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킵 네비게이션


분야별보기

트위터

페이스북

1995.7 | [문화시평]
연조에 의해 자연스레 곰삭은 경지 <전라도의 춤, 전라도의 가락>을 보고
윤화중 전북대학교교수 한국음악과 (2004-02-05 16:32:21)
우리전통 예술의 정조를 이루는 중요한 요소는 긴장과 이완이라는 구조이다. 이구조가 내재해 있지 않은 소리나 춤은 아무리 기교가 뛰어나도 '아직 소리를, 춤을 모른다'고 명인들은 표현한다. 그저 예쁘게 추는 춤들을 보고 있자면 확예회에서 재롱을 떠는 것 같아 답답하다. 또한 인위적이거나 넘치는 긴장은 작위적이어서 천박하다. 체득이 된 후 연륜이 쌓여의도는 전혀 없는 것같이 보일 듯 말 듯 온 몸의 긴장이 어깨에, 손 끝에, 버선발에 실드리면, 드러내놓지 않은 그 은근함에 오히려 객석에서는 숨을 쉬기가 어려워진다. 그런 춤을 보고 나면 몸살을 앓고 난 후처럼 나른하게 개운하다. 예술가가 이 경지에 오르기까는 타고 난 끼와 지극한 훈련과, 그리고 세월이 필요하다. 지난 5월 28일 예술회관에서 있었던<전라도의 춤 전라도의 가락-넷>은 우선 출연진들이 연조가 많다는 점 때문에 기대가 되는 공연이었다. 특히 북춤은 춤꾼인 양태옥이, 예순이 넘은 박병천의 스승이시라니 역동성이 우선인 북춤을 어떻게 출까...하는 의구와 기대를 가장 많이 가졌던 프로였다. 한 4,5년 전 진도 북춤에 매료당했던 적이 있었다. 여성화된 춤만 보다가 우연히 접하게 된 '박병천의 북춤'은 뻗쳐 나오는 힘만으로도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태평소.꽹가리.장고 등의 반주와 쌍채로 치는 북의 리듬이 이루어 내는 다이나믹은 강한 춤사위와 잘 어울어졌었다. 그래서 북춤은 남자의, 젊은이의 춤이라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양태옥의 북춤은 또 다른 경지를 보여주었다. 요즘 연행되는 한국무용의 정형화된춤사위와 비교한다면 그분의 사위는 민속무의 항목 한 가지를 더하는 것일 뿐이라고 일축될 수도 있다. 그 만큼 그분의 춤은 무대화 하지 않고 소박했다. 그 소박함 때문에 예술성이 떨어지기 보다는, 오히려 연조에 의해 많이 덜어내지고 자연스럽게 곰삭은, 나이 든 사람만이 보여줄 수 있는 경지를 보여주었다. 살아온 역정이 주는 무게가 실린 또다른 춤으로는 장녹운의 살풀이를 들 수 있겠다. 흔히 살풀이를 출 때 소품으로 이용되는 수건이 없이 추는 춤이라 그분의 손사위를 마음껏 감상할 수 있었다. 기량이 뛰어난 젊은 사람들은 소리든 춤이든 꽉채운다. 덜어내고 싶어도 마음이 치열하니 어쩔할 수가 없고 시나브로 시간이 해결해 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장녹운의 살풀이는 인생의 무게로 치열함이 덜어져 나간, 무겁게 추면서도 동작선을 자연스럽게 연결시키는 귀한 사위를 보여주었다. 체득한 기량을 꽉 채우는 상태는 검을 정도로 짙푸른 녹음이라면, 장녹운의 일견 단순한 것처럼 보이는 사위들은 늦가을의 들녘을 연상케 하였다. 지나치지 않아 빈 듯 하면서도 넉넉하고 일면처연한 빈 들판들. 부포놀은은 상모돌리기와는 또 다른 기술을 요한다. 솜보다 가벼운 깃털로 된 큰 꽃송이 같은 부포를 머리 위에 세우고 오묘한 모양을 고갯짓으로 만들어 낸다. 부포는 열대의 총천연색 바다속, 커다란 해파리처럼 고갯짓에 따라 꽃을 피웠다 오무렸다 신비한 조화를 부린다. 부포놀음을 하는 유지화가 치는 꽹가리나 정읍 농악단의 장단에 부포는 둥둥 떠 있는 에로스다. 이밖에 이인수의 설장고와 강송대의 육자배기, 우석대 젊은 이들의 소고춤이 연행되었다. 우리 전통 춤은 가능하면 소위생음악으로 반주를 한다. 녹음된 음악에 맞추어 추는 춤은 싱겁다. 거기에는 춤과 음악사이의 상호작용-'기의 흐름'이라고 표현 될 수도 있는 - 이 생음악에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적기 때문이다. 글 쓰는 이가 사물을 묘사할 때, 구도자가 정신통일을 하듯이 사물의 내면을 오래 응시하여 정수를 만나게되면 그 사물을 최선으로 묘사할 수 있다고 한다. 응시를 통해 사람이 사물의 정수와 만나게 되는 상태는 춤과 음악이 만나는 순간의 그것과 가다. 차이점은 춤과 음악의 만남은 즉흥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일뿐이다. 즉흥연행이란 그 세계에 젖어 그 세계의 온갖 어법이 체질화되어 있을 때만이 가능하다. 음악의 '맺고 푸는 것'에 따라 춤사위의 흐름을 조절할 수 있는춤꾼. 춤에 따라 불을 짓고 다음으로 음악을 넘길 줄 아는 사람들만이 예행연습 없는 즉흥연주를 할 수 있다.만남이 어긋나면, 즉 한 쪽이 기울면 상대적인 고수(高手)는 마음껏 가량을 발휘하지 못한다. 그래서 춤과 연주는 같은 수준이어야한다. 춤이 한을 굽이굽이 풀어내고 있는데 음악이 위에서 짓는다거나, 춤이 지정거리는데 음악이 풀고 있으면 춤은 맥이 빠진다. 예전의 명창들이 수종고수의 반주가 아니면 소리를 하지 않는 것도 이런 이유여서다. 우리는 기가 막힌 즉흥 연주의 전설을 많이 알고 있다. 그 시절의 연주가들은 날마다 즉흥연주로 시간을 보냈던 국극단의 악사였다. 그분들도 다른 연주 집단에 가면 음악의 전개나 선율이 낯설어 처음에는 즉흥연주를 척척 어울리게 하기가 어렵다고 한다. 더욱이 요즈음의 변화된 문화에서는 연습 없는 멋진 즉흥연주란 불가능해진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이번 공연을 보며 들었다. 이번 <전라도의 춤, 전라도의 가락-넷>을 보면서 나는 내내 흡족한 느낌을 가졌다. 사실 좋은 무대며 예술가들이 모두 중앙에 집중되어 있는 현실에서, 우리가 열악한 조건을 극복한하면서 새로이 숨은 예인을 발굴해 내고 무대를 만들어 나간다는 작업이 신선하였으며, 눈물겹기도 했다. 특히 나는 연주인으로서 무대에 서는 어려움과 마찬가지로, 무대 만들기 전까지의 기획과정이 얼마나 힘든 것인가를 잘 알고 있는데, 문화저널의 역량이 이 정도로 성장해 있다는 사실에 스스로 대견해졌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