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6 | [서평]
소월시 연구의 허점과 비밀
오하근의 〈김소월시어법연구〉를 읽고
정양 시인·전주우석대 교수
(2004-02-05 16:23:51)
한(恨)에 관한 한, 우리나라의 나이 지긋한 사람들은 좀 더 배운 사람이든 그렇지 못한 사람이든 너나없이 할 말이 많다. '너희 중에 죄없는 자는 저 여인을 돌로 치라'고 했던 예수의 망처럼, 한(恨)없는 사람 나서보라고 한다면 그들 우리나라의 나이 지긋한 사람들 중에서 선뜻 나설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름대로의 이해와 관심을 통하여 그처럼 보편화되어 있는 우리의 한(恨)이라는 정서가 사실을 알기 쉽고 말하기 녹녹한 것이 결코 아니고 꽤나 까다로운 역사적·사회적·문화적·철학적 의미망으로 짜여진 것임을 누구도 부인하지 못한다.
한의 다면적 구조를 모르면서도 한의 정서와 철학이 많은 이들에게 육화되어 있기 때문일까, 그 한의 시인으로 널리 알려진 김소월 시의 경우에도 그것이 쉽고 녹녹한 것이 결코 아님에도 불구하고 소월시에 대하여 친밀감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이 헤어릴 수 없이 많다. 그의 시에 관한 이러한 범문화적인 관심과 이해가 피상적인 것일 뿐 사실은 난해하고 정교한 어법의 구조물이라는 입장에서 오하근의 〈김소월시어법연구〉는 시작된다.
흔히들 쉽고 녹녹한 시로 알고 있는 소월의 시, 한의 문제를 만날 때마다 붙박이로 거론되는 시, 그 이본만 해도 80종이 넘도록 많이 팔리고 많이 읽혔다는 시, 그러나 80종이 되도록 제대로 된 시집이 한 권도 없다는 김소월의 시, 아직 사전적 의미조차도 밝혀지지 않은 말들이 수두룩한 채로 400편이 넘는 연구물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 김소월의 시, 오하근의 〈김소월시어법연구〉는 그러한 우리나라의 어처구니없는 허점을 뒤늦게나마 보완하고자 한다. 거의 10년이 걸렸다고 한다. 소월시의 어법에 대한 무지가 제대로 된 소월시집 한 권도 없는 참담한 문화적 결과를 낳았다는 것이다. 소월시의 난해하고 정교한 어법의 숲을 헤치고〈원본김소월전집〉과 〈정감김소월전집〉을 완성하여 김소월 연구의 새길을 닦아놓은 오하근의 치밀한 작업은 비단 소월시뿐만이 아닌, 우리의 시가문화에 대한 그의 치열한 애정이 맞물려 있다.
제대로 된 소월시집을 완성하기 위한 오하근의 〈김소월시어법연구〉는 대략 다음과 같은 괄목할 사실들을 밝히고 있다.
첫째, 150여 군데의 원문의 오기를 지적하여 김소월시의 원문 자체가 얼마나 많이 훼손되었는가를 우리에게 일깨운다.
둘째, 지금까지 정설로 내려 온 몇몇 작품의 시 해석이 정반대로 바뀌었다. 〈무덤〉,〈찬저녁〉,〈님의 말슴〉등이 그에 해당된다.
셋째, 그 정조와 율격만을 내세워 찬사만 받아왔지 막상 그 작품을 형성하고 있는 시어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던 이른바 대표작들의 시어법과 그 의미가 재조명되었다. 〈진달래꽃〉,〈초혼〉,〈예전엔 미처 몰랐어요〉등이 그에 해당된다.
넷째, 시어법이 제대로 파악되지 않아서 무관심 속에 파묻혀 있던 작품의 어법이 밝혀져 그 시에 가치가 부여되었다. 〈칠섭〉,〈왕십리〉등이 이에 해당된다.
다섯째, 지금까지 의미불명의 상태로 남아있던 수많은 시어들이 해석되었거나 또는 해석이 시도되었다.
