그문제의 목걸이를 나누고 ... 이런 식입니다.
신파를 놓고 그 시대 민중들의 문화적 수준이 낮다고 얘기할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것들이 득세할때는 다른문화가 개입을 못한다는 점이 중요했습니다. 이시대가 언제였습니까. 일제 식민지 시대였지요. 신파가 성공할 수 있는 조건이 있는 시대였습니다.
이렇게 출발한 한국영화가 중요한 계기를 만나게 되는 것이바로 1920년대 나운규의 <아리랑>이 만들어지면서입니다. 아리랑은 물론져도 못봤는데 아리랑의 시나리오초고 자료를 보면 이 영화를 민족의식이라는 측면에서 평가하기도 하고 그렇지만 제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이야기를 끌어가는 과정에 있어서 영화가 근대화되었다는 점입니다. 하나의 이야기가 서론,본론,결론 혹은 발단, 전개, 위기, 절정, 결론 나름대로 작품구조를 갖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이런 작품구조속에서 이 영화가 민족의식을 불러일으키는 작용을 했겠지요.
어쨌거나 바로 이 시기를 전후해서 한국영화가 획기적으로 발전해갑니다. 당시의 최고 인텔리계츠들이 이영화에 뛰어들곤 합니다. 예컨대 문학계에서 알아주는 시인 임화같은 사람들이 영화소에 와서 일을 만들었습니다. 임화가 추진한 영화에 보면 그가 '너무 예뻐보이고 얼굴에 분칠을 하는 그게 흠이더라'이 렇게 나오고 있구요 우리가 지금 보면 상상히 않되는 것이지요.임화같으면 지금 굉장히 심각한 시인 아닙니까. 그런 사람들이 영화 또는 배우하고 싶어 안달을 하고 그랬다는 것입니다.
이 당시 영화의 또다른 특징 하나는 민족 독립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등장했다는 점입니다. 이른바 조선프로예술가동맹(KAPF)계열의 영화작업이었는데 그나마 35년경을 전후로 해서 이런 문제의식들로부터도 멀어지고 맙니다. 이 시기 문학이나 다른 예술장르와 마찬가지로 영화 역시 흥미위주로 흐르고 식민지 상황이라든가 하는 문제와는 점점 멀어지는 양상을 보였지요.
그런 가운데 35년은대단히 중요한 의미를갖습니다. 그때까지 영화는 연사가 나오는 무성영화 시절에서 비로소 녹음을 사용한 영화의 모습을 갖춘 작품이 등장하는 시점입니다. 결국 영화가 이제 본격적으로 자본을 필요로 하는 시점이 되고 그러면서 기존의 영화사들이 대부분 정리되면서 말하자면 자본의 집중이 나타나게 됩니다.
이 시기에 만들어지는 여화들이<지원병>같은 영화들입니다. 그렇지만 진일보했음에도 불구하고 내용적으로는 여전히 신파조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독립운동이야기에 반드시 일본군 정부와 독립군과의 사랑이야기가 따라붙고 중요한 이야기들은 모두다 여자관계에서 시작하고... 그런식의 멜로드라마 혹은 신파를 그대로 본뜨고 있었지요.
마침내 해방이 되고 50년 한국전쟁까지 이 시기는 모든 장르에서 혼란과 격동의 시기였고 영화 역시 딱잘라서 말씀드릴만한 영화가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이 시기에 영화하던 사람들 대부분이 영화는 거의 팽개치고 늘 운동하고 다니곤 했지요. 이때부터 한국전쟁이 끝나는53년까지 많은 영화인들이 납북되거나 또는 월북하면서 한국 영화계의 절반 정도가 없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이 시기를 거쳐 55년부터 한국 영화의 전성기가 시작됩니다. 55년부터 60년 사이의 한국영화는 흥행에 실패한 적이 없습니다. 영화관을 드나드는 것이 그 시대의 멋이었고 경향 각지의 돈깨나 있다는 사람들이 다 영화판에 몰려들었스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외적인 성황에도 불구하고 사실 쓺란한 영화들은 그다지 많지 않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서방>같은 영화들이 등장하면서 몇몇 주목받는 감독들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방계진, 신상옥, 홍성기 등이 바로 그시대에 떠오른 사람들입니다.
홍성기 감독의 경우 한국최초의 멜로드라마로 성가를 높였고 그 방면의 대가로 꼽혔지요. 이시기 가운데 특히 59년과 60년 이 사이가 한국영화가 유일하게 제대로 돌아간 시점입니다. 그 유명한<오발탄>이라는 영화가 등잔하 것이 바로 그때입니다. <한>이라는 영화도 지금 따지고 보면 말도 않되는 줄거리인데 어쨌든 외국평곤가들이 깜짝 놀란 영화들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