여섯째, 김소월시에 흔히 보이는 도치와 반복이 보통 논의되는 정도의 수준을 훨씬 넘어서는 기법임이 추적되었다. 열거순서의 도치, 주어 목적어의 도치 등을 통하여 협박 따위의 감정을 노출시키기도 하고 능동과 피동의 심리적 혼란을 드러낸다든지, 양걸림말의 독특한 어법을 구사함으로써 그 혼란을 통하여 시의 의미망을 극대화하는 것 등이 그것이다. 또 반복의 경우에도 머리말 되잇기, 꼬리말 되잇기, 어절 뒤바꿔 잇기 등 김소월 특유의 어법과 그 효과를 정리하고 있다.
일곱째, 우리말에 대한 김소월의 각별한 관심을 환기시키고 있다. '능라도'를 '깁성'으로 '북두칠성'을 '일곱별'로 '여인숙'을 '나그네집' 혹은 '손의 집'으로, '지도'를 '좁혀 만든 그림장'으로 '여운'을 '소리만 남은 노래'로 그리고 획기적 조어인 여성 삼인칭 대명서 '그네' 등등이 이에 해당되는 말들이다.
여덟째, 우리말 어휘의 부족함을 메우거나 어감의 차이를 고려해야 옛말고 사투리를 더할 나위 없이 사용하고, 그도 모자라서 조어까지 더 보태는 김소월의 우리말에 기울인 노력들을 구체적으로 추적하였다.
아홉째, 김소월시에는 음운과 어절과 어구 등의 수많은 생략과 첨가현상이 널려 있음을 발견하고 있다. 그 가운데에는 '야말로'와 '답지않다'의 '답다' 따위의 조사나 접미사만으로 된 시어도 있고, '참아하다' 따위의 부정부사를 제외시키고도 부정의 의미를 오히려 강하게 나타내는 시어도 있다. 또 '숨겨져 있는' '맡기워져 있던' 따위가 '숨겼는' '맡기웠던' 따위로, '아주도' '아주나' 등과 같이 보조사 '도, 나'가 예사롭지 않게 붙는 현상 등등이 그에 해당된다.
열째, 김소월 시에는 어휘 자체를 딴 어휘와 대체하거나, 어휘의 의미나 용법을 확장해서 쓴 시어가 많이 나타나고 있음을 추려내고 있다. 의존명사 '줄'이 까닭이나 정도를 나타내고 주어로 사용되기도 하며, 보조사 '뿐'이 '만'의 용법으로 쓰이고 '다시'와 '다시는'과 '또는' 따위의 부사과 관용적인 의미가 아닌 다른 의미를 표출시키는 점들에 관한 언급이 그것이다.
그 외에도 소월만의 시어법이 어떻게 그의 시 속에서 관용어법을 넘어 그만의 의미망을 형성하고 있는가를 추적하면서 오하근의 〈김소월의 시는 민중의 언어로 된 쉬운 시다〉라는 일반적인 인식이 얼마나 허구에 찬 터무니없는 명제인가를 꼼꼼하게 밝히고 있다.
김소월이 작품활동을 하던 때로부터 어언 70년이라는 세월이 지나가는 지금, 오하근의 오랜 집념을 통하여 비로소 완성된 〈정본김소월전집〉은 우리 문화가 지니고 있는 어처구니없는 허점들을 성공적으로 보완해 낸 본보기다.
김소월의 시, 나아가서 우리 시가문화에 대한 오하근의 이러한 치밀하고 치열한 애정은 소월연구의 큰길을 비로소 닦았거니와, 소월시 전반에 대한 저간의 허구적 인식이 우리 문화사 속에서 어떻게 가능했던가를, 그리고 그러한 허구적 인식에도 불구하고 김소월이 변함없이 우리의 사랑스러운 민족시인인 까닭을 극명하게 밝히는 일 또한 오하근의 몫이기를 기대한다. 오하근의 〈김소월시어법연구〉는 접근하기가 만만치 않은 난해함과 정교함에도 불구하고 식민시대와 해방공간과 분단의 시대를 건너 김소월의 시가 여전히 친밀한 정서적 공감을 우리에게 환기시키는 그 비밀을 명쾌하게 풀어낸 든든한 근거가 될 것이다.